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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훈(한국수생식물연구회 회장) 연꽃의 생태적 특성과 재배 역사 연꽃은 예로부터 이 땅에서 우리 겨레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연꽃이 피는 세계를 극락정토로 생각했고, 저녁에 오므라들었다 아침이면 다시 피어나는 것을 보고 부활의 상징으로 믿었다.
죽어서도 연꽃이 피는 세상에서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던 우리 선조들은 고분의 중앙 가장 높은 천장에 연꽃을 그려 사후 세계의 낙원으로 삼았다. 건축물도 연꽃으로 단청을 했으며, 가장 화려한 비단 옷의 옷고름에도 연꽃을 그려 넣었다. 또 연꽃으로 차를 끓이거나 연잎, 연밥, 연근은 요리의 재료가 되었다. 죽어서도 연꽃을 장식한 꽃상여를 타고 저승의 강을 건넜다. 연꽃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꽃은 생활 속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연꽃을 예찬했고 건축과 공예, 회화에서도 연꽃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남아있다.
연꽃이 주는 의미와 우리의 의식주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크고 넓어 깊이를 알 수 없다. 연꽃은 Nelumbo속 식물이고 수련은 Nymphaea속(屬)에 들어 있다. 같은 수련과 식물이지만 속은 완전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연꽃은 잎이 크고 잎자루나 꽃자루에 가시가 있다. 그에 비해 수련은 가시가 없어서 매끄럽다. 또 연꽃은 잎과 꽃이 물위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수련은 잎과 꽃이 물위에 떠있다. 연잎이 둥근 모양인데 비해 수련 잎은 둥글지만 한쪽이 고깔 모양으로 중앙까지 갈라졌다.
온대지방에서 자라는 수련은 꽃이 물위로 벗어나지 못하고 수면에 뜬다. 그러나 열대성 수련은 꽃자루가 길게 물위로 솟아오르고 꽃은 연꽃처럼 물위에서 핀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연꽃을 연(蓮)이라 쓰지만 중국에서는 蓮보다 하(荷)로 쓴다. 蓮과 荷 모두 연꽃을 뜻한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면서도 나라마다 쓰는 글자가 다른 것도 재미있다. 영어로는 蓮을 Lotus라 하고 수련은 물위의 백합이란 뜻으로 Water Lily 라 쓴다. 수련의 학명 Nymphaea는 물의 요정 님프에서 따온 말이다. 물의 요정처럼 예쁜 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유럽에서는 물의 요정 님프가 꽃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가 어린이가 꽃을 꺾으려고 하면 발목을 잡아 연못으로 끌어들인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님프를 무서워하여 함부로 연못에 들어가지 않았다. 보통 연꽃은 낮에 피지만 수련은 낮에 피는 것도 잊고 밤에만 피는 종류도 있다. 남미 아마존강에서 자라는 세계 최대의 왕련은 수련의 일종으로 잎의 지름이 2m나 돼 어린이가 올라가도 가라앉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자생하는 연꽃과 수련은 없다. 마을 근처의 저수지나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 수련이 있다면 아주 오래 전에 인위적으로 심은 것이다. 가시연꽃은 에우리알레(Euryale)속 식물이고 순채는 브라세니아(Brasenia)속 식물이다. 또 개연꽃과 왜개연꽃은 누파르(Nuphar)속이다. 이름만 연꽃이라고 부를 뿐 수련과 연 어느 쪽과도 거리가 먼 것들이다. 강진의 백련과 무안의 백련은 영원히 보존해야할 국가적 자연 자원이다.
연꽃은 열대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산으로 알려져 있다. 야생상태로 자라는 지역만 해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러시아 동북지방,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넓게 분포한다. 식물 생태학적으로 보면 연꽃은 수련과에 속하는 다년초로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근경은 옆으로 길게 뻗으며 원기둥꼴이고 마디가 있다. 이 마디에서 실뿌리를 내리고 진흙 속을 기면서 자란다. 연꽃은 종자 발아 능력이 그 어떤 식물보다 뛰어난 편이다. 일본의 오오가 이찌로 박사는 2000년 전의 호수 진흙층에서 발굴한 연꽃 씨를 발아시키는데 성공했다. 동경 부근의 5.4m 되는 깊이에 묻혀 있던 카누에서 세 개의 연꽃 씨를 발굴하였는데 그 중 두 개에서 싹이 튼 것이다.
그 연꽃이 씨가 여물어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 식물원에 보내져 자라고 있다. 연은 씨가 워낙 단단하고 물이 묻지 않기 때문에 쉽게 발아하지 않는다. 물에 떨어진 씨는 물길을 따라 멀리멀리 퍼져 나가고 진흙 속에 수십 수백 년 동안 묻혀 있다가 어느 때 조건이 맞으면 싹이 터서 자란다. 연의 학명 Nelumbo nucifera에서 Nelumbo는 세일론어로 연꽃이라는 뜻의 라틴명이다. 또 뒤의 종소명 nucifera는 씨가 단단하다는 뜻이다. 연근과 연잎의 잎자루를 자르면 굵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구멍을 통해 물위와 물 아래로 호흡을 한다. 잎은 수면에 뜨기도 하지만 수면 위로 솟아올라 잎자루의 길이가 1∼2m나 자란다. 잎은 원형이고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매끄럽다. 잎자루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있어서 맨살에 스치면 살갗이 찢어질 정도이다. 연잎은 물이 묻지 않고 물방울이 되어 구른다. 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린다. 이렇게 며칠을 반복하는 동안 꽃이 수정되면 꽃잎이 처지고 이어 한 장씩 떨어진다. 꽃잎이 지는 모양을 자세히 보면 먼저 녹색의 꽃받침이 떨어진다. 그 다음 꽃잎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가 밑에서부터 한 장씩 떨어져 버리고 암술머리만 남게 된다. 연꽃의 암술머리는 유난히 크다. 처음에는 위를 보고 꼿꼿이 서지만 씨가 익어 가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종자가 원숙할 때쯤엔 완전히 밑을 향한다.
중국의 고생물학자 서인(徐仁) 박사는 1000만 년 전 지층에서 연꽃잎 화석을 발굴하였다. 또 1973년에는 절강성 여요현(余姚縣)의 7000년 전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 유적지를 발굴하였는데 이곳에서 놀라온 유물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 식물학자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연꽃 화분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000만 년 전부터 중국의 남부지방에서는 연꽃을 널리 심었으며 식용 또는 약용으로 생활에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오래된 늪지나 연못에 연꽃이 널리 분포하고 있지만 언제부터 자라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5세기 경 일본의 웅략왕(雄略王) 때 중국의 연꽃이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한반도에서는 연꽃을 널리 재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에는 천상계(天上界)의 연꽃이 고구려 고분에 나타난 수많은 연꽃 문양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 땅에서 자생적으로 발달한 미술양식이다. 고구려 고분 중에서도 무용총의 천장에는 수많은 연꽃 문양이 그려져 있다. 그 연꽃들은 꽃잎 끝이 뾰족하고 꽃잎 사이에 초록색의 꽃받침이 선명하다.
