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가(家) 출신 대통령 후보 세 사람의 자서전을 함께 읽다
현대그룹이 배출한 대통령 후보 세 사람의 자서전을 나란히 펼쳐놓고 함께 읽었습니다. 정주영님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아들인 정몽준 씨의 ‘나의 도전 나의 열정’, 그리고 정주영님의 후계자 이명박 씨의 ‘신화는 없다’. 정주영님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1992년 2월 발행본이고 정몽준 씨의 ‘나의 도전, 나의 열정’은 2011년 9월 발행본, 이명박 씨의 ‘신화는 없다’는 1995년 5월 발행본입니다.
고인이 되신 정주영님은 현대(現代)그룹의 창업자로 1992년 12월의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나섰던 분입니다. 정몽준 씨는 정주영님의 다섯째 아들로 2002년 대선에서 태풍의 눈이 되셨던 분이고, 이명박 씨는 현대그룹이 낳은 대표적인 전문 경영인으로 2007년 12월의 대선에서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신 분입니다. 세 분 중 이명박 씨는 1992년 초에 현대그룹을 떠나 당시의 여당으로 가셨던 분인데,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 현대건설 회장의 경력이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므로 현대가(家) 출신 정치인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정주영님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이명박 씨의 ‘신화는 없다’는 낙양의 지가를 올려놓은 책입니다. 특히 정주영님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국민도서’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은 책이 보급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최대의 화제였던 서울시장 선거는 정몽준 씨의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초반 여론이 나쁘지 않았는데 후반에 급전직하 역전이 되더군요. 이는 14대 대선 때의 정주영님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최대 화제였던 그 분의 패전과 아들 정몽준 씨의 패배 이유, 현대가 출신 정치인으로 대통령이 되는 데 성공한 이명박 씨의 사례가 대비되어, 때마침 입수된 세 분의 책을 함께 읽게 된 것입니다.
먼저 세 권의 책의 머리말에서 가장 돋보이는 문장을 한 줄씩 찾아보았습니다.
나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라고 규정짓는 일에 도전, 그것을 이루어내는 기쁨을 보람으로 오늘까지 기업을 해왔고 오늘도 여일하게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정주영)
나는 나의 열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를 좀 더 따뜻하고 풍요로운 곳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했다. (정몽준)
시련이라는 험한 파도 앞에서, 나는 우회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 작은 용기를 사람들은 신화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명박)
위의 세 문장을 비교하면서, 공격과 방어의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새로움을 향해 계속되는 도전, 그리고 기왕에 소유하고 있는 무엇을 남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하는 마음. 후자의 경우 본인은 좋은 뜻이겠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수혜자의 굴욕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런 뜻의 기록을 남긴 분에게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60대 초반의 헌책장사로 대한민국 서민의 표준적인 사람입니다. 따라서 유명인의 책을 읽고 그 내용의 허실을 따져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지 싶습니다. 위에 열거한 세 권의 책의 저자 중 한 분은 인생 유일의 실패를 한으로 남기고 고인이 되셨고, 한 분은 염원을 이루어 대통령이 되셨으며, 한 분은 아직 결과를 보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생각할 때, 원인을 따져서 비교해 보는 것은 공연한 수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대가(家)’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첫째가 경부고속도로입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 국토개조사업이었다는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현대건설의 정주영 사장을 필두로 한 건설역군들이 박정희대통령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이룩한 성과였다는 게 세간의 상식입니다.
아래는 상기한 책들에서 찾아본 경부고속도로 부분의 기록을 요약한 것입니다.
추풍령에 있는 고속도로 기념비에 이런 글자가 있다.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길.’
……
하루는 청와대로 불려 들어갔다. 단 둘이서 대좌하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박대통령은 우리가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사장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드는 최저 소요 경비를 좀 산출해봐 주시오.”
