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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이 정점을 찍었습니다. 아니,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더 큰 일이 터지더군요. 저는 대부분의 비판들이 합당하며, 그 목소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 얼굴을 가져야할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얼굴을 가져야 할까요? 아마 변화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늘 이런 고민을 하고 살았는데, 최근 마이클 프로스트를 만났습니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이미 많은 책을 썼고, 그 책을 통해서 많은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교회들도 바뀌었죠. 저는 앞서 나온 책들은 깊이 있게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사상이 무르익었으며, 그 열매로 가득한 책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 책을 손에 얻었습니다.
저자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이 그 사실을 잘 드러내주지요. 그는 한국에 큰 교회가 많으며, 그 교회들이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는 사실, 즉 한국 교회의 밝은 부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스트 씨는 2016년 한국에 방문한 뒤, 그 빛 뒤에 있는 많은 그림자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죠. 저자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한국에 ‘새로운’ 교회, ‘진짜’ 교회가 설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 저는 그의 추측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성육신과 탈육신을 비교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탈육신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육신이지요. 현대인은 갈수록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껍데기에 불과하다며 ‘물질’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념을 공격하기 위해 온갖 방법이 사용되고, 인간의 성(性)은 더이상 소중한 것이 아닌, 소비하고 소비되는 것으로 전락했습니다. 사람들은 온라인 게임이나, 좀비나 흡혈귀에 대한 영상물 등 도덕적인 경계가 허물어지는 문화에 하루가 다르게 빠져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지만, 그 영혼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상태로 노숙자처럼 살아가지요.
여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에서의 탈육신인데요, 탈육신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종교는 영혼을 중시하여 종교와 인생,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고, 몸으로 하는 예배, 의례, 실천은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탈육신된 사회에 필요한 것이 예수 자신이 몸소 보여준 성육신적 생활방식에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근본인 존재, 그렇게 단순했던 예수의 삶을 놓친 교회의 모습은 처참합니다. 비참한 상황의 해법은 멀리 있지 않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고 저자는 얘기합니다.
프로스트 씨는 탈육신과 성육신을 다양한 각도에서 심층적으로 설명합니다. 현대 사회가 가진 문제점과 현대 교회가 처한 상황들을 바우만, 폴라니, 알랭 드 보통과 같은 사회학자들의 목소리를 빌어, 그리고 게임, 영화, 드라마 같은 세부적인 대중 문화 분석을 통해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탈육신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요. 그리고 뉴비긴, 라이트, 팀 켈러, 아우구스티누스, 머피처럼 기독교 교회와 신학 역사에 기여한 사람들의 의견에 힘입어 성육신적 신학, 교회, 그리고 삶을 제시합니다.
이 책은 21세기 한국의 모든 목회자가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때 미국은 한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나라였죠. 국제화로 인해 미국과 한국의 시간적 격차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미국을 보면 한국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가 노출된 문화는 상당 부분 미국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절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한 교회 개혁을 원하시는 모든 평신도에게도 (평신도라는 표현도 불편하지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목회자가 아닌 사람들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서 복음을 살아내기를 추천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저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지금처럼 비목회자들의 움직임이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면, 한국 교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시며, 책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은 분들을 위해 각 장이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소개하겠습니다.
1장 ‘뿌리 없고 단절된 스크린 중독 세대’에서 저자는 현대 세계를 공항에 비유합니다. 공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은 피상적이고 사소하죠. 모든 사람은 그저 스쳐지나갑니다. 거기에 ‘인격적인’ 만남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공통 분모는 생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탈육신된 세상에 사는 사람은 어느 세계관 하나에도 헌신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습니다. 어느 공동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로 어떤 중대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죠. 이들은 사회로부터 이탈되어 모든 타자를 대상화합니다. 결국 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죠. 이런 사회를 만들어낸 주범이자, 그로 인해 흥하는 문화가 바로 스크린 문화, 가상 현실 그리고 인터넷입니다. 실제 상호 작용보다 스크린 속 사람들의 상호 작용을 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얼굴을 보지 않은 체 ‘대화’하고, 만난 적 없는 사람을 ‘친구’라고 부릅니다. 이런 문화에 젖은 사람은 사회성과 감정을 잃고, 복잡한 관계성을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이런 문화는 교회에도 들어와, 목회자는 설교를 인터넷에 올리기를 선호하고, 성도는 목회자와 교제하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교회 선택은 일종의 쇼핑 행위가 되었죠.