서정록 님은 그의 저서 ≪백제금동대향로≫에서 고구려 고분의 연꽃은 수련과의 님페이아속(Nymphaea 屬) 수련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연꽃문화에 대해 불교가 유입되면서 함께 들어온 미술양식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학자들이 학문적 비판 없이 기존의 학설을 답습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불교의 상징화라 알고 있는 연은 넬룸보속(Nelumbo 屬)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연잎에 물방울이 묻지 않는 것처럼 물욕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따라서 잎에 물이 묻지 않고 구르는 것은 연꽃이다. 그에 비해 수련의 잎은 물에 젖는다. 고구려의 연꽃 문양이 수련이라면 불교와 무관한 독자적 문화라 할 수 있다. 수련은 아침에 피었다가 오후 3시면 이미 꽃잎을 닫는다.
다음날 다시 꽃을 피우기 때문에 죽지 않는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 낮이면 다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두고 태양을 생각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수련을 태양 꽃으로 생각하여 태양신 호루스(Horus)가 수련꽃에서 태어났다고 여겼다. 따라서 연꽃이야말로 영원불멸의 태양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반도 최초의 연꽃 문양은 함경북도 웅기군 송평등(松坪洞) 고분에서 발견된 목긴항아리(長脛壺)이다. 어깨 표면에 굵은 먹선이 그려진 8엽의 연화문(八葉蓮花紋)이다.
고구려 이전의 이 땅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독자적인 연꽃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무덤은 죽은 이의 유택이다. 내세관을 굳게 믿었던 고대사회에서는 무덤 속을 생시와 같은 공간으로 장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태양이 비치는 영원불멸의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고구려의 고분에 연꽃이 아닌 수련 문양이 등장하는 것도 내세관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라 해석된다. 하늘연못(天池)에 피는 태양의 꽃 연꽃은 중국 동북부 하르빈 북쪽 흑룡강 유역에도 널리 자란다. 그러나 수련은 이 보다 내한성이 약해서 양자강 유역까지 내려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충남 이남 지역의 저수지나 연못에서 자연상태로 자란다. 그러나 재배하는 온대성 수련은 이 보다 훨씬 높은 위도에서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화분 분석을 통해 빙하기 이전에는 러시아와 몽골, 캄차카 반도에서도 수련이 널리 자라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고대 한반도에서는 태양을 상징하는 수련을 가꾸고 자연물을 통한 연꽃문화를 널리 꽃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수레를 단순하게 교통수단으로 보기보다 움직이는 주택으로 생각했다. 작은 집에 바퀴를 달았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주택의 지붕이니 마땅히 수레의 천장에도 연꽃문양이 장식돼 있어야 한다.
<구가> 하백(河伯) 조(條)에는 하백이 ‘연꽃으로 지붕을 장식한 수레를 타고 두 마리의 뿔 없는 용을 몰고 간다.(乘車兮荷蓋 駕兩龍兮驂螭)’ 라고 적고 있다. 지붕에 연꽃을 장식하는 풍습은 전국시대부터 있었던 것 같다.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쓴 ≪초사(楚辭)≫에도 그 같은 내용이 보인다. 수중궁궐을 지어 연꽃으로 지붕을 덮는다.(築室兮水中 葺之兮荷蓋) 지붕이나 수레의 덮개를 연꽃으로 장식했다고 하는데 동북아시아에서 표현한 연이 바로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수련문화는 중국 남부나 인도, 동남아시아 각국의 연꽃문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불교가 투입되면서 수련은 점차 연꽃으로 바뀌고 꽃잎 중앙에 연밥을 표현하게 되었다. 비로소 순수한 연꽃문양을 완성한 샘이다.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백제의 위대한 금속공예품 한 점이 출토되었다. 고분이 모여 있는 서쪽 골짜기 공방터의 수조(水曹) 구덩이에서 1400년의 긴 꿈을 헤매다 깨어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일본 등 세계가 소장하고 있는 향로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미적으로도 완성된 위대한 문화재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웅덩이는 길이 135㎝, 너비 90㎝, 깊이 50㎝ 규모로 향로는 구석에서 뚜껑과 몸체 부분이 분리된 채 누워 있었다.
향로의 전체 높이 62.5㎝로 봉황이 있는 뚜껑과 연판(蓮瓣)이 겹겹이 붙어 있는 몸체 부분, 그리고 용이 연꽃 줄기를 입에 물고 나는 듯 구부리고 있다. 향로의 연은 꽃잎마다 오리와 새 같은 갖가지 동물을 부조로 새겨 놓았다. 향로의 연꽃은 다른 회화나 부조로 된 연꽃에 비해 입체라는데 의미가 있다. 이 보다 앞서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銅托銀盞)의 뚜껑에도 연꽃이 이중으로 장식돼 있다. 중앙의 연꽃 사이에 허공을 나는 봉황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백제의 또 다른 연꽃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또 1994년 9월 어느 일본인 수집가가 한국문화재 37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 유물 중에는 고려시대의 금제연화문장식(金製蓮花紋裝飾) 2점이 포함돼 있다. 물고기와 연잎 그리고 활짝 핀 연꽃을 표현하였으며 서로 연결된 줄기 공간은 투각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연꽃문양들을 통해 하늘연못에 핀 연화세계와 우주관을 살펴 볼 수 있다. 연꽃 문양의 발달과정 고구려에서는 고분 천정을 온통 연화문으로 가득 채웠다. 그 연화는 흐르는 구름 사이에 점점이 떠 있다. 바로 하늘나라의 연꽃인 셈이다. 고구려에서 돌로 된 벽면에 연꽃을 그린데 비해 백제의 무녕왕릉에서는 벽돌에 연화를 부조하여 벽과 천정을 축조하였다. 이것 또한 연꽃 피는 천상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또 삼국시대에는 목조 건축물의 기와에 연꽃을 새계 지붕 전체를 연꽃으로 덮었으니 천상계를 현실에 재현한 셈이다.
