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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西北方의 離垢幢菩薩
(1) 世間을 淸淨하게 하는 德
爾時에 離垢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如來大智光이 普淨諸世間하나니
世間旣淨已에 開示諸佛法이로다
設有人欲見 衆生數等佛이라도
靡不應其心하사대 而實無來處로다
以佛爲境界하야 專念而不息하면
此人得見佛호대 其數與心等이로다
成就白淨法하야 具足諸功德하면
彼於一切智에 專念心不捨로다
導師爲衆生하사 如應演說法하사대
隨於可化處하야 普現最勝身이로다
佛身及世間이 一切皆無我니
悟此成正覺하고 復爲衆生說이로다
그때 이구당(離垢幢)보살이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여래의 큰 지혜광명
모든 세간을 두루 깨끗하게 하나니
세간이 깨끗해지면
부처님이 법을 열어보이네
가령 어떤 사람이
중생 수효와 같은 부처님을 보려면
그들의 마음에 모두 응하지만
실제로는 오는 곳 없어
부처님을 경계로 하고
오로지 생각해 쉬지 않으면
이 사람 부처님 보되
그 수효 마음과 같으리
희고 깨끗한 법 이루어
모든 공덕 갖추고
온갖 지혜에 대하여
전심으로 생각하고 버리지 않나니
도사께서 중생 위하여
근기에 맞춰 법문을 연설하시네
교화할 곳에 따라
가장 훌륭한 몸 나타내며
부처님 몸이나 세간이나
모두 '나'라 할 것 없나니
이것 깨달아 정각 이루고
다시 중생 위해 말하네
*
서북방(西北方)의 이구당보살(離垢幢菩薩): 서북방 이구당보살의 찬탄
*
세간(世間)을 청정(淸淨)하게 하는 덕(德): 여래가 세간을 청정하게 하는 덕
*
이시(爾時)에 : 그 때에
이구당보살(離垢幢菩薩)이
승불신력(承佛神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여래대지광(如來大智光)이 : 여래의 큰 지혜광명이. 불교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여래 역시 지혜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몸도 지혜의 가르침이다. 그 지혜 광명이
보정제세간(普淨諸世間_하나니: 세상을 맑게 한다. 우리들 마음을 하나씩 하나씩 정화시키고 바른 이치에 눈뜨게 한다. 이 광명이 널리널리 퍼져나가면 세상도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다.
세간기정이(世間旣淨已)에 : 세상이 이미 깨끗하고 난 뒤에는
개시제불법(開示諸佛法)이로다 : 그 때 모든 부처님을 열어서 보이는 도다.
우리는 불법에 대해서 ‘불법은 지혜의 가르침이다’‘참다운 이치를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알아야 된다.
가끔 나는 ‘주지에게 불교를 배우면 제대로 불교 못배우고 차장사에게 차를 배우면 제대로 차 못배운다’는 말을 한다. 차를 파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차를 위주로 차를 가르친다. 여기 공부하러 오신 스님들이 전부 주지들인데 주지는 사찰 운영을 중심으로 불교를 가르친다.
최소한 화엄경을 놓고 공부하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솔직하자면 그렇다. 사실 내가 주지라도 그럴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갈등할 때가 많다. 내가 한참 건강할 때 여기저기 절에 법문을 하러 쫓아다니면 주지가 미리 이런 저런 말은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주문을 한다. 주지들은 얼토당토 않게 자기 소리만 딱 해버리는 사람에게 법문을 잘 청하지 않는다. 그 스님을 청했다가 괜히 주지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하면 ‘청해 놓은 법사가 이런 소리를 하는데 우리 주지 스님은 저런 소리를 한다. 어디를 따라야 옳은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나는 법문을 잘 하지 못해도 법문 청이 많이 들어왔는데 내가 상황 파악은 잘해서 방편을 잘 쓴다. 상황파악을 잘 해서 주문대로 해 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로 돌아가서는 방편을 가르치더라도 여기서 공부는 정확하게 해야 한다.
*
설유인욕견(設有人欲見) : 설사 어떤 사람이
중생수등불(衆生數等佛)이라도 : 중생수와 같은 부처님을 보고자 하더라도
미불응기심(靡不應其心)하사대 :그 마음 응하지 아니함이 없음에
이실무래처(而實無來處)로다 : 실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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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위경계(以佛爲境界)하야 :부처로서 경계를 삼아서
전념이불식(專念而不息)하면: 오로지 그 부처님만을 생각해서 쉬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 별표를 해놓았다. 이 대목은 염불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타력신앙은 경계를 대상으로 두고 한다.
염불은 타력신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불위경계다. 부처로서 경계를 삼는다. 관세음보살이든지 지장보살이든지 석가모니든지 아미타불이든지 딱 경계를 삼아서 전념이 불식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 부처님만을 생각해서 쉬지 않으면 나와 그 부처님이 동화가 되어서 하나가 된다.
