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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갔는데 금강산이었다…그곳서 원피스 휘날린 이유 | 중앙일보
에디터권혁재
‘금강산 화암사’라는 표지석에 아연실색했습니다.
‘설악산 신선대’로 가자는 지인에게 이끌려 왔건만,
‘금강산 화암사’ ‘금강산 신선대(성인봉)’라니 아연실색할밖에요.
목적지를 잘못 찾아온 겁니다.
알고 보니 이랬습니다.
포털에 ‘설악산 신선대’를 검색하면
대체로 ‘금강산 신선대(성인봉)’가 주르륵 나옵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요?
어느새부턴가 ‘금강산 신선대(성인봉)’가 MZ세대들이 열광하는 인생 사진 명소가 된 탓이었습니다.
너나없이 SNS 혹은 포털에 ‘금강산 신선대’에 관한 이야기만 올리니
‘설악산 신선대’는 검색에서 묻혀 버린 겁니다,
그런데 화암사에, 또 신선대에 왜 뜬금없이 ‘금강산’이란 고유명사가 떡하니 앞서 붙었을까요?
시작은 화암사에서 비롯됐습니다.
화암사의 기록을 전하는 사적기에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된 데서 비롯한 겁니다.
769년(신라 혜공왕 5), 진표율사가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 서쪽에는 장안사,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한 데 기원이 있습니다.
이렇듯 화암사가 금강산의 남쪽 줄기에 닿고 있으며,
남쪽에서 북으로 보면 화암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기에 ‘금강산’이 붙은 겁니다.
하여튼 요즘 행정구역으로 하자면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토성면에 있는 화암사, 신선대입니다.
‘설악산 신선대’를 찾아가다가 잘못 찾아온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금강산 신선대(성인봉)’에 올랐습니다.
올라가서 보니 안개 자욱했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수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사진 찍느라 여념 없는 이에게 물었습니다.
이리 안개 자욱한데도 산에 오른 이유가 뭔지 물은 겁니다.
“저 안개 속에 울산바위가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사진 찍으면 인생 사진이 됩니다. 그래서 올랐는데 하필 안개 자욱하네요. 다음에 맑은 날 다시 와야겠네요. 여기서는 누구나 작품이 되니까요.”
“여기서는 누구나 작품이 된다”니 그 풍경이 자못 궁금했습니다.
눈앞에 떡하니 울산바위 앞에선 누구나 ‘인생 사진’을 찍게 된다니 꼭 한번 보리라 작정했습니다.
비 온 후 다음 날 맑아진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서울에서 새벽길을 달려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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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을 닮은 수 바위에 오르자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고운 노을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산 중턱에 오르자 해가 떴습니다.
동해는 그득한 해무에 가렸지만, 해는 해무를 뚫고 오른 겁니다.
신선대에 오르자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른바 ‘화암사 숲길 전망 바위’입니다.
예서도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이른바 ‘인생 사진 명소’인 겁니다.
신선대를 지나 울산바위가 보이는 암반지대로 향했습니다.
금세 울산바위가 눈앞에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해가 사라진 점입니다.
기껏 일출을 보여주더니 어느새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맑음’에서 한순간에 ‘흐림’이 된 겁니다.
날씨가 흐린 데도 서고, 앉는 자리마다 그럴싸합니다.
최고의 전망 장소라는 ‘낙타 바위’에 당도했습니다.
너른 암반에 불쑥 솟은 두 바위가 낙타를 연상케 합니다.
그 앞, 바위 난간이 울산바위를 조망하는 최고의 명소로 이름나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진을 위해 따로 의상을 챙겨 온 이들이 숱합니다.
등산복이 아닌 특별한 옷으로 그들만의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겁니다.
사실 여기를 가려면 바위를 내려가서 다시 올라야 하는 수고를 겪어야 합니다.
그 수고를 넘어서는 결과가 있기에 사람들은 줄을 서서 저 자리에 오릅니다.
이곳에서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요즘 반영 사진으로 세계적인 명소가 된 곳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거울이나, 유리, 물 등으로 만든 반영이 독특해 명소가 된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반영을 만들어볼까 하는 재밌는 생각이 든 겁니다.
