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터 공부모임에서 집단학습을 했던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를 읽고
전맹인 시라토리는 극도의 약시로 태어나서 색을 본 기억이 거의 없고 색은 개념으로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색은 시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얀색이니 갈색이니 파란색이니 하는 이름이 붙은 시점에 개념적이기도 한다. 각각의 색에는 특정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걸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그 특징적인 이미지로) 이해하고 있다. 전자파나 미생물도 모든 곳에 우글우글 있다는 사실까지는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목격할 수는 없기에 어디까지나 개념상의 존재인 것이다. (21쪽)
같은 그림을 보았는데, 왜 이토록 인상이 다를까.
그건 아무래도 보기의 과학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시각이라면 눈과 시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뇌와 관련된 문제라고 한다. 오래전, 사물을 보는 행위는 오늘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과 비슷할 만큼 닪순한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점점 보기가 얼마나 복잡한 행위인지 밝혀졌다. 사물을 보는 행위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전에 축적된 지식과 경험, 즉 뇌 내의 정보다. 우리는 풍경이든, 예술이든, 사람의 얼굴이든, 전부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기초해 해석하고 이해한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 등 데이터베이스를 정교하게 이용하면서 눈앞의 시각정보를 뇌에서 취사선택하고 보정하여 이해한다. 더 나아가 과거의 기억정보에 기초하여 눈앞의 사물을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판단한다. 과거에 정신적으로 나를 괴롭힌 직장동료와 닮은 사람을 보기만 해도 공연히 불쾌감이 치미는 것은 그 때문이다. (25~26쪽)
작품을 보는 방식은 단 하나가 아니라 보는 사람 수만큼 존재하며, 또 시대에 따라 그 해석과 가치도 달라진다. (96쪽)
눈이 보이는 사람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작품을 관람해보면, 자신의 고정관념과 착각을 자주 깨닫게 된다. 보통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방대한 시각 정보에 노출되며 생활하는데, 세세한 정보까지 전부 뇌에서 처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눈은 필요한 부분에 주목하여 필요한 정보만 취사선택한다. 그와 동시에 필요하지 않는 부분은 시야에 들어와도 뇌에서 처리하지 않는다. 선택적 주의라고 불리는 일종의 인지적 편향이다. 인지적 편향을 증명한 것이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다. 패스 횟수를 헤아리라고 지시하지 않은 경우에는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고릴라를 보았다고 답했다.
우리는 통상적이니 보기는 무척 변변찮다. 보도록 조정된 것, 즉 봐야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시간이 흘러간다. 눈은 의미 혹은 기호에 반응하는 것이 되었으며, 그러면서 보기에서 야성이 결여되고 있다. 보이는 것에 어떠한 표준을 고정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보이는 것에 세계라는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런 효율성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인 듯싶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평소에 사용하는 뇌의 취사선택 기능이 꺼지고, 우리의 시선은 말 그대로 작품 위를 자유롭게 헤매며 세세한 부분에도 눈길을 준다. (153~155쪽)
***우리는 개념을 세상을 바라본다. 어떤 개념을 공부하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고 실천도 변화합니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집단주의가 아닌 전체주의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을 포함한 미.일.유럽 등은 민주주의(표방하는 측면이 매우 강하고 평시에는 전체주의 모습)로 북한을 포함한 사회주의를 집단주의가 아닌 그냥 전체주의로 봅니다.
자본운동법칙에 따라 세계정세 파악을 신제국주의와 신식민지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자유주의 관점에서는 다른 국가와 관계를 조금 불평한 관계 정도로 파악합니다.
경제에서도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여 잉여가치에 의해서 산업자본, 금융자본, 토지자본 등으로 배분한다면 당연히 노동자를 포함한 민중은 보다 공정한 분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에 댓가로(실은 노동력의 댓가?) 임금, 자본가는 생산수단의 소유댓가로 이윤, 토지소유자는 지대로 분배가 된다고 주류경제학에서 배운 것처럼 개념 정리가 되어있으면 공정한 분배를 위한 파업 등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똑같은 현상을 다양한 관점에 따라 다르게 봅니다. 이는 개인의 삶의 경험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교육이나 언론 등을 통해서 시대모순을 바라보고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다양한 진보적인 조직이 있어서 여기에서 정기적인 총화 시간을 갖는 속에서 함께 모순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뇌는 취사선택을 하기에 많은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봤던 것을 토론과 논의를 통해서 종합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안전지대에서 빠져나가 세계를 더듬더듬 헤아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자신이라는 존재의 삶을 손에 넣는다. 그러는 사이에 황야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거친 황야가 안락하고 지내기 좋은 장소로 바뀌는지도 모르겠다.
아슬아슬한 탈선을 하자. 모르는 사이에 우리 내면에 똬리를 튼 빡빡한 규범의 바깥으로 용기내어 한 발 나가 자기 규제를 해제하면, 예전에는 탈선이었던 일들이 조금씩 허용 범위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보통과 정상과 당연의 영역이, 다르게 표현해 편안한 삶의 폭이 넓어진다.