나는 그전에 신도들에게 기도를 시킬 때도 ‘당신이 다니는 절의 부처님을 기억하느냐’를 먼저 물었다. 대부분 기억을 못한다. ‘그럼 오늘부터 당신 절에 가서 불상을 잘 기억해라. 주불을 세세히 잘 보고 기억하고 외워놓아라.’ 어디에서든지 그 불상을 기억하면 마음에 딱 떠오르게 된다. 그렇게 하고나서 염불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관상(觀想)이다.
그렇게 해야 기도가 훨씬 잘 된다.
머리는 다른 것을 떠올리면서 입만 계속 돌아가면 그야말로 립싱크다. 직접 부르는 노래가 아니고 입술 모양만 맞추는 립싱크라는 것을 알면 노래 들을 재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기도 역시 생각으로 부처님을 그려서 딱 떠올리고 기도를 해야 입으로도 외우고 생각은 부처님에게 고정되는 것이다.
차인득견불(此人得見佛)호대 : 이 사람은 분명히 부처님을 보아서
기수여심등(其數與心等)이로다: 그 부처님의 숫자가 마음과 더불어 동등하다.
예를 들어서 한 시간에 한 마음이라면 한시간에 딱 한 부처님이다. 설혹 열 개의 마음이면 열 개의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구절이라서 내가 공부를 하다가 별표를 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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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백정법(成就白淨法)하야 : 백정법을 성취해서. 백정법이라는 것이 화엄경에는 가끔 나온다. 희고 청정한 법이라는 뜻이다.
과거 조사스님들은 ‘성불후(成佛後)에 설법도생지식(說法度生之識)’이라고 하였다. 백정식(白淨識)이라는 말도 있다. 백정법이나 백정식이나 유사한 뜻인데 ‘성불후에 법을 설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식의 작용이 제구 백정식이다’라고 표현한다.
그것과 유사하게 여기 백정법이라고 하는 것도 가장 깨끗하고 가장 청정한 법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실 그렇게 높은 차원의 어떤 차별을 떠난 경계는 아니다.
차별상에서 볼 때 가장 수승한 법인 백정법을 성취해서
구족제공덕(具足諸功德)하면: 제공덕을 구족하며
피어일체지(彼於一切智)에: 저 일체지혜에
전념심불사(專念心不捨)로다: 오로지 생각해서 마음이 버리지 않는다. 일체지를 그대로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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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위중생(導師爲衆生)하사: 도사가 중생을 위해서
여응연설법(如應演說法)하사대: 거기에 맞춰서 법을 연설하사대
수어가화처(隨於可化處)하야 : 가히 교화할 곳을 따라서
보현최승신(普現最勝身)이로다 : 최승신을 널리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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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급세간(佛身及世間)이: 부처님 몸과 세간이
일체개무아(一切皆無我)니: 일체가 다 무아다. 여기 무아라고 나왔다.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천변만화한다. 참나가 있지만 참나는 고정불변하는 아(我)는 없고 천변만화하는 아(我)가 있다.
오차성정각(悟此成正覺)하고 : 이것을 깨달아 정각을 이루고
부위중생설(復爲衆生說)이로다: 다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한다. 여기서 무아(無我), 아(我)가 없다는 것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무아가 아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진아, 일체유심조, 참마음을 이야기 한다.
그 아(我)는 고정불변하는 내가 아니다. 고정불변하는 나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통째로 없느냐? 진공가운데 묘유하는 것이다. 공적하면서 영지한다.
텅비었으면서도 신령스럽게 아는 작용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없다고 부정할 수가 없다.
원효스님은 신해(神解)라고 해서 신비롭게 아는 능력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아무리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 무아를 가지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이 많다. 대승 불교권에서 출가해서 대승불교를 공부하다가 잠깐 남방 불교 가서 공부해 왔다고 어떻게 저런 이야기를 힘주어 설하는가? 하고 나는 궁금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어째서 그럴까?’ 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연구를 다 해놓았다.
그분들이 한국 불교에서 공부할 때는 10년을 공부해도 아주 편하게 어려움 없이 공부했다. 그런데 남방에 가서 말도 서툴고 음식도 안맞고 여러 가지 어려운 데서 하루하루 지옥과 같은 삶을 살면서 4년 5년 내지 10년간 공부하다 왔으니 그 뼈에 사무친 공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10년간 편안하게 공부한 것은 어디 가버렸는지 없지만 거기서 뼈에 사무치면서 공부한 것은 남아있다. 버리지 못한다.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음식이 안맞으니 일년에 몇 번씩 설사를 하면서 피골이 상접해가면서도 종이 쪽지 하나 받아오려고 그렇게 공부를 했다. 그러니 다시 대승 불교권에 와서도 죽어라고 소승불교를 선전하는 것이다.
계속 무아를 이야기 하는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또 거기에는 역사적인 석가모니라는 배경이 있다.
역사적인 석가모니는 무아를 많이 이야기 했다. 대승불교에 와서는 그것이 유치원생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스님들은 유학을 다녀와서 그 소승불교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핸드폰으로도 이런 사실을 비유할 수가 있다. 지금 2G폰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데 2G폰을 똑똑한 스마트폰과 비교하면 어떤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그 성능이 비교할 수가 없다.
