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다리를 화두에 담고 살아온 3,4년간의 시간동안 내가 내게 끊임없이 물어본 것이 있었다.
내가 지금 행하는 것들이 진실로 나의 마음을 담아 놓은 부끄럽지 않은 거울속의 모습이 될 것인가?
나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비춰졌을 때 가식과 비겁함을 포장하여 적당히 나의 이쁘고 내세울만한 마음들을 내보이려 애쓰는 헛된 일에 지나지는 않는가?
헛된 일은 아니지만, 이 작은 마음 씀 들이 누군가에게 공명되어 하나의 의미 있는 발자국들을 남기고 걸어가는 내 여정의 증거가 될 것인가?
등등이다.
최선을 다하고자 했고, 진심을 다하고자 했다고 내가 내게 항상 대답해온 것 같다. 때론, 그것들이‘ 아니야 아니야... 비겁하고 나약한 나의 또 다른 반복에 지나지 않아’라고 자학하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매우 힘들었다. 이글 처음 시작이 그 힘듦에 대한 나름대로의 용기내기로 시작된 것임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다시금 되돌아본 내 모습이 ‘이뻐 하고 대견해할 구석’도 있었음에 대한 발견이 이 글쓰기의 성과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관찰이나 묘사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아닐 터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에 대한 나의 질문과 대답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어떤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그 운명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아쉬움 대신에 가져가고 싶은 게 있다. ‘사노라고 애썼다. 이제 쉬자... 애썼다 김길중! ’이라고 마지막 의 순간을 가지고 가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일 것이다. 앞으로도 나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섶다리 놓기로 비롯된 일련의 것들에 대한 또 다른 나의 관심사는 이것이 진짜 조금이나마 의미를 남기게 될 것인지, 누구에겐가 도움이 될 만한 필요한 일들을 하는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대화와 그때의 인상으로 그것에 대한 나의 답을 남겨보려 한다. 천변의 산책로를 활용하는데서 필요한 편의시설의 요구와 생태적 보존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대목이었다.
그 당시 입주자 대표회장이던 블루님께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발언의 요지를 기억나는데로 재 구성해보자면 이렇다.
‘섶다리에서 올라오는 전망 데크 옆의 휘트니스 센터 화장실을 외부인들이 이용하지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공공화장실로 제공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편하게 하고 그것 때문에 속 끓이고 신경 쓰는 우리 마음도 편해보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였다.
이게 정답인 것 같다.
어차피 막는다고 안 오는 것이 아닐 터라면 차라리 능동적으로 제공 하는 것이 이미지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실익보다 조금 더 큰 보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 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이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이 내게도 이익이 될 거라는 확신이 섰을 때에라야 만 공동체가 지탱되는 것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그래야만 공동체에 대한 호소가 가능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자 실증적 결과물이라 여기며 종종 그 의미를 되새김질 해보곤 한다.
이 이야기에서 다룬 이 공동체가 어디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특별한 방법에 의해 주민공동체라는 것을 이루었겠는가? 그저 옆에 있는 다른 아파트 주민들과 그리 별반 다를 것 없는 구성원들임에 불과하지만, 주어진 여러 기회들을 슬기롭게 노력하여 잘 가꾸어진 마음의 밭들이 커가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쁘게 잘 가꾸어진 그 밭을 지나가던 누군가는 자기네 밭에 가서 또 그렇게 이쁜 밭으로 가꾸려는 노력을 제공할 인상이 남기면 족한 것이다. 능동적으로 제공한 화장실을 이용하는 지나가는 또 다른 동네의 주민이 거기서 목격한 그 싹을 물어다 자기네 아파트 뒤뜰에 정성들여 심고자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블루님의 발언 속에 담겨진 마음이라면, 나로부터 이웃, 이웃으로부터 마을, 마을로부터 도시로 확장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짐이다.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확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쓴 대목이다.
