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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리학의 발전
김장생 27세, 효(孝)와 열(烈)을 겸비한 정부인(貞夫人) 순천 김씨.
김계휘 26세, 김문서 22세. 광산김씨 족보의 유래.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왕실위주의 국가 질서론과 주자가례의
연구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예학은 도덕윤리를 기준으로 하는 형식 논리를 중요시하고,
명분중심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신분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형식을 중요시 여겼다.
관혼상제에 대한 예학이 발전 하였는데 예학의 태두라는
사계 김장생의 업적이 크게 빛났다.
사계 선생의 업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광산김씨를 예문종가라 불렀다.
고려시대부터 족보가 등장하였으나,
한 종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15C에 들어서 나왔다.
광산 김씨의 족보 유래
시조공(始祖公) 흥광(興光)의 신위(身位)
우리 광산 김씨의 시조는 왕자공(王子公) 흥광이시다.
흥광께서는 신라국의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으로서
신라 왕자로 태어나셨다.
신라 계세(季世)에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을 미리 아시고,
광산현 서일동에 은둔하시어 광산 김씨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족보의 시작은
왕실에서 왕의 계보와 왕족의 족보가 기록되어있는 것을 시작으로 본다.
고려 중엽 18대 의종 때 왕씨 계보(王氏系譜)가
처음으로 만든 기록이 나온다.
사가(私家:일반가정)에서는 이보다 더 후세에
조선조 9대 성종 8년(1476), 안동 권씨가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었다.
조선조 중엽까지 족보에 대한 문헌이 희소하기 때문에 각
종중에서 만든 족보가 부정확한 것이 많다.
용계보:
약시의 7세손 용계 지남이 2권을 편찬하니 용계보라 한다.
‧ 영남종인(嶺南宗人)과 외손 송희업이 함께 편찬한 족보가 있다.
두 족보는 규모가 작고 크지 못하지만 애석하게도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서석보:
1677년 숙종 4년(정사년) 문충공 만기(30세)가 위
양보(兩譜)의 잘못을 시정하고 속편하지 못한 것을
증수(增修)한 것이 서석보다.
죽천보:
1687년 숙종 14년 정묘년에 문충공 만기의 아들 문천공
진규가 이어서 완성하고 증보한 8권이 죽천보다.
정묘대보:
1747년 영조 24년 정묘년에 지추공 진동이 속수성편(續修成編)한 것이 정묘대보다.
본편 17편, 별편 12권 총 29권으로 성편.
경자보(庚子譜):
정조 5년 경자에 계속하여 대보를 편수하다가 사변을 만나 흩어져 없어지니,
3년이 지나서 임인 년에 정묘보를 성편하니 이것이
경자보의 중간(重刊)이 된다.
병자대보:
1876년 고종 14년 갑술년에 미서 재현‧경대 상현 두 분이
정묘보에 의거하여 분편‧추편‧별편으로 29권을 완성하니 병자대보다.
서기 1910년 경술국치가 되던 해
충정공 의원(8세 1066-1148)의 묘지가 장단군 강상면 구화리 능동에서 발견되니
공이 돌아가신지 763년만의 일이다.
우리 김씨는 옛적부터 전해오는 족보가 없었으나,
시조공의 행적을 상고할 수 있었던 것은,
전고공 이(典誥公 珥)의
「광산현 제영시서」가 가장 오래된 사실의 근거이다.
족보를 보수 편찬하신 분들이 모두 제영시서에 기초를 두고 편집하였으나
어느 선조의 어느 계통인지,
몇 대손 또는 이름이 확실한지에 대한 의문을 계속 남았다.
충정공의 묘지석이 발견됨으로 의심하던 바가 많이 줄어들었고
정사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장성대보:
1939년 기묘년에 만든 족보다.
한성대보:
1957년 정유년에 만든 족보다.
김문서(文瑞: 22세)는 통훈대부로 낙안 현령을 지냈다.
묘소가 대천에 있는데 상석 밑에 족보함으로 석함읕 갖추었다.
조상의 근본이 있는 족보의 귀중함을 후손들에 보여주는 귀감이 되었다.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약사.