가정용 전화기와 스마트폰을 비교를 해 보면 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집전화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을 비교해보면 스마트폰 안에 온 우주가 다 들어오고 온 우주의 정보가 그 속에 다 있다. 그런데 가정용 유선전화는 딱 전화 거는 기능 뿐이다.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그와 같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5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는 발전해서 아주 스마트한 불교가 되었다. 너무너무 스마트한 불교가 되어버렸고 달라졌는데 그것이야말로 진짜 불교다.
그런데 계속해서 왕년의 불교가 진짜 불교고, 부처님 육성으로 설한 불교라고 자꾸 주장하고 있다면 가정용 전화기만 가지고 제일 좋은 전화기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 스스로 잘 사유를 해서 마음속에 정리를 하고 있어야 된다.
‘사람을 따를 것인가. 진리를 따를 것인가.’
탄허스님 같은 이들, 성철스님 같은 이들이 평소에 늘 말씀하셨다. ‘만약에 불교보다 더 우수한 가르침이 있다면 나는 오늘이라도 당장에 옷 벗고 나갈 자신이 있다.’
불교보다 더 위대한 가르침이 있다면 당장에 옷벗고 그 가르침을 쫓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럴 때 부처님이나 조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보다 진리가 중요하다는 견해다. 그런 소견을 가졌으니까 그런 스님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2) 自淸淨德
一切人師子가 無量自在力으로
示現念等身하시니 其身各不同이로다
世間如是身과 諸佛身亦然에
了知其自性이실새 是則說名佛이로다
如來普知見으로 明了一切法하사
佛法及菩提를 二俱不可得이로다
導師無來去며 亦復無所住라
遠離諸顚倒실새 是名等正覺이로다
모든 사람 가운데 사자이신 분이
한량없이 자재한 힘으로
생각과 평등한 몸 보이니
그 몸이 제각기 같지 않고
세간의 이와 같은 몸과
부처님 몸도 그러하니
그 성품 분명히 알면
그 이름 부처라 하리
여래는 널리 알고 보시어
온갖 법 환히 아시니
부처님 법과 보리를
둘 다 얻을 수 없어
도사는 오고 가는 일 없고
머무는 곳도 없나니
전도(顚倒)를 영원히 여의면
'등정각'이라 이름하네.
*
자청정덕(自淸淨德):여래가 스스로 청정함을 말하다
*
일체인사자(一切人師子)가 : 인사자는 부처님을 말한다. 사자 사(獅)자와 여기 나온 사(師)가 통용된다. 일체 인사자가
무량자재력(無量自在力)으로: 한량없는 자재한 힘으로
시현념등신(示現念等身)하시니: 생각과 같은 몸을 시현하시니
기신각부동(其身各不同)이로다: 그 몸도 각각 부동함이다. 생각은 순간순간 찰라멸 찰라생(刹那滅 刹那生) 한다. 그러면서 늘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 그 몸도 마찬가지다.
*
세간여시신(世間如是身)과 : 세간
제불신역연(諸佛身亦然)에: 제불신도 또한 그러하니
요지기자성(了知其自性)이실새 : 그 자성을 요지할새
시즉설명불(是則說名佛)이로다 : 이것이야말로 곧 부처라고 이름할 수가 있다.
*
여래보지견(如來普知見)으로 :여래가 넓은 지견으로
명료일체법(明了一切法)하사: 일체법을 밝게 깨달아서, 밝게 알아서
불법급보리(佛法及菩提)를 : 불법과 보리를
이구불가득(二俱不可得)이로다: 둘 다 가히 얻을 수 없더라.
*
도사무래거(導師無來去)며: 도사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역부무소주(亦復無所住)라: 또한 머무는 바도 없더라. ‘무거무래역무주(無來無去亦無住)’다.
원리제전도(遠離諸顚倒)실새 : 모든 뒤바뀐 생각들을 멀리 떠났을새
시명등정각(是名等正覺)이로다: 이것의 이름이 등정각이로다. 등정각은 모든 현상 모든 사물을 그 실상대로 바르게 보는 것이다. 전도를 멀리 떠나는 것이다. 잘못 보는 것이 아니고 정확하게 바르게 실상대로 보는 것이 정각이다. 바르게 깨달았다. 바르게 본다.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깨달아 안다.
