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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행] 강서구
서울사랑 매거진 2013년 5월호
글 윤재석(언론인)
하늘의 관문 ‘강서구’... 미래 지식단지로 변신중...
김포국제공항으로 대표되는 강서구는 고도 성장기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관문이었다.
인천국제공항에 그 명성을 내준 지금은 마곡동과 가양동에 걸쳐 조성될 ‘미래 지식 산업단지 및 국제 업무 단지’ 예정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또 의성(醫聖) 구암 허준과 천재 화가 겸재 정선의 고장이기도 한 강서구를 살펴본다.
강서구는 글로벌 도시의 원조이기도 하다. 김포국제공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부터 강서 기행을 시작한다. 1936년 건설된 8.63km2(강서구 면적의 5분의 1) 규모의 김포국제공항은 고도 성장기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관문이었다. 수다한 유학생과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청운의 뜻을 품고 미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 출국 수속을 밟은 곳도 여기였고,
수출 역군들이 샘플 보따리를 둘러메고 오대양 육대주로 뛰쳐나간 곳도 여기였다.
그러던 김포국제공항은 2001년 5월 인천국제공항 개항을 기점으로 급속히 퇴락한다. 말만 국제공항이지 국제 노선이
사라진 김포공항은 철시한 장마당처럼 썰렁한 분위기의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인천국제공항이 세계 최고 공항으로서 입지가 확고해질수록 김포국제공항은 더욱 초라해졌다. 김포국제공항은 한동안 국내선 운행과 대형 할인 마트, 웨딩 컨벤션 등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김포-하네다 취항을 계기로 쇠락에서 조금씩 벗어났고, 이후 김포-오사카, 김포-홍차오(상하이) 등의 노선이
추가되자 빈약하나마 국제공항의 면모를 되찾기 시작했다. 2년 전엔 인천-베이징 노선 일부를 담당하면서 공항으로서
효용성이 더 높아졌다.
사실 김포국제공항의 경쟁력은 엄청나다. 애초 국제공항으로 조성·증축됐으니 기본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공항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접근성이 뛰어나다. 수도 도심에서 공항까지 1시간 이내에 1달러 내외의 저렴한 교통비로 접근할 수 있는 국제공항이 세계에서 몇이나 될까? 여기에 공항 시설 활용률이 50% 미만으로 출입국 수속 또한 간편하다.
이따금 지방에 갈 때 느끼는 김포국제공항의 분위기는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한산하다. 예전 전성기 김포국제공항의 면모를 되살릴 순 없겠지만, 시설 활용도 측면에서 봐도 지금보다 국제 노선을 더 늘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발 기다리는 마곡 들판 김포공항역에서 9호선 민자 지하철을 타고 가다 양천향교역에서 내린다. 1번 출구로 나와 서쪽을 바라보니 너른 들판에 건물이 하나 둘 올라가고 있다. 3.66km2 규모의 ‘미래 지식 산업 단지 및 국제 업무 단지’ 조성 예정 지역이다. 단지 예정지는 마곡동과 가양동에 걸쳐 있다.
서울시 산하 SH공사는 이곳에 정보 기술(IT), 생명공학 기술(BT), 나노 기술(NT) 등 성장 동력 산업을 유치해 미래 지식 산업 단지를 조성하는 한편, 외국자본을 들여와 컨벤션 센터, 전시 시설 등의 국제 업무 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단지 내 주거 시설도 대규모로 조성 중이다. 올해 SH공사는 아파트 2천856가구를 분양할 예정이다. 첨단 기술과 주거가 조화된 환경친화적 산업 단지를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전회(양천구 편)에서도 언급했듯 이곳은 옛 양천의 본거지다. 강서구 홈페이지에 들어가 봐도 양천구와 별반 다른 게
없다. 따라서 강서구 기행의 상당 부분이 옛 양천의 현장 답사가 될 것임을 미리 일러둔다.
양천향교역에서 산이 보이는 길을 따라 정북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길이 갈리는 지점에 ‘양천현아지(陽川縣衙址)’라고 새긴 비석이 하나 서 있다. 그렇다. 조선 시대 양천현의 중심으로, 양천현령이 집무하던 현아 터다. 현아를 중심으로 벼슬아치와 구실아치들이 모여 살고 장이 서기도 했다. 특히 이곳은 반경 50m 안에서 모든 것이
이뤄진, 이른바 읍치(邑治)가 작동하던 작은 세계였다.