26세 대사헌 휘 계휘 (양간공파‧의정공파)
1526(중종21)-1582(선조16)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회. 호는 황강.
아버지는 증 좌찬성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전의이씨이다.
서너 살에 문자를 알고, 여덟 살 때 문의(글의 뜻)를 통하고
15세 이전에 경서와 사기를 다 읽었, 한번 보면 거의 다 기억하였다.
1548(명종4) 정시 및 과시에 연이어 장원하니
전시에 직접 응시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듬해 전시에 장원하고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고 곧 호당에 뽑혔다.
이듬해 부정자를 거쳐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 저작 박사가 되었다.
명종 10년에 부수찬, 사간원 정언 이듬해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이조좌랑이 되었다.
김홍도와 오로지 격탁양청(激濁揚淸)을 주장하니
권신간배의 꺼리는바가 되어 한을 머금고 화를 전가시키니,
일시의 명류들이 귀양을 가고 혹은 파직을 당하였다.
서울을 떠나 연산에 은거하였다.
명종 22년 조정의 조치가 달라져서 벼슬을 주고 다시
등용한다는 명을 내렸다.
마침 부친의 상중이라 이듬해 복제를 마치고 곧
승문원 교리, 예조정랑, 성균관 직강에 이조정랑에 제수 되었다.
그 후 여러 시(寺)의 첨정을 한 번, 정 (正)을 세 번하고
양사의 사간과 집의며 의정부로는 검상과 사인이요,
관직으로는 직제학을 지냈다.
명종 22년 중시 문과 을과 제1인으로 뽑히니 동부승지를 배수하였다.
중시에 올린 시표가 시정에서 걸출할 뿐만 아니라
당 송 명문집에도 당당히 우두머리가 될만하니 곧 학사가
당상관이 되는 예요 상감의 은총을 받았다.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이조참의, 대사간이 되었다.
중국에 사은사로 다녀와 선조 7년에 가선에 승진되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로 대사간을 4번, 대사헌을 3번 지내고 평안, 전라 관찰사,
공조, 형조 참판, 상호군, 돈영부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 때에는 성균관사,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경상감사 재직 시 백성의 제소를 공정히 처결하여 흐르는 물 같고,
일의 작은 수나, 이름을 한번이라도 듣고 본 것은,
아무리 오래 되어도 기억하니, 이민(吏民)이 그의 신명함에 탄복하였다.
급미(給米) 삼백 석을 연산으로 보내
고운산사에 있는 정회당을 대둔산으로 옮겨 서재를 짓고 학문을 권장하였다.
종계변무(宗系辨誣 : 왕조계통이 명나라 서책에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것) 교섭 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야 했는데
학식이 고명한 인재로 황제를 감동시켜야 할 당시의 인재로는,
김계휘와 율곡 뿐이었다.
임금이 계휘로 주청사를 삼고,
고경명과 최립은 보좌관으로 수행하였다.
선조 34년 광국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으로 추증 되었다.
묘는 연산군 논산면 고정리에 있고 신도비는 논산군 연산면
거정리에 있으니 지방유형문화재 110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27세 사계 휘 장생(양간공파‧ 의정공파)
1548년(명종4)-1631년(인조9) 조선 중기 문신이며 유헌,
자는 희원, 호는 사계
서울 출생, 아버지 대사헌 계휘, 어머니 정부인 평산 신씨
1557년(명종12) 10세에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
행동에 무게가 있고 말이나 웃음을 함부로 않으니,
장차 덕성을 갖춘 큰 인물이라 했다.
1567년(명종23) 율곡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유학의 종장이요,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선조 12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 참봉에 배수
1581년 아버지 황강공을 수행하고 변주사로 중국에 갔다 와
이듬해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선조 24년 통례원 인의를 거처 정산 현감
선조 26년 4월에 임진란이 발발되었고,
5월에 장자 은이 왜병에 해를 입고 서제 연손이 전투 중 전사하였다.
선조 30년 정산 현감 임기가 끝났다. 12월에 호조 정랑으로 임명
1597년(선조31)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병에 군량을 호남에서 조달 의무를 맡았다.
