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두 얼굴] 저주받은 혁명가 - 카를 마르크스(1)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근대의 그 어떤 지식인보다도 실제 사건이나 인류의 정신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그가 활용한 개념이나 방법론이 매력적이라고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개념이나 방법론이 치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주기는 했지만, 그가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 된 것은 그의 철학이 세계의 두 강대국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그들의 많은 위성 국가에서 제도화된 덕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닮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5세기부터 13세기가지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가장 폭넓게 읽힌 책이었고, 그 결과로 중세 기독교의 형성에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더욱 직접적이었다. 마르크스가 스스로를 위해 상상했던 개인적 독재 권력이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추종자인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 세 사람에 의해 현실로 구현되면서 인류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결과를 안겨 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세 사람은 모두 충실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마르크스는 그가 살았던 19세기 중반의 시대상이 낳은 산물이었고,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인 사상임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19세기 철학이었다. “과학적”이라는 용어는 어떤 사상을 승인한다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단어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많은 적들과 자신을 구분할 때 이 단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했다. 그와 그의 저작은 “과학적”이었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다윈의 진화론과 유사한 인간 행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역사 속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인 데 반해 다른 철학들은 과학인 적이 없고 과학이 될 수도 없다는 관념은 그의 추종자들이 세운 국가들의 공식적 학설로 주입됐고, 그 결과 학교와 대학에서 다루는 모든 과목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현상은 권력에 매료된 비공산권의 지식인들, 특히 강단의 지식인들에게도 퍼졌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연 과학의 막대한 학술적 권위와 동일시되어 경제학, 사회학, 사학, 지리학 같은 엄밀하지 못한 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분야에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1941~1945년에 중부 유럽과 동유럽을 놓고 벌인 싸움에서 스탈린이 아니라 히틀러가 승리해 히틀러의 의도가 대부분의 세계에 강요됐다면, 역시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던 나치 사상, 특히 인종 이론과 같은 사상은 학문적 이론을 거느리면서 세계 곳곳의 대학으로 침투해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군사적 승리는 나치 과학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과학의 승리를 보증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르크스에 대해서 물어봐야 할 첫 질문은 “도대체 그는 어떤 의미의 과학자였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심한 증거 수집과 평가를 통해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그는 어느 정도나 관여했는가? 마르크스의 전기는 표면적으로 그를 학자로 묘사한다. 그의 친가나 외가는 모두 학자 가문이었다.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랍비이자 탈무드 학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유명한 랍비인 마인츠의 엘리제 하-레비의 후손인데, 하-레비의 아들 예후다 민츠는 파도바 탈무드 학교의 교장이었다. 마르크스의 어머니 헨리에타 프레스보르크 역시 유명한 학자와 현인들을 배출한 가문 출신으로 랍비의 딸이었다. 1818년 5월 5일에(당시 프러시아 영토인)트리어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아홉 남매 중 셋째이자, 중년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의 누이들은 각각 엔지니어, 서적상, 변호사와 결혼했다. 마르크스 가족은 당시 세계적으로 한창 성장 중이던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 자유주의자인 아버지는 ‘볼테르와 루소를 속속들이 아는 진정한 18세기 프랑스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대인이 법률과 의료 분야에서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금지한 1816년의 프러시아 법령에 따라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신교도가 됐고, 1824년 8월 26일에 여섯 아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열다섯 살에 세례를 받은 마르크스는 한 동안은 열성적인 기독교도였던 듯하다. 예수회에서 운영하던 고등학교를 다닌 마르크스는 종교를 버리고 본대학에 진학했다. 본대학을 다니던 그는 당시 세계 최고였던 베를린대학으로 옮겨갔다. 그는 유대식 교육은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고, 그런 교육을 받고자 시도한 적도 없었다. 유대주의 사상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독특한 학자적 특징, 특히 탈무드 학자의 특징을 발전시켰다는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탈무드 학자들은 절반가량은 엇비슷한 문헌들을 엄청나게 쌓아놓고는, 결코 끝나지 않을 백과사전적인 저작을 계획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학자가 아닌 사람들을 기죽이고 경멸하며, 다른 학자들을 상대할 때는 극단적인 고집을 피우면서 분노를 터뜨린다. 마르크스의 모든 저작은 사실상 탈무드 연구의 특징을 갖고 잇다. 본질적으로 그의 저작은 자신의 학문 분야에서 연구하는 다른 학자들에 대한 논평이며 비판이다.
훌륭한 인문학도가 된 마르크스는 나중에 철학, 그것도 당시 압도적으로 유행하던 헤겔 철학을 전공했다. 그는 베를린대학보다 수준이 낮은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학교에서 강사 자리를 얻을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842년에 <라인 신문>의 기자가 된 마르크스는 신문이 폐간된 1843년까지 5개월 동안 기사를 썼다. 이후 그는 파리에서 추방당한 1845년까지 <독일-프랑스 연보>와 다른 저널에 글을 썼고, 추방 당한 후에는 브뤼셀에서 글을 썼다. 브뤼셀에서 그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결성에 관여하게 댔고, 1848년에는 조직을 위한 선언문을 집필했다.
