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로 다시 태어나
증 언 자 : 나상옥(남)
생년월일 : 1959. 4. 3(당시 나이 21세)
직 업 : 대학생(현재 화가)
조사일시 : 1989. 6
개요
21일 오전 백운동 로터리에서 무질서하게 돌아 다니는 차량을 통제하고 그 차량을 모아 20여 대로 도청을 향해 진격하던 중 앞차에 탄 청년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곳을 빠져나온 나상옥씨는 백 운동파출소에서 탈취한 무기를 지급하는 일을 했다. 나는 전라북도 김제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식당을 경영해서 우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생활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광주로 온 후 쭉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갖고 수채화를 열심히 그려 강연균씨처럼 잘 그려야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팔이 뒤로 묶인 채 원산폭격을
18일 오후 광주경찰서 부근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후배와 같이 밖으로 나왔다. 금남로 쪽에서는 시위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그곳을 피해 양영학원쪽으로 갔다. 가는 도중 서너 군데에서 군인들과 마주쳤으나 "좀 지나갑시다"라고 말하면 그냥 길을 터됐다. 우리는 아무 탈없이 양영학원 근처까지 갔다. 그때 공수들이 탄 트럭이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쪽으로 갔다. 공수들이 차에서 우리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면서 "야, 새끼들아!죽여"라고 소리를 질렀다. 죄지은 일도 없는데 그들의 위세에 눌려 잔뜩 겁을 먹고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광주천변을 따라 광주공원 쪽으로 갔다. 공원 앞 다리에 공수 1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공원앞 광장에는 7, 8명의 청년들이 손이 뒤로 묶인 채 원산폭격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도망칠 수 없게 해놓고 공수 몇명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일부 공수대원은 공원 앞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지나려고 하자 아주머니들이 사색이 되어 만류했다.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다가 족치니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호기심 때문에 가지 못하고 어물거리고 있는데 공수 1명이 "죽여버리겠다. 빨리 꺼져"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도 내가 가지 않고 쳐다보고 서 있자 나한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이구, 계속 있다가는 큰일나겠다'싶어 월산동파출소 근처에 있는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빵을 줘
20일 MBC방송국이 불타고 있을 무렵 나는 조흥은행 앞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계엄군 40여명이 시민들에 의해 완전히 고립되었다. 순간 시민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장교가 앞으로 나서더니 사병들을 자리에 앉혔다."돌을 던지려 거든 던지십시오. 우리는 이대로 앉아서 맞을 랍니다. 우리는 어제 그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그 군인들이 아닙니다." 이런 요지의 말을 그 장교가 아주 호소력 있게 하자 시민들은 돌을 거두고 장교 의 말을 점차 경청하는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나중에는 시민들 사이에서 모금을 해 즉석에서 걷힌 돈으로 빵과 우유를 사서 군인들에게 건네주기에 이으렀다. 그때 군인들이 무장을 했는지, 공수인지 일반계엄군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절제한 차량의 통제
21일 오전에 집을 나와서 시민들이 운행하고 있던 차에 탑승했다. 그 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 의외로 많은 차가 중구난방으로 돌아다녔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왔다갔다하는 차들을 통제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조직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지만 누군가가 앞장 서서 차량을 통제하고 지휘를 맡아야 한다. 이대로 방치해두면 주요소에 있는 기름이 당장 동나게 될 것이다. ' 이러한 생각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백운동 로터리에서 조직적인 통제나 이유 없이 지나다니는 차량을 모두 세웠다. 후배와 함께 한참 동안 그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다 보니 또 새로운 계획이 떠올랐다. '여기에 있는 차들을 이끌고 도청에 있는 계엄군을 향해 진격하면 좋겠다'는 기발한 생각이었다. 장값차처럼 견고한 것을 선두에 세우고 다음엔 트럭 등 튼튼한 것부터 세웠다. 다 배치하고 나니 차가 20여대쯤 되었다. 우리가 도청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젊은 남자가 나에게 왔다."지금 상무대 근처에서 군인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빨리 바리케이드를 설치해야 하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저쪽에 원목을 실은 트럭이 있는데 그것을 가져가면 돼겠는데요." "그래요 한번 가볼시다."젊은 남자가 이끄는 곳으로 가보니 8톤 트럭 2대에 원목이 가득 실려 있었다. 굉장히 두꺼운 원목이었다. 주위 사람에게 수소문한 결과 트럭기사가 근처의 민가에서 묵고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그 기사는 여수에서 원목을 싣고 올라왔는데 사태가 심각해지자 발이 묶여 있다고 했다.
