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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등장한 뒤에도 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업체들은 자전거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자전거 대회를 열었다. 최초의 자전거 경기는 1869년 5월 31일 파리 생 클루(Saint-Cloud) 공원에서 개최됐다. 이 대회는 페달형 자전거를 만든 미쇼사가 후원했다. 우승자는 영국 청년 제임스 무어(James Moore)였다. 그는 1200m 경주에서 프랑스 선수 두 명을 20m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1869년 11월 7일에는 파리에서 루앙까지(Paris-Rouen) 123km를 달리는 도로 경기가 열렸다. 1백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는데 여성도 여섯 명이나 있었다. 최초의 도로 경기라 할 수 있는 이 대회 역시 미쇼사가 주관한 것으로 그때까지 열린 대회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대회 코스는 폐허처럼 황량했고 참가자의 3분의 2가 도중에 포기할 정도로 경기가 힘들었다. 제임스 무어는 10시간 30분 만에 완주해 이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모두 30명가량의 선수가 24시간 안에 완주했고 루앙의 자전거 클럽 회원들이 우승자를 맞이하러 나왔으며 관중들도 선수들을 열렬히 환호했다.
자전거가 보급되면서 자전거 경기가 꾸준히 인기를 얻자 1900년 유럽의 몇몇 자전거경주협회 대표들이 제네바에 모여 국제사이클연맹(Union Cycliste Internationale, UCI)을 설립했다. 이후 국제사이클연맹은 세계의 사이클 경주를 주관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전거는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훨씬 큰 형태로 발전했다.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는 거리는 앞바퀴의 지름에 비례하기 때문에 속도를 높이려면 앞바퀴를 최대한 크게 만들어야 했다. 1970년 영국의 제임스 스탈리(James Starley)는 동료인 윌리엄 힐먼(William Hillman)과 함께 앞바퀴가 큰 자전거를 만들어서 특허를 받았다. 스탈리는 이 자전거에 '아리엘(Arie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앞바퀴가 큰 형태의 자전거를 '하이 휠(High Wheel)' 자전거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이 자전거는 '오디너리(Ordinary)'와 '페니 파딩(Penny-Farthing)'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니와 파딩은 영국의 화폐인데 1페니 동전은 4파딩이었다. 커다란 앞바퀴와 작은 뒷바퀴를 동전에 비유한 것이다. 하이 휠은 빠른 속도를 원하는 대중들의 욕구에 맞춰 앞바퀴가 더욱 커졌다. 앞바퀴가 60인치나 되는 것도 있었다. 오늘날의 자전거 바퀴가 26~27인치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이 자전거는 상당히 빨라서 경주용이나 여행용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이 휠은 1870년대의 표준 자전거로 자리를 잡았고 유럽, 북미 등으로 널리 보급됐다. 자전거 클럽이 활성화되고 자전거 인구도 크게 늘어 영국의 자전거 산업이 번창했다. 코번트리, 버밍엄, 맨체스터 등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자전거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영국은 세계 최대의 자전거 생산국이 됐고 1870년부터 1900년까지 세계 자전거 산업의 중심지였다.
영국의 자전거 산업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바로 '자전거 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스탈리'다. 그는 하이 휠로 특허를 받은 데 이어 세 바퀴 자전거인 트라이시클(Tricycle)을 만들어냈다. 또 차동기어와 속이 빈 프레임, 바퀴살이 교차하는 탄젠트 스포크 등을 개발했다. 스탈리는 코번트리의 자전거 제조업자들 사이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었다. 자전거 산업의 경쟁이 치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51세에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했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적이 아무도 없었다.
하이 휠은 빠르고 우아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안전 문제였다. 앞바퀴가 커질수록 자전거가 높아져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타고 내릴 때도 아주 위험했다. 자전거에서 굴러 떨어져 부상을 당할 위험도 컸다. 이런 점 때문에 하이 휠은 젊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가격도 비싸 중상류층이 아니면 구입하기가 어려웠다. 여성이나 노인은 아예 하이 휠을 탈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대신 안전한 트라이시클을 주로 탔다.
