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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커르크에서 나가사키까지
배리 리드
1993년 추수감사절에 영국 노스우드에 있는 딸 데비의 집으로 갔다. 고기파이를 막 완성하던 사위 돈 브레이크는 해군중위로 영국 정보부 MI-6 소속이었는데, 옆집을 초대했다고 하면서 영국군 준장으로 은퇴한 에이단 맥카티라고 했다.
70대의 에이단과 아내 캐슬린은 품위 있는 이웃이었고, 에이단은 전형적인 북서유럽인(Gaelic) 얼굴에 영구적인 미소를 간직한 분이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의 잔이 비지 않도록 신경도 쓰는 매너.
대화가 에이단 씨가 태어난 곳인 아일랜드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아무래도 그 세대 같은데 전쟁 얘기는 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2차대전 때 별로 한 게 없으셨나 싶었다.
그게 아니었다. 우리의 의문에 결국 놀라운 용기와 생존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에이단 맥카티는 아일랜드에서 군 의무학교를 1938년 졸업해 군의관으로 임관했으나 런던의 의무대로 발령 난다. 그 일에 염증을 느끼던 시기, 같은 아일랜드 출신 군의관 둘과 어울렸는데, 영국군 어느 직종이 최고인가 토론했다. 어느 날 저녁 술자리 논쟁은 나이트클럽까지 이어져 동전 던지기까지 한다. 동전 앞면은 공군 - 뒷면은 해군, 결국 공군이 승리했다.
1939년 9월 독일이 전쟁을 선언하자, 맥카티 소위는 공군 전대를 따라 프랑스 북부로 건너가고, 당시 전대의 기종은 나무로 만들어진 구식 전투기에 복엽기까지 있었다.
1940년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해서 네덜란드 저지대를 공격했고, 영국군 프랑스군 방어선이 곧바로 붕괴하여 퇴각하기 시작한다. 맥카티 소위는 차량 15대 대열에 속해 퇴각하면서 독일 전투기 기총소사와 급강하 폭격기 스투카 공격을 지속으로 받고, 독일군 기갑부대가 따라잡으려고 기를 쓰고 뒤에서 추격한다. 도로에 피난민 군중까지 뒤섞였다. 맥카티 소위는 여성 어린애까지 낀 피난민들을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지켜봤고, 내려오는 전투기 공격에 조각나는 현장도 목격했다.
그러다 긴급명령이 떨어졌다.
[최대한 빨리 던커르크로 도착하라.]
기총소사와 폭격은 계속되고, 독일군 탱크사단들은 뒤쪽 1마일 거리로 붙었다. 맥카티와 의무병들은 소총 들고 참호를 파서 포위전에 대비하란 지시를 받는다.
그렇게 대기하던 맥카티 소위는 마을로 가서 본부를 찾아 정보를 얻으려했는데, 막상 가보니 마을은 잡석으로 변해 불타고 있었다. 혼란 속에 영국군 프랑스군 수천이 멍한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다.
그 참호선 대기 3일 동안 물도 먹을 것도 없이 버티다 인내심은 불안으로 변한다. 같이 지키던 정규군 병력이 이동하는 걸 따라서 해변으로 향하고, 가보니 배를 타고 영국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맥카티와 부하들은 잔교에서 빠르게 떠나는 연락선 같은 배를 향해 뛴다. 그러나 배는 잡을 수 없이 멀어져갔는데, 맙소사, 그 배가 어뢰 한 발을 맞고 조각이 난다. 엄청난 사상이 났다.
결국 부하들과 다른 배에 타는 데 성공했고, 병사들은 갑판 밑으로 내려갔는데 파이프에 물이 새고 배 흘수선에는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그 구멍에 입과 코를 대고 헐떡였다. 그때 대위가 나타나서 소리쳤다. ‘배 반대 면으로 가! 배가 기울었어!’ 그렇게 어찌어찌 배는 영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프랑스에서 탈출한 맥카티 소위는 호닝톤의 비행장 부-의무대장이 된다. 1940년 8월 독일공군은 이 비행장을 때려 엄청난 피해와 사상자가 난다. 그때 맥카피 소위는 깨어나서 수술하고 수술하다 잠들었다.
1941년 5월 맥카티 소위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어느 컴컴한 밤, 독일을 폭격하고 돌아온 영국 폭격기 한 대가 기지로 날아왔는데, 미숙한 조종사가 무전으로 ‘붉은색과 녹색이 계기판에 점멸한다. 비상!’ 선언했다. 바퀴가 고정되어 내려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방 사이렌이 울며 맥카티 소위는 가까운 응급차로 뛴다.
문제는 독일군 전투기 한 대가 이 폭격기 꼬리를 물고 날아온 거다. 폭격기는 독일 전투기 때문에 하강할 때 활주로를 비추는 랜딩 라이트를 못 켠다고 통보했다.