섶다리가 있는 서신동에는 섶다리 마을 말고도 세 개 아파트가 한 덩어리를 이루어 일궈가는 신명나는 한동네 큰잔치가 있다. 또한 서신동에는 아파트 숲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소 소외된 지역
에서 문화를 스스로가 채워가려는 노력이 있는 재뜸 마을이 있다.
이 두동네에 대한 이야기도 글로 써보자면, 섶다리 이야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을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을것이다.(그것은 내가 잘 알지 못하므로 여기까지만 언급한다.)
섶다리 마을과 재뜸마을, 그리고 한동네 큰잔치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보면 서신동이 보이고, 전주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을간의 교류도 적지 않게 내밀한 곳에서 작게나마 시작되고 있다.
확장 가능성은 이미 시작되었고 진행 중에 있다.
섶다리는 서신동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에만 있지 아니하다.
한동네 큰잔치 옆(대우대창, 광진 선수촌, 한일동아) 세개 아파트에도 있고, 재뜸 마을에도 놓여있다. 삼천동 둔치에 세내 섶다리도 있고, 평화동의 지시제 주변 여러 아파트들을 이어주는 섶다리도 있다. 아중리 에도 있고, 동산촌 어느 아파트의 마을문고에도 있고 송천동 뜨란채라는 아파트에도 있다. 내가 언급하지 않은 그 밖의 무수한 아파트에도 있고, 내가 모르는 또 어떤 마을들에도 있다.
그것이 이름만 다르게 불려 질 뿐이고, 생김새가 조금씩 다를 뿐이라고 여기면 된다.
밑둥 잘린 섶다리에서 싹이 자라난 것을 보고서 그 싹이 커 나갈 매우 큰 느티나무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기에 무리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 적어놓은 무수한 싹들을 군데 군데서 무성하게 자라나는 나무로 이해한다면, 머지않아 그 싹들이 자라나 울창한 숲으로 자라고 있다고 여겨도 충분하다. 그중 내가 가장 가까이서 본 싹 하나로, 그 희망의 근거가 이미 우리 곁에 있음을 목격하며 오늘날의 우리들에 대해 이렇게 적어 본다.
섶다리를 화두에 담고 살아온 3,4년간의 시간동안 내가 내게 끊임없이 물어본 것이 있었다.
내가 지금 행하는 것들이 진실로 나의 마음을 담아 놓은 부끄럽지 않은 거울속의 모습이 될 것인가?
나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비춰졌을 때 가식과 비겁함을 포장하여 적당히 나의 이쁘고 내세울만한 마음들을 내보이려 애쓰는 헛된 일에 지나지는 않는가?
헛된 일은 아니지만, 이 작은 마음 씀 들이 누군가에게 공명되어 하나의 의미 있는 발자국들을 남기고 걸어가는 내 여정의 증거가 될 것인가?
등등이다.
최선을 다하고자 했고, 진심을 다하고자 했다고 내가 내게 항상 대답해온 것 같다. 때론, 그것들이‘ 아니야 아니야... 비겁하고 나약한 나의 또 다른 반복에 지나지 않아’라고 자학하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매우 힘들었다. 이글 처음 시작이 그 힘듦에 대한 나름대로의 용기내기로 시작된 것임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다시금 되돌아본 내 모습이 ‘이뻐 하고 대견해할 구석’도 있었음에 대한 발견이 이 글쓰기의 성과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관찰이나 묘사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아닐 터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에 대한 나의 질문과 대답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어떤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그 운명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아쉬움 대신에 가져가고 싶은 게 있다. ‘사노라고 애썼다. 이제 쉬자... 애썼다 김길중! ’이라고 마지막 의 순간을 가지고 가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일 것이다. 앞으로도 나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섶다리 놓기로 비롯된 일련의 것들에 대한 또 다른 나의 관심사는 이것이 진짜 조금이나마 의미를 남기게 될 것인지, 누구에겐가 도움이 될 만한 필요한 일들을 하는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대화와 그때의 인상으로 그것에 대한 나의 답을 남겨보려 한다. 천변의 산책로를 활용하는데서 필요한 편의시설의 요구와 생태적 보존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대목이었다.