연꽃 피는 천상계의 낙원을 지상에 건설하여 생활공간으로 발전시킨 형태라 할 수 있다. 사실적인 연꽃이 간소화 하여 문양으로 발전한 시기는 AD 1세기 겅 쿠산(Kusan)왕조 때부터이다. 당시에 축조한 옥원석각문(玉垣石刻紋)은 연꽃이 원형으로 단순화 되어 있다. 그 후 BC 3세기경 부다가야(Buddagaya)의 연화인어문석각(蓮花人魚紋石刻)은 씨방 둘레에 인어문이 사실적으로 장식돼 있다. 또 BC 2세기경 바르하트(Barhat) 유물에서는 더 간단하고 양식화 하였다. 문화적 경제적으로 완성기에 접어든 쿠산왕조에서는 연화문도 여러 가지로 세분화 하는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의 좌대에 새긴 연꽃잎을 3중으로 표현하거나 윤대를 따라 좌우로 소용돌이를 윤각(輪刻)했다. 꽃잎 안쪽에 음각으로 세로선을 넣거나 타원형을 새기기도 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연꽃은 처음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신성한 꽃이었으나 약용 또는 식용으로 쓰이면서 민간으로 퍼져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연꽃은 연화(蓮花), 수지(水芝), 부용(芙蓉). 수화(水華), 수운(水芸), 빙단(氷旦), 수부용(水芙蓉), 택지(澤芝), 옥배(玉杯), 초부용(草芙蓉), 유월춘(六月春)이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동양에서 연꽃을 재배한 역사는 유구하다.
아름다운 여인을 연꽃에 비유하기도 기원 전 500여 년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는 호산(虎山)의 궁(宮)에 연못을 파고 총애했던 비 서시(西施)와 함께 연꽃을 완상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서시로 꼽는다. 당대의 영웅 오왕도 서시를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때문인지 오월(吳越) 지방에서 생산되는 연근을 서시비(西施臂)라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라는 뜻이다. 《시경(詩經)》 진풍(秦風) 편에 한 여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과 부들에 비유하여 호소하고 있다. 저기 연못에 부들과 연잎이 정답게 자라네. 사모하는 이여 그대를 향한 내 마음 어찌 하오리까? 자나 깨나 애타는 마음 일손 놓고 눈물짓네.
彼澤之陂 有蒲與荷 有美一人 傷如之何 寤寐無爲 涕泗滂沱 부들은 남성을 연잎은 여성을 비유한다. 연못에서 부들과 연잎이 정답게 자라고 있는데 그리운 님은 언제 돌아와 함께 지낼 수 있을까. 그리움이 사무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다는 애절한 사랑의 노래이다. 기원 전 700여 년에 이미 연의 각부 명칭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연꽃을 널리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아(爾雅)》 석초(釋草) 편에, “연(荷)은 부거(芙蕖)라 한다. 잎자루(葉柄)를 하(하)라 하고 지하경에서 솟아오른 어린 싹을 밀(密)이라 한다. 또 꽃봉오리를 함담(菡萏), 연의 씨방(花托)을 연(蓮)이라 하고, 씨(蓮子)는 적(적), 씨 중에서 배아(胚芽)를 의(薏)라 한다.”
라고 적고 있다. 당의 수도 장안(長安) 부근에도 부용원(芙蓉苑)이라는 넓은 연못이 있어서 여러 가지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뿐만 아니라 겹꽃의 백련도 기록하고 있다. 왕인유(王仁裕)가 쓴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는, “명황(明皇) 가을에 태액지(太液池)에 겹꽃(千葉) 백련(白蓮)이 여러 송이 피었다.” 고 했다. 또 동진(東晋) 이전에 이미 연꽃을 화분에 심어 가꾸기도 했다. 송나라 때는 분재기술과 함께 연못에 수경식물(水景植物)을 널리 재배하기도 했다.
당시의 연못에는 연꽃 외에도 수련, 마름, 부들, 갈대를 심었으며, 연못 가장자리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수면에 어리는 영(影)을 즐겼다. 송의 동파(東파) 소식(蘇軾)은 그의 《물류상감지(物類相感志)》에서, “양양 석량산 위에 연못이 있는데 보라색 연꽃이 핀다.” 고 적었다. 연꽃을 감상하기 위한 동양식 정원 동양 정원문화의 정수(精髓)라고 말하는 중국 소주(蘇州)의 졸정원(拙政園)에는 연꽃을 감상하기 위한 시설이 따로 마련 돼 있다.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기 위한 유은각(留听閣)은 원앙정의 서부에 있다. 두 면이 연못과 접해 있어 형태가 정교하고 고상한 단층 응접실이다.
이곳은 차를 마시며 연꽃을 감상하기에 좋은 건물이다. 연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데 날씨 변화와 밤낮에 따라 서로 다른 연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된다. 당대 이상은(李商隱)의 시 구절 “중추의 날씨에 장마가 계속되고, 날씨 개어 서리 내리는 가을이 깊지 않았네. 그나마 다행하게도 연못에 아직 연이 남아있으니,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구나(秋陰不散霜飛晩 留得枯荷听雨聲)”에서 유은각(留听閣)이란 이름을 얻었다. 유은각 북쪽에 대나무 숲이 있는데 가을비가 세차게 내릴 때 빗방울이 댓잎을 때리는 소리를 듣는 것도 특별한 흥취가 있다.
연꽃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 부용사(芙蓉榭)이다. 부용사의 반은 연못의 기슭에 지어졌고 나머지 반은 돌기둥으로 받친 수면 위에 둥실 떠있다. 부용사 내부의 남쪽 창살과 동서 양측의 칸막이는 조각이 매우 정교하고 고색창연하다. 게다가 둥근 모양의 의자를 배치하여 고상한 맛을 더했다. 부용사의 외곽은 구불구불한 복도이고 사방이 넓게 트여 있다. 이름 그대로 연못의 연꽃을 감성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앞에 펼쳐진 연못은 넓고 기슭은 푸른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으며 많은 꽃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장 아름다울 때는 물론 여름철 연꽃이 필 때이겠지만, 오월에 모란이 가득 피고 버들가지에 새잎이 나면 꾀꼬리가 날아와 그야말로 기막힌 동양정원을 완성한다.
서쪽의 연못을 향하고 있는 복도 기둥의 전서체 대련(綠香紅舞 貼水芙蕖增美景 / 月縷雲裁 名園闌榭見新姿)을 눈여겨보는 것도 좋다. 졸정원의 아름다운 경치에서 연꽃을 뺄 수 없다는 것과 문징명(文徵明)과의 관계를 명시하고 있다. 이 대련을 통해 졸정원은 처음 건립 때부터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하고 있었으며, 연꽃을 감상해 온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련 중에 녹향홍무(綠香紅舞)는 연꽃을 뜻하는 말이다. 강백석(姜白石)의 <석호선수석호거사(石湖仙壽石湖居士)>에서 나온 말이다. 석호거사는 남송의 전원시인 범성대(范成大)를 말한다.