12월 단양군수 임명
선조 32년에 군자감 첨정,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음.
가을에「근사록해의」1권 저술, 9월에 남원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 이듬해 양근 군수,
2월에 익위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 6월에 안성 군수가 되었다.
9월「가례집람」완성
1601년 주역의 구결을 교정하는 일로 종원부 전부에 제수,
병으로 직무를 수행치 못하였다.
1602년 정인홍이 선비를 탄압하자 벼슬을 두고
연산에 와「양성당」을 지어 도를 강의하였다.
1609년(광해2) 회양부사, 광해 3년 철원부사
1613년(광해6) 서제 경손과 팽손이 계축화옥에 연루되어 옥사,
이를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 10년간 연산에 은거하며 후진을 가르쳤다.
광해 11년「경서변의」 8권 완성
1623년(인조1) 인조반정 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 상소를 올렸다,
사재감 첨정으로 나가니, 경연의 관원들 건의에 따라
원자(元子)를 보양하고, 유생을 가르치라고 성균 사업을 설치하였다.
10월에 상소를 올려 사직,
1624년 이괄의 난이 끝난 후 공주에서 임금의 수례를 호종하고
서울로 돌아와 상의 원정에 임명.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세 번 글을 올려 사퇴가 허락되지 않으니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 13가지 일을 진주하였다.
1626년 황산 서원을 건립, 이듬해 정월 종묘 호란에 호남 충청 호소사로 임명되었다.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양호 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4월에 적이 물러가니 호소사직을 그만두고 향에 돌아왔다. 이듬해
9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치 않았다.
1630년 4월 83세에 노인을 우대하는 식전이 있어 가의대부에 올랐다.
천자가 돈후하여 도에 가까운 뜻을 세워 대현에게 친히 배웠고,
세운 뜻이 꿋꿋하여 약관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덕을 쌓은 그릇이 넘쳐나 안면에 나타남으로 성덕군자라 일컬었다.
문하에는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을 비롯한
여러 유현을 배출하여 기호학파를 이루었다. 끊임없는 학문 연구에 글을 읽다가
얻을 것이 있으면 기록하며, 경서 8권, 의례문해 8권,
서소잡록략 천(千)편과 첨주 가례집람 3권, 상례비요 1권 등
사계전서 51권을 집대성하였다.
인조 9년 5월에 병이 났으나 요양하지 않고
매일 같이 문인들과 강론하다가 8월 3일에 서거하니 향년 84세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케 하고
세자도 공부를 폐하였다.
문도로써 복제를 갖춘 분이 수백이고 장삿날 모인 사람이 수천이었다.
인조 14년 조정의 공의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57년(효종9)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
1717년(숙종44) 문묘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 해주 소현서원,
파주 자운서원 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가의대부 형조참판 증 영의정 의정부 시 문원공 장생 신도비명
선생이 명종 무신년에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장중하여 망령된
말과 실없는 장난을 즐기지 않았다.
처음 귀봉 송익필에게 사자서(四子書)와 근사록을 배워 읽고 마음으로 즐겨 행하였다.
대사헌공(계휘)이 기뻐 말씀하시되
「내 아이가 벌써 학문을 아니 내 근심이 없다.」하였다. 자라서
율곡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도의의 요령을 들으니
선생이 심히 중하게 여겼다.
선생의 서제(庶第)가 1613년 옥사에 연루되어 고문으로 죽었다.
연좌죄로 곧 사지를 찢는 큰 형벌의 대역죄로 결론이 내려졌다.
친척들이 화가 풀릴 계책을 세우자 하니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시되 “
화와 복이 천명이니 인력으로는 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법관이 말하되 “법률상 연좌되지 않다.”하니 대신들의 의논도 같은지라 화를 면하였다.
처음 광해군이 죄수를 친국하면서 고변한 사람에게 물으니
“김모도(사계) 이 일이 있느냐?”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되 “김 모는 어진이라 모등이 꾀하는 것을 들어서
알까 염려하였다.”고 대답하니 죄를 면하였다.