나는 그날부터 토목 담당 중역들과 함께 거의 한 달 가까이 5만분의 1 지도를 들고 서울과 부산 사이의 강과 산, 들판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
(조사한)기관에 따라 엄청나게 들쭉날쭉한 건설비 책정에서 박대통령은 건설 경험을 가진 우리의 안에 가까운 400억 원에 10퍼센트 안팎의 예비비를 추가해 430억 원으로 총 건설비를 책정했다.
이 총 건설비 430억 원은 2차선으로 계획되었던 대전, 대구간을 나중에 4차선으로 변경한 데 따른 용지 매수와 물량 증가, 또 추풍령에서 왜관으로 곧장 빠질 계획이었던 것을 구미로 우회하면서 약 100억 원이 추가됐다.
……
1968년 2월 1일, 우여곡절 끝에 경부고속도로 첫 번째 톨게이트 근처에서 발파음을 터뜨려 기공식을 가졌다.
박대통령도 나도 가슴에 벅차오르는 흥분과 감동을 감출 수 없었다.
430억 원의 최저 공사비로 428킬로미터의 고속도로를 3년 안에 건설한다는 것은 국가로도 하나의 모험이었지만, 건설회사로서도 까닥하다가는 결손을 보고 세상 웃음거리가 될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
외채(外債)와 내자(內資)에 대한 이자, 노임 지급이 공사 기일에 비례한다.
공사기간 단축 자체가 곧 돈이다. 이것을 전제하면 내가 현장을 독려하여 고삐를 움켜쥐고 서두르는 경영 방침을 이해할 것이다.
‘공기를 앞당기자’, ‘현장을 독려하자’, ‘그것으로 공사비를 최소로 줄이자’는 것이 나의 전략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공사를 기계화해야 했다.
나는 당시로 보면 천문학적이랄 수 있는 800만 달러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총 중장비가 1900대였다.
……
경부고속도로가 시공되고부터 나는 거의 잠을 못잤다. 잠이 오지도 않았고 잘래야 잘 수도 없었다. 작업현장에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고 작업을 독려했다. 공기만 단축하고 공사의 질이 부실하면 안 된다.
……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안 잤다.
잠잘 시간에는 일하고 덜컹거리는 44년형 지프차에 실려 가면서 잠깐씩 눈을 붙였는데, 차에서 자는 습관은 나중 울산조선소 건설에까지 계속되어 결국은 목 디스크가 되기도 했다.
……
그런 가운데 옥천(沃川) 공구 당제터널 공사가 나를 가장 당혹시켰다.
……
옥천군 이원면 우산리와 영동군(永同郡) 용산면 묘금리 사이의 4킬로미터에 소백산맥이 가로놓여 우리는 터널을 뚫고 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 지층이 경석(硬石)이 아닌 절암토사(節岩土砂)로 된 퇴적층(堆積層)이었다.
당제계곡 쪽에서 20미터쯤 파들어 갔을 때, ‘와르르’ 순식간에 벽이 무너져 내렸다.
……
무려 열세 번의 낙반 사고를 겪고 공기는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상행선 590미터, 하행선 530미터의 당제터널 공사 상행선은 겨우 350미터에 머물러 있었다.
……
총칼이 없었을 뿐 전쟁이었다. 기한 내에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이 가능하냐 아니냐가 이 당제터널에 달려 있었다.
나는 흑자를 포기하고 현대건설의 명예를 선택하기로 했다. 우선 단양시멘트에 보통 시멘트보다 스무 배나 빨리 굳는 조강(早强) 시멘트 생산에 전력투구할 것을 지시했다.
……
3개월이 소요될 공사가 25일 만에 끝나서 1970년 6월 27일 밤 11시, 당제터널 남쪽에서 ‘만세’가 터졌다. 이로써 경부고속도로의 마지막 공사이자 난제의 공사였던 당제터널 상행선이 개통을 보게 되었다. 하행선은 이미 한 달 전에 완공되어 있었다.