그 당시 입주자 대표회장이던 블루님께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발언의 요지를 기억나는데로 재 구성해보자면 이렇다.
‘섶다리에서 올라오는 전망 데크 옆의 휘트니스 센터 화장실을 외부인들이 이용하지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공공화장실로 제공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편하게 하고 그것 때문에 속 끓이고 신경 쓰는 우리 마음도 편해보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였다.
이게 정답인 것 같다.
어차피 막는다고 안 오는 것이 아닐 터라면 차라리 능동적으로 제공 하는 것이 이미지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실익보다 조금 더 큰 보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 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이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이 내게도 이익이 될 거라는 확신이 섰을 때에라야 만 공동체가 지탱되는 것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그래야만 공동체에 대한 호소가 가능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자 실증적 결과물이라 여기며 종종 그 의미를 되새김질 해보곤 한다.
이 이야기에서 다룬 이 공동체가 어디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특별한 방법에 의해 주민공동체라는 것을 이루었겠는가? 그저 옆에 있는 다른 아파트 주민들과 그리 별반 다를 것 없는 구성원들임에 불과하지만, 주어진 여러 기회들을 슬기롭게 노력하여 잘 가꾸어진 마음의 밭들이 커가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쁘게 잘 가꾸어진 그 밭을 지나가던 누군가는 자기네 밭에 가서 또 그렇게 이쁜 밭으로 가꾸려는 노력을 제공할 인상이 남기면 족한 것이다. 능동적으로 제공한 화장실을 이용하는 지나가는 또 다른 동네의 주민이 거기서 목격한 그 싹을 물어다 자기네 아파트 뒤뜰에 정성들여 심고자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블루님의 발언 속에 담겨진 마음이라면, 나로부터 이웃, 이웃으로부터 마을, 마을로부터 도시로 확장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짐이다.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확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쓴 대목이다.
섶다리가 있는 서신동에는 섶다리 마을 말고도 세 개 아파트가 한 덩어리를 이루어 일궈가는 신명나는 한동네 큰잔치가 있다. 또한 서신동에는 아파트 숲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소 소외된 지역
에서 문화를 스스로가 채워가려는 노력이 있는 재뜸 마을이 있다.
이 두동네에 대한 이야기도 글로 써보자면, 섶다리 이야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을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을것이다.(그것은 내가 잘 알지 못하므로 여기까지만 언급한다.)
섶다리 마을과 재뜸마을, 그리고 한동네 큰잔치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보면 서신동이 보이고, 전주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을간의 교류도 적지 않게 내밀한 곳에서 작게나마 시작되고 있다.
확장 가능성은 이미 시작되었고 진행 중에 있다.
섶다리는 서신동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에만 있지 아니하다.
한동네 큰잔치 옆(대우대창, 광진 선수촌, 한일동아) 세개 아파트에도 있고, 재뜸 마을에도 놓여있다. 삼천동 둔치에 세내 섶다리도 있고, 평화동의 지시제 주변 여러 아파트들을 이어주는 섶다리도 있다. 아중리 에도 있고, 동산촌 어느 아파트의 마을문고에도 있고 송천동 뜨란채라는 아파트에도 있다. 내가 언급하지 않은 그 밖의 무수한 아파트에도 있고, 내가 모르는 또 어떤 마을들에도 있다.
그것이 이름만 다르게 불려 질 뿐이고, 생김새가 조금씩 다를 뿐이라고 여기면 된다.
밑둥 잘린 섶다리에서 싹이 자라난 것을 보고서 그 싹이 커 나갈 매우 큰 느티나무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기에 무리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 적어놓은 무수한 싹들을 군데 군데서 무성하게 자라나는 나무로 이해한다면, 머지않아 그 싹들이 자라나 울창한 숲으로 자라고 있다고 여겨도 충분하다. 그중 내가 가장 가까이서 본 싹 하나로, 그 희망의 근거가 이미 우리 곁에 있음을 목격하며 오늘날의 우리들에 대해 이렇게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