하이 휠 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시드니 웨브(Sidney Webb) 부부와 함께 웨브의 시골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시드니 웨브는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였으며 그의 부인 베아트리스 웨브(Beatrice Webb) 역시 유명한 여성 사회학자였다.
버나드 쇼는 집 근처에서 오래된 하이 휠을 발견하고 그것을 타기로 했다. 그는 자전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쇼는 그 자전거를 끌고 집 근처 언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그는 키가 컸기 때문에 하이 휠 자전거를 잘 탔다.
시드니 웨브는 창문을 통해 버나드 쇼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자전거를 타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며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자기도 한번 타보고 싶다고 쇼에게 소리쳤다. 쇼는 웨브를 보고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는 웨브가 키가 작아 하이 휠을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웨브에게 한번 타보라고 부추기며 그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상상하며 좋아하고 있었다.
쇼가 웨브를 안장에 막 태우려는 순간에 웨브의 아내가 그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아주 엄격하고 신중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집 밖으로 뛰쳐나와 그들에게 경박하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웨브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의 부인 역시 쇼를 놔두고 가버렸다. 베아트리스는 당시 유명한 사회학자로 지식인 여성이었지만, 그녀조차 하이 휠을 위험하고 경박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하이 휠 전성기에도 바퀴가 큰 이 자전거는 일부 부유한 사람들이나 남성들이 타는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다. 가격도 비싼 데다 아주 위험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노인과 여성들은 하이 휠보다 훨씬 안전한 트라이시클을 더 선호했다. 제임스 스탈리는 1877년 트라이시클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트라이시클은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이 스탈리가 만든 트라이시클을 사면서 아주 유명해졌다. 1881년 6월 여왕이 영국 남부의 와이트 섬 별장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여왕이 오후에 마차를 타고 밖으로 나왔는데 마차 앞에서 어떤 젊은 여성이 반짝이는 바퀴가 달린 기계를 타고 달리는 것이 보였다. 그때 앞에 가던 여성은 여왕의 마차가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힘껏 페달을 밟아 속력을 냈다. 여왕의 마차는 이 여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여왕은 그 여성이 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가 사라지는 바람에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여왕은 젊은 여성이 타는 기계가 무엇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왕실은 그 여성이 누군지 알아냈다. 그녀는 미스 로치였다. 로치 양은 그 지방에서 스탈리 자전거의 대리점을 운영하는 사람의 딸이었는데 아주 근대적인 여성이었다. 당시 그 섬에서는 트라이시클과 자전거가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트라이시클을 널리 알리기 위해 딸에게 가능하면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니라고 했다. 여왕은 그녀를 불러 트라이시클을 타는 시범을 보여 달라고 했다. 미스 로치가 자전거 타는 것을 본 여왕은 즉시 트라이시클 두 대를 주문했다.
그리고 자전거를 배달할 때 반드시 그것을 발명한 사람이 함께 오도록 지시했다. 스탈리는 급히 그 지방의 대리점에서 자전거를 배달하고 여왕을 알현했다. 여왕은 그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의 발명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레오폴드(Leopold) 왕자도 곧 이 자전거를 타게 될 겁니다."
여왕은 방문 기념으로 스탈리에게 가죽 케이스에 든 은시계를 선물했다. 스탈리는 여왕을 알현한 사실을 감격해 하며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몸 둘 바를 몰라 '여왕 폐하 영광입니다' 하고 말할 때 고개를 너무 많이 숙이는 바람에 거의 넘어질 뻔했다오. 그때 한 신사가 나를 안내했는데 놀랍게도 왕자님께서 다가와 트라이시클 타는 방법을 설명해달라고 했다오."
