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요한복음 11장 3절-8절 2013년 12월 1일 주일 오전 말씀지
지금도 복음으로 살리시고 진리로 자라나게 하시는데 살아난 자가 자라나지 못하면 병들어 잠들어 냄새나는 자리에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사 복음으로 그 생명을 살려주셨건만 진리로 자라나야 할 생명의 양식이 귀한 줄 모르고 소홀히 여김으로 나사로는 병이 들게 하신 것입니다. 열매맺는 생명으로 살아났다면 진리로 자라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받기 위하여 새벽을 깨워야 하며 주일도 지켜야 하는데 새벽은 커녕 이제는 주일마저도 지키지 못함으로 서서히 말씀과 멀어졌던 것입니다. 말씀이 멀어지면 지난날 말씀을 통하여 주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달아져서 진정 감사하는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됩니다. 들은 말씀은 있어서 자기 열심과 충성만 앞세우며 자랑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은혜에서 떠나 다시금 율법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삶 이것이 병든 것입니다. 시46:5-
이제 바리새인처럼 살고 있으면서도 괞찮아 스스로 위로하며 육신생활에 떨어졌고 주일은 형식이요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빠졌던 것입니다. 기도는 외식이요 무엇이나 조금만 잘하면 바리새인들처럼 자랑케 되었습니다. 기쁨은 사라졌고 이제 영이 잠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살리심 받았으나 다시 열매없는 사망의 잠에 빠진 것입니다. 시13:3-
사망의 깊은 잠에 빠져가는 나사로를 깨워 다시금 영광 길을 달려가게 하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다시 살리시는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3절=[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에 그 누이들이 그 누이는 자매이나 다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오빠가 아픈 것에 대한 걱정도 다릅니다.
1.영에 속한 마리아는 오빠가 이병으로 인하여 신앙이 더 떨어질까봐 염려스러웠고
2.육에 속한 마르다는 이병으로 인해 혹시 육신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룻기서에 살림 받은 룻과 육에 속한 오르바도 시모가 친정으로 돌아가라 할 때 각기 신앙이 다름으로 그 눈물도 다른 것입니다. 룻1:14-
사람을 보내어 그래서 예수님께 기별을 하였습니다. 누구나 문제가 생기면 답답하여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엎드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이미 병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이 모르실까봐 일일이 보고하는 기도가 되면 안 됩니다. 병들었을 때 그 원인을 찾게 해달라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데 그 기도는 올바르게 오랜 신앙을 하셨던 앞서가는 장로들이 하는 것입니다. 약5:14-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누이들은 두 사람 다 예수님이 오빠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말씀 앞에 앉아 양식을 받기 원하는 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양식을 받을 때 그 사랑이 깨달아짐으로 그 사랑 안에 살게 됩니다. 깨닫게 하신 그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그것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깨닫게 하신 사도 요한도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인 것입니다. 요21:20-
4절=[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죽게 하시려 주신 병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병든 것은 죽게 하시려 주신 병이 아니고 이병을 통해서 잠자는 신앙을 깨우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에 악한 왕 아하시는 다락에서 떨어져 병든 것은 그를 죽게 하시려 함입니다.
왕하1:2,1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나사로를 잠들어 죽은 자리에서 깨워 살리심으로 복음을 받고도 자라나지 못함으로 잠든다는 것과 잠든 자를 다시 깨우시는 그 역사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아지게 하신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나사로를 잠자는 자리에서 깨우시는 역사를 성자를 통하여 하셨는데 지금도 영적 잠을 자고 있는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역사를 나타내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아가서에도 참 성도가 두 번이나 영적으로 잠들게 된 것을 나타내주셨습니다.
아2:10, 5:2-
나사로가 병든 것은 영적 양식을 계속해서 받아먹지 못하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은혜를 떠나게 되고 내가 또 열심 충성하려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영적 병이 들고 잠이 들어 사망에 떨어지는 것을 나타내주시려 함입니다. 다시 십자가 앞에 엎드려 죄인의 괴수임을 고백케 하시는 역사입니다.
5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것은 먼저는 그들이 본래
1.택자이고
2.영원한 구원을 입혀서 보내신 아들들이고
3.그들에게도 상과 영광이 예비 되었기 때문이요
4.복음을 받을 때 내게 하시는 말씀을 받게 하신 자들이요
5.진리의 말씀을 양식으로 늘 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 모두 복음을 은혜로 받았지만 마르다는 자라지 못하여 자기 열심으로 나가고 나사로도 복음만 받아 살아났지만 다시 율법에 치우친 자이며 마리아만 계속하여 진리의 양식으로 장성함에 이르러 무엇이 귀한지 분변하여 깨닫고 감사만 하는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히5:14-
6절=[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유하시고]
나사로가 병들었다 나사로의 병을 바로 보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고 살아났건만 때마다 날마다 주시는 영의 양식을 받지 못하여 약하여 육신에 치우쳐 버린 것입니다. 동생들과 같이 계속해서 주의 발아래 앉지 아니하고 잠시 과거에 내의를 앞세우는 바리새인의 교훈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갈라디아 교회처럼 어리석게 율법에 치우친 것이요 갈3:1-
에베소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계2:4-
야곱처럼 하늘영광 보여주셨더니 손을 들어 그 영광을 얻어서 자랑하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틀을 유하시고 빨리 가셔서 그 병만 고치시면 사망의 잠을 자는 영적 병 고치시는 역사는 어떻게 보여주나요? 양의 우리를 떠나면 절도와 강도가 해한다는 10장의 말씀을 하셔도 깨닫지 못하니 이제 보여 주시려 이틀을 더 계시다가 가시는 것입니다. 요10:8-
그래서 병들어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계신 기간입니다. 아예 나사로가 죽은 뒤에 가서 살려야 1.잠자던 자가 깨어 일어나는 부활의 생명이 믿어질 것이니까 2.생명이 살아났지만 또 잠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니까 3.잠든 자를 기어코 고통까지 주셔서 살리시는 것을 믿을 것이니 일부러 지체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픈 몸만 낫기를 원하는데 낫고 난 후에 또다시 죄에 빠져 허덕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육신은 얼마 후 다 썩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영과 혼은 영원한 것임으로 그 영을 온전케 하시려 어떤 이에게는 육신의 아픔을 계속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아지면 아픔도 고난도 나를 유익되게 주신 줄 알고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119:67,71-
7절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유대로 가자 유다인들이 사는 곳이 유대입니다. 유다는 찬송의 뜻입니다. 택하심 구원하심 영광에 이르게 하심을 늘 찬송해야 하는 유대인들은 지금 율법아래 매여 복음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노래인 찬송이 끊어진 곳입니다.
8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그 때 예수님이 계시던 곳은 요단강 동쪽 베레아 지방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베다니로 가자고 아니하시고 서편인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신 것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인 것을 복음으로 다시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 돌로 치려 하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하니 아직 핍박과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그곳에 가면 죽게 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마16:23-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누구나 살아나지 못하면 영광길 생명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되어지는 일들에 원망과 불평 그리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시 사단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16:22-
누구라도 생명 살리는 일에 왈가왈부해서는 안 됩니다. 귀한일이니 기도와 협력을 당연히 기쁨으로 해야 하며 자기가 머리노릇 하려 하면 제자들처럼 그 일을 막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