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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타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걱정했고, 석가모니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했습니다.
'싯달타'는 생로병사를 문제 삼은 분이고, '석가모니'는 생사해탈을 이루신 분입니다.
생로병사란 태어나서 죽는 것, 즉 생멸을 의미합니다. 생멸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생멸을 잘 모르고 그냥 생활을 합니다. 생활은 무엇인가?
첫째, 감생感生입니다. 감생은 느끼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입고 먹고 자는 의식주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감생이라고 합니다. 추우면 입고 더우면 벗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생존적 삶이라고 합니다.
살아남으려고 느끼는 대로 사는 생존적 생활입니다.
둘째, 욕생欲生입니다. 욕생이란 욕망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입고 먹을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생존적 삶이 아니라 소유적 삶입니다.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느냐? 간단히 말하면 재財. 권權. 명名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를 소유하려고 합니다. 지금 현재 먹을 게 있지만 계속 더 소유하려고 합니다. 마음대로 뜻을 펴는 것을 권력이라고 하는데, 내 마음대로 더 하고 싶어합니다. 명예는 자기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하고 명성을 가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소유하기 위해서 생활하는 것이 욕생입니다. 그 욕망 속에는 무엇을 이루고 계속 더 가지려고 하는 성취적 욕망이 있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쾌락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즐기면서 살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평생 한 번 즐겨 보지도 못하고 죽을 때까지 계속 이루고 가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쓸 줄 모르고 모으기만 합니다. 그러니 돈이 아무리 많아도 고생만 합니다. 욕망이 계속 성취적 욕망에 멈춰 있기 때문에 쾌락적 욕망으로 못 넘어갑니다. 돈을 벌 줄만 알고 그 돈을 전혀 못 쓰고 죽습니다. 그리고 자족적自足的욕망이 있습니다. 노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재미가 없어지고 놀고 나면 허탈합니다. 여행을 가도 가서 볼 때는 흥분이 되어도 돌아오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외국 갔다가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 또 앞으로 뭘 해야 하나 따분하고, 따분하니까 또 다음을 준비합니다. 쾌락이 마음에 깊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내 스스로 만족을 찾는 사람들의 삶이 굉장히 깊은 삶입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만족을 얻고 의미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야 바람직한 사회가 됩니다.
봉사활동이나 기부 같은 것도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봉사와 기부를 통해 얻는 자기만의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쾌락이나 성취와는 전혀 다릅니다.
또한 공부를 깊이 하면 공부를 하는 만족이 있습니다. 『논어』『노자』『도덕경』같은 고전만 깊이 공부해도 거기서 느끼는 엄청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인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면 어떤 이익이 있느냐?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만족이 있고, 자기만 확실히 보는 세계가 있습니다.
반면 세속적 욕망에 물든 사람들은 하나하나 눈에 보이는 효과만 따라 다닙니다.
그래야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선비들이 공부하면서 "고인도 나를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본다. 고인은 못 보아도 예전 길이 앞에 있네. 예전 길이 앞에 있으니 아니 가고 어이 하리." 라고 소감을 적어 놓은 글이 있습니다. 인생에 자기 갈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기만족입니다. 자기만족을 얻으려면 자기 스스로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전부 욕망의 삶, 욕생입니다.
싯달타는 인간은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재財. 권權. 명名. 쾌락快樂. 자기만족自己滿足 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데 무엇을 구하고 소유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老. 병病. 사死를 고민했습니다.
이 문제를 깨닫고 사는 것을 각생覺生이라고 합니다.
셋째, 각생은 곧 보살의 삶입니다.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입니다.
보리는 각覺이고, 살타는 생生입니다. 깨달으려고 살고,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이 소유만 하려고 살고, 또는 먹고 입고 자는 것만 하려고 삽니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싯달타가 엄청난 사고(?)를 칩니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 노릇을 버렸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말 대단하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문제투성이일 수도 있습니다.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자식 노릇, 왕 노릇까지 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문제 많은 사람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버렸는가? 생사에서 해탈[生死解脫]하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생사해탈을 했는데,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답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은 생사해탈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음이라는 방법으로 생사해탈을 했습니다. 그러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마음으로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으로 어떻게 보느냐? 경전에서는 깨달음을 다른 말로 생지生智, 즉 지혜가 나왔다고 하고, 생안生眼, 즉 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눈은 생사의 실상을 보는 눈입니다. 여태까지 생사의 형상을 보고 살아왔는데, 생사의 실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생사의 실상을 보는 눈과 지혜가 생김으로써 생사가 곧 생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생로병사에서 생사가 없는 진실한 내용을 지혜의 눈으로 보는 것이 깨달음의 내용입니다.