스탈리가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자 왕자는 매우 좋아했으며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여왕이 구매한 자전거의 이름은 '살보(Salvo)'였는데 스탈리는 자전거의 이름을 '로알 살보(Royal Salvo)'로 바꿨다. 살보가 영광스러운 '왕립'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실제로 여왕이 트라이시클을 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왕이 트라이시클을 구매한 것은 자전거 붐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여성이 자전거 타는 것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었을 때 여성들은 여왕이 자전거를 구입한 것은 분명히 자전거가 여성들에게 이롭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 트라이시클은 엘리트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트라이시클 단체가 생겨나기도 했다. 트라이시클을 타는 사람들 중에는 왕자와 공주 그리고 귀족들이 포함돼 있었는데 이들은 다른 자전거를 타는 사람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위험한 하이 휠 대신 안전한 자전거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짐에 따라 하이 휠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차체가 낮고 체인으로 뒷바퀴를 돌려서 굴러가게 하는 자전거였다. 체인을 사용해 뒷바퀴를 돌리면 더 이상 앞바퀴를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이런 자전거는 앞바퀴가 큰 하이 휠보다 훨씬 안전했기 때문에 세이프티 자전거(Safety Bicycle)라는 이름이 붙었다.
1885년 새로운 세이프티 기종의 자전거가 선을 보였는데 바로 제임스 스탈리의 조카인 존 켐프 스탈리(John Kemp Starley)가 개발한 '로버(Rover)'라는 자전거였다. 이 자전거는 앞바퀴와 뒷바퀴의 크기가 같고 차체가 낮았다. 또 체인과 기어를 사용해 뒷바퀴를 돌리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로버는 안전하고 조종하기도 쉬웠다.
이 자전거는 몇 차례의 개량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타는 자전거와 같은 형태로 발전했다. 먼저 로버 세이프티는 다이아몬드 프레임(Diamond Frame)을 사용했다. 삼각형 두 개로 이뤄진 이 프레임은 구조적으로 가장 튼튼한 형태로 꼽힌다. 이어 로버는 존 던롭(John Dunlop)이 개발한 공기타이어를 장착했다. 공기타이어는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로버 세이프티의 명성을 높여줬다. 로버는 차체가 낮아 공기저항도 적었기 때문에 속도도 빨랐다.
로버는 대성공을 거뒀다. 새로 자전거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신형 로버 세이프티를 샀다. 로버는 곧 하이 휠 자전거를 대체했다. 세 바퀴 자전거를 타던 상류층 여성들도 새로 나온 세이프티 자전거를 샀다. 여성들은 세이프티의 주요 고객이었는데 이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여성들이 자전거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이프티는 전통적인 자전거인 하이 휠을 제치고 확고한 지위를 차지했다. 앞바퀴가 큰 하이 휠은 쓸쓸히 퇴장했다.
세이프티 자전거는 누구나 쉽게 탈 수 있는 자전거가 됐다. 하이 휠이 부유한 사람들의 자전거였던 것과 달리 세이프티는 '가난한 사람들의 말'이 됐다. 자전거는 등장한 지 한 세기 만에 마침내 인류의 발이 됐다.
공기타이어의 발명은 자전거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벨파스트에 사는 스코틀랜드의 수의사 존 던롭은 아들에게 선물로 준 나무 트라이시클이 더 잘 굴러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는 고무 튜브에 압축 공기를 가득 채운 타이어를 생각해 냈다. 그가 수의사용 고무장갑을 끼다 영감을 얻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들이 트라이시클을 타는 것을 보고 착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튜브를 만들어 공기를 주입한 뒤 그것을 바퀴에 붙였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자신이 새로 만든 공기타이어가 부착된 자전거를 아들에게 타보라고 했다. 던롭의 아들은 집 주위의 울퉁불퉁한 길에서 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를 탈 때 생기는 심한 진동 문제가 마침내 해결됐고, 1888년 2월 '던롭' 상표가 등장했다.
이듬해 한 무명 선수가 이 새로운 타이어를 장착하고 벨파스트에서 열린 자전거 대회에서 잇따라 우승을 차지했다. 공기타이어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이 제품에 감동한 아일랜드 출신의 자본가 하비 듀 크로스는 던롭을 설득해 자신에게 제품 판매권을 팔도록 했다. 두 사람은 공기타이어 회사를 공동 설립한 뒤 영국의 자전거 시장에 공기타이어를 공급했다. 오늘날까지도 던롭은 미쉐린(Michelin)과 더불어 타이어 산업의 선두적인 기업으로 손꼽힌다.
프랑스 작가 폴 푸르넬(Paul Pournel)은 이렇게 말했다.
"안장뿐 아니라 프레임이나 타이어, 타이어 속의 압축된 공기는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줍니다."
