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꼴찌 -> 영업익1위' 비결은 조직력
알뜰주유소에 3년 연속 공급.. 시장점유율 2위 눈앞
계열사 3개 만들며 유류저장. 윤활기유 등 사업확장
권오갑 현대오일뱅크 사장이 지난달 회사 창립 50주년을 맞아 직원들에게 편지 한 장을 띄웠다.
"팀을 이끄는 감독과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 사이에 신뢰와 조직력이 무너지면 아무리 강팀이라도 경기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과거 명성에만 안주해 변화하지 않으면 실패만이 있을 뿐입니다. 기업도 다르지 않습니다"
브라질 대표팀의 몰락을 보고 쓴 듯한 이 글이 사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은 그러나 막 8강이 가려지던 6월 말이었다.
이후 준결승과 결승을 거치며 '녹슨전차'소리를 듣던 독일 축구가 세계 축구의 신주류로 우뚝 섰다. 독일팀엔 리오넬 메시 같은 초특급 스타가 없었지만 대신 막강한 조직력이 있었다. 최근 한국 정유업계에서 현대오일뱅크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와 비슷하다.
정유4사 중 공장 규모와 주유소 숫자가 가장 적은데도 3년 연속 영업이익률1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 1분기 석유정제업에서 1000억원대 영업이익을 낸 곳은 현대오일뱅크가 유일했다. 알뜰주유소 공급업체로 3년 연속 선정되면서 국내시장 점유율 2위를 넘본다.
외형상 크게 내세울 게 없는 이 회사가 잘나가는 비결을 파고들다 보면 결국 '조직력'의 문제로 귀착된다. 조직력을 구축하는 것은 축구에선 감독, 기업에선 CEO의 몫이다.
1964년 극동정유에서 출발한 현대오일뱅크는 1993년 현대그룹이 인수하면서 현대정유가 됐고, 2001년엔 아부다비 국제석유투자회사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현대중공업이 대주주가 된 것은 2010년. 이 해 8월 권 사장이 초대 사장으로 부임했다. 만년 꼴찌라는 패배의식, 잦은 경영권 교체로 느슨해진 조직 기장을 다잡는 일이 시급했다.
"직원들에게 믿고 맡긴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인사는 공정하고 투명하게 한다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제가 정유사업을 처음 하다 보니 직원 한 명 한 명이 다 선생님인 거예요. 아는 척하지 않고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권 사장은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했고 현대오일뱅크 CEO가 되기 전 30년 이상을 현대중공업에서 보냈다. 화학 전공 일색인 화학.정유업계에서 건너온 CEO는 권 사장이 거의 유일하다. '정유 문외한'이었던 그가 불과 4년 만에 1등 성적표를 받아든 것은 경영학적 탐구 대상이 될 만하다.
"저는 현장에 단순하고 쉽게 설명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모든 사안은 단순하고, 쉽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영의 본질은 수익을 내는 것이고 경영자는 이에 최적화된 판단과 결정을 내리면 됩니다"
현대오일뱅크는 정유업계에서 유일하게 석유코크스를 연료로 하는 최첨단 열공급 설비를 쓴다. 저유황 중유를 연료로 쓰는 다른 정유사에 비해 연료비가 50%가량 절감된다.
권 사장이 원가 절감이라는 기본 방향을 제시하자 현장은 FBC라는 구체화된 아이디어를 내놨다. 북해산, 남미산 원유 등으로 도입처를 확대한 것도 이런 과정의 산물이다. 권 사장이 밑그림을 그리면 현장이 색깔을 채워넣는 그런 식이다.
2009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정유사와 가스 수입사에 대해 LPG 가격 담합 혐의로 수천억 원대 과징금을 부과했다. 정유사들은 담합사실이 없다며 법원에 과징금 부과 취소 소송을 냈다. 최근 대법원은 나머지 회사의 담합 혐의는 모두 인정하면서 현대오일뱅크에 대해서만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오일뱅크의 논리 개발과 사건 대응 속도가 가장 빨랐다"고 평가했다.
권 사장은 현대중공업 시절 4년간 법무실을 담당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그가 이끄는 법무실은 회사 관련 소송에서 거의 패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권 사장은 스스로와 직원에게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하는 리더십을 가졌다.
"사장 임기 동안 계열사 5개는 만들고 나가야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계열사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업 영역이 확대된다는 것이고 직원들의 승진 기회도 늘어나므로 굉장히 실질적이고 중요한 목표인 거죠"
지금까지 현대오일터미널, 현대쉘베이스오일, 현대케미칼 등 3개 회사를 세웠고 석유정제가 전부였던 현대오일뱅크 사업영역은 유류 저장, 윤활기유, 혼합자일렌으로까지 확대됐다. 올가을 카본블랙 생산을 위해 국내외 제철회사와 합작사 설립을 모색 중이다.
대부분 CEO가 그렇지만 권 사장도 1등 지상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보통 1등을 추구하다 보면 주변에 긴장을 조정하고 적도 생겨난다. 그런데 권 사장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큰 장점으로 '적이 없다'는 점을 꼽는다. 그가 지난해 초 프로축구연맹 총재로 추대될 때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음달 11일로 사장에 부임한 지 만 4년이 되는 권 사장은 지금도 아침 출근길마다 판교 부농이었던 부친의 말을 되새기곤 한다. "아버님이 그러셨어요. '어디 일하러 가거든 남보다 풀하나라도 더 뽑고 와야 한다'. 회사에 와 보니 고 정주영 회장님이 그런 자세로 일하시더군요. '풀 하나 더 뽑는것' 이 단순한 마음가짐이 'CEO권오갑'을 만들고 현대오일뱅크를 변화하게 만든 원동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