1969년 9월 11일에 착공한 지, 290일 만이었고, 마침내 경부고속도로 전장 428킬로미터의 완전 개통이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경부고속도로는 정상적 공사가 아니었다. 전투였다. 대통령이 사령관이었다면, 정주영 사장은 민간 출신 야전 사령관이었다. 서빙고 공장에서 내가 출근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 원성을 자자하게 샀지만, 사실 우리가 맨손체조를 하고 있던 그 시간에 장장 4백 킬로미터가 넘는 경부고속도로 공사의 전 구간에서는 이미 불도저가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작업을 하고 있었고, 정주영 사장의 지프차는 수원을 지나 대전 남쪽의 당제 터널을 향하고 있었다.
……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우리 건설업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장비가 일하는 시대로 돌입하고 있었다. 중기사업소의 역할은 갈수록 막중해졌다. 장비를 신속하게 지원하지 않으면 전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정사장은 수리를 재촉하는 전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걸어왔다. 소장도 있고 기술 분야 과장들도 있는데 반드시 나를 찾았다. 정사장은 장비 이름과 성능, 부품을 꿰고 있었으나 관리과장인 나는 중기에 관해 모르는 게 태반이었다.
……
그날도 호통을 맞았다. 그날 저녁 나는 제때에 수리를 못 해 혼쭐이 난 D8형 불도저와 기종이 비슷한 HD16형 한 대를 몽땅 해체해버렸다. 그냥 세워 둔 장비가 아니라 당장 수리해 현장에 내려 보내야 할 장비를 뜯어 놓았으니 모두들 야단이었다.
나는 매뉴얼 북을 펴놓고 부품 하나하나의 이름과 기능을 숙지해나갔다. 그런 다음 다시 조립했다. 가장 중요한 토목 장비인 불도저에 관한 구조와 성능, 부품을 훤히 꿰게 되었고, 다른 장비에 대해서도 자신이 생겼다. (신화는 없다)
단군 이래 최대의 공사였다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정주영님은 박대통령과 함께 주역으로 활약하였고, 이명박 씨는 현대건설 중기사업소의 관리 책임을 맡아 한몫을 하였습니다. 정몽준 씨의 책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관한 언급이 없는데, 당시의 정몽준 씨는 2세경영인으로써의 수업을 받고 있어서 현역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창업주 정주영과 전문경영인 이명박, 2세 경영인인 정몽준의 차이는 세 사람의 대선 도전 역사에 연계되어 차별된 효과로 나타납니다.
먼저 현대가 출신 대선 주자의 첫 번째였던 정주영님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분은 현대건설로 대표되는 재벌 현대가(家)의 창시자입니다. ‘무에서 유를 일으켰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마는, 정주영님이야말로 맨손으로 재벌을 일구어 낸 입지전적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아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발견한 정주영님의 인생역정 중에서 “대단하다!” 하고 감탄한 부분을 한 곳만 간추려 옮겼으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또다시 흉년이었다.
한 해 풍년이면 두 해 흉년, 이래도 농사밖에 살 길이 없는 걸까.
잠재웠던 회의가 눈을 뜨고 푸시시 고개를 들었다. 콩죽, 비지밥, 감자밥, 초근목피(草根木皮)의 길고 긴, 지루하고 우울한 겨울이 가고 이듬해 봄, 나는 또다시 도망칠 작정을 했다.
……
그러던 중 내 꿍꿍이 속을 알 리 없는 작은아버님이 당신 송아지를 판 돈 30여 원을 맏형님인 아버님께 고스란히 맡겨서 나무 궤짝 속의 돈은 70여 원이 되었다.
‘기회는 두 번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나는 영원히 여기서 이대로 썩어야 한다. 아버님 돈은 부기학원 졸업한 후 취직해서 원금, 이자까지 몽땅 갚아드리면 되잖는가.’
며칠 후 어느 날 밤, 가족들이 잠든 틈을 타 70여 원의 대금을 몽땅 훔쳐 들고 송전역으로 내달아 서울행 밤차에 뛰어올랐다.