로버 세이프티의 성공으로 자전거는 전 세계로 확산됐고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1890년대에 자전거 붐이 일어났는데 이때를 '대유행기'라고 부른다. 자전거는 실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자전거는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서민의 발이 됐으며 값싼 여가수단이 됐다. 장거리 여행도 가능해졌다. 자전거를 타는 여성도 크게 늘었다.
대유행기 이후 자전거의 값이 떨어진 데다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이 높아지면서 노동자들도 쉽게 자전거를 살 수 있게 됐다. 누구나 자전거를 살 수 있게 되면서 가난한 사람들도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이 같은 자전거의 특성 때문에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자전거를 사회적인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버나드 쇼는 자전거가 이런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라기보다는 효과적인 운동기구로 건강을 위한 만병통치약이라고 말했다.
대유행기를 거치면서 자전거 산업은 크게 번창했다. 영국 노팅엄에 있는 롤리 자전거 회사(Raleigh Cycle Company)는 자전거 산업의 선두주자였다. 롤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전거 회사가 됐지만 그 시작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었다. 롤리의 신화는 한 젊은 변호사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됐다.
1880년대 후반 영국의 젊은 변호사였던 프랭크 보든(Frank Bowden)은 홍콩에서 영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슬픈 여정이었다. 보든은 홍콩에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건강을 해쳤다. 의사는 그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영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보든은 아직 젊었고 살려는 의지가 강했다. 의사는 건강을 회복하려면 자전거를 타라고 했다. 그는 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전거를 탔는데 6개월 후 건강을 되찾았다.
보든은 자신이 탔던 자전거를 만든 사람을 찾아 나섰다. 1887년 그는 노팅엄의 롤리 거리에서 작은 작업장을 찾아냈다. 그곳은 불과 열두 명의 기술자를 데리고 한 주에 석 대 정도의 하이 휠 자전거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보든은 그 공장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 회사와 그곳에서 만든 자전거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바로 자본을 투자하기로 했다. 1888년 동업자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경영권을 맡겼고 그는 공장을 확장했다. 이어 그는 회사 이름을 '롤리 사이클 회사'로 바꾸고 그 회사의 사장이 됐다.
롤리사는 자전거 붐을 타고 처음 3년 동안 큰 이익을 냈다. 그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롤리사에서 만든 자전거는 곧 세계 최고의 제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1896년 롤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전거 회사가 됐다. 그 후에도 롤리는 다른 자전거 회사를 사서 기업을 확장 했다. 롤리사는 자전거 붐을 타고 빠르게 성장했다. 보든은 대리점을 개설하기 위해 전 세계를 여러 차례 여행했는데 이런 경험 때문에 영국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19세기 말 자전거 대유행기에 영국과 미국의 산업에서 자전거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자전거 산업이 커지면서 다른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는 불평까지 나왔다. U.S 플레잉 카드사(U.S Playing Card Company)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람들이 자전거에 너무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다른 업종은 침체를 겪었다. 구두 제조공들은 앉아서 놀았다. 사람들이 더 이상 걸어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피아노 제조업체의 매출도 절반으로 떨어졌고 보석 상점은 텅텅 비었다. 한 모자 제조업자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쓰든 안 쓰든 1년에 모자 하나를 사도록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의회에 요구하기도 했다."
자전거 대유행기가 시작되면서 자전거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자 인기 있는 스포츠 레저 수단이 됐다. 그러나 19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자전거의 강력한 경쟁자인 모터사이클과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자전거 대유행기가 막을 내렸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시대가 시작됐다. 그 후 오랫동안 자전거는 주류 문화에서 밀려났다. 자동차 문명을 이끈 것은 미국이었다. 자동차 시대를 개척한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는 자동차 시대를 이렇게 예고했다.
"자전거는 여가이자 유행이었다. 자동차는 여가이지만 결코 유행은 아니다."