생사가 생멸이고, 생사가 없는 것을 적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이 생로병사하는 생멸이 생로병사가 없는 적멸이라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셨느냐?
깨달음을 얻어서 보셨습니다. 생지와 생안, 진실을 보는 지혜와 진신을 보는 눈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에서 생사가 없는 적멸을 지혜의 눈으로 보고, 곧 적멸이라는 것을 깨닫고 생사해탈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생로병사가 바로 해탈열반이라는 것을 알아서 생사해탈하신 것입니다. 생멸이 곧 적멸이고, 적멸은 해탈열반입니다.
그러니까 생멸이 적멸이라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확실하게 보고 생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고, 부처님이 생사해탈하신 방법입니다. 생멸을 연장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로는 생사해탈을 할 수 없습니다. 생멸이 적멸임을 마음의 눈으로 봤을 때 생사해탈이 됩니다. 비유하자면 물과 얼음이 있는데 얼음만 보지 그것이 물이라는 것을 못 보다가 어느 순간 '얼음이 바로 물이다!'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얼음이 바로 물이다!' 이것이 바로 '생멸이 적멸이다.' 입니다. 그러니까 깨닫기 전에는 생로병사가 윤회요 고통이었는데, 깨달은 후에는 생로병사가 해탈이요 즐거움입니다.
이 즐거움을 적멸락寂滅樂이라고 하고 열반락涅槃樂이라고도 합니다. 생사 없는 세계를 깨달으면 거기에서 즐거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멸 속에 계속 나고 죽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면 고통이 따릅니다. 그것을 생멸고生滅苦라고 합니다.
이 생멸고에서 적멸락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깨닫느냐? 『연화면경蓮花面鏡』에 "일체행一切行이 무상無常하다." 라고 했습니다. 일체행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오온五蘊을 말하는데, 이 오온이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행諸行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 속에 흘러가면서 바뀌기 때문에 일체행은 무상합니다.
행이라는 것은 움직여서 행이 아니라, 시간을 겪으면서 시간 속에서 변합니다. 이것이 무상입니다. 깬 눈으로 살면 소유하는 것이 의미가 없고, 성취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 속에서 다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이 깬 사람의 의식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세월이 지나가면 다 없어지니까 그 무엇을 소유하면서 산다는 게 부질없습니다.
"일체법은 무아無我" 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자체가 없습니다. 이 아我라는 것은 상일성常一性과 주재성主宰性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에는 항상성恒常性과 주재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가 임시로 모인 집합성集合性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고, 제법諸法은 무아無我입니다. 그리고 적멸은 그대로 열반입니다.
열반은 불생불멸입니다. 그 불생불멸을 느끼면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적멸락寂滅樂입니다.
그러면 이 불생불멸, 적멸락을 누가 느끼는가? 느끼는 것을 불성佛性이라고 합니다.
생멸이 없음을 깨달으면 깨닫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적멸락이고 열반락입니다.
그래서 이 셋을 법인法印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불교의 복도장[福印]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모든 것은 자체상이 없다, 모든 것은 열반적정이다.' 이 세 가지 도장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깨닫고 보면 무상도 적정 적멸이고, 무아도 적멸이고, 다 적멸 하나뿐입니다. 알고 보면 구름도 물이고 얼음도 물이고, 물 하나뿐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생멸에서 적멸을 얻고 난 다음에는 밥을 먹어도 생사해탈이고, 잠을 자도 생사해탈이고, 죽어도 생사해탈이고, 가도 생사해탈이고, 적멸 하나뿐입니다.
왜냐하면 생멸에 자체성自體性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이 외우는 게송 중에서 다음 『열반경』사구게四句偈가 있습니다.
諸行無常 제행무상
是生滅法 시생멸법
生滅滅已 생멸멸이
寂滅爲樂 적멸위락
모든 무상한 것은
곧 생멸법이니
생멸이 다 없어지면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모든 무상한 것은생멸법입니다. 생멸이 다 없어진다는 것은 생멸을 좇아가는 미혹한 마음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생멸이 없는 줄을 모르고 생멸의 형상만 좇아가는 미혹과 탐욕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생멸이 다 없어지면 물 하나뿐인데, 얼음을 좇아가고 구름을 좇아가는 것이 미혹한 탐욕입니다. 그래서 형상만 보고 좇아가면서 일어나는 미혹과 탐욕의 생멸심이 없어지면 적멸이 즐거움이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평생 닦은 도를 간략히 요약한 것입니다. 생멸이 다 끝나면,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면, 일체가 적멸락입니다. 태어나는 것도 적멸락, 죽는 것도 적멸락, 오는 것도 적멸락, 가는 것도 적멸락, 적멸락 하나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대적멸 속에 있는데 스스로 적멸임을 모를 뿐입니다. 왜냐하면 형상만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미혹입니다.형상에 집착하니까 마음이 생멸합니다. 이 미혹과 집착은 생멸이 적멸임을 깨달았을 때 사라집니다. 사성제四聖諦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인데, 열반을 얻으면 멸滅 하나뿐입니다.삼법인三法印은 열반적정涅槃寂靜 하나뿐입니다. 본래 생멸이 적멸인데, 그 생멸의 형상을 좇아가서 계속 생사윤회를 하다가 생멸이 적멸임을 마음으로 보고 생사에서 해탈하니까 거기에는 적멸락이 있습니다. 생사고를 걱정하던 싯달타가 생멸이 적멸임을 깨닫고 적멸락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입니다. 저도 게송을 하나 지어 보았습니다.