……
좀 더 나은 일자리가 없을까 틈틈이 거리를 쏘다니다 운 좋게 ‘복흥상회(福興商會)’라는 쌀 소매상 배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
내리 사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쌀가마를 싣고 자전거타기 연습에 매달렸다. 그 이후로 자전거에 쌀을 싣고 나가 꼴사납게 나동그라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고, 얼마 안 되어 두 가마를 한꺼번에 실어 배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외에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하 정주영님의 인생 역정에는 많은 시련과 극복의 역사가 있지만, 저는 위의 사건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나갔고, 최초의 입지에 성공한 농사꾼의 아들 정주영. 일개 쌀가게 배달원이었던 그의 자전거타기 성공은 후의 많은 시련을 극복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갖은 신고 끝에 기업을 일으켰지만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화재를 겪어 망하기 일보 직전에 놓이고, 재기하여 뛰어든 건설업에서 수없는 성패를 겪지만 결국 첫 가출의 실패를 극복하고 가출에 성공하여 확실한 직장을 잡을 때까지의 작은 성공의 확대 재생산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사내가 뜻을 세우고 의지를 관철하는 것, 그야말로‘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였던 것입니다.
다음은 이명박 씨의 책‘신화는 없다’에서 찾은 입지 부분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나고 대학 졸업장을 받아 쥐었으나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내란선동죄’라는 전과를 갖고 있던 나는 거주지인 이문동 형님 집에서 반경 2킬로미터를 벗어날 때마다 관할 파출소에 신고를 해야 했다.
……
대학을 졸업하고 몇 군데 회사에 입사시험을 치렀지만 번번이 2차 서류전형이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나는 자유롭지 못했고 들어가 일할 데도 없었다.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동지들은 벌써 정치판에 들어가 있었다. 갑자기 세상이 사막처럼 황량하게 느껴졌다. 나의 ‘전력’이, 정확하게는 국가가 나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
앞날을 궁리하고 있는데 신문 한 구석에 내 눈길을 끄는 작은 광고가 하나 있었다.
‘해외 건설 현장에 나가 일할 역군 모집’
현대건설이라는 회사에서 태국 현지에서 일할 사원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건설회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현대건설에 대해서도 자유당 시절의 건설회사 ‘5인조’를 추월해 부상하고 있는 중소기업이라는 풍문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광고가 눈에 들어온 까닭은 기업의 규모가 아니라 해외로 나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내가 현대건설에 입사원서를 낸 것은 1965년 5월, 일류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었던 데다가 해외 건설 현장이라는 조건까지 덧붙여져 입사시험 시험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
1차 필기시험은 잘 치렀다. 연락이 올 것인가. 입사가 되더라도 출국은 가능할까. 나에게 채워진 이 족쇄는 언제나 풀어질까?
‘인사부장 면담 요’라는 전보가 한 장 날아들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면 면접장소와 시간만 통보해 주면 그만 아닌가. 인사부장 면담이라니, 보이지 않는 손이 벌써 그물을 쳐놓은 것이리라.
현대건설 인사부장은 내 서류를 꺼내더니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필기시험 성적은 아주 좋은데……학생운동 전력이 있구먼. 아직 높은 분들은 모르지만 곧 보고를 해야 합니다. 무슨 방법이 없겠소?”
……
나는 한번 정면으로 부딪쳐 보자고 작정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대통령 박정희였다. 나는 편지에다 먼저 내 ‘전력’을 밝히고 학생운동의 순수성과 그 충정을 토로한 뒤, 사회에의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며칠 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민정 담당 비서관 이낙선 씨였다.
“국가 체제에 도전했던 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 앞으로 운동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종을 울린다는 뜻도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
……
우여곡절 끝에 1965년 6월 면접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면접관은 정주영 사장을 포함해 이춘림 상무, 권기태 이사 등 모두 6명이었다. 정 사장은 ‘현대건설’이라고 새겨진 작업복을 입고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갔다.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말은 잘하는구먼.”