9, 下方의 星宿幢菩薩
(1) 佛周遍德
爾時에 星宿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如來無所住로대 普住一切刹하사
一切土皆往하시니 一切處咸見이로다
佛隨衆生心하사 普現一切身하사
成道轉法輪하시며 及以般涅槃이로다
諸佛不思議시니 誰能思議佛이며
誰能見正覺이며 誰能現最勝이리오
그때 성수당보살이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여래는 머무는 데 없으면서
모든 세계에 두루 머물매
온갖 국토에 모두 가고
온갖 곳에서 모두 보도다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따라
온갖 몸 나타내시니
도를 이루고 법을 연설하고
그리고 열반에 드시나니
부처님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나니
누가 능히 부처님 생각하고
누가 능히 정각을 보고
누가 능히 수승한 몸 나타내리
*
하방(下方)의 성수당보살(星宿幢菩薩): 하방 성수당보살의 찬탄
*
불주변덕(佛周遍德): 여래의 두루한 덕
*
이시(爾時)에
성수당보살(星宿幢菩薩)이
승불신력(承佛神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여래무소주(如來無所住)로대 : 여래는 머무는 바가 없음이로대
보주일체찰(普住一切刹)하사: 머무는 바가 없지만 또 일체 세계에 널리 다 머무르사
일체토개왕(一切土皆往)하시니: 일체토에 다 가시니
일체처함견(一切處咸見)이로다: 일체처에서 다 본다. 보고 듣는 것이 다 여래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인데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凈身)가’‘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여래의 광장 설법인데 산천초목이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아닌가’ 이것이 또한 화엄경을 푸는 열쇠라고 내가 늘 말했다.
*
불수중생심(佛隨衆生心)하사 : 부처님이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보현일체신(普現一切身)하사: 일체 몸을 널리 나타내시사
성도전법륜(成道轉法輪)하시며 :도를 이뤄서 법륜을 굴리시며
급이반열반(及以般涅槃)이로다: 열반에 듦이로다.
*
제불부사의(諸佛不思議)시니 : 부처님을 누가 사의하겠는가
수능사의불(誰能思議佛)이며: 누가 능히 부처님을 사의할 것인가. 제불은 부사의 인데 부처님을 누가 사유하겠느냐는 말이다.
수능견정각(誰能見正覺)이며 : 누가 능히 정각을 보며
수능현최승(誰能現最勝)이리오: 누가 능히 가장 수승한 부처님을 나타내는가.
(2) 佛體自在德
一切法皆如일새 諸佛境亦然이니
乃至無一法도 如中有生滅이로다
衆生妄分別 是佛是世界어니와
了達法性者는 無佛無世界로다
如來普現前하사 令衆生信喜나
佛體不可得일새 彼亦無所見이로다
若能於世間에 遠離一切着하고
無碍心歡喜하면 於法得開悟로다
神力之所現일새 卽此說名佛이니
三世一切時에 求悉無所有로다
若能如是知 心意及諸法하면
一切悉知見하야 疾得成如來로다
온갖 법 모두 진여(眞如)요
부처님 경계도 그러한 것
단 한 가지 법이라도
진여 속에 생멸이 있는 것 아니니
중생들이 허망하게
부처라 세계라 분별하지만
법의 성품 아는 이에겐
부처도 세계도 없어
여래가 앞에 나타나
중생들이 믿고 기쁘게 하지만
부처님 자체는 찾을 수 없고
저들도 보는 것이 없어라
만약 능히 세간에서
온갖 집착 멀리 여의면
걸림없이 마음이 환희하여
법을 깨닫게 되리
신력으로 나타내는 것을
곧 부처라 이름하나
삼세의 모든 때에
구하여도 있지 아니해
만일 능히 이렇게
마음과 뜻과 법을 안다면
온갖 것 모두 알고 보고
여래를 빨리 이루게 되리라
*
불체자재덕(佛體自在德): 중생들에게 응함이 자재하다
*
일체법개여(一切法皆如)일새 : 일체법이 다 진여다
제불경역연(諸佛境亦然)이니: 제불의 경계도 또한 그러하니
내지무일법(乃至無一法)도: 내지 한 법도
여중유생멸(如中有生滅)이로다 : 진여 가운데 생멸 있음이 없더라. 전부가 진여이고 불생불멸이다. 마음도 불생불멸이고 물질도 불생불멸이다. 형태와 나타난 모습인 형상만 약간씩 달라져 갈 뿐이다.
*
중생망분별(衆生妄分別) : 부처와 세계를 망령되게 분별하거니와
시불시세계(是佛是世界)어니와: ‘이것이 세계다’ 라고 망령되게 분별하거니와
요달법성자(了達法性者)는: 법성을 요달한 사람은
무불무세계(無佛無世界)로다: 전부가 법의 성품이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이라고 했다. 전부가 법성이다. 법성도리를 제대로 알면 부처와 세계가 둘이 아니다. 부처다 세계다 할 것도 없다.
*
여래보현전(如來普現前)하사 : 여래가 앞에 널리 나타나사
영중생신희(令衆生信喜)나: 중생으로 하여금 믿게 하고 기쁘게 한다.
부처님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고 얼마나 환희하고 얼마나 신심을 내고 그 신심에 얼마나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가. 그러나
불체불가득(佛體不可得)일새 :부처의 체는 가히 얻을 수 없을새
피역무소견(彼亦無所見)이로다: 그 또한 보는 바가 없더라.
*
약능어세간(若能於世間)에 : 만약에 세간에
원리일체착(遠離一切着)하고: 일체 집착을 원리하고
무애심환희(無礙心歡喜)하면 : 걸림없는 마음으로 환희할 것 같으면
어법득개오(於法得開悟)로다 : 법에 있어서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화엄경 구구절절이 기가막힌 소식을 전한다. 우리가 이런 것에서 신심을 내고 환희심을 일으킬 것 같으면 감동을 받게 되어 있다. 크게 깨닫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큰 감동을 받는다.