조금 더 올라가면 또 갈림길이 나온다. 한복을 곱게 입은 어린이들의 모습을 부조한 담벼락을 끼고 몇 걸음 올라가니
양천향교(陽川鄕校)가 나온다. 향교는 문묘 기능과 유학을 연구하고 강론하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양천항교는 전국 234개 향교 중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다.
향교는 말 그대로 지방 교육기관이다.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으로 조선 시대 한양의 사학(四學: 중학, 동학, 서학,
남학)과 함께 지방 관청 산하에 설치된 중등 교육기관이다. 그런데 서울에 웬 향교? 그건 양천이 경기도 김포군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이 향교는 조선 태종 12년(1411년)에 창건해 노후된 것을 1981년에 전면 복원했다. 60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양천향교 역시 여느 향교와 다를 바 없다.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 외삼문을 지나면 중앙에 명륜당, 그리고 좌우로
동재와 서재, 명륜당 뒤로 내삼문, 그 뒤로 대성전, 대성전 옆으로 전사청(典祀廳)이 자리하고 있다.
양천향교 정문 안쪽에 쓰인 글귀가 눈길을 끈다. ‘존천리거사욕(存天理去私慾)’, ‘하늘의 이치를 존중하고 개인의 욕심을 버리라’는 뜻 정도 되겠다.
양천항교는 전국 234개 향교 중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
다천혜의 요충, 궁산
향교 탐방을 마치고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산을 향해 올라간다. 해발 74.6m의 궁산(宮山). 옛 양천현의 진산(鎭山)인 이 산은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 양천관아와 양천향교를 품에 안고 마곡평야를 바라보는 천혜의 산이다. 하지만 지금은 올림픽대로에 뒷덜미가 잘려나가고 수없이 많은 건물이 들어서 시야를 가리고 있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올라가니 정상은 너른 평지. 이곳 어딘가에 백제 온조왕이 축성한 장난감 같은 양천고성이 있었으리라. 양천고성은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을 내려다보며 적의 침입을 경계하고 방어했던, 때론 공격을 가했던 요충지다.
강 건너 왼쪽으로 행주산성을 머리에 인 덕양산이, 오른쪽으로는 봉화대를 올렸던 안산(또는 안현)이 아련히 보인다.
오른쪽으로 돌아 길을 내려오다 만나는 솔숲 속에 파란 지붕의 화장실 건물 같은 게 보인다. ‘관산성황사(關山城隍祠)’
궁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관산의 성황사는 조선 시대 마을의 도당 할머니를 모신 곳이다. 도당 할머니는 민초의 번영과 행복을 빌어주고, 악귀와 돌림병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특히 민물 어업을 하는 이들이나 뱃길 장사를 하는 이들에겐 성황 여신의 각별한 돌봄이 간절했을 터.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산신제와 굿으로 도당 할머니를 기렸다는데, 사당의 행색이 좀 초라하다.
조금 더 내려가 동편 기슭, 팔작지붕의 우아한 정자가 있다. 전회에 소개한 소악루(小岳樓)다. 1737년(영조 13년)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李楡)가 경관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자택 부근 옛 악양루 터에 지은 정자로, 본래 자리에 있던 소악루가 소실돼 1994년 지금 자리에 복원했다.
겸재 정선과 구암 허준
둘레길을 돌아 내려와 다시 길이 시작되는 곳에 서니 바로 겸재정선기념관이다. 조선 영조 시대 5년(1740~1745년) 동안 있었으리양천현령을 지낸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생애를 기리고 작품을 모아놓은 곳.
그가 현령 재직 중 그린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양천구 편에서 소개)과 한강을 중심으로 주변의 명승을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등이 전시돼 있다. 아쉽게도 그의 작품은 대부분 개인이 소장하고 있어 이곳에선 진품을 보기 어렵다.