정 사장은 잠깐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잠시 뒤, 옆에 있는 임원들을 향해 던진 말은 영 딴판이었다.
“요즘은 말만 번지르르한 건달들이 많아.”
……
정주영 그 사람, 거침없이 자신만만하고 ‘건설이 곧 창조’라는 내 대답에 미소를 띠던 그 모습이 이상한 매력을 주었으며, 그와 함께라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또 하나 나를 조바심나게 한 것은, 청와대와의 담판 결과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입사를 방해 말라.’는 나의 항의에 권력은 바늘귀만한 융통성이라도 보여 줄 것인가?
‘7월 1일부터 출근할 것.’ 1주일 뒤에야 합격 통지가 날아왔다. 내가 배치된 부서는 본사 공사관리부였다.
이명박 씨의 경우도 앞서의 정주영님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현대건설 사원으로 탄생까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의 어려웠던 성장과정과 고학생으로서의 학업, 그리고 학생운동은 ‘현대건설’의 사원이 되기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고, 후에 이룩한 현대건설 회장의 직함을 맡기까지의 일화들은 사원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보답이었을 뿐 ‘신화는 없다’였던 것입니다.
“정주영”하면 현대건설 회장이 생각나고, “이명박”은 그 후계자로 현대건설 사장, 그리고 “정몽준”은 현대건설의 2세 경영인으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이 공식은 세 사람의 입지에서부터 성공까지 시종 변치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고 있는 세 권의 책에서도 같은 공식이 적확히 적용되어 정몽준 씨의 책을 다른 두 권의 책과 비교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우리 서민들은 유명인의 자서전을 읽을 때 자신과 닮은 점이 있는지 살피기를 좋아합니다. 자서전의 대필 작가들은 그러한 서민들의 심리를 살펴 ‘가난했던 유명인의 성공담’으로 편집을 합니다. 정주영님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아들인 정몽준 씨의 ‘나의 도전 나의 열정’, 그리고 이명박 씨의 ‘신화는 없다’. 이상 세 권의 책은 모두 자서전의 공식 기록법을 충실히 지킨 역작이었습니다. 농사꾼의 아들 정주영이 세계적인 대기업 현대건설을 만든 과정과, 상고출신 귀국동포 이명박이 정주영의 오른팔로 그의 사업을 잇는 과정이 전문 편집인의 솜씨로 유감없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정몽준 씨의 경우 정치가나 기업인의 자서전을 정석대로 흉내 냈던 점이 손해로 보였습니다. ‘어려웠던 성장기를 극복하고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성공을 한다’는 형식에 충분할 만큼의 성장기 과정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갖은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고 나라에 봉사했다. 그러니 그 값을 달라. 앞으로도 이렇게 봉사할 비전을 갖고 있다.”는 형식의 정치인 공식 자서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어려웠던 성장기의 극복’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분야이건 성공한 사람의 자서전에는 공통으로 적용되는 공식 한 가지가 반드시 있습니다. 자기 얼굴을 갖는 것. 성공한 사람이라면 모두 자기류의 고집으로 인생을 살고 그 과정에 자기 색깔이 충실한 얼굴을 갖추게 되어 글에 나타나는데, 정주영님과 이명박 씨의 경우 감탄하리만큼 충실한 자기 얼굴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분의 자서전은 성공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의 개성이 드러나는 장면이 많아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재미가 넘쳤으니까요.
헌데 정몽준 씨의 책에서는 그러한 자기 얼굴을 발견하기 힘들었습니다. 스스로 고백하듯 ‘아버지에게서 인생을 배운’ 분의 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을 뿐, ‘나야말로 이러한 철학을 가졌으니 믿고 따라 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부분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기업을 물려받아 착실히 경영해 왔고 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공로가 있었음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서민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에는 방향부터가 다른 성공담들이었습니다.