현재의 급박한 상황을 기사에게 알린 후 원목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던 기사가반승낙을 하자 곧바로 화정동으로 실어보냈다 다른 트럭의 기사는 만나지 못해서 양해도 구하지 못하고 화정동으로 보냈다. 나는 원목을 실은 트럭에 후배를 딸려보냈다. 기름도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백운주유소에서 구한 휘발유를 후배에게 줬다. 차량을 앞세우고 도청으로 전격 원목차를 보내고 다시 백운동 로터리로 왔다. 백운동주유소에서 가져온 기름으로 하염병을 만들어 차에 실었다. 우리는 도청 앞에서 후퇴할 때 어디로 빠져나갈 것인지에 대한 작전을 짜고 20여 대의 차에 나누어 탔다. 나는 세 번째 트럭에 타고 갔다. 그 차에 조금 전 우리가 만들어 실어놓은 화염병이 있었다. 점심 무렵 백운동을 출발하여 화니 백화점을 지나 금남로로 진입했다. 금남로에 가득 찬 시민들은 우리가 도청을 향해 차를 몰자 '와아'하는 환호성을 질렀다. 시민들도 차량을 따라 도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탄 차가 관광호텔 부근에 이르렀을 때 총소리가 들렸다. 장갑차에 탔던 청년(트레이닝 바지를 입었음)이 장갑차 밖으로 몸을 내놓고 가다가 목 오른쪽 부위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봤다. 백운동을 출발하기 전에 계엄군은 총을 갖고 있으니 절대 몸을 밖으로 노출시키면 안 된다고 했는데 시민들의 환호하는 모습에 흥분해서 몸을 내밀었던 모양이다. 금남로와 도청 앞에서도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이 목에 맞은 것은 정조준에 의한 것이었다. 오른쪽 목에 맞은 점을 미루어 아마 관광호텔에서 쏘았을 가능성이 놓다. 총소리가 나자 차들이 정신없이 후진했다. 후진할 때 보니 금남로에 늘어선 차가 굉장히 많았다.
백운동팍출소 무기탈취
어떻게 해서 도청을 빠져나와 다시 백운동으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백운동에서 다시 모인 우리는 누군가의 제의로 무기를 탈취하러 백운동파출소로 갔다. 레커차로 파출소 담을 부수고 들어가자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4,5명이 들어가서 줄줄이 세워져 있는 20∼30 정의 카빈총을 가지고 나왔다. 실탄도 넉넉하게 있었다. 총을 지급할 때 증명을 제시하는 사람에 한해서 줬다. 송암동 연탄공장 부근 도로에 레커차가 가로막고 있어 왕래가 불편하다는 연락을 받고 출동했다. 사고현장을 보니 참혹했다. 타이어에 깔려 머리가 깨진 채 죽은 사람,다리가 잘려진 사람 등 3,4명이 죽어 있었다. 레커차를 길에서 밀어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끄떡하지 않자 우리는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기름탱크를 향해 총을 쏘았다.연료통에 불이 붙으면 폭파하리라는 생각으로 총을 쏘았으나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총에 공기가 없었다. 레커차 치우는 것을 포기하고 백운동 로터리로 왔다.
계엄군의 동태파악을 하러 해질 무렵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자체경비를 서기 위해 6,7명이 지프차를 타고 양림동 수피아여고로 갔다. 수피아여고는 지대가 높기 때문에 그곳에서 보면 멀리 개방대 부근의 산까지 잘 보였다. 멀리 산에서 계엄군의 움직이는 것이 보이자 겁이 났다. 우리가 머물 만한 요새를 찾다가 내일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총 7,8자루와 실탄, 수류탄을 수피아여고 기숙사와 석산고 담사이에 묻고 지프차도 그곳에 세워둔 채 각자 흩어졌다. 다음날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만약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곳에 무기가 있을 텐데, 혹시 잘못돼 학생들이 다치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26일 YWCA로 갔다. 학생들이 모여 도청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 나도 따라갔다. 밖이 어둑어둑할 무렵이었다. 도청에는 오늘 밤 계엄군이 도청으로 쳐들어을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도청에 있던 사람들은 계엄군과 접전하다 죽을지도 모른다며 신원 파악을 위해 옷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을 봤다. 그것을 보다 캄캄해지자 집으로 왔다.
오월의 체험을 작품에서 표현
그 이후 나는 학교생활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조각을 전공하면서 여체를 조각하는 따위의 작업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사회고발의 내용이나 오월의 체험을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했으나 쉽지 않았다. 5월의 체험을 새롭게 재인식하게 된 것은 1985년 5월 행사 중의 유가족행렬을 보면서였다. 그 후 상복을 입고 영정을 든 남자 인물상을 조각했다. 1988년에 그동안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5월항쟁을 주제로 전시회를 기획했다. 이것도 계획으로 그치고 말았다. 여럿이 힘을 합쳐야 가능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동안 예술작품은 개인적인 것으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큰 변화가 온 것이다. 오월 체험의 표현과 오월을 형상화한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하게 된다. 당시 정치상황을 풍자한 '음모-5·18전야', '어여쁜 나의 젖가슴', '부대자루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을 표현한 암매장' 등의 작품이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사회 고발적인 공동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