겸재의 산수화 중 특히 관심을 끄는 작품이 바로 <경교명승첩>인데, 25폭의 그림으로 형상화한 한강과 주변의 명승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65세인 1740년 양천현령으로 부임했을 때, 같은 동네(인왕산) 출신의 죽마고우이자 진경시의 대가 사천 이병연(李秉淵)이 찾아와 색다른 제안을 했단다. “내가 시를 지어 보내면 자네의 그림과 바꾸어서 보자”고. 겸재가 이 제안에 따라 1741년 상하 2첩 25폭으로 완성한 작품이 <경교명승첩>이다.
<경교명승첩>은 양수리 부근 한강 상류의 절경을 담은 ‘녹운탄(綠雲灘)’과 ‘독백탄(獨栢灘)’에서 시작해, 물류와 나그네의 내왕이 빈번했던 ‘광진(廣津)’과 ‘송파진(松坡津)’,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狎鷗亭)’, ‘동작진(銅雀津)’ 행주산성 유역을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남산의 풍광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은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 떠오른다”는 이병연의 시에 맞추어 남산 일출의 장관을 그린 것으로, 두 사람이 맺은 약조와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마침 이곳에선 양천향교가 마련한 한국 고대사 특강 및 선사 고대 유물 전람회도 열리고 있어 볼거리가 풍성하다.
이제 강서가 낳은 거인 구암(龜巖) 허준(許浚)을 만나러 간다. 지하철 9호선 가양역이나 양천향교역에서 내려 한강 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허준박물관이 나온다. 그런데 바로 옆에 대한한의사협회 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참 절묘한 구도다.
박물관은 신묘한 의술로 박애를 실천한 의성이자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 허준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나 유품은 많지 않다. 본격적인 전시 공간은 3층. 먼저 허준기념실에 들른다. 이곳은 ‘동양의학의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을 지닌 <동의보감>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의 세계관과 인체관, 오장육부를 설명한 내경, 인체 외부 질환을 다룬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순. 그러고 보니 올해는 <동의보감> 간행 400주년이 되는 해다. 이어 <언해구급방> 등 허준의 각종 저서를 전시하고 있다.
다음은 약초·약재실. 한약재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곳엔 곡부(穀部), 과부(果部), 채부(菜部), 초부(草部), 목부(木部) 등과 탕액에 관해 배울 수 있다. 이어 의약기실, 내의원한의원일부가 2실, 의관과 의녀·체험 공간실로 이어진다. 박물관과 이어져 야외 약초원과 인공 폭포, 전망대가 있고, 옥상 공원도 있어 휴식 공간으로도 괜찮다.
허가바위굴 그리고 광주바위
허준박물관을 나와 한강 쪽으로 조금 나가면 작은 숲이 나타난다. 철책으로 둘러친 저 밑을 보니 한낮인데도 음침한 기운이 도는 천연 동굴이 엎드려 있는 것 아닌가! 이름 하여 ‘허가(許家)바위굴’. 서울시 기념물 제11호로 굴의 크기는 가로 6m, 세로 2m, 길이 5m다. 신석기시대 선사인들이 한강에서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혈거 동굴이기도 한 이 동굴에 허가바위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곳에서 양천(陽川) 허씨(許氏)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태어났다는 설화 때문. 허선문은 고려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를 지낸 인물이다.이 굴은 허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암은 말년에 이 굴에서 의서 집필에 전념했고, 급기야 서거했다고 한다. 허가바위굴 옆엔 ‘공암나루터(孔巖津址)’라고 새긴 석비가 있다. 양천과 행주를 잇는, 북포(北浦)라고도 불린 나루 자리다.뒤를 돌아 한강 쪽으로 가면 구암근린공원이 나온다. 이름에 걸맞게 허준의 좌상이 있다. 이곳 연못에 가면 특이한 바위가 눈길을 끈다. 이름 하여 ‘광주바위.’