*
신력지소현(神力之所現)일새 : 신력을 나타난 바일새
즉차설명불(卽此說名佛)이니: 이것이야말로 부처라고 이름하니
삼세일체시(三世一切時)에 : 삼세일체시에
구실무소유(求悉無所有)로다: 구해도 다 있는 바가 없더라.
*
약능여시지(若能如是知) : 만약 이와 같이
심의급제법(心意及諸法)하면: 마음과 뜻과 모든 법을 알 것 같으면
일체실지견(一切悉知見)하야: 일체를 다 제대로 보고 알아서
질득성여래(疾得成如來)로다: 순식간에 여래를 이루게 된다. 그렇게 아는 것이 곧 여래를 이루는 일이다.
(3) 拂自在之迹
言語中顯示 一切佛自在하시니
正覺超語言이어늘 假以語言說이로다
말로써 부처님들의
자재하심 보이거니와
정각은 말도 초월했으나
말을 빌어서 말할 뿐이네
*
불자재지적(拂自在之迹):자재한 자취마저 떨어버리다
*
언어중현시(言語中顯示): 언어 중에서
일체불자재(一切佛自在)하시니 : 일체부처님이 자재하심을 나타내 보이시니
정각초어언(正覺超語言)이어늘 : 정각은 말을 떠났지만
가이어언설(假以語言說)이로다: 언어를 가자해서 또한 설명한다. ‘언어가 즉시 도다’ 하는 말도 있다.
10, 上方의 法幢菩薩
(1) 讚佛勸見
爾時에 法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寧可恒具受 一切世間苦언정
終不遠如來하야 不覩自在力이로다
若有諸衆生이 未發菩提心이라도
一得聞佛名하면 決定成菩提로다
若有智慧人이 一念發道心하면
必成無上尊이니 愼莫生疑惑이어다
如來自在力을 無量劫難遇니
若生一念信이면 速證無上道로다
그때 법당(法幢)보살이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세간의 고통을
항상 달게 받을지라도
마침내 여래를 가까이 하여
자재한 힘 보아야 하리
만일 모든 중생들
보리심 내지 못하였어도
부처님 이름 한 번 들으면
결정코 보리 이루리
지혜 있는 사람 누구나
한생각 도에 대한 마음 내면
반드시 위없는 세존 이루리니
의혹을 내지 말아라
여래의 자재하신 힘
무량겁에 만나기 어려워
잠깐만 신심 내어도
위없는 도를 빨리 이루리라
*
상방(上方)의 법당보살(法幢菩薩): 상방 법당보살의 찬탄
*
찬불권견(讚佛勸見):사람들이 보고 듣기를 권하다
*
이시(爾時)에
법당보살(法幢菩薩)이
승불신력(承佛神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영가항구수(寧可恒具受) :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해서 써서 붙여놓곤 했었다. 항상 빠짐없이 갖추어서
일체세간고(一切世間苦)언정: 차라리 일체 세상에 있는 고통이란 고통은 내가 다 받을지언정
종불원여래(終不遠如來)하야 : 마침내 여래를 멀리해서
불도자재력(不覩自在力)이로다 : 여래의 자재한 힘을 보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여래를 본다는 뜻이다. 부정사가 두 번이니까 전부 긍정으로 해석하면 된다
이건 무슨 말인고 하면 차라리 세상 고통을 내가 다 받을지라도 여래를 항상 친견하고 여래의 자재한 힘을 항상 내가 보면서 살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통은 받을 대로 받는다. 이 구절이 참 가슴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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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유제중생(若有諸衆生)이 : 어떤 중생이
미발보리심(未發菩提心)이라도: 보리심을 발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일득문불명(一得聞佛名)하면 : 한 번 부처님의 이름을 들을 것 같으면
결정성보리(決定成菩提)로다: 결정코 성보리로다. 제대로 가슴에 탁 꽂힌다면 결정코 보리를 이루고 깨달음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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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유지혜인(若有智慧人)이 : 어떤 지혜있는 사람이
일념발도심(一念發道心)하면: 한 순간에 도심을 발해서 ‘아 이거구나. 이것이 인생의 고귀한 가치구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필성무상존(必成無上尊)이니 : 반드시 무상존을 이룰 것이니
신막생의혹(愼莫生疑惑)이어다 : 삶의 의혹을 내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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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자재력(如來自在力)을 : 여래의 자재한 힘을
무량겁난우(無量劫難遇)니: 한량없는 세월 속에 만나기 어려우니
약생일념신(若生一念信)이면 : 만약 한 순간이라도 그 믿음을 낼 것 같으면
속증무상도(速證無上道)로다 : 빨리 무상도를 이룰지어다. 발심은 어느 순간 경전의 단 한 구절에서 올라온다.