폭격기는 활주로 경계인 담장을 너무 빠른 속도로 통과했고, 우현 날개 끝이 지상을 때리면서 빙 돌아서 정지했다. 조종석은 거의 정신을 잃었고, 즉각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다. 맥카티와 의무반원은 응급차에서 내려 잔해를 향해 질주했는데, 문득 공포로 정지한다. 투하하지 않은 폭탄이 그대로 있었고, 언제 터질지 모른다. 그래도 의무반은 잔해에서 심한 화상을 입은 승무원들을 끌어냈다.
맥카티가 조종사에게 다가갔을 때, 분명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맥카티. “그 미숙한 조종사는 자기 실수로 자신의 젊음을 잃었어. 모든 승무원을 안간힘으로 끌어낼 때까지 폭탄들은 터지지 않았는데,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신이 준 기적이 아니면 우린 그때 죽었어.”
그 구조행동으로 맥카티 소위는 조지 훈장을 받았고, 41년 11월 버킹햄 궁전에서 조지 6세로부터 직접 수여 받았다.
공군성으로부터 받은 새 명령은 북아프리카다. 배 타고 가서 자유 프랑스군과 작전하란 배치였다. 맥카티의 비행단은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전투기로 몰타섬과 알렉산드리아 사이 해협을 지키란 명령을 받았다. 맥카티 소위는 다른 병력과 함께 수송선에 올라 지브롤털로 향한다.
그런데 배는 지브롤털로 진입하지 않고 아프리카 서부해안을 따라 남하,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정지해 일주일 쉬는데, 거기서 새로운 선단이 합류하면서 목적지가 싱가포르란 소리를 듣는다. 말레이시아를 침공하는 일본군을 막는다는 소리였다. 일본군 침공이 다급해서 북아프리카로 갈 비행단을 아시아로 돌린 것이다.
맥카티 소위의 선단은 자바와 수마트라 사이의 순다 해협에서 일본군 포격을 받았고, 목적지를 자바섬의 바타비아로 변경해 도착, 짐을 내리고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전투기를 재조립한다.
전투구역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편안한 분위기로 맥주도 마시곤 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영국인이 아니라 영어 하는 네덜란드인이란 걸 알게 된다. 유일한 위험은 가끔 나타나는 호랑이였다.
새롭게 받은 이동명령은 수마트라 동쪽 팔렘방으로 날아가란 거였다. 그곳에 록히드 A-28 허드슨 폭격기 20대로 무장한 호주공군이 작전하고 있는데, 일본군 공수부대가 낙하산으로 정글에 뛰어내려 비행장을 포위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군 공격이 심각해지자 네덜란드인들은 석유 탱크들과 접안 부두를 폭파했다. 여기서 맥카티와 부대원들 다수가 다쳤고, 정글 길로 퇴각하기 시작해 순다 해협에 닿는 280마일 남쪽 오스타벤으로 향한다. 정글은 이정표도 없고 호랑이 악어 원숭이가 가득했다.
어렵게 어렵게 오스타벤에 도착했으나 혼란은 재현된다. 도시는 불타고 석유 저장탱크들도 불이 나 검은 연기구름이 올라가고 있었다. 작은 페리선 세 대에 오른 맥카티 소위의 부대는 해협을 따라 자바로 간다. 자바에 도착하니 연합군은 1만 명에 이르렀으나, 무장이 부실하고 병기를 제대로 못 다루는 병사들도 많았다. 라디오에 처칠 수상이 나와 최대한 오래 고수하라고 영국군을 고무한다.
자바를 침공하는 일본군은 네덜란드군/미군 방어부대의 저항을 분산하려고 네 곳에 나누어 상륙했다. 배들은 상공의 일본군 폭격기들에 당해 침몰하고, 일본군이 밀고 들어오자 맥카티와 부하들은 다시 산악으로 급하게 퇴각한다. 같이 행동한 부대는 미군 텍사스 야전포병대대와 일본기 폭격기에 당해 침몰한 해군 생존자들이었다.
맥카피 회상. “산악 5일 차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뜨고, 일본군이 우리 후방에 갑자기 나타났어. 일본군이 총도 쏘지 않고 우리 사이로 그냥 걸어들어왔어. 사실이라기보다 꿈같았지.”
1942년 3월, 영국/호주 방어군 4천은 산악에서 걸어 내려와 벌판을 가로지른다. 뜨거운 열대 날씨에 화물기차로 적재되었고, 내려 보니 일본군이 점령한 구 네덜란드군 비행장이다.
“일본군 보초들은 전투에 단련된 사람들로 군기가 꽉 잡힌 일선 병력이었어. 인상적인 건, 적개심 같은 게 별로 없더라고. 그런데 곧 변하지. 일선부대에서 다른 병력으로 교체되는데, 훨씬 잔인했어. 나는 곧 아시아인의 엄격한 문화를 배우게 돼. ‘얼굴’이야. 다른 말로 하면 ‘체면을 잃는다.’ 개념이야. 얼굴이 명분 체면이란 거지. 사적인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얕보이면 안 된다! 보초들은 그런 일관된 태도야. 일본군 장교가 화가 나잖아? 사람들 보는데 하사관을 대놓고 때려. 그러면 병장은 상병을 때리고 상병은 일병을 때려. 일병은 근처에 있는 한국인을 걷어차지. 그러면 한국인도 포로들을 때려. 그게 그들의 체면 시스템이야. 장교가 서열 밑바닥인 우릴 때리는 건 그들에게 체면이 아닌 거야.”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일하러 가거나 활주로 풀을 제거하는 병력으로 나뉘었는데, 그때 공군 포로만 따로 빼서 무슨 주특기인가 조사를 한다. 며칠 후 포로가 집합했을 때 영국군 최선임 장교가 일본군 명령을 거부했다.