우선 여분의 휴대폰을 꺼냈습니다.
휴대폰 카메라 렌즈 앞에 그 휴대폰을 수평으로 붙였습니다.
그 순간 반영이 액정에 맺혀 나타났습니다.
휴대폰의 액정이 거울 역할을 한 겁니다.
그 바람에 사람이 선 바위가 액정에서 떠 있는 섬인 듯 표현되었고요.
사실 사진은 놀이입니다.
심오한 작품만이 아니라
이렇듯 재밌는 상상을 사진으로 구현하는 일 또한 사진인 겁니다.
저 바위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평평한 암반이 나타납니다.
그곳엔 물이 그득한 작은 웅덩이가 여럿 있습니다.
물과 바위, 그리고 울산바위가 어우러졌으니
예서도 ‘인생 사진’이 됩니다.
때마침 흐렸던 하늘에 파란 구름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파란 구름 또한 어우러지니 더할 나위 없습니다.
산에서 내려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내려가면서도 자꾸 뒤돌아 사진을 찍게 됩니다.
다시금 안개 낀 날 어떤 이가 들려줬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여기서는 누구나 작품이 됩니다.”
에디터
중앙일보 사진전문기자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중앙일보 사진전문기자 권혁재입니다.
junu****2023.08.03 14:57
고성에 있는 화암사는 벼화자를 쓰는 화암사입니다. 일주문에는 금강산 화암사라고 씌여 있고요. 콘도가 밀집한 지역을 지나 미시령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가면 나오는 절입니다.
간성군(杆城郡)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華巖寺)
화암사 일주문.. 금강산 화암사라 되어 있다.. 화암(禾巖)은 쌀이 나오는 바위라는 뜻이다.
지금의 미시령 옛길을 분기점으로 설악산과 금강산으로 나뉘는데.. 화암사 뒷쪽에 위치한 신선봉(1312.2m)이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첫번째 봉우리이고 화암사는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번째 암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암사 일주문 현판에는 "금강산 화암사" 라고 적혀있다.
수바위
수바위를 내려와서 화암사로 가는 입구의 바위에 새겨진 간성군(杆城郡)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華巖寺)..
지금의 고성군(高城郡)의... 옛이름이 간성군(杆城郡)이다. 사찰이름도 현재의 화암사(禾巖寺)가 아닌 화암사(華巖寺)다..
▲ 세심교에서 바라본 수바위.
어느 날..
이 절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동시에 나타났다.
백발노인은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알려주면서 끼니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세 번을 흔들라고 했더니
두 사람 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 두 스님은 식량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년 후 한 객승이 이 이야기를 듣고 세 번을 흔들어 두 사람이 먹을 쌀이 나왔으면, 여섯 번을 흔들면 네 사람이
먹을 쌀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다음 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욕심을 내어 쌀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여섯 번을 흔드는 바람에 쌀이 나오는 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난 뒤 쌀이 끊어져 버렸단다.
화암사가 벼 화(禾)자에 바위 암(巖)자를 써서 화암사(禾巖寺)가 된 것도 이 전설에 연유하였다는 이야기이다.
▲ 수바위는 처음에는 볏가리 모양 같다고 하여 화암(禾岩)으로 불렀다고 한다.
수바위는 계란모양의 바위 위에 왕관모양의 또 다른 바위가 놓여 있는데 윗면에는 길이가 1m, 둘레 5m의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물이 항상 고여있어 가뭄을 당하면 웅덩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왔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수바위의 '수'자는 수(水)로 보기도 하고, 바위의 생김이 뛰어나 빼어날 수(秀)로 보기도 한다.
▲ 화암사 대웅전..
서기 769년 신라시대 혜공왕 5년에 진표라는 스님이 설악산의 북쪽기슭에 창건한 인조 때 소실된 것을 복원한 뒤 1864년
고종 원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하였다. 그뒤 1915년과 6.25때 화재로 소실된것을 다시 증건했다.
원래 건봉사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신흥사의 말사라고 한다.
▲ 뒤에는 신선봉, 앞에는 동해바다로..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다.
▲ 샘치골교위에서 올려다본 천진천의 무명폭포와 신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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