저는 60대 초반으로 정몽준 씨와는 동년배이기도 하니 현대가가 낳은 세 분의 대통령 후보와 같은 세상을 시각만 바꾸어 보면서 살아온 사람인 셈입니다. 게다가 직업이 헌책장사이다 보니 책의 진실성을 의심해보는 습관을 갖고 있기도 하여, 세 분의 책에서 제목과 연관된 항목을 찾아보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옳습니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언제나 헤쳐 나오셨습니다. 그 과정에 더욱 충실한 전문가로 성장하여. 단, 정치인이 아니었을 때이지만. 고령교 건설공사, 태국의 고속도로공사, 주베일 항만공사, 현대조선 창설 등의 어려운 일들을 모두 이기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데 성공하였지요.
‘신화는 없다’. 역시 맞습니다. 보통사람들이 감히 생각지 못할 만큼의 초인적인 노력, 이명박 씨의 성취는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결과일 뿐 하늘이 우연히 빚은 신화는 아니었습니다. 상업고교 야간부 졸업자의 일류대학 입학과 학생운동, 현대건설 회장이 되기까지 삶의 모든 장면들은, ‘신화는 없다’라는 제목 그대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나의 도전, 나의 열정’. 역시 옳습니다. 월드컵의 한·일 공동 개최를 끌어내기까지의 노력은 책에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일화들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을 만한 애국적 열정의 결과였습니다. 당시는 IMF의 경제신탁통치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열정의 시기, 월드컵은 우리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데 최고의 상품이었습니다. 분명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한 도전과 열정은 혼자만의 영광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상 세 분의 책을 보면서 ‘한 분의 위대한 사람의 그늘’을 느꼈습니다. 이명박 씨도 정몽준 씨도 정주영님의 후광을 업고 현재가 있었습니다. 특히 기업의 후계자로서 정치적 성공까지 이룬 이명박 씨의 경우는 ‘신화는 없다’고 부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야말로 신화가 아닌가’하고 감탄할 만하였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시작된 신화는 ‘신화는 없다’고 자랑할 만큼의 신화를 엮어냈던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나의 도전 나의 열정’입니다. 정몽준 씨가 나라 안팎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들을 무릅쓰고 이루어 낸 월드컵은 역사에 남을 만한 성공담이었고 온 국민이 축제로 즐길 수 있었지만 책에 기록된 내용은 서민들에게는 구름 위의 동화처럼 꿈같은 이야기들뿐이었습니다. 길게 소개된 월드컵의 유치 과정에 자주 보이는 외국 유명인들과의 고급 호텔 회합 장면에서 ‘내 일이다!’로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월드컵 기간 동안 우리 서민들은 한 경기, 또 한 경기, 세계적 강호들을 이기고 올라가는 대한민국 선수단의 활약을 보며 함께 웃고 함께 울었습니다. 정몽준 씨는 우리 선수단의 승리 순간에 국민들과 함께 응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우리 서민들은 유명인의 모습에서 자신과 닮은 점을 찾을 때 가장 기뻐하고 경계의 마음을 벗어버리게 되니까요.
현대가(家) 출신 대통령 후보 세 분의 이야기를 길게 쓰고 있습니다만, 결론은 일개 서민의 시새움일 것입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부분을 이루어 낸 분에 대한 감탄과 시새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감동. 서민들이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는 마음은 모두 같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TV에서 정몽준 씨를 보고 조금 감탄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대결한 박원순 씨와 함께 나온 뒤풀이 장면이었는데, 허허로움 가운데 드러나는 나이만큼의 내공을 엿보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유명인의 자서전에서는 자기 얼굴을 드러난다’고 이야기했습니다마는, 갖은 어려움을 겪어본 자만이 보일 수 있는 깊이 있는 얼굴 표정을 읽는 것입니다. 헌데 과거의 정몽준 씨에게는 없던 역경의 표출이 보였던 것입니다. 자서전의 성립 공식인 ‘역경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갖추지 못한 정몽준 씨가 자기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한 꺼풀 벗어 날개를 얻는 나방이의 우화(羽化)와 같은데, 선거 과정에서의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던 탓의 체념 내지 달관의 표출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 날 출연한 두 분의 얼굴 모습이 비슷해졌다고 보았는데, 일개 서민이지만 동년배의 사람이 보는 평가이니 틀림없지 싶습니다.