“포로 규정에 주특기에 따라 뭘 시키는 건 없는 거야. 그래서 장교가 정당히 거부했지. 보초들이 건물로 끌고 들어가 구타했어. 우리는 서서 그 비명을 들었어. 얼마 뒤 장교가 끌려 나왔는데, 우리 눈앞에서 분대가 총살했어. 이제 잔인한 세상이 왔구나, 직감했지.”
어느 날 맥카티가 비행장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데, 일본군 경폭격기 한 대가 재급유를 위해 착륙해 맥카티 무리 근처에 정지해 주기한다.
“재급유를 기다리는 키 큰 일본 승무원이 우리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데, 자세히 보니 폭격기가 일장기로 칠한 영국군 블렌하임 (경)폭격기인데, 우리 포로 중 하나가 블렌하임 조종사 출신인 거야. 그 친구가 저 비행기를 탈취해서 호주로 튀자는 거야. 넷이 탈 수 있어. 그런데 눈치챘어. 넷이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일본 조종사가 리볼버 권총을 꺼내서 겨눴는데, 깜짝 놀랐어. 완벽한 영어로 ‘꿈도 꾸지 마.’ 그래. 다 들은 거지. 미국식 억양이었어. 바로 폭격기에 오르더니 다른 곳으로 몰고 가 주기하더라고. 분명히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외국에서 태어난 일본인을 니세이라고 불러. 미국 국적인 그들은 국가를 배신하고 일본제국을 위해 싸우러 간 자들이지.”
[주 : 니세이(nisei)는 2세. 3세는 산세이. 당시 중남미나 미국 등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 3세를 일본인들이 그렇게 불렀다.]
다시, 맥카티 무리는 철도 화물칸에 올라 16시간을 갔고, 도착한 곳은 자바 동쪽 소에라바자. 거기서 몇 달 있었다. 여기서 맥카티도 개인적인 비극을 경험한다. “한 보초가 원숭이를 애완동물로 키웠는데, 그 원숭이에게 경례하라는 거야. 우릴 능멸하려는 거지. 내가 거부했더니 날 때렸고, 보초 여섯이 더 와서 집단으로 구타했어. 난 정신 잃었어. 나중에 동료들에게 들으니, 꼴 보기 싫으니 저리 끌고 가라고 해서 끝났대.”
포로에게 주는 식량은 씻지도 않은 더러운 쌀과 수수가 주였고, 가끔 반 썩은 고구마도 줬다. 쌀은 벌레가 끼어 심하게 감염되었고, 밥을 하면 ‘작은 친구들’이 위에 떠다녔다. 더 많이 끓이면 벌레가 녹아서 포로들은 ‘구더기 수프’라 불렀다. “그래도 단백질은 있잖아? 하면서 먹었어. 아무 맛도 없었기에 오렌지 껍질을 조미료처럼 썼어. 여우, 박쥐, 도마뱀, 쥐를 잡아서 요리하거나 말려서 가죽 씹듯이 먹었어.”
포로는 영국군, 호주군, 인도네시아인도 있었다. 맥카티 소위는 인도네시아 포로들의 연합군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했으나, 일본군이 규칙 위반한 인도네시아 포로 몇에게 가하는 형벌을 보고 의심을 거뒀다.
“인도네시아인을 두들겨 패고 머리를 삭발로 밀어. 그리곤 목만 내밀고 땅에 묻어. 열대 태양 아래 그렇데 놔두니 파리 모기가 달려들어. 난 무기력하게 쳐다만 봤어. 어떻게 도울 방법도 없어. 3일 지나 죽었어.”
시간은 흐르고 매일 하루 버티는 것이 어마어마한 고난이었다. 이질로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다. 내장과 방광이 통제가 안 된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약은 너무 적었다. 맥카티는 어느 죽어가던 공군을 지켜보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 죽어가는 친구는 기력이 없어도 자기가 죽을 운명을 알아. 마을에 신부님이 있었는데, 복사 아이를 데려와서 성찬을 베풀었어. 성찬을 입에 넣은 그 친구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운명을 받아들였어.”