그는 석호에서 살았고 그의 생일은 연꽃의 생일과 같은 음력 6월 24일이다. 이 때 연꽃이 처음 피기 때문에 연꽃의 생일이라고 말한다. 이 대련은 시인 왕서야(王西野)가 짓고, 당대의 명필 주퇴밀(周退密)이 글씨를 썼다. 연꽃은 부용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연화(蓮花), 부거(芙蕖), 수지(水芝), 수화(水華), 오환(五環), 택지(澤芝) 등의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부용이라는 이름은 많다. 창덕궁 부용정(芙蓉亭)은 연꽃이 핀 연못에서 임금이 고기를 낚으며 정국을 구상하던 곳이다. 호남선 이리에서 김제로 가는 길목에 부용역(芙蓉驛)이 있다. 옛날에 이 지역에 연꽃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에 부용지(芙蓉池)라는 저수지가 있어 연꽃이 아름답다.
조선 시대 대궐의 연회 때 무동이 머리에 쓰는 연꽃 모양의 모자를 부용관(芙蓉冠)이라 했다거나, 연꽃 향이 나는 고급향을 부용향(芙蓉香)이라 했다. 졸정원의 부용사는 서쪽으로 연못에 임해 있어 해마다 연꽃이 피는 계절이면 수면이 온통 녹색으로 뒤덮이고, 햇빛을 받으면 꽃들이 붉은 빛을 토해낸다. 우뚝 솟은 연꽃의 의연한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 기분을 한껏 유쾌하게 한다. 이곳은 여름날 연꽃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어서 부용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잎에 떨어지는 낙수물소리 졸정원은 동부와 서부구역 그리고 중부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부구역의 중심 건물이 원향당(遠香堂)이다. 졸정원 조경미를 개략적이나마 한 눈에 감상하기 위한 장소로는 중원의 원향당에 오르는 것이 좋다.
동부와 중부를 연결시켜주는 복도를 따라 의홍정(倚虹亭)에 이르면, 졸정원 중부에 들어서게 된다. 중부는 졸정원의 심장부이다. 연못 면적이 중부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니, 연못이 중심이 되어 주위 풍경이 펼쳐져 있는 셈이다. 졸정원 중부의 주된 건축물인 원향당 북쪽은 대부분 연못으로 조성돼 있는데 매우 넓고 물이 맑다. 연못 가운데 두 개의 섬이 있어서 연못의 물을 남북으로 나눈다. 게다가 양옆의 들쭉날쭉한 건축물과 검푸른 산과 출렁이는 물결은 보는 이로 하여금 드넓은 자연의 정서를 느끼게 한다. 졸정원 중부는 연못이 주를 이룬다.
광활한 연못가에는 무성한 나무들과 돌을 이용한 자연스러운 경치를 만들어 명대의 정원 조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름철 연못에 연꽃이 만발하면 맑은 향기가 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퍼져 나간다. 송의 주돈이(周敦頤)가 <애련설(愛蓮設)>에서 “연꽃은 진흙에서 나왔으나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향은 멀리 떨어질수록 더욱 맑으며, …… 진실로 꽃 중의 군자다(予獨愛蓮之出于淤泥而不染…… 香遠益淸…… 誠花之君子也)”라고 하였다. 그래서 연꽃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사대부의 상징이 되었다. 졸정원 안에는 연꽃이 두루 심어져 있을 뿐 아니라 건축물 또한 연꽃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는 뜻을 취해 원향당이라 한 것 같다.
서울의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또한 애련설에서 따온 이름이다. 전에는 경복궁 연못에도 연꽃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물의 오염 때문일까. 자연의 소리 듣기를 좋아했던 옛 선비들은 글을 읽는 사랑채 앞에 파초를 심어 여름철 넓은 파초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즐겼다. 또 낙수물이 떨어지는 추녀 아래 양하를 심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강진의 다산 초당에는 지금도 양하가 무성하다. 그 당시 다산 선생께서 양하 잎에 떨어지는 가을 빗소리를 들으며 향기로운 양하 나물 한 접시를 앞에 두고 농주 잔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산사에서 수도하는 스님들도 파초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깊은 운치로 생각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낙수물 소리가 깊은 산사에서 홀로 수도하는 조사(祖師)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타는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했다. 연잎이든 파초잎이든 떨어지는 빗소리가 자연의 소리이기에 정숙의 미를 추구하는 선불교에서 높은 격조로 여겼다.
이슬비 내리는 날 홀로 연지(蓮池)로 가 넓은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어보라. 화려하고 오묘한 연꽃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귀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연은 꽃이 갖고 있는 시각적 미뿐만 아니라 잎에서 느낄 수 있는 청각적 아름다움 또한 값진 관상식물이다. 명대에는 본초학(本草學)의 발달에 힘입어 식물 분류학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또한 강남의 일부 호족들은 정원을 지나치게 호사스럽게 꾸몄는데 연못을 파고 가장자리는 태호(太湖)에서 나오는 질 좋은 태호석(太湖石)을 쌓아 마감했다.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전설속의 수미산(須彌山)을 조성하고 갖가지 기화요초(琪花瑤草)를 심었다. 16세기에 펴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연꽃 재배법과 함께 연씨의 단단한 껍질을 칼로 깎아서 심으면 쉽게 발아시킬 수 있다는 사실까지 기술하였다.
청 가경(嘉慶) 년간에 펴낸 《강하보(강荷譜)》에는 33종의 연꽃 품종을 기술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60년대 이후 연꽃의 개량에 힘을 기울인 결과 많은 신품종을 길러냈다. 항주(杭州), 무한(武漢), 북경식물원에서는 현재 300여 종의 연꽃 신품종을 작출(作出)하여 세계 원예시장에 내놓았다. 불교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자원식물 불교를 상징하는 꽃, 하면 누구나 연꽃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연못에 핀 연꽃의 청초한 모습을 보면 세상에 이처럼 깨끗한 것도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정말 연꽃만큼 순수하고 티 없이 맑은 빛깔의 꽃도 흔치 않을 것이다. 진흙탕에 핀 연꽃이지만 주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아서 예로부터 ‘성자(聖者)의 꽃’이라 불리어 왔다. 연꽃은 웅덩이에서 자란다. 물이 있으면 우선 시원하다.
