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다르던가요”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말을 한다. 한 책상 곧 강원에서 함께 공부할 때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졸업 후 각자의 근기대로 정진하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해 봤다.
절친한 도반 스님이 있다. 일찍이 행자실에서 만나 통도사 강원에 함께 입방하면서 둘은 다짐 하듯 말했다. “우리는 화엄경을 다 공부하고 졸업 합시다.” 말한 대로 였다. 그런 전례가 없었는데도 당시 방장이신 월하 노장님과 사중의 특별한 배려 그리고 학인 스님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9명 졸업 중에 5명이 별도로 화엄경을 시작했다.
그러나 순탄하지 않았다. 석 달이 채 못 되어 애초 결심했던 도반하고 단 둘만이 남아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다행히 당시 강주이신 원산스님께서 둘을 앉혀 놓고도 당신의 공부라 여기시며 하루에 거의 2시간 정도를 빠짐없이 지도해 주셨기에, 2년에 가까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회향을 할 수 있었다. 그 인연으로 2003년도에 법사 스님으로 모시고 전강식을 하면서 ‘법광(法光)’이란 호를 받았다.
잠시 도반 스님 이야기를 해야겠다. 도반은 7살에 입문하여 수계를 모르고 지내다가 스물이 되어서야 계를 받았다. 어찌나 철저하게 계를 지키는지 지금껏 멸치꼬랭이 하나 입에 대지 않는다. 그런 도반과 강원에서 유난이도 가까이 지내게 되어 주위에선, 만다라에 나오는 법운과 지선스님으로 비교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엄경을 마칠 때까지 꼬박 5년간 객기를 부리며 도반의 통장을 다 털어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도반 스님은 심지가 굳어 전혀 흩어짐이 없었고 오히려 객기 많은 나를 더욱 이해해 주었다.
함께 공부한 도반 강주하다가 ‘선원 행’
선원 율원에 다니던 나는 강주 맡게 돼
통도사 강원에서 5년을 공부하고 도반 스님은 그대로 남아 강의를 하고 난 선원으로 걸망을 졌다. 떠날 즈음 내게 말했다. “공부 방법이 다르니 함께 갈 수 없네요!” 그 후 도반 스님은 교학에 전념하여 2002년도에 최연소로 총림의 강주가 되었다. 이어 2005년도에 경쟁이라도 하듯 바로 이웃 총림에 나도 강주로 부임 했으니, 결코 다른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간의 여정은 차이가 있었다. 도반 스님은 강원에 남아 줄곧 5년 넘게 강의를 했고 1년가량은 능엄경에 심취해 외따른 곳에서 달달 암송을 했으며, 이어 은해사 승가대학원을 졸업한 연후에 4년동안 강의를 하고 강주가 되었다.
내겐 걸망의 연속이었다. 1991년 초가을부터 걸머진 걸망은 15년간 선원.율원.승가대학원 3곳의 강원에서 강의하기까지 무려 스무 번이 넘도록 처소를 옮겨 정진한 끝에 2005년도 백양사 강원 강주로 자리를 옮겼다. 출가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힘든 고비가 있었다. 2003년 여름 통도사에서 떠들썩하리만큼 근사한 전강식을 한 지 6개월. 법주사 강원에서 강사로 지낸지 3년 만에 선원으로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 의아해 하거나 핀잔에 가까운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법사 스님께서는 오히려 격려해 주셨다. 일찍이 선.교를 겸했으면서도 2000년 초에는 3년간 무문관까지 성만했던 경험에서 오는 위안 이셨다. 그래서 인연이라고 했는가 보다.
2004년 봄 절박한 심정으로 봉암사에 방부를 했다. 산철결제를 마치자 ‘선감’ 소임을 맡았으면 하는 권유가 있었다. 선감 소임은 기본 선원 스님들을 갈무리 하며 1년간 산문 출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마음내서 정진할 바엔, 의미 있는 소임이다 싶어 흔쾌히 수락했다. 덕분에 그간의 습기(?)를 잠재운 소중한 계기였다.
도반 스님은 강주 소임을 놓고 선원에서 정진한지 1년이 지났다. 이번 하안거 결제에 앞서 만날 듯싶다. 한번 물어 볼거나. “공부가 다르던가요?” 아무튼 20여년 만에 처지가 바뀌었다. 역지(易地)다!
법광스님 / 고창 선운사 승가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