(주 : 성찬. 미사 때 입에 넣는 작은 밀떡 조각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맥카티 소위는 영국공군에 충성하는 군인으로서 일본군 보초에게 경례하길 거부하다 일도 치렀다. 보초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와 개머리판을 쳐들었다. 맥카티는 간단한 일본어를 섞어 장교가 병사 보초에게 경례할 의무는 없다고 설명하려 했으나, 보초는 개머리판으로 맥카티의 오른쪽 팔꿈치를 찍었고, 팔꿈치 뼈가 산산이 부서졌다. 일본인 의과대학생이 국소마취도 없이 부서진 뼈를 치료했다. 치료 과정에 맥카티는 온 정신이 아니어서 기억이 희미하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백정’이 핀셋으로 뽑아낸 뼛조각을 자랑스레 들어보고 있었다.
의약품 부족의 대가는 포로들에게 큰 문제가 된다. 평소에 듣지도 못했던 질병들이 부상한다. 결핵성 폐렴, 빈혈, 베리-베리(각기병), 암과 신장병, 이질 설사병 등. 많은 사람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사기는 돌맹이처럼 떨어졌다.
다시 이동, 컴컴한 수레에 올랐고 문은 빗장으로 잠긴다. 그렇게 22시간, 사람들은 밀실 공포에 떨었다. “그날 밤, 제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그거 타고 가다가 여럿 죽었고, 그 시신이 숨 막힐 듯한 고온에 빠르게 부패했어. 어둠 속에 송장하고 같이 가는 거야.”
도착한 곳은 자바섬 반둥이란 곳의 새 수용소, 전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게 습격한다. 한센병균이 돌고 말라리아가 목숨을 위협한다. 여기에 더해 신형 질병도 잉태되는데 – 알콜 중독이다.
맥카티는 아일랜드에 있는 삼촌의 주조장에서 일했었고, 그때 어떤 채소나 과일로도 알콜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익혔다. 고구마, 쌀, 바나나로도 만들 수 있었다. 과일을 얇게 썰어 설탕을 버무리고 이스트 약간과 지역에서 나는 콩을 섞고 물을 붓는다. 그렇게 10일 놔두고, 그걸 임시변통 장치로 증류했다. 도수 90도 증류주가 만들어지고, 그걸 다시 병에 담아서 2주간 묵힌다. 잔존물과 부작용이 있는 밀주였으나, 의료용 소독제로도 대체할 수 있었다. 맥카티는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다 중독을 경험한다.
반둥 수용소 활동은 유럽의 포로수용소들과 비슷했으나 6개월 지나 다시 기차와 트럭으로 이동한다. 바타비아에 도착한 포로들은 두들겨 맞으며 구 네덜란드군 병영으로 우겨넣어졌는데, 끔찍한 악명의 수용소가 된다. 이곳은 규칙을 조금만 어겨도 구타했고, 탈출 시도는 무조건 죽였다.
포로들이 계속 들어오는데 부상자와 시력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앞사람 어깨에 손을 얹고 들어온다. 네덜란드군은 군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군기가 없었다. “그 네덜란드군 포로들이 가장 더럽고 끔찍했어. 시력 잃은 사람이 너무 많아. 앞이 보이는 소수가 그들을 끌고 온 거야. 비타민 결핍 같았어.”
수용소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몇 개월 그렇게 지내다 다시 쪼개진다. 맥카티 소위는 바타비아의 항구로 걸어갔고, 영국군/미국군/네덜란드군 포로 1,200명은 화물선에 오른다. 노예를 적재하듯이 좁은 곳에 밀어 넣었다. 많은 포로가 배 안에서 죽었는데 해가 지기 전까지는 시체를 밖으로 들어낼 수가 없었다. 시신은 바다로 던졌다.
배 안에서 설사병이 광풍처럼 휩쓸고, 사족을 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공기가 안 좋았다. 공습이나 잠수함 경보가 주기적으로 울리며 해치들이 쾅 닫힌다. 포로들은 푹푹 찌는 어둠 속에 앉아 끔찍한 시간을 견디고, 어느 때라도 어뢰에 맞을까 두려움이 공존했다.
선단이 대만 해협을 지날 때 미국 폭격기들 공격이 있었다. 곧 류큐 섬에 도착할 즈음이었고, 당시 일본군 호위로 붙었던 구축함들은 모두 침몰했다.
항해 마지막 밤, 저 멀리 일본 본토가 언뜻 보였다. 일본에 도달하자 보초와 선원들이 술 마시고 노래를 불렀는데, 기분에 취해 포로들에게 술도 좀 나눠줬다. 맥카티와 동료들도 같이 노래를 불렀다. 적어도 이젠 안전하단 안도감이었다.
“그 전쟁 당시 유명했던 베라 린의 노래를 불렀지. 모두 취침하란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노래를 불렀는데, 마지막 노래가 ‘I will Be With You In’이었어. 직후 어뢰가 때렸지.”