인도라는 열대성 기후대에 속한 땅에 사는 사람들은 물이 있는 인더스강을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 불교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터전, 즉 열반에 드는 것을\'물이 불을 끄는 일\' 에 비교한다. 뜨거운 불덩이 같은 땅에서 더위와 고통에 시달리다가 시원한 연못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최고의 안락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물속에 고귀한 연꽃으로 다시 피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바램이겠는가? 그래서 연꽃을 부활의 상징으로 보았고 재생의 기운을 타고난 꽃으로 보았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의하면 “극락세계의 보련화(寶蓮華)에는 백천억 개의 잎이 있고, 그 잎에서는 수많은 광명이 비치며, 하나하나의 빛에서 부처가 나타난다.” 고 적고 있다.
또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는 “목숨이 다한 뒤에 극락세계로 가거나 칠보로 장식된 연화세계에 다시 태어난다.” 고 했다. 불교 경전에서는 연꽃이 피는 세계를 낙원으로 본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는 향수가 가득한 바다에 거대한 연꽃이 떠 있고, 그 연꽃 속에 비로자나여래가 사는 화장장엄세계해(華藏莊嚴世界海)가 있다고 한다. 불교와 함께 열대성 연꽃이 이 땅에 전해져 전국의 중요 연못에서 매년 붉은 꽃을 피워왔다. 경북 상주의 공갈못, 수원의 방죽연, 전주 덕진지, 해주의 부용지는 연꽃으로 유명하다. 산스크리트어로 푼다리카(Pundarika)라 하고 한자로는 분다리화(芬陀利華)로 적는다. 경전에서는 언제나 홍련, 황련, 청련, 다음에 백련을 열거한다. 좋고 귀하며 지위가 높은 것일수록 맨 나중에 열거하는 것이 인도인의 관습이다. 그래서 백련도 가장 마지막의 자리에 놓는다.
고대의 불교 성전에 의하면 백련화(Pundarika)가 곧 부처라고 했다. 화려한 백련이 진흙탕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이 성자시여 당신은 선과 악의 어느 쪽에도 물들지 않습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사비아라는 수행자가 부처님을 찾아가 의문을 던져 처음으로 명쾌한 해답을 얻었다. 그는 수많은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궁금증을 말했지만 누구 한사람 시원한 해답을 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찾았고 드디어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 수가 있었다. 사비아는 기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참사랑입니다. 깨달은 분이며, 번뇌와 추악한 것을 없애는 분입니다. 당신은 빛이시며 자비로운 분이며, 지혜로운 분입니다.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사비아는 기쁜 나머지 스승을 향해 합장하고 양쪽 발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귀의하였다.
불경 속에서는 연꽃과 수련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 당시에는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과 수련을 함께 성화(聖花)로 여긴 듯하다. 문학작품 속에 그려진 연꽃의 미학 북송 때 학자 주돈이(周敦頤)는 그의 〈애련설(愛蓮設)〉에서 연꽃을 예찬했다. 나는 연꽃을 누구보다 좋아한다. 연은 진흙에서 돋아났지만 더러운 물이 묻지 않고, 맑은 물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다. 가운데가 비었고 밖은 곧으며, 덩굴도 아니고 가지도 없다. 더구나 멀어질수록 향기는 오히려 맑고 꿋꿋하게 서 있다.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다가가 만질 수는 없다. (自獨愛蓮之出어泥而不染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완焉)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정이 든 연인에게 석별의 정을 나누며 붉은 연꽃 한 송이를 선물했다. 그 낭자는 돌아온다던 님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마침 조선으로 귀국하는 이익재(李益齋)를 만나 연시를 적어 보낸다. 떠나실 때 주신 연꽃 처음에는 붉고 붉더니 오래지 않아 꽃 시들고 초라한 모습 사람 같더이다. 贈送蓮花片 初來灼灼紅 辭枝今幾月 憔悴與人同 선명한 연꽃이 언제까지나 붉게 피어있을 것 같더니 이제 시들어 초라한 모습으로 남았다. 사람의 마음도 연꽃처럼 변하고 말았는가. 그리운 님을 만날 수 없음을 한탄하며 한편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상주에는 연밥 따는 노래(採蓮謠)가 전해내려 온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 줄게 이내 품에 잠들어 주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 가오. 상주의 대표적인 이 노래는 공갈못을 배경으로 연밥 따는 아가씨와 연정을 품은 남정내의 대담식으로 구성돼 있다. 낭만과 시정이 깃든 상주 공갈못은 삼한시대에 축조된 저수지이다.
관계농업용 시설물이며 당시의 뛰어난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상산지(商山誌)》에 따르면 제방의 길이가 860보이고, 연못의 둘레 16,647척이나 된다고 했다. 수심이 다섯 길이나 되는 연못 가장자리에 연꽃이 가득 피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매년 여름 연밥이 익을 때쯤에는 부녀자가 연밥을 채취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가을에 잎이 마르면 연근을 캐서 각종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금당리의 금당지(金堂池)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백련 서식지이다. 130여 년 전부터 백련이 피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그 고고한 모습을 지켜나가고 있다. 또 무안에도 10만 평에 이르는 넓은 백련서식지가 있다. 귀중한 자원이면서도 그 동안 언론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백련의 가치에 대해 일반인이 깊이 인식하지 못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연은 먼 옛날부터 우리의 먹을거리가 되었고
때로는 불전을 장식하는 꽃으로 아낌을 받았다. 한국 전통 꽃꽂이 문화도 연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불전의 공양화로 연꽃만큼 의미 있는 꽃이 없을 것이다. 중국의 시인 주자청(朱自淸)은 그의 글 〈하당월색(荷塘月色)〉에서 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썼다. 꼬불꼬불한 연못 위를 가득 덮은 것은 넓적한 잎사귀. 수면을 뚫고 고고하게 세운 잎사귀는 무녀(舞女)의 치마. 층층이 포개어진 잎사귀마다 드문드문 빠끔히 얼굴을 내민 하얀 꽃송이가 더러는 교태롭게 피어 있고, 더러는 아직도 부끄러운 듯 봉오리에 입막음을 하고 있다. 어쩌면 알알이 뒹구는 구슬일까, 아니면 파란 하늘의 별들일까?
