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지명에 있어 남도진(南桃鎭), 금갑진(金甲鎭)의 진(陣)과 벽파진(碧波津), 녹진(鹿津)의 진(津)의 차이점은?
옛 지명에 남도진(南桃鎭), 금갑진(金甲鎭)의 진(陣)은
수군 진영(군사 거점)이로 조선 세종 때에 성(城, 남도진성, 금갑진성)을 쌓아가꼬
그 두 반데에다가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덜얼 각각 주재하게 했든 군사요충지로 군대 진영(鎭營)이란 야기여람짜.
※수군만호(水軍萬戶)
조선시대 바다와 해안의 요충지인 진(鎭)이나 포(浦)를 지키던 종4품 외직 무관 관직으로 군선(전함)을 관리하고 왜구 등 외적의 침입을 막는 임무를 맡는다.
※군수(郡守)도 종4품이고 수군만호도 종4품으로 품계는 동급이나, 숭문천무(崇文賤武) 경향도 있어 군수가 훨씬 우위이다.
그 소임(所任)에 있어서도 군수는 관할 군 안에 모든 지역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모두 쥐고 주민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이었고, 수군만호는 군현 내부 또는 경계에 설치된 수군 기지(진영)에 파견되어 오직 해상 방어와 군사 임무만을 전담하는 직책이다.
이 때문에 수군만호는 담당 지역의 민정과 군수물자 조달(군량미, 부역 등)을 지휘하는 군수의 행정적 협조를 받아야만 진을 운영할 수 있었다는 실질적 영향력 차이도 있었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지방 군사력 강화를 위해 종4품 군수에게 무관직인 '병마동첨절제사(종4품)'를 겸임하도록 했다. 이런 군제상 서열의 차이는 군수가 겸하는 '동첨절제사'가 '수군만호'보다 상위 격의 직책이 된다.
이에 따라 같은 종4품이라 하더라도 지역 방어 체계 내에서 군수가 수군만호보다 우월한 지휘 권한을 가졌다.
그랑께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종4품인 발포수군만호(1580년~1582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를 지냈었제만, 이후 정읍현감(1589년~1591년)을 하다가 제87대 진도군수(진도군수로 1591년 2월 1일 임명된 직후 가리포 첨사→전라좌수사로 급속 영전이 되아가꼬 진도 현지 부임은 못 했음)로 임명되았을 때도 수군만호 때 보담 영전이라고 그라지라.
이순신 장군에 진도 군수직 임명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宣祖修正實錄 二十四年 辛卯(1591, 明 萬曆 十九年) 二月一日 (戊辰) 篇
○以李舜臣爲全羅左道水使。 時, 舜臣聲名始著, 論薦相繼, 自井邑移拜珍島郡守, 未赴任除加里浦僉使, 未幾擢拜水使。
선조수정실록 24년 신묘(1591, 명 만력 19년) 2월1일 (무진) 편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이때 순신의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칭찬과 천거가 잇따라서 정읍(井邑)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이배(移拜)되어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수사로 발탁되었다.
라고 올라있어람짜.
야튼 각각 만호덜이 주재했든 남도진(南桃鎭), 금갑진(金甲鎭)의 진(陣)은 그라고
벽파진(碧波津), 녹진(鹿津)의 진(津)은 나루터(교통·수운 요충지)를 뜻하지람짜.
한자나 규모넌 딸러도 두 글자 모도 수로 방어나 교통의 핵심지에 공히 붙여지긴 했었어람짜.
그란데 군사 진영이 아닌 나루터라고넌 해도 조선 시대 때 특히 벽파진(碧波津)은 군사적 요충지여가꼬 수진장(守津將)이란 관직에 장수가 임명되아 있었는데라.
벽파진(碧波津)의 수진장은 조선 시대 호남 남해안 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필수 길목이자 국방 최전방이었던 벽파나루 중요성 땜시로 방어와 통제를 총괄하는 군관직 정9품의 군관인 수진장(守津將)이 임명댜 있었지라.
종4품 문관(文官)인 각 군에 군수(郡守)덜 하고, 무관(武官)인 진성(鎭城)의 만호(萬戶)들은 나라에서 임금이 어명이로 직접 임명했제만,
육진장(陸鎭將)은 병마절도사가, 수진장(水鎭將)은 수군절도사가 관찰사랑 의논해서 정하는 지방 군관직(장수)이였지라.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장수로 임종형(任宗亨) 군관(軍官)이 내나 벽파진 수진장이었고, 근대에 벽파진 수진장이로는 진도에 진중·진고 학교럴 세우셨음시로 진도 제4대, 제8대 국회의원이었고 최고의 서예가였던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2년∼1981년) 선상님네 할아부지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 1862~1942) 선생이 벽파진 수진장얼 지내셨었고, 뒤로 선전관(宣傳官), 승훈랑(承訓郞)을 거쳐 통정대부까지 올랐다 항구만이라.