이후에 고향에 돌아와 세상을 잊고 문을 닫아 외인과 통하지 않으면서
오직 경서와 고훈에 심취하여 습독함을 스스로 즐겼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하교하되
“김장생은 내가 잠저(임금이 되기 전 살던 집)에 있을 때 그 이름을 익히 들었다.”하고
사헌부 장령을 제수하여 물렀다.
선생이 만언소 13가지를 조목으로 들어 진주하니
시강 학관에 책립되고 가선에 승진하고 동지 중추부사를 배수하였다.
오랑캐가 서울을 침범함에 상감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세자는 조정의 관리를 나누어 남하하였는데 선생으로 하여금 호소사롤 삼았다.
병력과 식량을 모집하여 분조(分朝)에 가 세자를 뵈옵고
강화도에 이르니, 화의가 결정되어 적은 물러갔다.
상감이 불러 위로하고 장려하니 선생이 “적세도 완화되었고 신이
병이 중하니 돌아가겠다.”하고
또 “강화론은 임시 권도에서 나왔고 척화론도 그릇된 것이 아니다.”라고 상소하였다.
1631년 8월 3일에 별세하니 명하여 가로되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어 순직하고 재주가 뛰어남이
인(仁)에 가까우니 성훈(聖訓)이 빛났다.
사과(四科:덕행, 언어, 정사, 문학)의 열에 증자(曾子)는 참여치 못하였다.
마침내 공자의 전통을 얻었도다.
아! 선생은 자질이 진중하고
기품이 순후하여 확실히 정중하고 전일하도다.
일찍이 진유를 스승삼아 구(矩)는 모나고 규(規)는 둥글도다.
세상의 학자들은 허공에 의지하여 먼 곳을 달리고
화려한 빛을 밖으로 펴는데,
선생은 이와 달라 마디만큼 쌓고 저울눈만큼 쌓아서
선후를 먼저 할 것을 알았도다.
충심으로 이치를 통하고 아름다움이 사지(四支)에 통하였으니,
혼연한 덕성이 온전하고 늦게 성주를 만나
융숭한 예로 대접하고 벼슬을 주었네.
임금이 거처하는 집에서 감격하고 즐겼도다.
나라에 큰 어른으로 오래도록 살고 강녕하니 붉은 얼굴과 흰 머리요,
사림(士林)의 첨앙함이 산과 같고 뫼 뿌리와 같으니
큰 별은 하늘에 있음이로다.
날이 기울고 들보가 부러짐에 슬픔과 영화로움을 구비하였네.
저 재상 같은 무덤의 근 비에 명을 새겨 만년까지 보이네.
신풍군 장유 찬략
27세 문원공 휘 장생 배(配)
효(孝)와 열(烈)을 겸비한 정부인(貞夫人) 순천 김씨
효열(孝烈)을 겸비한 정부인(貞夫人) 순천 김씨는
조선조 선조 5년(1572) 6월 21일에 충남, 은진, 채운리에서 증 호조 참판 수언(秀彦)과
숙부인 남양 홍씨 따님으로 태어나시었다.
조선조 초기 때 좌의정 절제 상공(김종서)의 7세 손녀요,
도학과 예학의 종장이신
사계 선생(휘는 장생)의 후실 부인으로 정부인의 직첩을 받았다.
정부인의 가계는 단종 계유년에 절제 상공과 맏아들
참의공(승규)부자가 함께 참화를 입어 가솔과 재산이 몰수될 때
참의공의 세 살 난 행남(幸男)을 노비가 숨겨 도망하여
천신만고의 역경에서 하늘의 도움으로 은거해
절제 상공의 혈통을 이어온 후예이다.
정부인은 천성이 어질고 정숙하며 매사에 법도에 따르며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8살 어린 나이 때 부친의 환후가 위독하자
수일간 철야로 부친 쾌유를 기도하는 효녀였다.
나이가 17세 되자 직장공이 딸에게 가정의 선대의 내력과
절제공의 충성과 절개가 삼강(三綱)과 함께 백일하에
빛날것이로되 패역으로 몰린 비사와 유품을 전하면서 일렀다.
우리 가정의 천추의 한을 풀려면
너는 덕(德)과 명망이 높은 군자(君子)를 만나서 의논해서 풀지니
지금에사계 선생이 가장 덕목이 높다 하였다.