“어뢰가 내가 있던 자리 바로 밑에서 터졌어. 배 용골이 박살 났지. 전등이 나가고 침몰하기 시작해. 난 구명조끼를 움켜쥐고 갑판으로 기어올랐어. 배는 코부터 대양으로 들어가는데, 고물이 자꾸자꾸 높아져. 배는 끝났어. 물로 점프했지. 난 침몰하는 배로 빨려 들어갈 줄 알았어. 수영으로 될 게 아니야. 기다렸지. 그 순간을.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 어, 내가 안 죽을 수도 있다?! 신에게 감사 기도를 시작했지. 그래도 물속이라 위험해. 난 마지막 힘을 달라고 신에게 부탁했어. 섬처럼 떠다니는 잔해를 잡았어. 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가득해. 저 멀리 어뢰 맞아서 불타는 유조선이 보여. 하늘에 별 참 유난했어.”
“새벽 동이 터오고, 사방에 시신들이 떠다녀. 그런데 여자와 애들 시신이야. 필리핀에서 소개되던 피난민 탄 배가 우리 배와 거의 동시에 어뢰에 맞은 거야. 한 어린애 얼굴을 내려다보는데 초점 없는 눈에 비명을 지르는 완전히 벌어진 입으로 고정된 채 죽었어.”
수온은 적당한 편이었지만 잔해에 매달린 모두는 흠뻑 젖었고 떨리는 피부들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일본군도 좋으니 구조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바다에 작은 난파를 붙잡고 살아 있었어. 그러다 하나씩 조용히 물로 들어가. 도와달라고 우는 목소리들이 들려.”
그 상태로 12시간이 지나 마침내, 맥카티 소위 무리 20명은 일본 구축함이 나타났다. 그래도 해군은 인간적이리라 생각했는데, 배 위에 오르자마자 준비한 듯이 체계적으로 포로들을 구타하고 배 밖으로 던졌다. (주. 일본군만 구조하려 한 것 같다) 어떤 포로가 맞아 정신을 잃은 채로 바다에 던져지면서 구축함 프로펠러 쪽으로 내려갔고, 사람이 사라지면서 빨간 물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제주도 쪽으로 수영하려 발버둥 쳤고, 그때 제주도까지 거리가 18마일이었다.
지나던 어선들이 함대처럼 나타나 포로들을 구조했고, 건져진 포로는 나가사키로 간다.
생존 포로 82명이 알몸으로 항구에 내려졌다. 그들은 나가사키 거리를 통해 걸었고, 어떤 포로는 임시 들것을 만들어 동료 포로들이 들었으며 지팡이도 짚었다. 의기양양하게 조롱하는 일본인들 속을 수치스럽게 걸었다. “그때 호주군 포로 몇이 손가락으로 ‘V’를 세웠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몰라. 하지만 그때는 우리도 반 미쳤던 것 같아.”
나가사키에 도착한 포로들은 항만 노동, 근처 산의 석탄 광산으로 배치되었는데, 항구에 새로 만드는 항공모함 작업에도 동원되었다. 새벽 5시에 종을 치면 일어나 포로들 정렬해 숫자 세고, 5시 30분에 쌀죽 먹고 광산으로 걸어간다. 오후 5시 반에 수용소로 걸어서 돌아오는데, 광산 감독자인 일본 민간인이 대나무 몽둥이로 포로 머리를 때린다. 밤 9시에 침상에 눕고,
“중세에 그린 지옥도야. 바로 잠드는 것이 세상 편하게 잊어.”
맥카티와 동료들은 그런 생활을 2년 반이나 했다. 사기란 것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상당히 쇠약하여 매 하루가 생존 전투였다. 일본군이 때리면 가-수면처럼 무관심한 상태로 들어간다. 하루하루 살기 위해 힘을 내야 한다. 그걸 실패하면 목숨을 잃는다.
1945년 봄, 포로들은 이번 여름을 견디고 생존할 수 있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견딘다 해도 다시 다가올 겨울. 그런 계절을 어떻게 버틸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하루하루 살려고 발버둥 친다. 45년이 되자 포로들은 심리적으로 포기하기 시작한다. 더는 어떻게 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게 아니었다면 포로들 모두 죽었을 확률이 높다.
1945년 여름, 미군 공습이 늘어난다. 맥카티는 생각 없는 한국인 간수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이오지마가 미군에게 넘어갔고 오키나와가 혈전으로 불타오른다는 소리다. 공습 사이렌이 울어 방공 참호에 들어갈 때마다 포로들은 미군 공습에 죽거나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부에서 결정하면 포로를 죽일 일본인들이었다. 광산 일을 끝내고도 수용소 주변을 둘러 1.5m 깊이 참호를 팠다.
포로가 죽으면 소각/화장했다. 재는 이름/계급/군번이 적힌 작은 항아리에 담아 보관했고, 2주마다 항아리들을 나가사키에 있는 천주교 성당을 납골당처럼 가져갔다. 맥카티도 이 납골 봉납에 참여했었다. 성당 제단의 빨간 석유등과 촛불을 기억한다. 맥카티와 포로들은 제단에 무릎을 꿇고 영어와 네덜란드어로 묵주기도를 암송했다.
포로들에게 땅을 더 파라고 명령해서 1.8m 깊이에 20평방피트 사각형으로 팠는데, 일본 목수가 와서 바닥에 마루 비슷하게 깔았다. 무슨 무덤인가 했더니 기관총좌를 만든 거였다.
