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추자도 최영 동백나무
고려 25대 충렬왕 2년인 1276년이다. 원나라는 제주의 삼별초를 평정한 뒤 몽고말 160필의 목장을 세우고 사육전문가 목호를 두었다. 점차 목장도 14개로 늘어나 제주도 인구 2만여 명일 때 목호는 1,700여 명에 이르렀다.
1352년 즉위한 31대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폈다. 이에 목호들은 수차례 고려에 반기를 들었다. 원이 명에게 쫓겨난 북원 시절인 공민왕 1369년에도 반란을 일으켜 고려 관리를 죽였다. 고려가 명나라에 탐라의 연고권을 주장한 1372년 3월과 4월에도 반란을 일으켜 제주목사 겸 만호 이용장, 명에 바칠 말을 가지러 간 비서감 유경원과 고려 병사 300명을 죽였다. 그리고 목호 석가을비와 초고도보개는 제주 동서 목호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몽골 황제의 명이 아니고서는 명에 말을 보내려는 간택에 응할 수 없다’고 큰소리쳤다.
1374년이다. 명은 임밀과 채빈을 사신으로 보내 북원을 치는데 필요한 말 2천 필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고려 조정이 말을 가지러 갔지만, 이번에도 목호들은 ‘이 말들은 세조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풀어 기른 말이다. 적국인 명나라에는 줄 수 없다.’며 3백 필만 가져가라 했고, 명의 사신들도 ‘2천 필이 아니면 여기서 죽겠다’고 뻗댔다.
마침내 공민왕은 제주도 목호의 무력 진압을 결정했고 총사령관은 최영이었다. 이때 고려군은 25,605명이었고 타고 갈 전함 314척은 모두 왜구에게 빼앗은 전함이었다.
공민왕 앞에서 출정식을 치르고 8월 초에 정벌군은 나주 영산포에 이르렀다. 이어 진도를 거쳐 추자도에 들렀다. 8월 28일 마침내 목호 지도자 석질리필사의 기병 3천이 진을 친 제주 명월포(한림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고려군은 기세를 올려 어름비, 밝은오름, 검은데기오름 등으로 30여 리를 쫓아 밤낮으로 전투를 치렀다. 이에 목호들은 서귀포 남쪽 범섬으로 달아났다. 최영은 빠른 배 40척으로 범섬을 포위하고 정병을 거느려 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호 무리를 가차 없이 격파하고 샅샅이 찾아내 모두 죽여 시체가 들을 덮었다.
한 달여 만에 목호 무리를 정벌한 고려군은 9월 22일 제주 명월포를 나왔으나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출항 추자도에 이르렀으나 다시 풍랑에 갇혔다. 10월 5일에야 겨우 추자도를 나와 소안도, 보길도, 진도를 거쳐 11월 3일 목포 해안에 도착했다.
당시 최영 고려군의 발을 묶은 추자도는 강풍을 피하고, 순풍을 기다린다는 뜻에서 후풍도(後風島)라 했던 바람의 섬이다. 또 추자도는 가래나무 열매(楸子)를 바다에 뿌려 놓은 모습이어서 얻은 이름이라는 말도 있다.
1801년이다.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가 천주교 박해로 관노가 되어 제주로 유배 갈 때이다. 정난주는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이 평생 노비로 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뱃사공과 나졸을 설득했다. 아기가 죽은 것으로 하고 추자도에서 해어졌다. 마침 바위에 놓고 간 아기를 주민 오상선이 거두었다. 황경한은 가정을 이루어 두 아들을 낳았고, 정난주가 피눈물로 아기를 두고 간 곳에 십자가를 세웠으니 바로 ‘눈물의 십자가’ 유래이다.
또 여기 최영대장신사는 장군이 목호의 난 진압 때 풍랑에 갇혀 머물며 그물을 엮어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 데 대한 고마움으로 세운 사당이다. 원시적인 어로에서 벗어난 주민들은 조국도통대장 최 장군 신위를 모시고 봄가을 제사를 올리며 은덕을 기렸다.
이 섬에서 가장 신성한 이곳을 동백나무가 지키고 있다. 뭍이건 섬이건 숱한 민초들의 한 맺힌 슬픔과 고통이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흰 동백꽃송이에 마음이 울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