1849년의 혁명이 실패한 후 브뤼셀을 떠나야만 했던 그는 런던에 영구히 정착했다. 마르크스는 1860년대와 1870년대의 몇 십 년 동안 혁명적 정치 활동에 다시 관여하면서 국제노동자협회를 운영했다. 그렇지만 그는 1883년 3월 14일에 사망할 때까지 런던에서 보낸 시간-죽, 34년-의 대부분을 대영박물관에서 자본에 대한 광대한 연구에 쓸 자료들을 찾고, 그 자료들을 출판에 적합한 형태로 추려내기 위해 노력하는 데 썼다. 저작 1권(1867)의 출판은 그가 직접 목격했지만, 2권과 3권은 그가 사망한 후 그가 남긴 노트를 편집한 동료 엥겔스에 의해 출판됐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학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투덜댔다. “나는 책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야 할 팔자를 타고난 기계야.” 그러나 깊은 의미에서 보면, 그는 학자가 아니었고 과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진리를 찾아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진리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시인과 저널리스트, 도덕주의자의 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요소는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의 엄청난 의지와 결합된 세 요소는 그를 막강한 위력의 작가이자 예언가로 만들어 줬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과학적인 요소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사실, 그 모든 요소에 있어 그는 비과학적이었다.
마르크스의 시인 기질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의 시적 이미지가 얼마 되지 않아 정치적 비전에 흡수돼 버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시를 썼다. 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와 1841년에 결혼한 프러시아-스코틀랜드 혈통의 이웃집 여자아이 예니 폰 베스팔렌과 세계의 파괴. 그는 시를 굉장히 많이 썼는데, 예니에게 보낸 3권 분량의 원고는 두 사람의 딸 로라에게 물려졌다가, 그녀가 사망한 1911년 이후에 사라졌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시 40편은 아직도 남아 잇다. 그중에는 비극시 <오울라넨>도 있는데, 마르크스는 이 작품이 당대의 <파우스트>가 되기를 바랐다. 1841년 1월 23일에 베를린에서 발행된 잡지 <아테나신전>에 시 2편이 실렸다. 시의 제목은 <잔인한 노래들>이었는데, 잔인함은 인간의 처지에 대한 강렬한 비관론, 증오, 타락과 폭력에 대한 매혹, 동반자살하자는 약조, 악마와 맺은 계약 등과 더불어 그의 시의 특징이었다.
“우리는 사슬에 묶였고, 기진맥진했으며, 마음은 허하고, 겁에 질렸다.
우리는 존재라는 이 대리석 토막에 영원토록 매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가 쓴 시다.
“우리는 무정한 하느님의 유인원들이다.” 하느님이 낳은 인간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류를 향해 거대한 저주를 울부짖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 상당수의 이면에는 세계적 위기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을 좋아햇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멸해야 한다.”
그는 나폴레옹 3세를 반대하는 팸플릿 <브뤼메르 18일>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는데, 얼마 안 있어 기존 체제에 닥칠 엄청난 대재앙에 대한 이 묵시론적인 비전은 그의 마음속에 평생토록 남아 있었다. 그의 시에 담겼던 이 비전은 1848년의 <공산당 선언>의 배경이었고, <자본론>의 클라이맥스였다.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는 시종일관 종말론에 매진한 작가다. 예를 들어, 그가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6)의 초고에 그의 시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구절을 집어넣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구절이 다루는 “심판의 날”은 “도시들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천국에서 볼 수 있을 때이고……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와 프랑스 혁명의 멜로디와 천둥 치듯 울리는 대포 소리의 반주로 이뤄진 ‘천상의 하모니’가 흐르는 가운데, 단두대가 박자를 맞추고 흥분한 군중들이 프랑스 혁명 때 불렸던 전진가를 목청 높여 부르는 때, 그리고 자의식이 가로등 기둥에 목 매달릴 때이다.” 반면 영웅의 망토를 걸친 프롤레타리아가 등장하는 <공산당 선언>에는 <오울라넨>의 메아리가 담겨 있다. 시의 국시론적 특징은 그가 1856년 4월 14일에 행한 소름끼지는 연설-공포, 빨간 십자가가 표시된 집들, 파멸에 대한 메타포, 지진, 지층이 갈라지면서 끓어오르는 용암-에서도 다시 용솟음쳤다. “역사는 재판관이고, 프롤레타리아는 그 집행자입니다.” 요점은 종말에 대한 마르크스의 개념은 시적이든 경제적이든, 예술적이지 과학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비전은 마르크스의 마음속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정치 경제학자로서 객관적으로 검증된 자료로부터 증거를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러한 예술적 비전으로부터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어줄 증거들을 찾으려 했다. 자본주의의 죽음과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싶었던 급진적인 독자들이 마르크스의 역사 예측 드라마에 매료된 것은 물론 그의 시적 요소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의 시적인 재능은 마르크스의 저작에 간간히 모습을 나타내면서 기억에 남을 만한 구절들을 양산한다. 추론이나 계산이 아니라 직관에 강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끝까지 시인으로 남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