아니면 욕실(浴室)에서 지금 막 나온 미인일까? 산들바람이 스치자 몇 오라기 맑은 향기는 마치 먼 나락(奈落)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은 것. 이 때 잎사귀와 꽃 사이엔 조그마한 충동이 일고, 그 소동은 번개처럼 금방 연못 저쪽으로 물결쳐 간다. 서로의 어깨와 어깨를 다정하게 마찰시키던 나머지라 잎사귀 사이엔 금방 파란 물결이 길처럼 환하게 뚫린다. 그리고 잎사귀 아래로는 맥맥(脈脈)히 흐르는 유수(流水). 다만 잎사귀에 가려 아무런 빛깔을 볼 수 없고 잎사귀만이 풍치(風致)를 보일 뿐. 달빛은 흐르는 물처럼 고요히 연꽃과 연잎에 쏟아지고 있다. 얇디얇은 파란 안개가 연못에서 으스스 일어난다. 잎사귀와 꽃은 어쩌면 마치 우유에다 멱감은 듯 보얗게 아롱져 있고, 어쩌면 가벼운 면사(綿絲)에 가린 꿈처럼 몽롱하다. 중국 강남 지방에서는 지금도 연꽃을 딴다.
연꽃을 따는 풍습은 육조(六朝)시대부터 내려온 것으로 여러 시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양의 원제가 지은 〈채련부(采蓮賦)〉에도 당시의 풍습을 읽을 수 있다. 여기 선남선녀들이 두둥실 뜬 배에 몸을 싣고 천천히 선수를 틀며 술잔을 기울이네. 살며시 젖는 노에 물풀이 걸리고, 뱃전이 몸을 틀면 마름이 달아나네. 가느다란 허리에 감긴 비단 자락. 돌아설 듯 망설일 듯 종종걸음, 봄의 여운을 간직한 지금은 여름, 꽃보다 잎이 향기로운 계절 치마가 젖을까 조심스레 미소짓고, 배가 뒤집힐까 옷고름 여미네.
於是妖童媛女 蕩舟心許 首徐廻 兼傳羽杯 櫂將移而藻괘 船欲動而萍開 爾其織腰束素 遷延顧步 夏時春餘 葉嫩花初 恐沾裳而淺笑 畏傾船而劍 〈서주곡(西州曲)〉에는 남당에 가을이 깊어 연밥을 따려 해도, 연꽃은 높고 높아 키를 이루었네. 고개를 숙여 연밥을 만지면, 푸른 연밥은 맑은 물이라. 采蓮南塘秋 蓮花過人頭 低頭弄蓮子 蓮子淸如水 남향집 마당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 연꽃이 가득 피어 있다. 때는 초가을이라 연밥이 익어 가고 있어 발길이 더욱 잦아졌다. 때늦게 핀 연꽃은 키를 넘어 우러러 볼 정도다. 발아래 연밥이 있어 손을 뻗었더니 웬걸 물속에 어린 연밥일 줄이야. 하도 물이 맑아 물에 어린 허상을 실제 연밥으로 착각하고 손으로 따려고 했으니 얼마나 멎진 표현이냐. 이집트의 수련에서 탄생한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 연꽃에서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이라는 상상 속의 길상초(吉祥草)가 탄생했다. 물론 인동당초문의 인동이 어떤 식물을 뜻하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고증된 바는 없다.
우리나라 산야에 자생하는 인동이 바로 인동당초문 속의 그 덩굴식물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것은 못된다. 그렇다면 당초문(唐草紋)의 당초란 어떤 식물일까. 대체로 학자들은 당 나라 풀이라는 이 당초를 난초로 보고 있다. 우리가 가꾸는 사군자 속의 보춘화나 혜(蕙) 또는 난(蘭)이 바로 당초라는 것이다. 난초를 도안화하여 연속무늬로 만든 것이 바로 인동당초문인 셈이다. 당초문은 원래 당 나라 때 고안된 문양이 아니다.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고대 이집트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이집트의 수련꽃 무늬인 로터스(lotus)를 도안화한 장식문양이 그리스로 건너가 기원 전 5세기경에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 때 페르시아 지방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에서는 아쇼카 왕이 건립한 부다카야의 난순(欄楯)에 처음 연꽃을 도안화 한 당초문이 등장한다. 이집트의 연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연꽃이 아니다. 비슷한 수련(睡蓮)을 지칭하는 것 같다. 당초문은 그 후 문양의 형태에 따라 그리스의 안테미온(Anthemion) 계와 아라비아 지역에서 발전한 아라베스크(Arabesque) 계로 나눌 수 있다. 안테미온은 잎이 다소 넓고 장중한 감이 있는데 비해 아라베스크 양식은 섬세하고 조밀한 감을 준다. 또 같은 안테미온 계의 문양에서도 원형의 꽃무늬 형식을 주로 하는 로터스(lotus), 부채꼴 꽃무늬 형식의 팔마트(palmette), 그리고 덩굴무늬 형식의 아칸더스(Acanthus)로 나눌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인동문을 허니서클(honeysuckle)이라 하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종려나무잎(palm) 모양이라 하여 팔마트(palmette 棕櫚葉紋)라한다.
서방의 덩굴형태로 연결되는 아칸더스 문양이 육조시대에 실크로드를 따라 동양으로 전해진 것이 인동당초문인 셈이다. 처음에는 허니서클을 번역한 인동에 중국 풀이라는 뜻의 당초문이 결합돼 인동당초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다양한 인동당초문이 보인다. 그중 집안 제4호, 제5호분이나 사신총의 인동당초문을 걸작으로 꼽고 있다.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관식은 불꽃 문양과 보상화가 결합된 당초문이라 할 수 있다. 또 통일신라로 넘어오면서 서역에서 전해진 포도, 석류, 연꽃과 결합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당초문이 나타난다.
인동덩굴에 연꽃이 곁들여지면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 포도송이가 곁들여지면 포도당초문(葡萄唐草紋), 석류가 들어있으면 석류당초문(石榴唐草紋)이 된다. 그 외에도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 모란당초문(牧丹唐草紋), 국화당초문(菊花唐草紋) 등 여러 가지이다. 부귀다남(富貴多男)의 염원을 담은 연꽃 연꽃은 우리 겨레의 심성에 특별한 의미로 자리 잡았다. 불교를 국교로까지 승화한 고려시대에는 생활 전반에 걸쳐 연꽃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을 것이다. 연꽃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알았고 연꽃이 피는 극락정토를 믿게 되었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 나타난 연화나 백제 무녕왕릉도 연화문 전으로 쌓았다. 사찰의 지붕을 이는 기와에도 연화문이 들어있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은 연꽃으로 다시 살날 수 있었다. 연꽃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연꽃이라는 한 가지 식물이 회화, 건축, 공예를 비롯한 의생활, 식생활에까지 얼마나 폭넓게 쓰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건축물을 장엄하게 장식하는 단청(丹靑)에도 연꽃무늬를 뺄 수 없다. 연꽃(蓮花), 연잎(荷葉), 연봉, 연밥(蓮子)이 모두 단청의 소재이다. 꽃의 모양도 다양하다. 위에서 바라본 것, 옆에서 본 것, 사면에서 본 입체형도 있다. 꽃이 위로 피면 앙련(仰蓮), 밑으로 쳐지면 수련(垂蓮), 오그리거나 펼치면 파련(波蓮), 평면으로 오므리면 웅련이 된다.