저자는 탈육신적 세계에 필요한 것은 ‘정원’이라고 합니다. 공항처럼 스쳐지나가는 곳이 아닌, 우리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삶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하나님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축소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성육신적 사고에서 나오는 ‘정원’를 탈육신의 해독제로 소개합니다.
2장 ‘정신분열적 자아의식’에서 저자는 현대 복음주의 교회를 비판합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서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떠올리고’ 조용히 앉아 설교를 듣고, 설교를 통해 그분을 ‘생각’합니다. 어디에 강조점이 있는지 아시겠죠? 탈육신의 철학적 기반은 기독교 이원론으로, 하나님을 ‘생각’의 공간에 가두어 버립니다.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잘라버리죠. 하나님은 이제 그저 사람들이 착하게 살기를 바라시며, 세상이 고장날 때 조금씩 고치시는 소극적인 존재가 되셨죠.
저자는 톰 라이트를 인용하여 내세와 현세를 구분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삶의 자리를 강조하자고 합니다. 삶의 전체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육신이라고 선포하지요. 교회와 인생이라는 두 영역을 구분하여 오락가락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합니다.
3장 ‘도덕적 지뢰밭에서 목표 없이 방랑하기’에서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몸과 정신이 단절된다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도덕적 해이를 소개합니다. 21세기 도덕을 보면 인간 몸의 가치가 심각하게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하죠. 포르노, 폭력, 신체적 행동의 중요성 감소, 그리고 자기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 성매매, 장기매매. 이런 광경은 이제 너무나 흔해져 버렸죠. 인간은 물건, 상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편안하게 보는 좀비 영화나 드라마도, 사실은 인간의 육체가 가치를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는지도 모르지요.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몸의 가치를 성적 매력이나 경제적 생산성에 두고 있습니다. 많은 돈이나 재화를 생산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하하고, 그로 인해 슬퍼하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핑계로 자기 몸을 망가뜨리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탈육신된 세상에서, 저자는 우리가 몸이라는 감옥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존재한다고 선포합니다. 어쩌면 기독교인들이 부활에 대한 제대로된 이해를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이제 우리는 몸이 인격이며, 구체화된 육체의 모습을 수용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와야합니다. 자신과 타인의 몸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윤리로 포용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4장 ‘우리 시대의 도덕적 모호성’에서 저자는 기술 사회로 인한 몸의 대상화에 대해 탐구합니다. 폭력적인 게임이나 자극적인 영상 매체 등이 문제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노출 때문에 인간은 생리적으로 무감각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과학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증명합니다. 이로 인해 현대인은 도덕적으로 모호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모호성 때문에 탈육신이 가속화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로 인해 사람은 서로를 소모품으로 여기게 만들죠.
저자는 바로 이 맥락에서 선교를 재정의합니다. 탈육신된 세상에 성육신을 소개하고 전달하는 것이 바로 선교인 셈이죠. 선교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인간이 되는 새로운 방식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외칩니다! 인간은 생산력이 아니라 지혜와 관계성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우리의 죄는 내적 행위와 외적 행위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교회는 세상에게 얘기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5장 ‘구체화된 경험으로서의 종교’에서 저자는 탈육신된 현대인에게 없는 것이 구체적인 경험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구체적인 경험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그것을 갈구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YouTube와 같은 인터넷과 텔레비전을 통해서 편하고 재밌게 간접 경험하는 것을 선호하게 강요해버리죠.
이런 행동 양식은 교회에도 들어와서 믿음과 행동이 분리시켰습니다. 많은 대형 교회는 감각적인 분위기, 감성을 자극하는 영상과 음악을 통해 개인화되고 감성적 문화를 성도들에게 주입합니다. 성도들은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이는 마약처럼 작용하여 구체적인 경험을 원하지 않게 만들어버립니다.