선생(사계)께서 상처하여 복상 중이니 만일 네가 선생과 배필이 될 수만 있다면,
절제(김종서) 선조의 신원(伸寃)도 가할 것이요,
상공의 혈손 한 줄기가 살아남아 있음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 하니
부인께서 후처가 될 것을 허락했다.
직장공이 다시 당부하되 성현의 훈계에 역적의 집안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않으니
너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본색을 드러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때 사계 선생께서 병술 년에 상배하신 후 홀로 계시니
정부인께서 선생의 후실로 입문하여 경인년에 아들을 낳은 후
시종 전말을 고하니, 크게 경탄하시고 상소하려 하였으나
장릉(莊陵:단종)의 복위가 되지 않아 탄식하시면서
공론(公論:조정의 공사)이 서서,
위호(位號)가 정해지면 순절한 절제공의 신원도 다할 것이니
내가 미처 보지 못하겠다 하였다.
부인께서 남편을 공경과 정성으로 받들어 부인의 도리를 다하였고,
아랫사람에게 은혜로서 거느리고,
자녀들은 법도에 합당하게 가르치니 온 집안이 언제나 화목하였고 편안하였다.
평생에 절제 상공의 원통함을 줄어 들이지 못한 한(恨)이 뼈에 사무쳐서,
평일에 웃는 일이 없으시니 신독재(문원공)께서
경탄하여 말씀하시되, 부녀자로서 종신토록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계 선생이 신미(辛未)년에 득병하자, 어려운 병구로를 불편한
몸으로 손수 하시고 수하에 맡기지 않았다.
마침내 8월 3일에 별세하시니 애통함이 도에 지나치시고,
조속 상식을 생시처럼 예의를 극진히 하였다.
삼년 거상(居喪)에 소식(蔬食)을 하여 집상(執喪)
범절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계유년 11월 상정일(上丁日)에 길제(吉祭)를 보신 후 모든
자녀들을 불러들여 말씀하셨다.
“불우하게 피해 다니는 아녀자로,
선조(김종서)의 원통한 한을 풀려고 너의 집에 온지 46년이 되었으나,
아직 뜻을 못 이루었다. 그러나 군자(사계)를 받들고 봉제사로 큰 허물은 면하였고,
여자로서 회갑을 지냈으니 상수(上壽)이며 6남 2녀를 낳아 모두 성취시켰다.
삼년상과 담제까지 지냈으니 세상에 살아 있어야 할 의리가 있겠느냐?
올해 나의 선조께서 순절하신 지 계유년이다.
내가 본래 품었던 원한이 이것이니 죽어 구천에 가서 뵈옵이 마땅하다” 하시었다.
말씀 후 일어나시어 목욕을 하고 의복을 갈아입고,
침석에 누워 음식을 끓고 한번 정한 의리를 다하기를 기다려 종신 하였다.
정부인이 추상열일 같은 정절은 계유년 12월 9일에 62세의 향년으로 임종하시니,
제족이며 향당과 문하(門下)의 모든 군자(君子)가
“효(孝) 가운데 효행(孝行)이고, 열(烈) 가운데 열녀(烈女)” 라고 극진히 찬양하였다.
숙종 무인년에(1698) 단종이 복위(復位)되고,
영조 병인(丙寅:1746)에 소척지전(昭척之典)이 내려,
절제 상공 작위의 복원과 충익공의 시호와 부조의 은전과
참의공 절행을 찬양하니 충효겸전의 정표였다.
광무(光武) 10년(1909)에 자손들과 연산의 유생 이인식들이 상소하고
대신 민영규가 효열(孝烈)을 품계 하여,
그해 4월 18일에 孝烈卓異(효열탁이)의 포장의 은전을 입어
칙명(勅命)으로 정부인에 추증되고,
그 후 정사(丁巳)년 12월 8일에 정려를 세우니
정부인의 효열이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것이다.
광산종보 97. 3. 1.
광산김씨 약사. 광산김씨사. 광산김씨종보.
편집, 대구 경북 종친회 전 부회장.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