아무리 경을 보고 염불을 하고 절에 살고 절밥을 먹더라도 안 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경전의 딱 한 구절에 느낌이 꽂혀서 ‘정말 이것이구나’ 하게 될 때가 있다. 재수좋은 육조스님 같은 이는 나무 팔러 갔다가 문자도 모르는 분이 금강경 한구절 읽는 소리를 듣고는 그 순간에 필(feel)이 꽂혀서 그 길로 어렵게 사는 어머니마저 버리고 출가를 하게 되었다. 제대로 탁 꽂히면 그런 결연한 의지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자꾸 자꾸 이렇게 여러 가지 대승경전을 무수히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고 음미하고 또 음미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는 이 길 밖에 없다.
물고기는 그물코 하나에 걸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물코 하나만 바다에 던져 놓으면 천날 만날 가도 절대 걸리지 않는다. 재수 좋은 육조스님이나 그렇게 그물코 하나에 딱 걸린다.
우리같은 둔한 사람들은 그물코를 천 개 만 개 펼쳐놔야 거기에 고기가 한 두 마리 걸릴까 말까다.
고기를 잡으려면 끊임없이 그물을 쳐야 된다.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 漉人天之魚)’라고 쓰인 도장이 범어사 보물이다. 60화엄경에 있는 구절이라고 하는 데 이 도장을 원효스님이 사용했다고 한다.
‘큰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서 인천의 고기를 다 건진다’는 뜻이다.
원효암 우물을 청소하다가 그 도장이 나와서, 유수한 사람에게 검증을 해보니 틀림없이 신라 때 돌이고 신라 때 전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루어 짐작컨대 화엄경의 구절이고 원효암에 원효스님이 계셨으니 원효스님이 사용하시던 도장일 것이라고 판명하였다.
과학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렇게 심증이 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토록 그물을 많이 쳐야 된다. 끊임없이 밤낮없이 자나깨나 가나오나 그물을 쳐야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내가 쳐 놓은 그물에 나라고 하는 고기가 딱 걸릴 때가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그 그물을 치는 것이다.
(2) 讚法勸聞
設於念念中에 供養無量佛이라도
未知眞實法이면 不名爲供養이로다
若聞如是法하면 諸佛從此生이니
雖經無量苦라도 不捨菩提行이로다
一聞大智慧와 諸佛所入法하면
普於法界中에 成三世導師로다
雖盡未來際토록 遍遊諸佛刹이라도
不求此妙法하면 終不成菩提로다
衆生無始來로 生死久流轉하야
不了眞實法일새 諸佛故興世로다
諸法不可壞며 亦無能壞者니
自在大光明이 普示於世間이로다
설사 생각생각마다
무량한 부처님께 공양한대도
진실한 법 알지 못하면
공양이라 말할 수 없어
이런 법 듣기만 해도
부처님 여기서 나[生]나니
한량없는 고통 겪더라도
보리의 행 버리지 말라
크고 넓은 지혜와
모든 부처님이 들어가신 법을 한 번 들으면
넓은 법계 가운데서
삼세의 대도사 이루려니와
오랜 세월이 끝나도록
모든 부처님 세계에 두루 다녀도
이렇게 묘한 법 구하잖으면
마침내 보리 이룰 수 없어
중생들 끝없는 옛적부터
나고 죽는 데 오래 헤매고
진실한 법 알지 못하매
부처님들 일부러 출현하사
모든 법 깨뜨릴 수 없고
깨뜨릴 사람도 없어
자재하신 큰 광명
세간에 널리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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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법권문(讚法勸聞): 중생들이 듣고 구하기를 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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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어념념중(設於念念中)에 : 설사 순간순간 가운데
공양무량불(供養無量佛)이라도: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한다 하더라도
미지진실법(未知眞實法)이면 : 진실한 이치를 모를 것 같으면
불명위공양(不名爲供養)이로다 : 그것은 공양이 아니다.
돈을 산더미처럼 올리고 음식물이니 초니 향이니 하는 것을 산더미처럼 올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 공양이 아니다. 진실한 법을 아는 것이야말로 부처님께 진짜 공양하는 길이다.
놀라운 이야기다. 이런 말을 주지가 신도들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신도들은 ‘공양 아니라는데 뭐하려고 내가 공양올리나?’ 하면서 올렸던 공양을 다 쓸어내리고 다시는 그 절에 안 올 것이다.
딱 그렇게 되어 있다. 념념중에 순간순간에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올리다 하더라도 진실한 법을 알지 못할 것 같으면 공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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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문여시법(若聞如是法)하면 : 만약 이와 같은 법을 들을 것 같으면
제불종차생(諸佛從此生)이니: 모든 부처님이 바로 이 자리에서 태어난다.
이 도리를 알면 여기서 바로 부처가 튀어나온다.
수경무량고(雖經無量苦)라도 : 설사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불사보리행(不捨菩提行)이로다 : 보리행을 버리지 않을 지로다.
금방 이렇게 된다. 이런 결연한 의지가 저절로 순식간에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이 본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육바라밀이고 사섭법이고 사무량심이고 본래 우리 마음속에 갖추고 있는 것이다.