조선시대 민화(民花) 속에는 삼다식물(三多植物)을 주제로 한작품이 많다. 장수(長壽), 다복(多福), 다남(多男)을 뜻하는 삼다사상(三多思想)이 보편화되면서 복숭아(天桃), 석류, 불수감(佛手柑)이 십장생도(十長生圖)에 같이 그려지는 수가 있다. 때로는 복숭아, 석류, 연밥이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동자가 연꽃을 갖고 노는 그림은 건강과 행복을, 연꽃 아래 노는 원앙 한 쌍은 부부의 금실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아침이면 활짝 벌어지고 밤이면 오므리는 연꽃의 습성과 일생 동안 짝을 바꾸지 않는 원앙처럼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비는 마음에서다. 연꽃 아래 헤엄치는 잉어를 그리면 출세를 뜻한다.
그 외에도 석류와 연밥을 함께 그리거나 석류와 포도를 그려 다산과 다복을 빌었다. 석류와 불로초가 함께 그려질 때는 백자장생(白子長生)을 뜻하며, 황조(黃鳥)와 함께 그려지면 금의백자(錦衣白子) 즉 출세한 자손을 뜻한다. 연꽃이 활짝 핀 연못에서 물놀이를 하는 하동도(河童圖)나 복숭아밭에서 노는 동자 100명을 그린 백자도(白子圖), 포도덩굴에 매달려 노는 동자 그림은 모두 삼다사상(三多思想)을 반영한 작품이다. 복숭아와 불수에 수복강녕을 담았다면 연꽃과 포도에는 부귀다남의 기원이 서려 있다. 연밥의 씨가 많은 것을 취하여 자손의 번창을 염원했던 것이다. 한복의 옷고름에도 연꽃이 들어있고, 부녀자들의 안방을 장식하는 민화병풍에도 연밥을 그려 넣어 자손의 번창을 빌었다.
선비 문화 속에도 연꽃은 깊숙이 뿌리 내렸다. 옛 선비들은 연꽃을 심은 부용지(芙蓉池)에 부용정(芙蓉亭)을 지어 연꽃을 바라보면서 시회(詩會)를 열었다. 연꽃의 고매한 성정을 사랑하여 연잎에 맺힌 이슬을 모아 하엽차(荷葉茶)를 끓였다. 심신이 상쾌해 지고 혈색이 소년처럼 밝게 된다고 했다. 한양의 돈의문(敦義門) 밖 연못에는 연꽃이 많았다고 한다. 연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는 새벽에 쪽배를 띄우고 연꽃 벌어지는 소리를 듣기 위해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함께 연꽃 벌어지는 소리를 듣는 모임을 청련계(聽蓮契)라 하였다니 얼마나 운치있는 모임인가. 연꽃에 맺힌 아침이슬을 모아 졸여서 엿을 고았는데 이것을 하로당(荷露糖)이라 하여 미용식으로 썼다.
속살까지 예뻐진다고 하지만 엿을 고을 정도로 많은 이슬을 모을 수 있을지. 경북 안동의 하회(河回) 마을에는 강을 바라보면 건너편에 둥근 바위산이 솟아있다. 이 바위산을 부용대(芙蓉臺)라 하는데 바로 연꽃 봉오리 모양을 한 동산이기 때문이다. 둥근 봉우리가 잔잔한 강물에 어리면 또 하나의 연꽃이 물속에 잠겨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옛 선비들의 뛰어난 심미안으로 본 자연미라 할 수 있다. 정신을 맑게 하는 향기로운 연꽃차 연차(蓮茶)를 간단히 만드는 방법을 알아보자. 먼저 저녁 해거름 연꽃이 오므라들기 전 미리 준비해 둔 차 주머니를 연꽃 속에 넣는다. 이튿날 아침 연꽃이 벌어지기 전에 저녁에 넣어 둔 차 주머니를 꺼내 차를 끓인다. 연차는 뜨거울 때 마시기보다 차게 해서 마시면 향이 더욱 좋다.
요즈음은 일부 차인들이 오전 10시경 갓 피어난 연꽃을 잘라 실내의 화병에 꽂아 놓고 차주머니를 넣기도 하지만 잘못된 방법이다. 차주머니는 한지나 베, 비단이 좋으며 되도록 염색과 풀을 먹이지 않은 것이 좋다. 연향(蓮香)이 가득 밴 차는 유리병 같은 밀폐된 용기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한다. 16세기 중국의 심복(沈復)이 쓴 《부생육기(浮生六記)》에는 운(芸)이라는 여인이 연화차 끓이는 장면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여름에 연꽃이 처음 필 때에는, 꽃들이 저녁이면 오므라들고 아침이면 피어난다.
운이는 작은 비단 주머니에 엽차를 조금 싸서 저녁에 화심(花芯)에 놓아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이것을 꺼내서 맑은 샘물을 끓여 차를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 차의 향내는 유난히 좋았다.” 이처럼 옛 선비들은 연꽃을 친한 벗 이상으로 사랑했다. 연꽃이 피면 벗을 불러 연향(蓮香)에 취했고 연꽃 속에 넣었던 차를 마셔 몸과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연꽃차의 전통은 사라지고 말았다. 연꽃을 칼로 잘라 강제로 꽃을 벌리고 그 속에 차를 넣어 실로 꽁꽁 동여맨 뒤 항아리 속에 가두어 두는 천박한 행위를 백련차의 전통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연은 부처님의 얼굴이다.
불법을 수호해야할 수행자가 스스로 연꽃을 잘라 부처님을 해하는 행위를 어떻게 전통적 차법(茶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연잎은 상처가 났을 때 지혈제로 쓰고, 독버섯을 먹고 중독증을 일으킬 때 잎을 짓찧어 그 즙을 마시게 했다. 또 야뇨증에 잎을 달여 마시면 특효라 했다. 지네에게 물렸을 때는 날콩과 함께 생밤, 연잎을 함께 찧어 해독제로 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연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이다. 서양인 좋아하는 장미나 백합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원예식물이다. 동양인에게 있어서 연꽃의 의미는 종교로까지 승화된다.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 외에도 우리 심성에 잘 맞는 식물이다. 우선 우리 겨레가 꿈꾸는 낙원이 곧 연꽃이 피는 극락이라는 점이다.