이를 비판하며 저자는 구체화된 경험이 없는 종교에서 벗어나, 이제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몸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불어 세례, 결혼, 성찬과 같은 행위를 통해 십자가의 길로 구체적으로 들어가기를 종용합니다. 이제는 머리에 종교가 머물지 않도록, 그리스도처럼 낮은 길로 내려가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얘기합니다.
6장 ‘주님에게 배우는 본보기’에서 저자는 어떻게 성육신적 인생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으로 예수 닮아가기를 소개합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현하셨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체현하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바로 잡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만족시키고, 이스라엘에 임한 저주를 제거하셔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셨다.
교회는 이 새로운 이스라엘에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성육신의 본을 따르고, 성육신에서 솟아나오는 지속적인 힘을 받고, 하나님의 성육신적 선교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도제식 훈련’, 즉 폴라니가 소개한 ‘인격적 지식’을 도입하여 종교가 제시하는 규칙을 따르는 대신 예수라는 존재의 본보기를 통해 배우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삶이 참된 삶임을 주장하였다. 성육신적 그리스도인은 머리가 아니라 손끝으로 제자도를 배우고, 팟캐스트나 트위터가 아니라 함께 호흡하며 신뢰하는 이를 따르는 존재이다.
7장 ‘욕구와 우상숭배, 그리고 제자도’에서 저자는 욕구와 우상 숭배, 그리고 제자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합니다. 저자는 여러 신학자와 사상가를 인용하여 모든 인간의 열망이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탐구임을 알려줍니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은 인간에게 구속의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동시에 몸의 충동을 인정하고 그 배경을 설명해줍니다.
풀어 설명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죄와 타락으로 인해 그럴 수 없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보다 못한 것을 욕망하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우상 숭배를 범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몸의 욕구를 완전히 배제해선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육화된 방식으로 제자도를 실현해야하죠. 즉, 성육신적인 사고 방식을 통해서만 이 땅의 욕구와 우상 숭배를 초월하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몸과 영혼을 분리하지 않고, 통전적인 방식으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할 때, 진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8장 ‘우리는 영을 가진 몸이다’에서 저자는 7장의 논의를 이어갑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를 육체적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죄를 단순히 ‘나쁜 일’이 아닌,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정의하지요. 즉,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을 죄로 보았죠. 직업, 연애, 경제적 상태, 사회적 지위 등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을 때 인간은 속박, 중독, 불안, 강박, 시기, 원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저자는 죄를 이렇게 정의하고, 영과 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자아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적 자아는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견되고 형성되며, 그렇다면 외적 공적 세계에 참여하는 태도가 진정한 삶으로 도달하는 길임을 설파합니다. 우리가 영을 가진 몸이라면, 영성이 하나님과의 연합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과정을 통해 다양성을 포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따라서 진정한 영적 실천의 비결은 공적으로는 삶을 확장시키고, 내적으로는 성찰과 기도를 통해 깊이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9장 ‘탈육신적 시대의 선교’에서 저자는 다시 한 번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기독교 신앙 자체가 탈육신적이기에, 그 교회의 선교 또한 그런 방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피상적인 ‘온라인 행동주의’에 빠져버렸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에 휩쓸였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을 개인화되고 내면화된 것으로 축소시켰습니다. 복음을 통해 이웃의 삶에 깊숙히 개입하고 실천하는 겸손한 공동체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하죠.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탄원서를 올리고,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바꿔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응원하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휴가인지 선교인지 구분되지 않는 단기 선교 여행도 그 모습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죠.
저자는 이처럼 허울뿐인 선교를 벗어나자고 합니다. 이제는 가난한 자들이 스스로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을 제공해주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입장에서 도와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관광과 우리 자아의 건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섬김 받는 사람의 필요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성육신적 선교라고 얘기합니다.
10장 ‘교회-세계 이원론에 대한 도전’에서 저자는 선교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억압된 사람에게 하나님 통치의 선함과 그 가치를 몸소 보여주고, 또 그 내용을 선포하는 것이 선교라고 하지요. 저자는 일, 놀이, 정치, 사업, 예술, 공동체 봉사, 교육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선교요, 교회-세계 이원론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합니다.