자기 색깔을 살리라. 현대가의 창시자 정주영님의 정치 도전 실패는 끝까지 자기 색깔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군사독재시대가 마감되는 희망의 시대, 모든 것이 도약하는 기세였지만 경제만이 아직 궤도에 오르지 못했던 시기였는데, 정주영님은 자신의 색깔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경제를 살리자!” 일색이었으면 성공했을 것을 ‘초원복집사건’의 폭로 등으로 자기 분야 아닌 데에 열중하여 실패를 보았던 것입니다.
성공한 이명박 씨는 차치하고 정주영님의 아들 정몽준 씨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했습니다. 지난 16대 대선 때에 노무현 씨와의 단일화 번복으로 얻은 배신 이미지가 그대로 살아있던 분이 또 네거티브 작전이었으니 참으로 서툴렀습니다. ‘휘하에 진정으로 민심을 살필 줄 아는 서민 출신 참모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는데, 참모 부재는 부자 모두에게 공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재벌 출신이란 건 장점일 수 있지만 약점이기도 합니다. 서민들에게 친화감을 주기 위해 연출한 행사가 모두 역효과가 났다는 것을 참모들은 몰랐던 것일까요. 음식점 주방장 차림의 재벌가 출신 후보를 보고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실제로 선거 때마다 벌이는 정치인들의 그런 퍼포먼스에 속은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좋은 책을 추천해 주세요.”하는 말을 들으면 “백범일지를 읽으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백범 김구선생의 일대기는 너무나 감동이 커서 감히 말씀드리기도 저어됩니다마는, 책장사로서 자서전을 남기고 싶은 정치인 지망생들에게는 ‘자서전의 모든 공식을 가장 충실히 지킨 책이니 꼭 참고로 삼으라’하고 읽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물론 백범일지를 읽어 선생의 행적에서 무언가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경우가 되겠습니다마는.
끝으로 현대가(家) 출신 세 대통령 후보 중에서 당선의 영광을 입은 이명박 씨의 책 내용 중 제 직업인 헌책방과 관계된 부분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그 분의 성공 이유인 ‘헝그리 정신 강조’가 가장 잘 표현된 감동적인 장면이고, 겸하여 제 직업에 대한 자랑이기도 하여.
“청계천의 헌책방에 가면 참고서를 싸게 살 수 있다.”
이웃사람에게서 이 말을 들은 후 돈벌이에 나섰다. 이태원시장에 나가 번 일당을 모아 만든 1만 환의 거금(?)을 들고 청계천으로 나섰다. ‘대학입시 참고서 전문’이란 간판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헌책방 주인은 사십대 남자였다. 대학입시 책을 사려고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하자 어떤 책을 찾느냐고 했다.
“그걸 모릅니다. 무슨 책을 봐야 할지를 모릅니다.”
주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
“어느 대학이든 상관없어요. 아무 대학이나 갈 수 있는 책을 주십시오.”
주인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책이 빼곡한 서가에서 책을 골랐다. 여남은 권의 책을 쌓아 놓고 주인은 주판알을 튀겼다.
“삼만 환이야. 아주 싸게 쳐준 거다.”
“이거 어떻게 하죠. 지금 가진 돈이 만 환이 전부인데…….”
“야, 너 지금 바쁜 사람 앉혀 놓고 장난하는 거냐. 보자보자 하니까 이놈 엉뚱한 놈이네.”