시대와 사회의 흐름, 변해가는 상식과 규칙 속에서 규범과 탈선은 항상 격렬하게 힘 싸움을 벌이고 있다. 휠체어와 유아차-버스탑승: 교통권 기본적 권리를 매너, 규칙, 감사, 배려 같은 것들이 얽힌 문제로 바꿔치기 하는 논의가 얼마나 많은가. (239~241쪽)
***우리는 사회의 다양한 법과 제도 등 규칙에 따라 생활합니다. 그런데 이런 규칙이 다수의 민중의 삶과 동떨어져서 불편하고 생존을 위협한다면 당연히 이를 어기어서 바꾸어내야 합니다. 예전에는 헌법 위에 군림하는 악법 중에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어기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는 규칙에 이익을 보는 세력과 손해를 보는 세력과의 싸움이기에 쉽게 바꾸지 않지만 다수가 행동하면 바뀌어집니다.
꿈이란 아무리 지리멸렬 한 같아도 어디까지나 꿈꾸는 사람의 인생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꿈과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오래된 기억과 바로 전날의 신선한 기억이 뒤섞여서 완전히 잘 섞인 믹스주스처럼 꿈에 나타나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만나지 않는 친구를 비롯해 죽은 사람, 실제로 본 적 없는 연예인도 꿈에는 잘만 나오고, 아무런 관심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연인으로 등장해 가슴 설레는 꿈을 꾸기도 한다. 왜 꿈이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밤에 보는 꿈과 장래의 꿈은 같은 단어를 쓰는 듯싶다.
꿈에 영감-지킬박사와 하이드씨, 프랑켄슈타이니,꿈 등 상대성원리, 원소주기율표, 전구 등 과학적 발견 역시 꿈을 꾸다 번뜩인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뇌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꿈속에서 무작위로 재생되는 기억의 단편에는 역시 의미가 있다고 한다. 뇌는 과거의 잡다한 기억을 자유롭게 연결함으로써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을 만들어내어 가능성의 경계선을 더욱 넓히려 하는 것이다.
(347~350쪽)
***자면서 꾸는 꿈은 현실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됩니다. 여기에는 현실의 소망도 포함됩니다. 학교란 제도교육을 포함해서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꿈을 꾸도록 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꿈에 대한 개인적 관점에서 해석한 프로이드와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한 융에 대해서 공부하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목소리 인간이 내는 목소리란 단순히 말을 옮기는 수단이 아니다.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입에서 흘러나온 공기는 사람들 사이의 공기를 진동시키며 바람이 된다. 그 바람은 ‘따뜻할 수도 차가울 수도 있다. 아니면 몸이 찌르르 저릴 수도 있다. 그런 물리적 변화까지 모두 아우른 것이 목소리고, 말이다.
우리 신체 역시 많은 메시지를 내보낸다. 냄새, 몸짓, 체온. 시라토리 씨는 원랠부터 타인의 팔꿈치에 손을 대고 많은 것을 느꼈다. 성질 급한 사람인지, 덜렁대는 사람인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그처럼 피부로 느낀 것에 귀와 코를 통해 들어온 정보까지 모두 중층적로 쌓여서 하나의 기억이 된다.
미술작품 또한 물체로서 에너지를 뿜고 있다. 그래서 화면 위에서만 소통하는 가상 감상에는 미술 감상을 체험으로 바꿔주는 결정적인 요소가 결여된 것이구나. 시라토리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기만의 방법으로 지금의 확인하고 있다. 일기를 쓰거나 sns에 사진을 올리거나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시라토리가 사진을 찍은 이유는 지금이라는 시간에 책갈피를 끼워넣은 것이다.(325쪽)
***책이나 미술작품을 가상공간에서 감상할 것이 아니라 인쇄되거나 실물을 보고 읽고 감상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과 대화도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전화나 화상회의나 카톡 고유방에서 이야기할 수 있으나 되도록이면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서로 더 신뢰하고 더 많은 것을 느낍니다.
타인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힘이야말로 지금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공감력이 아닐까
필사적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상상해도, 우리는 결코 다른 누군가의 인생과 감각까지 체험할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볼 필요도 없었다. 괴로움도 기쁨도 모두 그 사람만의 것이다. 그저 함께 있으면서 웃는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408쪽)
인생은 황야다.
보름달이 환하게 어둠을 밝혀주는 날이 있는가 하면, 길에 버려진 자전거에 발이 걸려 흙탕물 웅덩이에 넘어지는 바람에 홀딱 젖어서 돌멩이를 걷어차고 싶은 날도 있다. 행복이 절정일 때는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생각하지만, 아름다움이란 대체로 오래 가지 않는다. 나중에 이어지는 현실에서는 진저리 나는 일이 계속되며, 때로는 방문을 쾅 닫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고 싶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발밑에 고인 흙탕물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고,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길바닥의 돌멩이 따위가 아니라고 믿을 것이다 사람은 시간이라는 것에 저항할 수 없지만, 시간을 보물로 삼을 수는 있으니까 (415~4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