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일곱 개의 센터가 있다. 가장 낮은 센터는 성(性)이고 가장 높은 센터는 사마디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다섯 개의 센터가 있다. 이것은 하나의 사다리와 같다. 남녀의 일곱 개 센터 모두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이때 비로소 그들은 소울 메이트를 발견한 것이 다..........
소울 메이트를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처럼 보인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절대적인 하나됨,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합일이 느껴진다. 두 사람이 서로 안으로 완벽하게 사라진다.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얇은 칸막이조차 없다. 아무 구분이 없다. 이것이 ‘유니오 미스티카’ 신비의 합일이다.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처럼 기능한다. 몸은 둘이지만 영혼은 하나다. 여기엔 절대적인 조화가 있다. 사랑의 정점이다. 그들에겐 명상이 필요없다.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인도의 시바 사원에 가 본 사람은 시바링가를 보았을 것이다. 시바링가는 이 두 연인의 오르가즘 상태를 상징한다. 시바링가는 남성 에너지를 대표한다. 그리고 남근의 상징인 시바링가 아래에는 샤크티의 상징인 요니가 있다. 시바링가와 샤크티의 요니가 만나고 있다.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서로의 안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그들은 개체성을 잃었다. 링가와 요니가 세상에서 얼굴이 없는 유일한 상징물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링가와 요니에 의해 상징되는 것은 순수한 에너지다.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가 창조적인 에너지, 바이탈 에너지를 상징하고 있다. 이 에너지로부터 삶 전체가 흘러나온다.
샤크티도 시바도 얼굴이 없다. 그들의 얼굴은 무의미해졌다. 그들이 개체성이 사라졌다. 이것은 순수한 에너지의 만남이다. 그리고 오직 순수한 에너지만이 서로 안으로 용해될 수 있다.
만일 고형의 개체성이 있다면 그것이 용해를 방해할 것이다. 오직 순수한 에너지, 액체처럼 유동적인 에너지만이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될 수 있다. 바위 두 개를 한자리에 놓으면 그 바위들은 함께 있을 수는 있지만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물에 물을 부으면 하나가 된다.
이 가장 높은 정점에서는 일곱 개의 센터 모두가 만난다. 개인이 사라지고 오직 에너지만 남는다. 에너지의 작용, 의식의 작용만 남는다. 여기에 그침 없는 기쁨이 있다. 이것은 절정의 오르가즘이다.
이것이 영적인 교류다. 이런 커플에게는 명상이 필요없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곧 명상이다. 이것은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현상이다. 아주 희귀한 현상이다. 수많은 사람들 중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거의 우연의 일치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 아래의 차원에 또 하나의 만남이 있다. 여섯 개의 센터가 만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드문 일이다. 일곱 개 센터 모두의 만남이 1퍼센트의 확률을 갖고 있다면 이 여섯 개 센터의 만남은 2퍼센트의 확률을 갖고 있다.
이 만남은 합일이 아니라 결합이다. 이것은 우주적이고 신비적인 합일은 아니지만 그와 아주 근접한 곳에 있다. 이것은 미적인 결합, 예술적인 현상, 시적인 경험이다.
일곱 개 센터 모두의 만남은 삼매를 아는 사람, 사토리를 아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섯 개 센터의 만남은 시인, 화가, 무용가, 음악가들이 이해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그보다 낮은 차원의 만남은 다섯 개 센터의 만남이다. 이 만남의 확률은 3퍼센트다. 이것은 결합조차 아니다. 이것은 이원성의 차원이다. 두 사람이 만나 두 사람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엔 큰 조화가 있다, 마치 두 개의 악기가 조화 속에 연주되는 것처럼 두 사람이 조화롭게 기능한다. 두 사람이 둘 그대로 남아 있다. 거기엔 결합도 없고 합일도 없다. 그들은 분리되어 있다.
이것을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묘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원을 바치는 두 개의 기둥처럼 되어야 하리라.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하나의 지붕을 받치고 있듯이.“
이것은 미학적이고 음악적인 경험보다 다소 낮은 차원이다. 이것은 윤리적 차원의 경험이다. 하지만 순결하고 아름답다.
네 번째로 네 개 센터의 만남이 있다. 여기엔 4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이원성의 차원이다. 조화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큰 이해가 존재한다. 서로에 대해 큰 이해가 있다. 즉각적인 조화는 없지만 이해에서 비롯된 일종의 리듬은 아직 남아 있다. 이것은 지성적인 경험이다. 이것은 윤리의 차원도 아니다.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네 번째 차원으로부터 추락할 것이다.
그 다음에 다섯 번째의 차원에서는 세 개의 센터가 만난다. 여기엔 5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다. 이원성이 더욱더 두드러진다. 이해가 남아 있긴 하지만 지속적이지 않다. 명멸하는 불빛처럼 깜빡거리는 이해가 있다. 가끔씩 갈등이 일어나긴 하지만 이 갈등이 사랑을 파 괴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갈등은 사랑에 무엇인가를 보태고 생기를 더해 준다. 이것은 심리적인 차원의 경험이다.
그 아래의 차원에서는 두 개의 센터가 만난다. 여기엔 6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다. 이원성이 크게 두드러진다. 서로에 대한 이해는 순간적으로 일어날 뿐이다. 갈등이 아주 많다. 이것은 거의 50대 50의 만남이다.
50퍼센트는 이해고 50퍼센트는 갈등이다. 이것은 생리학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아직 훌륭한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 반은 이해고 나머지 반은 갈등이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서는 하나의 센터가 만난다. 여기엔 7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다. 이 만남에는 아주 갈등이 많다. 즐거움의 순간이 찾아오긴 하지만 매우 드물다. 그러나 가치 있는 만남이다. 이것은 성적인 경험이다.
그 아래 가장 낮은 차원에서는 아무 센터도 만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잡다한 만남이 여기에 속한다, 대부분의 커플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은 성적인 경험도 아니다. 이것은 성적인 경험보다도 아래의 차원이다.
이 만남은 어느 정도 자위 행위에 가깝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협상일 뿐이다. 이 만남은 착취며 사업이다. 어느 정도 시장의 원리를 따르는 만남이며 계약 결혼이다.
이 만남에는 사랑도 없고 존경도 없다. 미움조차 없다! 미움이 존재하려면 먼저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정도 아니고 적개심도 아니다. 매우 형식적인 관계다. 사실, 이것은 관계라고 할 수도 없는 관계다.
이것은 상호 자위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대는 상대방을 착취하고 상대방은 그대를 착취한다. 이것은 일종의 매춘이다. 가장 추악한 만남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세상에 가장 흔한 만남이다.
- 오쇼라즈니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