연꽃 속에서 태어난 심청의 효성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죽어서도 연꽃이 만발한 꽃상여를 타고 영생의 낙원으로 떠난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성스러운 사원을 만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연꽃으로 장식하고 그 중앙에 연화좌대를 마련하여 부처님을 모신다. 또 연꽃은 부귀다남의 상징이며 자손의 번창과 건강장수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부처를 상징하는 흰 연꽃이 고통과 질병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연꽃은 부위별로 각종 질병을 막아주는 영약으로 알려져 있다. 또 어린잎은 나물로, 연근은 밑반찬으로, 꽃은 차나 술을 빚어 마신다. 연근은 꿀에 졸여 연근정과를 만들고,
된장 고추장에 박아두면 연근장아찌가 된다. 그냥 간장에 졸이면 맛깔스런 밑반찬이 되고 불고기요리에 곁들여서 갈비찜 등을 할 수 있다. 연의 씨(蓮子) 대나무쌀(竹米), 송홧가루(松花)는 예로부터 신선식이라 하여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 비법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의 전통 민속주에 연엽주(蓮葉酒)가 있다. 찹쌀과 잘 띄운 누룩가루를 버무려 마른 연잎 사이에 켜켜이 넣고 익힌 술이다. 연잎의 향이 베어 기막힌 맛을 낸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자원식물인 셈이다. 최근 날로 수질오염이 가속화하고 있는 이 때 연꽃이야말로 도시의 조경용으로 식재 한다면 수질정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도시 중앙을 흐르는 작은 개천이나 호수 공원의 녹화용으로 연꽃을 심는다면 관상은 물론 수질과 공기를 동시에 정화시켜 준다. 환경을 보다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연꽃을 많이 심어야 한다. 연꽃은 오염된 수질에서도 잘 견디는 강인한 수초이다. 또 물 없이 화분에 심어 가꾸어도 잘 자란다. 도시 가로변의 녹지 공간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관상식물이다. 연꽃이 활짝 핀 우리의 도시 환경을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식물인가.
연꽃의 약리학적 효과 연꽃 씨를 연실(蓮實), 연자(蓮子), 석련자(石蓮子)라 하는데 말려서 약재로 쓴다. 껍질을 벗긴 연씨를 연육(蓮肉)이라 하며 맛이달기 때문에 감석련(甘石蓮)이라고도 부른다. 연은 부위에 따라 이름이 많다. 연꽃의 암술머리를 연심(蓮心)이라 한다. 꽃에도 이름이 제각각이다. 꽃받침 즉, 송이 전체를 연방(蓮房), 잎은 하엽(荷葉), 잎 가장자리를 하엽대(荷葉帶), 잎자루를 하경(荷硬)이라 한다. 꽃을 연화(蓮花)라 하고 꽃술을 연수(蓮隨)라 한다. 근경은 연근(蓮根), 마디 부분을 우절(藕節)이라 하며, 근경을 갈아서 뽑아낸 전분을 우분(藕粉)이라 한다.
씨눈(胚)과 꽃대에는 알칼로이드계의 Nelum bine이 들어 있고, 근경에는 아미노산인 Asparagine, Arginine, Tyroisme 등을 함유하고 있다. 알칼로이드 함량은 잎에 0.4%, 잎 중앙 꼭지 부분에 0.06%가 함유돼 있다. 근경을 진통 진정제로 쓴다. 한방에서는 껍질을 벗긴 열매를 강장, 강정제로 하고 설사, 청소년의 유정에, 가슴이 두근거릴 때, 불면증과 해열제로 쓰인다. 잎은 열, 이뇨, 지혈, 지사 효과가 있고, 피로가 겹쳤을 때, 몸에 물이 찰 때 달여 마신다. 민간요법으로는 야맹증에 잎 2장을 감초와 함께 넣고 달여 마신다. 연자는 만성장염, 위염, 방광염, 요도염 등 염증성 질병에 달여 마신다.
연의 수술(蓮隨)은 강장, 유정, 치루, 토혈, 신경쇠약에 쓰고, 신장을 튼튼하게 하며 머리카락을 검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민간요법으로는 야맹증에 잎 2장을 감초와 함께 넣고 달여 마신다. 연자는 만성장염, 위염, 방광염, 요도염 등 염증성 질병에 달여 마신다. 연의 수술(蓮隨)은 강장, 유정, 치루, 토혈, 신경쇠약에 쓰고, 신장을 튼튼하게 하며 머리카락을 검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연근은 피를 엉키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혈전 용해제로 쓴다. 송(宋)의 대관이 연근을 깎다가 양의 피를 받아 놓은 그릇에 한 조각을 떨어뜨렸다. 이상하게도 그 피가 오래도록 엉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부터 연근이 혈전 용해제로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연밥은 덜 익었을 때 껍질을 까고 속에 든 열매를 날로 먹는다. 완전히 익으면 겉껍질이 딱딱한데 깨뜨려서 물에 불려 요리에 쓰거나 약재로 한다. 이처럼 연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든 아니던 생활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우리의 문화가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 연꽃의 의미는 퇴색될 수 없다. 연꽃이 핀 문화적 토양에서 태어나 연꽃문화 속에서 살다 다시 연꽃이 만발한 천상의 연화세계(蓮華世界)에서 영면(永眠)하려고 했던 우리 조상들. 그 전통을 이어받아 더 고차원적인 연꽃문화를 꽃피울 필요가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연꽃을 정신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경제적 물질적인 가치까지 연구하야 생활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연꽃을 심고 가꾸며 연꽃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겨레를 아끼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필 자 소 개 吳 秉 勳 수필가 한국수생식물연구소 소장 (사)생명의숲 가꾸기 국민운동 지도위원 (사)광릉숲보존협의회 지도위원 (사)한국식물원수목원협회 상임이사 (사)한국자연보존협회 학술위원 환경운동연합 생태지도위원 소속학회 한국식물연구회 회장 한국수생식물연구회 회장 한국동백학회 이사 한국난대림연구회 이사 한국양치식물연구회 이사 현 도서출판 생명의나무 대표 주간 계간 《한국의식물》, 《수생식물》 발행인 계간 《난대림》 편집인 지은책 《꽃이 있는 삶》 상하 공저 《원예식물대백과》 전 10권 《무엇이든지 물어봐》《장강에 배 띄우고》《마루가 있는 집》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