1945년 8월 6일, 포로들이 힘겹게 일하고 있는데 미군 폭격기 50대가 나가사키로 날아왔고 직강하폭격기도 날아와 건조 중인 항공모함을 공격해 일하던 포로 몇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일은 중단되지 않고 거기 가서 치우는 작업을 했다.
8월 9일. 맥카티 소위가 기억하는 맑고 밝은 날. 저 하늘 위에 항적 8개가 보였고, 엔진 4개 달린 폭격기 두 대가 남쪽으로 향하다 다시 되돌아 나가사키로 다가온다. 맥카티와 동료는 방공호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 포로 몇은 방공호로 들어오지 않고 항적운을 바라만 봤다. (주. 실제로 원래 목표가 다른 곳이었으나 나가사키로 돌렸다.)
“한 명이 소리쳐. 작은 낙하산 세 개가 떨어진다고. 이어서 푸른색 빛이 번쩍했어! 원자탄 섬광이었던 거야. 그게 마그네슘 조명탄처럼 상당히 밝았어. 이어서 귀가 멀 정도의 폭발이 났고, 뜨거운 광풍이 하늘에 불어. 방공호는 벽이 콘크리트인데, 그 벽에 붙은 통풍구가 다다다다닥 흔들릴 정도로 땅으로 큰 진동이 와. 직후, 섬뜩한 고요가 왔어. 무한과 같은 지루한 틈이 있었고, 호주군 동료가 머리를 들어 사방을 봤는데, 곧바로 다시 방공호로 몸을 구부려. 얼굴이 백지장이야.”
마침내 포로들이 밖으로 나올 때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수용소가 사라졌다(The camp had disappeared). 나무 오두막들은 숯과 재가 되었고 시신이 사방에 널려 있다. 벽돌집인 보초 건물은 붕괴했다. 수용소 앞의 긴 계곡이 평평해졌다. 그곳에는 수용소 앞 풍경을 가리는 건물과 공장들이 있어야 했다. 오히려 공장 외에 숲은 물결 모양처럼 비비 꼬여 이상한 모양이었다. 수용소 정문 바로 앞의 미츠비시 회사 높은 건물에 젊은 여성 500명이 일하고 있었다.
맥카티. “건물이 폭탄에 맞았다고 생각했어. 300m 거리에 시신이 카펫처럼 깔렸어. 그게 마치 인형 공장처럼 그 모습 망각하기 힘들게 기묘했어. 사람들은 자는 것 같았는데, 옷도 불타지 않고 상처도 안 보여. 마치 공장 교대시간에 대기하다 쓰러져 잠든 것처럼... 가장 무서웠던 건 태양 빛이 줄어든 거야. 땅거미가 내릴 때 같이 좀 어두웠어. 그때 내 생각은, 세상의 끝이 왔다...”
맥카티와 생존자들은 계곡 북쪽의 야산을 오른다. 가는 길은 무섭고 두려웠다. 끝도 없이 이어진 불에 탄 광경, 피들, 뜯겨 떨어진 생살, 몸부림치는 사람들, 쓰러진 사람들은 일어설 수가 없다. 섬뜩한 박명에 수많은 곳의 화재. 다치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 사람 수천이 안전한 곳을 찾아 밀고 끌고 파고 기어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심판의 날(Judgment Day)에 다다랐다. 분노한 신이 일본의 죄악에 대해 황폐와 유린으로 답했다. 다만 실수로 우리까지 홀로코스트에 포함되었다.”
맥카티와 일단은 일본 비밀경찰에 의해 포위되었고, 수용소로 다시 걸어 돌아간다. 수용소에는 재가 된 포로들이 쓰러져 있었고 일부는 눈이 멀었다. 거기서 5일이 지나 포로들은 계곡에 있는 새 수용소로 걸어간다. 유해 태우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장작처럼 쌓인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 태웠다.
8월 15일 아침, 수용소에서 깨어난 맥카티는 일본 간수들이 모두 사라진 걸 본다. 그들은 두 시간 후에 돌아왔는데, 가장 좋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수용소장도 사무실에서 완전한 복장을 착용하고 나왔다. 정오에 호전적인 군가가 크게 울리더니 천황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모두 절을 하는 상태에서 천황은 항복한다고 말했다.
(당시 맥카티는 포로 중 진급하여 소령 신분이었다) 포로 무리에서 맥카티가 최선임 장교라서 책임자가 되었고, 맥카티는 나라별로 포로 최선임을 불렀다. 그들과 함께 수용소장을 방문한 뒤 종을 울려 모든 포로를 모았다. 맥카티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마어마한 뉴스를 전했다.
“울었다. 서로 껴안고 울었다.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기도 했다.”