헨리 포드의 말은 자전거가 일시적인 유행에 그쳤다는 뜻이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1908년 포드 자동차는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연 '모델 T(Model T Automobile)'를 내놓았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는 부자만의 것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생산 첫해에 850달러였던 '모델 T'는 대량생산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가격을 대폭 낮췄고 1925년에는 250달러까지 떨어졌다. 보통 사람이 자동차를 갖는 시대가 됐다. 미국인들은 자동차가 없으면 살 수 없게 됐다. 정부는 도로 건설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고 미국에는 운전자보다 자동차 수가 더 많아졌다.
그러는 사이 자전거는 점차 잊혀갔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에 이미 자전거가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그 후 1960년대까지 미국인들은 자전거를 멀리했다. 어른이 자동차를 타지 않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1967년 미국의 한 학생은 이런 글을 썼다.
"영국은 우리보다 뒤떨어진 나라이다. 사람들 절반은 아직도 자전거를 탄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값싼 교통수단이자 좋은 운동기구라는 이유로 자전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는 자전거 대회가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세계 자전거 산업은 유럽이 주도했다.
20세기 들어 자전거의 소재와 부품이 발달하면서 자전거의 성능이 크게 개선됐다. 특히 우수한 변속기어가 많이 개발됐는데 이런 기어 덕분에 언덕을 오르기가 더 쉬워졌다. 20세기에는 몇 가지 새로운 자전거가 등장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누워서 타는 리컴번트 자전거(Recumbent Bike)였다.
1930년대에 프랑스에서 개발된 이 자전거는 유선형의 형태 때문에 공기저항이 적어서 아주 빨랐다. 또 등을 기대거나 누워서 타기 때문에 아주 편했다. 그러나 국제사이클연맹은 안전 문제를 이유로 이 자전거를 인정하지 않고 대회 출전을 금지시켰다. 오늘날까지도 리컴번트는 공식 자전거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 리컴번트는 한동안 잊혔다가 3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1960년에는 바퀴가 작은 소형 자전거 붐이 일어났다. 소형 자전거 붐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영국의 알렉스 몰튼(Alex Moulton) 박사였다. 그는 바퀴가 작고 휴대하기 편한 몰튼 자전거를 내놓았는데 이 자전거의 영향으로 소형 자전거가 널리 확산됐다. 소형 자전거는 도시 교통문제에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바퀴가 작은 자전거는 도시에서 타기에 아주 편했고 무엇보다 대중교통 수단과 연결해서 이용하기가 좋았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미국에서 새로운 자전거가 탄생했다. 바로 BMX와 산악자전거다. BMX는 어린이들이 타던 자전거에서 시작됐는데 모험심이 가득한 젊은이들이 거리와 스케이트 파크에서 이 자전거를 타면서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켰다. 1970년대 초에는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이 산에서 타던 자전거가 산악자전거(Mountain Bike)로 발전했다. 산악자전거는 처음에는 산악지대나 비포장도로에서 타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튼튼하고 타기에 편했기 때문에 점차 어디서든지 탈 수 있는 전천후 자전거가 됐다.
1970년대 들어 거의 모든 산업 부문에서 알루미늄과 티타늄이 사용됐는데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1980년대부터 자전거 산업에서도 대대적인 소재 혁명이 일어났다. 가볍고 튼튼한 알루미늄에 이어 티타늄과 카본이 자전거 소재로 쓰이기 시작했다. 부품과 소재가 발전하면서 자전거는 뛰어난 성능을 가진 첨단 제품으로 거듭났다.
1970년대에 석유 파동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특히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환경오염에 영향을 주지 않는 자전거에 눈을 돌렸다. 환경운동가와 사상가는 자전거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사상가 이반 일리히(Ivan Illich)는 "자전거는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결코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자전거 챔피언 펠리체 지몬디(Felice Gimondi)는 "자전거 타기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기계 문명이 날로 발달하는 요즘 자전거를 타는 문화는 시대를 역행하는 흐름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자전거는 시대를 앞서가는 노력의 산물이자 많은 사람이 뒤섞여 생활하느라 혼잡해진 도로의 제약을 넘어서기로 마음먹은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의 표현이다."
21세기 들어 자전거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바야흐로 자전거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자전거는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영국의 작가 H. G. 웰스(Wells)가 말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른을 보면서 인류의 미래가 비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첫댓글 와우 넘 좋은 정보네여.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