生而不生 생이불생
滅而不滅 멸이불멸
生滅無性 생멸무성
本自寂滅 본자적멸
생겼어도 생긴 것이 아니고
없어졌어도 없어진 것이 아니다.
생멸이 자성이 없어서
본래 스스로 적멸이다.
雖然如是 수연여시
本自寂滅 본자적멸
是箇甚麽 시개심마
看之看之 간지간지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본래 스스로 적멸한 것
이것이 무엇이냐?
보고 보아라!
자체성이 없기 때문에 물이 얼음이 되지만 얼음이 물 밖의 것이 아닙니다. 물이 얼었다고 해서 물이 달라진 것이 아니고, 얼음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불생不生이라고 합니다. 또 얼음이 얼어도 물이고 녹아도 물입니다. 이것이 생멸이 적멸인 것입니다.간단합니다. 얼어도 물이고 녹아도 물입니다. 얼음이 생겼다고 해서 물이 생긴 게 아니고, 얼음이 녹았다고 해서 얼음이 없어진 게 아닙니다. 그냥 물일 뿐입니다.생겨도 생긴 게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진 게 아니니 생멸 자체가 자체성이 없습니다.그래서 본래 스스로 적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입니다.그렇지만 본래 스스로 적멸한 이것이 무엇이냐? 말만 들어서는 해결되지 않고, 본래 스스로 적멸한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합니다. 이것이 공부이고 수행입니다.부처님이 다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가 보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처음 하셨기 때문에 위대하시다고 하는 것입니다.모든 사람이 의식주만 걱정하고, 재산. 권력. 명예만 탐하는데, 부처님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생멸이 적멸임을 깨달으셨습니다. 하늘을 메우는 법을 알아냈다든지, 땅을 만드는 법을 알아냈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마음으로 여실하게 본 것입니다.본래 생멸이 적멸이기 때문에 그것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생사해탈입니다.그러면 우리가 부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첫째,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수순隨順, 즉 마음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생멸이 적멸임을 믿고, 생사가 본래 생사가 아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혹해서 모릅니다.눈 가려지면 콩깍지가 씌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은 다 보는데 나만 보지 못하는 것처럼, 미혹과 탐욕이 생겨서 자꾸 밖으로 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행은 무상해서 구해 보았자 다 없어지는 것인데 구합니다. 구하면 없어지고 구하면 없어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참 답답한 일입니다. 만나면 헤어지는데 또 만나고, 만나면 헤어지는데 또 만납니다.구하면 없어지는데 또 구합니다. 그런데 깨어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각생覺生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래서 이제는 도를 닦습니다. 도는 어떻게 닦느냐? 모든 물질을 지혜로 틔우는 데 투자합니다. 모든 소유한 것을 지혜를 닦는 데 쓰는 것을 회향廻向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입니다. 그래서 생사 없는 지혜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금강경』에서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한 구절을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 합니다.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믿고 마음으로 따르면서 자꾸 닦으면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면 생멸고가 적멸락이 됩니다. 생로병사를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생사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생사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생로병사가 무엇이냐?"
"아야! 아야!"
"생사해탈이 무엇이냐?"
"아야! 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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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얼어도 물이고 녹아도 물입니다. 얼음이 생겼다고 해서 물이 생긴 게 아니고, 얼음이 녹았다고 해서 얼음이 없어진 게 아닙니다. 그냥 물일 뿐입니다.생겨도 생긴 게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진 게 아니니 생멸 자체가 자체성이 없습니다.그래서 본래 스스로 적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입니다.그렇지만 본래 스스로 적멸한 이것이 무엇이냐? 말만 들어서는 해결되지 않고, 본래 스스로 적멸한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합니다. 이것이 공부이고 수행입니다....깊이 깊이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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