보리행, 깨달음, 진실법, 발심 이런 것도 본래 우리 마음속에 다 갖추어져 있다. 그것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툭 튀어 나온다. 살아서 움직인다.
업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우리가 무슨 업을 지었는지 모른다. 어떤 상황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몰랐던 업이 툭 튀어 나온다.살다보면 그런 것을 느낀다.
한사람의 재능도 마찬가지다. 과거생에 익혀놓은 재주가 있어서 ‘나는 붓글씨 쓰는 것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써보니 참 재밌다. 금방금방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음악이나 예능 분야에도 그런 것이 많다.
출가한 사람들은 자기가 중이 될 업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동네 탁발하러 온 스님을 보고 재밌어서 졸졸 따라가다가 그 길로 중이 되기도 한다. 전생의 업이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탁발 온 스님을 보는 순간에 탁발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종일 쫓아다니다가 자기도 모르게 저 이웃동네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스님들은 더러 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일타스님한테 들었다. 일타스님은 그런 계기로 40명의 가족이 다 출가를 했다.
사람에게 어떤 업이 안에 있다가 어떤 경계를 만나면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 좋은 일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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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대지혜(一聞大智慧)와 : 한 번 대지혜와
제불소입법(諸佛所入法)하면: 제불에 들어갈 바 법을 한번 들을 것 같으면
보어법계중(普於法界中)에: 널리 법계 가운데
성삼세도사(成三世導師)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도사를 이룰지어다. 삼세에 부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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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미래제(雖盡未來際)토록 : 비록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변유제불찰(遍遊諸佛刹)이라도: 모든 세계에 두루두루 돌아다닐 지라도
불구차묘법(不求此妙法)하면 :이 미묘한 법을 구하지 않으려거든
종불성보리(終不成菩提)로다 :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다.
한 구절을 가지고 하루 종일 설명하고 있어야 되는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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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시래(衆生無始來)로 : 중생이 시작함이 없이 옴으로
생사구유전(生死久流轉)하야: 생사에 오랫동안 유전했을 새
불료진실법(不了眞實法)일새 : 진실법을 알지 못했을새
제불고흥세(諸佛故興世)로다 : 그래서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했더라. 출현은 생사에 유전하는 것을 말한다.
‘생사에 초월한다. 생사를 해탈한다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는 이론은 대승불교, 화엄불교에서 보면 외도들이나 하는 짓이다. 저급한 유치원 불교에서나 하는 짓이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중생들이 생사의 속에 치다꺼리는데 보살도 같이 생사에 치다꺼리 하고 같이 살면서 건져야 할 것이 아닌가.
보살이 생사에 유전하는 중생들을 외면해 버리면 그 중생은 누가 건질 것인가?
그러므로 보살은 생사에 유전한다. 열반에 들지 않는다.
열반에 들거나 생사를 떠나거나 생사를 초월하는 것은 불법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불법을 등지는 일이다.
이런 법문은 처음 듣는 이치일 것이다.
화엄경에 있는 소리다.
생사해탈을 하고, 선종삼매에 들어있고 하는 것만 전부 찬탄하는데 그런 것은 사실 저급한 불교에서 하는 소리다.
보살이 생사에 거듭거듭 태어나서 중생들과 함께 해야 한다. 중생들을 외면하고 생사를 떠나가버리면 안된다.
그래서 여기는 ‘선정삼매(禪定三昧)에 탐착한다’고 했다.
선정삼매에 탐착해서 폭 빠져 있으면 세상은 어쩌란 말인가? 세상은 저토록 불이 타고 있는데 그 불이 타는 세상을 외면하고 선정에 들어있다면 그것이 무슨 불교인가? 그런 불교는 외도들이나 하는 짓이다.
참 놀랍다. 이런 이야기를 귀로 한 번 스치기만 해도 큰 복이다. 이것이 진짜 불법이다.
선정삼매에 탐착해 있는 것은 불법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이런 대승법문을 귀에 한 번 스치기만 하면 다이아몬드를 삼키는 것과 같다. 다이아몬드가 거름 속으로 흙속으로 수백년을 돌아다녀도 그 빛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그 값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다이아몬드가 똥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해서, 창자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해서 그 값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빛이 감하는 것도 아니다. 빛이 발하고 값이 떨어진다면 다이아몬드가 아니다.
대승법문은 이와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으로 우리가 귀에 새겨 듣기만 해도 아주 큰 공덕이 된다. 그런 것을 이근공덕(耳根功德)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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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불가괴(諸法不可壞)며 : 모든 법은 가히 파괴할 수 없으며
역무능괴자(亦無能壞者)니: 능히 파괴할 자도 없다. 법은 파괴되지도 않고 파괴할 사람도 없어서
자재대광명(自在大光明)이: 자유자재한 대광명이
보시어세간(普示於世間)이로다 : 세간에 널리 나타나 보이는도다.
