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보내던 소녀들은 어디로… 잔뜩 웅크린 '빨간 우체통'
그리움은 노을빛인가? 우체통은 빨간색이다. 도심 한가운데 행인이 많이 다니는 보도 한쪽에 세워져 있거나, 우체국 문 앞에 짝 없이 놓여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거나, 시골 정자나무 아래에서 오도카니 서 있는 빨간 우체통.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와 그리운 그 누군가의 세계가 통 아래로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착각' 혹은 '위로'는 우체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을 언제나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리움이나 기다림을 적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라도 나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만으로도 우체통은 벌써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천국으로 보내는 편지까지 거기에 넣었을까. 사시사철 그 자리에 그 우체통이 서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움이 일상이라는 증거였으며, 아직 누군가에게 전할 사랑이 있다는 선언이었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돌아서며 드는 불안감은 '혹시라도 우표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간절함은 우표를 붙일 때부터 시작된다. 우표를 붙이기 전에 우표의 뒷면을 혀로 핥으면 풀기가 살아난다. 그 풀기가 편지를 받을 내 님께 나의 마음을 붙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떨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밤새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그러다 겨우 부치는 용기를 얻었어요.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도 모르겠고 혹여 제 떨리는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아 수줍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군인 아저씨께 위문편지 띄운 이후로 처음 써보는 이 편지가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이런 식의 연애편지가 소위 펜팔이란 이름으로 왕래하던 시절이 있었다. 학생잡지 부록엔 늘 펜팔을 구하는 사람들의 사진과 명단이 실렸고 그걸 통해 사귐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토머스나 피터, 존이나 주디 같은 외국인 친구 이름도 보였다. 연애편지 말고도 편지는 있었다. 서울로 유학 간 아들딸들이 용돈이 떨어지거나 하면 편지를 보내왔다. 가족들 사이에도 편지 왕래는 빈번했다. '서간문 형식'이 따로 있어서 대부분의 편지 앞머리는 비슷하게 시작했다.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되기도 하고 뜬금없이 '녹음방초 우거진~' 하며 계절 인사를 먼저 올리기도 한다. 보통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먼저 올리는데 그 당시는 이름을 다 부르기보다는 이름 끝 자만 부르는 게 멋스러워 보였는지 '창완'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저 '완~'이라고 불러 여운을 남겼다. 상투적이지만 '그리운 완에게'나 '보고 싶은 완' 정도가 편지글 시작의 표준이었다. 은밀한 내용은 편지봉투에 담겨 전달됐지만 공개해도 되는 내용이라면 엽서에 적어도 됐다. 방송국으로 전달되는 음악 신청은 대부분 엽서를 이용했다. 눈에 띄는 엽서의 신청곡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 엽서는 점차 진화했다. 점점 더 화려하고 기발한 엽서가 배달이 됐고, 방송국은 그런 엽서들로 전시회를 꾸미곤 했다. 그랬던 편지와 엽서가 사라져간다. 그리고 함께 우체통이 사라지고 있다. 3개월 동안 우편물이 하나도 없으면 그 우체통은 철거 대상이 된다고 한다. 우체통이 초조하게 편지를 기다려야 하는 시절이 됐다. 살아남아 있을 날짜를 목에 걸고 있는 유기견 같은 운명이다. 기다림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시대에 기다림 없이 우체통이 철거되고 있다. 웅크리고 있는 우체통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고마워 빨간 우체통."
출처 : 조선일보 201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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