수용소장은 항복의 뜻으로 장검을 맥카티에게 주어서 받았고, 맥카티는 수용소장을 보호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다. 포로 다수가 즉각 수용소장 목을 매달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위험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미군이 본토에 상륙한 것도 아니고, 많은 민간인이 어떤 짓을 할 줄 모른다. 맥카티는 수용소 경계근무를 편성에 게시했다. 미군이 오기 전까지 수용소를 떠나지 말라 했고, 일본 술 사케 마시는 것도 금지했다.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 미군병사들이 낙하산으로 나가사키에 뛰어내려 들어왔다. 그들은 맥카티에게 건물들 지붕에 ‘POW’라고 페인트로 칠하라 했다. 그 다음, 식량, 의약품, 옷이 공중에서 투하된다. 주변 현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다. 사람들이 서로 때리고 죽이며 굶주리는 홀로코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는 생존이었다.
신체 의무검사와 포로들 증언을 녹취하고, 해방 포로들은 배를 타고 마닐라로 가서 미군 병력수송선을 탄다.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갔고, 영국군 포로들은 거기서 5일간 열차를 타고 캐나다로 가로질러 영국 배 퀸메리호에 오른다.
제대로 된 치유와 대접을 받았지만 맥카티는 여전히 고통을 지울 수 없었다. 일본을 향한 쓰라린 감정이다. 일본은 종교와 문화가 전혀 달랐고, 마치 외계인처럼 포로들 행동을 부도덕하거나 나쁜 행실로 간주하고 처벌했다. 포로 동안 맥카티 자신이 살아온 세상 모든 게 부정되었다. 상처는 외상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있었다.
“몇 년 동안 긴 시련을 겪었는데 갑자기 사회 복귀가 된 거야. 영광과 명예는 몇 달 만에 끝나고 사회 적응이 닥쳐. 과거에 정상적이었지만 마음 내키지 않는 것이 생겨. 갑자기 문명과 재회한 거야. 내가 갑자기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할 사회야. 긴 시간 동안 난 하루만 살았어. 다음 날 깨면 또 하루만 살았지. 주기를 짧게 잡아야 내가 생존에 유리했거든. 그러다 돌아오니 생각의 주기를 길게 잡아야 해. 나를 살려준 기적을 준 신에게 감사해. 포로 동안 나를 위해 열렬히 기도해 줬던 마을 분들에게도 감사해. 그 강력한 기도를 신께서 들어주신 거지. 그러나 가장 큰 선물은 날 둘러싼 인생에 대한 진정한 평가야.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었고, 공기로 숨을 쉴 수 있으며, 고즈넉한 저녁에 나무 한 그루를 바라봐도 행복해. 아일랜드 위스키도 최고지. 아이들이 크는 걸 볼 수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회녹색 강에서 낚시도 하지. 이게 전부 하루하루를 새 인생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버릇에서 왔어.”
(잇빨 주 : ‘고통’으로만 표현할 뿐 피폭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아이단 맥카티는 이 이야기를 구술한 2년 뒤인 1995년 10월 11일 노스우드 자택에서 83세로 영면했고, 고향인 아일린드 웨스트 콕에 묻혔다. 아이단 맥카티는 사망 시점에 브랜디를 마시며 BBC 방송에서 녹음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끝]
잇빨 주 : 선전포고도 시간차로 늦게 하면서 자기들이 전쟁 일으켜 놓고 연합군 포로를 발가벗겨 행진시키고 능멸하는 적대행위. 모름지기 이 정도는 돼야 국민 세뇌다. 자기들이 피해자란 그 세뇌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전후를 그린 일본 영화는 미군이 술에 취해 일본 여성 농락하고 민간인 폭행하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억지로 만든 장면은 아닐 걸로 생각하지만, 자기들 남편 아버지 삼촌이 태평양전쟁에서 어떻게 했는지 모르니 당한 것만 악인처럼 그린다. 현재도 그렇다. 종전 직후 일본 주둔 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온갖 잔악 행위를 목격해 이가 갈리는 군인들이었다. 본 글처럼 동남아시아와 일본 본토에서 연합군 포로들 학대하고 죽인 건 빼먹고 무례하고 나쁜 미군으로 그린다.
깨어 있는 사람 있단 소리는 접대성 멘트고, 일본인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왜 원자폭탄 맞았는지 모른다. 태평양전쟁의 진실을 안 가르쳤고, 지금도 안 가르치고, 영원히 안 가르칠 거다. 그러니 식민이 무엇인지 정확한 개념도 모르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조차 모르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 읽어도 무슨 의미인 줄을 모른다. 이게 농담이 아니다. 이 카페에 오는 나의 군대 동기께서 미국에 스카이다이빙하러 갔다가 일본인과 역사 얘기하다 ‘그런 거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일본 애 팰 뻔했다. 그 일본 젊은이가 현재 50대일 거다.
JTBC 비정상회담에 나온 독일인이, 고등학교 때 의무적으로 폴란드 학살수용소로 수학여행 가서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 정도로 교육받았다는 얘기가 중첩된다. 그 사람 말로는 수학여행의 이유가,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지른 민족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였다고 한다.