이를 이룰 수 있는 중요한 방식으로 뉴비긴의 탈성직자화 모델을 소개합니다. 회중들이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내용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각자의 세속적 의무에 복음을 대입하는 방식이죠. 이런 역할은 평신도 지도자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데요, 이는 목회자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죠.
11장 ‘공동체에 속한 인간’에서 저자는 도시화가 야기한 현대 사회의 문제를 조명합니다. 도시는 인간을 탈육신하게 만들죠. 도시는 단조롭고 획일화된 공간으로, 그 공허함을 고치기 위해 상스러움을 사용합니다. 도시는 쾌적하지만 친밀성과 공동체가 없어 비인간적인 공간으로 변해버렸죠. 도시에는 공동체가 없습니다. 도시인은 자기중심적인 존재, 이기적인 소비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죠.
저자는 인간이 공동체에 속해야만 하는 존재라며, 교회가 그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합니다. 도시인이 원하는 이웃의 가치와 필요성을 채우기 위해 교회는 지역에 공동체를 제공해야 합니다. 또한 뿌리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을 위해 도시는 제공할 수 없는 기억과 전통을 교회가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지역에서 오래 뿌리를 내리고 삶으로써 지역 사람에게 충성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더불어 교회는 갈등과 차이를 인정하고, 수동적인 관용을 초월하여 대화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지요. 마지막으로 교회는 도시가 제공할 수 없는 미래를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갈 곳을 모르는 여행자들과 함께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해주고, 희망의 길로 함께 걸어갈 동반자가 되어주어야 하지요.
12장 ‘성육신적 자세를 취하기’에서 저자는 인터넷에서 벗어나 자연과 공동체의 방식, 즉 구체적인 방식으로 살아나기를 추천합니다. 원격으로 보고 듣고 행동하는 현대인, 탈지역화된 인간은 결국 그 존재가 근절될 수 밖에 없기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사소한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 현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데, 자꾸 그렇게 하려 하니 인류는 오작동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이렇게 근절된 존재들을 위해서 교회는 인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 이웃의 삶에 들어가야 합니다. 실제로 삶을 공유해야 합니다. 성도는 이웃이 없는 이에게 이웃이 되어주고, 목회자는 교회가 있는 마을에서 살아야 합니다. 저자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것처럼 보내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평화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며, 겸손하고 인자하게 자신을 이웃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13장 ‘절망의 끝자락의 첫 페이지’를 저자는 미국에서 나타난 디스토피아의 징후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글로벌 경제 위기, 아프가니스탄 전쟁, 치솟는 실업률, 재정 절벽, 부채 한도, 학교 대량 살상, 인종적 긴장…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회는 지속적으로 ‘탈출’에 대해 얘기하고, 심지어 한 종교 단체는 ‘집단 자살’을 통해 세상에서 도망치려 했습니다.
저자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구원과 탈출을 혼동함으로써 복음을 왜곡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복음을 왜곡하면 교회는 결국 도피에 빠지거나, 세계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폭력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고 저자는 얘기하지요.
따라서 저자는 건강한 종교를 새로이 정의합니다. 건강한 종교는 세뇌하지 않고 신자가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또한 건강한 종교는 자신의 지식을 겸손하게 정하지, 폭력적으로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주입하지 않습니다. 제대로된 교회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채우지 않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타인의 삶을 공감하는 능력으로 교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14장 ‘성육신적 삶을 향하여’에서 저자는 마지막으로 성육신적인 삶을 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집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집을 떠날 필요가 있다며,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보기를 추천합니다. 자기의 가치와 우선 순위를 점검해보고, 미래를 성찰하기를 종용합니다. 성찰하지 않으면 폐쇄적으로 변하고, 폐쇄적으로 변하면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지 위해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사실 관계를 조작하게 되지요.
저자는 이렇게 성찰하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사고하자고 합니다. 복잡한 삶과 믿음에 대해서 일부만 보고 단순한 해결 방식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특효약이 없음을 인정하고 삶의 풍성함을 인식하자고 설득합니다. 목회자는 자신과 타인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비전을 명확히 해서 체계적인 사고를 훈련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굳게 붙잡으면서도 열린 자세, 대화의 자세를 유지하자고 얘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