제법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이와 같은 가르침을 말한다. 선정삼매에 탐착하고, 빠져있는 것은 불법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생사가 싫다고 도망가고, 생사를 초월하고, 생사를 해탈하고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불법(佛法)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란다.
이것이 다른 불교와 차원이 다른 화엄불교다.
십회향 법문을 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길었다.
십회향 법문의 서론만으로도 몇 달이 걸렸는데 다음회부터 정식으로 십회향 법문이 나온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박수소리)
하강례
브레인워싱(brainwashing)
다음 달부터 시작되는 십회향품을 얼마나 오래 강의하실까 여쭤보자 큰스님께서 “길지. 지루할까봐 걱정이야.”하셨다.
큰스님은 십회향품을 읽고 또 읽으면서 ‘세뇌’가 되었다고 법문하셨는데, 돌아와 ‘세뇌(洗腦)’를 찾아보니 ‘본디 가지고 있던 생각을 새로운 생각으로 바꾸는 일. 영어로는 브레인워싱(brainwashing), 즉 뇌를 세척한다는 뜻이다. 세뇌는 보통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존 관념이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체제의 입장으로 전이하도록 하는 사상개조 활동을 의미한다.’라고 나와 있었다. ‘세뇌는 세뇌 대상이 진심으로 어떤 사상에 심취하여 깊이 설득된 상태이며 강요에 못 이긴 거짓 고백 따위는 세뇌라고 볼 수 없다.’라고도 나와 있다.
큰스님께 진심으로 새롭게 시작될 회향품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기대하고 있는) 한사람을 보고 강의하지 뭐.”
하고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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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불교방송국에서 국장님과 피디분이 인사를 오셨는데 큰스님께서 만원씩 자동이체를 해서 불교방송을 후훤하는 만공회 모집 팜플렛을 가져왔는지 물으시고 신도분들 법회 때 소개하겠다고 하셨다.
“새신랑 이리와 봐. 재밌나?” 하고 큰스님께서 젊은 피디에게 물으셨다.
가사일을 돕다가 ‘영광의 붕대를 감고 왔다’고 하는 새신랑은 ‘결혼 안했다면 손가락도 안다쳤을’ 거라고 하면서도 함빡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가느라 지난달 법회에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부처님처럼 떠받들고 살아.” 하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자
“큰스님께서 주신 108자재어 그 사람이 잘 보고 있습니다.” 하고 신부자랑을 하였다.
BTN에서 큰스님의 화엄경 강의가 계속 방영되자 BBS에도 화엄경강설집에 대해서 문의하는 전화도 많이 걸려온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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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무거사님이 고우 스님을 찾아뵌다고 해서 큰스님이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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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스님을 모시고 오셨다는 보살님이 큰스님을 뵙고싶었다고 하시면서 삼배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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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께서 염화실지 마지막에 실린 대만불자들의 순례기 ‘화엄경이 오다’에서 오래된 사진을 보고서 그때 이야기와 사진 속에 어디에 서계셨는지 짚어주셨다. 지혜월 보살님은 옛날 큰스님 사진을 보면 큰스님은 항상 가장자리 말고 중앙에 있다고 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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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법문에서 ‘80객의 춘성노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젊은날의 큰스님 이야기가 나온다.
인터넷 염화실에 올해도 어김 없이 화엄전 매화사진이 올라왔다. 이른 아침 지팡이를 짚고서 제자스님의 카메라 뷰파인더로 꽃을 들여다보고 계시는 큰스님 얼굴이 꽃같다.
‘포기하지마’ 옛날 봄바람이 올해 처음으로 피어난 매화 속으로 살랑 불어오는 듯 했다.
청순한 이름
봄꽃 화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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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화엄경 노트시리즈는 전부 보았습니다만 형식이 일기 형식인것 같습니다.
그런데,강의를 하기전 큰 스님 말씀하시는것은 일기형식이랑 잘 맞아져서 몰입하면서 읽었습니다만, 강의 부분 역시 일기체로 일관하다보니 보면서 헷갈리는 경우도 생겼고, 이상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만약에 일기체를 계속 하실것이라면 혜명화님의 큰스님 말씀에 대한 느낀점도 기록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또는 강의 부분에서는 어투를 조금 바꾸시는게 좋을것 걑습니다.
그 광경을 그린 듯한 현장감은 그 자리에서 강의를 듣는 듯이 참 좋습니다 ^^ 행복한 스케치..._()()()_
긴 내용은 염화실지를 통해서 보고 있지만, 여기에서 먼저 살짝 읽어 보는 글이 마음을 스케치 합니다^^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선정삼매에 탐착하고 빠져있는 것은 불법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생사가 싫다고 도망가고 생사를 초월하고 생사를 해탈하고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불법(佛法)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洗腦 본디 가지고 있던 생각을 새로운 생각으로 바꾸는 일.
brainwashing ~~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_()()()_
항시 법문 듣다가 의문도 생기고 다시 듣고 싶은 욕심이 생길때 이곳 스케치를 상세히 읽게 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혜명화님, 생동감 넘치는 스케치,넘 좋습니다.공부 잘 하고 갑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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