세상 모든 역사책은 그 나라 국수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모든 역사책은 필요할 때 왜곡한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한국 역사책이다. 한국인 자신들끼리 냉철하게 비판한다. 옛날 어느 한국 유학생이 그랬다. 세계 각국 학생들이 모였는데 죄다 국수주의적 사관을 가졌다고. 타국 역사는 냉정하게 분석하는데 자기 역사 지적받으면 흥분한다고. 그 유학생은 나중에 한국 돌아가면 철저하게 국수주의적 역사책을 쓰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본 잇빨중사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개념을 역사적 지리적으로 흔한 탐욕이라고 보며, 붙어 있는 나라끼리 친한 경우 없고 유혈 학살 없던 곳 없으며 서로 정복하려 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일본을 국방 경제로 지구가 망하는 날까지 눌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을 망하게 하려고 경쟁해야 침략 안 당한다. 침략할 곳이 한국밖에 없다. 백인과 비슷한 급이면서 같은 아시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크게 부흥하면 역사는 반드시 재현된다. 타켓은 1,000% 한국이다. 이념, 민족 차별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 역사다.
국제화고 무엇이고 어느 친한파 일본 분의 말이 정답 같다. “한국인이 중국인 어떻게 생각하죠?... 네. 일본인도 한국인 그렇게 생각해요. 그걸 기본으로 더 좋아하고 더 싫어하는 사람 있는 겁니다.” 현재 일본에서 k-pop 듣는 세대가 50대가 되기 전까지는 큰 변화 없을 거다. 어떤 종류건 일본을 반드시 이기는 것이 비극적 역사의 반복을 피하는 길이다. 한반도에서 전쟁 나길 학수고대하는 나라가 딱 하나 있고, 그 나라는 통일도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리면 항상 북한 공포를 사용한다. 역사책은 이유도 없이 일본 미워하는 한국으로 만든다.
무수한 영웅을 탄생시킨 정복 침략은 겉으로 별 이유가 없다. 알렉산더는 그냥 그냥 쳐들어간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분명하다. “가만히 놔뒀다간...”
정신병자에게 당하고 당하면서도 한국인의 장단점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일본에 대한 그 ‘흔한’ 이웃 국가 침략 개념이 없다는 거다. 그러나 현재 출산율로 통일 없이는 정복은커녕 먹힐 확률 다분하다. 생존의 희망이 있다면 다인종국가? 저 포함 여기 대세 회원님들이 죽고 나서는 현재 형태의 대한민국은 불가능 자체다.
현재 귀하게 태어난 애들이 전부 결혼해서 2명 낳아도 보충 안 된다. 현 상태 대한민국은 우리만 즐기고 끝이다. 밤새 마시는 화려한 문화도 암울한 독재 후에 전두환 대통령이 통금 풀면서 '진짜 이래도 되나?' 시작된 것이고, 원래 대한민국에 그런 문화 없었다. 이건 역사적으로 단기간이 될 가능성 크고 - 누린 건 우리 아버지 세대와 나 같은 세대다. 백인 선진국들처럼 자영업은 줄어들고 야간이면 닫으며 외식은 무척 비싸져서 밤에 못 즐길 거다. 출생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여파는 우리 다음 세대/다음 다음 세대가 제대로 맞는다.
헌법 개정되어 전혀 다른 대한민국이 되거나 사라진다. 국가 파워가 유지되려면 출산율 2.1 이상이어야 한다. 국가 존속 대체율이라고 한다. 현실은 0.7? 아이러니하게 북한도 우리보다 약간 높지만 출산율 저조하다. 대한민국을 기하급수적 소멸이라 하는 건 기본 인구가 적은 나라이기 때문이며, 중국과 일본은 현재 우릴 노리며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게 흔한 역사적 ‘전략’이다. 존속 방법은 국방력이 UFO 수준으로 완전 자동화 인공지능화되거나 북한을 점령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할 것 같은 평화 무드를 맹신해서 그렇지, 특이한 게 아니다. 우리도 침략하지 않으면 "가만히 놔뒀다가..." 그러나 자랑스럽게도 "우린 착하니까..." 충격적 변화를 두려워하는만큼 우리 소멸 확률은 높아진다. 극보수적으로 말해서 대한민국의 존속을 바란다면 뭐든 해야한다. 유혈이 아니라도 문화적 침략을 더 조직적으로 해야 한다.
2040년대면 애들이 없어 대한민국 군대 30만도 유지 힘들어.
그 전에 쇼당이 없으면 우리가 먹힐 가능성 크다.

첫댓글 오천년동안 싸웠고
앞으로 오천년동안 싸울것은 당연함.
에이단 맥커티장군님이 물이, 흙이, 연기가 되어버린 동료들의 하루하루를 대신하여 살아서 역사의 증인이 되신 모습이 아련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 역사의 현장들에 계셨다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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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진에 나오신분 옷을
알아보니 해군에서 착용하는
피코트라는 수병옷이더군요
여차 여차해서 저렴하게 중고 피코트
입양 했는데 왜 이렇게 무거운지
세탁후 그냥 장농 속으로 직행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