또, 참고로 해창(海倉)에넌 병선도 6척이나 있었고 수군도 300명이 있었다고덜 말하제만
여그는 진영(鎭營)하고넌 딸리 관곡(官穀), 진상품(進上品) 등을 보관하고 조운선(漕運船)이로 날르는 나라에 창고가 거가 있어가꼬 왜적에 침략도 대비할 겸사겸사로 그케 군대가 주둔한 것이었고라.
한편 우리나라에넌
정동진(正東津), 정남진(正南津), 정서진(正西津)이란 지명덜이 있넌데라.
여가 모도 서울 광화문을 중심이로 정동쪽(강릉시), 정남쪽(장흥), 정서쪽(인천, 서구)에 있넌 나루터들에 이름덜이지라.
그라믄 정북진(正北津)은 없냐?
예! 없어라. 대신 광화문 정북쪽에넌 중강진(中江鎭)이 있는데 압록강의 중류 지역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특성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답디다.
조선시대에 여가 아주 중요한 곳이여가꼬 국경 방어를 위해 이곳에 진영(鎭營)을 설치함시로 ‘중강진(中江鎭)’이라 불리게 되았다고 해람짜.
요런 진(陣)이 진도 남도진(南桃鎭), 금갑진(金甲鎭) 말고도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 등에 이름이 안직 남어 있넌데 초지진은 진영 말고도 인근에 나루터인 초지진(草芝津)도 또 있어람짜.
그라고 나루터 진(津)은 진도 벽파진(碧波津), 녹진(鹿津) 말고 노량진(鷺梁津), 주문진(注文津), 신탄진(新灘津), 방어진(方魚津), 삼랑진(三浪津)... 등에 그 이름이 남어 있고람짜.
이전에넌 벽파, 벽파진, 벽파리럴 우덜은 백파, 백파진, 백파장이라고 그케 불렀었지라? 덜?
‘백파장’은 일반적이로 ‘벽파정’에 발음이 변한 말이라고덜 하넌데람짜.
벽파정(碧波亭)은 벽파진을 오고 가는 관리와 사신 등을 맞고 보내기 위해가꼬 세운 정자로 고려 때 첨이로 셔지고 조선시대 중건 했다가 소실된 것얼 2016년에 새로 맨들아 논 정자여람짜.
이전 우덜 에릴찍에 벡파장에 가보므는 날마디 찰로 장날같어가꼬 장태만칠로 사람덜이 북적북적항께
그케 벡파장이라고 불렀등 것언 아니까라? 혹시감씨? ㅋㅋ~~
진도대교럴 놓기 직전인 1980년대 초
백파장 최고 시절엔 최대 108가구 500명 이상이 살았던 데로 유동인구넌 그 멫 배가 댰든 시절이 있었지라. 거가.
그랑께
지주도 가넌 배럴 갈어 탈라고 강진, 해남, 완도 고런 데서 오넌 손님덜도 많아다 봉께
주점 겸 식당을 겸하는 여인숙덜이 다섯 반데나 댰었넌데도
기상이 안 좋아가꼬 뱃질이 멍크므는 그케 많안 객방덜이 모도 다 꽉꽉 창께
반침이나 지시렁 밑에랑 허청재까장도 꺼적 펴놓고 자고
참말로 장태만칠로 사람 많아고 장날만칠로 북적대든 데가 백파장이었었지라.
그란 호시절도 1979년 4월에 제주-완도항로에 한일카훼리가 취항하고 욜로 쩔로 지주도 직항 뱃질덜도 나고
1984년 10월 진도대교가 놔짐시로 철부선도 끊기고 1994년엔 조도짝도 창유-팽목에 짤룬 항로가 남시로
시월따라 찌울어지다가 그남둥 목포-제주행 쾌속선덜이 벽파럴 지께댕김시로 운항하든 뱃질도 인자는 완전히 다 끊겨가꼬
지끔은 불꺼진 항구고 모도 흘러간 옛 노래가 댜뿌렀제만 이전에 날마디 장날 같었든 백파장 기억덜언 납살덜이 안직 70줄 된 사람덜 기억 속에서만 아련한 추억이로 남었구만이라.
-진도 솔개동리 출신 조병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