과거 큰 홍수가 났을 때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바위가 떠내려왔다고 한다. 광주현감이 수소문 끝에 공암나루 근처에 떠내려와 있는 걸 보고, 양천현이 이 바위에서 자라는 싸리나무로 만든 비 세 자루를 매년 바치는 쪽으로 타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양천현령으로선 억울한 생각이 들어 광주현감에게 바위를 도로 가져가라고 하자 그 뒤로는 빗자루 세금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19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할 때 바위 주변을 비롯한 한강내의원한의원일부가 메워져 없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주민들의 요구로 구암공원 연못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우장산과 개화산
이제 관내 산 두 곳을 탐방하는 것으로 강서구 기행을 마칠까 한다. 먼저 우장산(雨裝山, 해발 96m). 화곡동의 진산으로 북산인 검두산(鈐頭山)과 남산인 원당산(元堂山) 등으로 이뤄진 쌍봉산이다. 두 산에 제단을 차려놓고 기우제를 지낼 때 세 번째 기우제를 지내는 날엔 반드시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이날만은 참가자 모두가 우장(雨裝)을 쓰고 산을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산 이름이 유래했다.
개화산(開花山, 해발 132m)은 강서 북서쪽 끝에 위치해 한강을 내려다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 강서구에서 관내 유일의
산다운 산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위용을 갖췄다. 이에 따라 개화산은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요충지 역할을 했다.
지하철 9호선 종점 개화역을 나와 남쪽 기슭을 따라 올라가 미타사에 다다르면 근처에 ‘김포(개화산)지구전투위령비’가 서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김포비행장을 지키기 위해 상부의 철수 명령에도 아랑곳없이 인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전진부대(1사단) 장병 1천100여 명을 기리는 충혼비다. 산 정상엔 지금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현존하는 북한의 남침 야욕을 실감하게 된다.
둘레길을 따라 걷거나 지하철 5호선 4번 출구로 나와 산행을 하면, 산 북쪽 정상 못 미쳐 고찰 약사사에 이른다. 700~800여 년 전(고려 후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사에선 두 가지 특이한 유적을 볼 수 있다. 대웅전 안 석가모니 불상 뒤에 안치된 거대한 미륵 석불과 절 마당의 3층석탑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방화근린공원과 꿩고개(雉峴)근린공원, 서남환경공원 등을 거쳐 한강변에 위치한 강서습지생태공원을 소요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
공진중학교, 학교 폭력 ‘제로’ 실험 중
강서구에서 꼭 들러볼 학교가 있으니, 허준박물관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공진중학교다. 이곳에선 지금 학교 폭력을 줄일 새로운 실험이 진행 중이다. 쉬는 시간, 현관 앞에 학생 수십 명이 모여 벽에 설치된 모니터를 보며 환호하고 있다. 화면 속에선 학생 4명이 빠른 비트의 팝송에 맞춰 댄스 공연을 하고 있다. 학교 축제 때 영상? 아니다. 지금 정보관 1층 한쪽 귀퉁이에 있는 드림 스테이지(꿈의 무대)에서 공연 중인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이다.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어서가 아니다. 쉬는 시간이면 누구나 이곳으로 달려가 춤, 노래 등 자신의 끼를 펼쳐 보일 수 있다. 생중계되는 화면은 드림 월(꿈의 벽)이라 부른다.
작년 서울시교육청이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리 조사 결과 공진중 학생의 우울증 지수와 자살 위험도가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 폭력 때문이었다. 작년 10월 공진중은 역발상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서울시가 지원한 범죄 예방 디자인에 따라 대표적 사각지대를 학생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 개조했다. 꿈의 무대도 그중 하나. 드림 그라운드(꿈의 구장)는 학교 정보관 뒤 실외 암벽 등반 코스다. 철판으로 주변이 막힌 이곳은 과거 탈선이 횡행하던 곳이었다.
샌드백이 설치된 스트레스 존도 마찬가지. 이곳에서 벌어지는 학생의 모든 활동은 동영상 카메라를 통해 드림 월과 교무실로 실시간 전송된다. 폭력 발생 여지를 근본부터 없앤 것이다.
최근 공진중 학생의 정서는 확연히 호전됐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사 결과 이 학교 학생의 범죄에 대한 두려움은 전보다 3.7% 준 반면, 학교에 대한 애착은 1.4%가 올랐단다. 다른 학교에서도 시도해볼 만한 실험이다. (끝)
첫댓글 이번에는 강서구... 제가 현재 살고 있는 강서구의 소개라서 많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알고 있는 내용들이라서 그럴가...? 강서구를 소개하는 내용에 웬지 정성이 느껴지지 않고 소홀함이 엿보이더군요. 좀 더 아름답고 짜임새 있는 소개를 해 주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운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