주인은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욕설을 퍼부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너무 심하게 욕을 해대니 나는 참다못해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학교에 가려고 하나. 그냥 시험이나 보려는 건데.”
“뭐라고? 이런 이상한 놈 다 봤나. 너 뭐라고 했니?”
나는 (어려운 환경을) 사실대로 말했다.
……
내 얘기를 가만히 듣고 난 책방 주인은 처음에 꺼냈던 책들을 서가에 꽂고는 책을 다시 고르기 시작했다.
“이 책으로 공부하면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다. 있는 돈만 주고 가져가. 나머지는 나중에 갚아.”
돌변한 주인의 행동에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내 등을 떠밀었다.
“내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가. 이 촌놈아.”
나는 믿어지지가 않아 책을 가슴에 안고 뒷걸음질 치다가 냅다 뛰었다. 그가 마음이 바뀌어도 쫓아오지 못할 지점까지 나는 멈추지 않았다.
욕쟁이 책방 주인 덕분에 참고서는 구했지만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나는 아침저녁에는 시장에서 부모님 일손을 돕는 한편 시간을 쪼개 입시 공부를 했다. 헌책방 주인이 헐값에 준 참고서들은 내가 지난 3년 동안 배운 지식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를 깨우쳐 주었다. 나는 죽어라고 참고서를 파고들었다.
……
시험 당일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겨우 시험장에 들어갔다. 영어는 잘 보았고 수학도 무난했다. 그러나 합격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
그런데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신화는 없다)
첫댓글 현대가의 사람들은 역동적입니다. 뭔가 더생각해보게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최근에 후손들이 서툰 행보를 보여 반감을 산 점은 있지만, 현대가, 특히 정주영님의 공로는 인정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신화는 없지요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지요
댓글 자주 달지못해 미안합니다
옳습니다. 무릇 성공한 사람들은 남모르는 노력이 있었지요.
읽어주시고 좋은 조언 주셔서 고맙습니다.
왕회장이 스스로 자기를 가르쳐 '나는 소나무같은 사람이 아니라 잡초와 같은 사람이다.'바람이 거세면 눕지만 다시 일어서서 목표를 이루는 사람이란 것이다. 힘도 세셨지..신입사원과 씨름도 곧장 하시곤 하셨고. 짜장면 500인분을 먹일수 있는 능력도 있었고.....
왕회장님.... 오랫만에 듣는 호칭이네요. 현장에서는 폭군처럼 몰아치셔서 위엄이 지나치기도 하셨다지만, 일을 벗어나서 사원들과 어울릴 때는 자상한 어른이셨다더군요. 자서전을 읽고 난 후 그 어른이 이 나라의 한 분야를 호령하셨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성본사엔 소나무로 가림벽을 만들고 있고....
아산병원 정몽준집무실앞에 대나무정원이 있고 자갈이 깔려있답니다.
정주영님이 대나무를 좋아하셨다네요..
낙엽지는 가을..... 아산병원 조경팀은 자갈들사이에 박힌 대나무잎을 일일이 하나씩 줍느라 고생한다는데...
"밀어붙여!!" 좋아하시는 왕회장님이 그 광경을 보셨다면 뭐라 하실지....
글쎄요... 울산 현대에서는 다들 정회장에게 표를 몰아주었을지는 모르나...
송파구풍납동 아산병원 직원및 그 가족들은 절대 안찍는다는 소문이....
오라버니...다 읽고 글 한번 써보신다더니.. 그새 벌써....
저는....나이들어 기력이 쇠하여(?) 대상포진이 온 관계로 며칠 늦어질것 같습니다.
궁금하시더라도... 쫌만.....ㅎㅎ
대상포진은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오는 건데 예원님은 아직 청춘이시군요. 부럽습니다.
왕회장님.... 그 분이 청문회에 섰던 때가 생각납니다. 서슬 푸른 국회의원들이 위엄에 질려 "회장님"을 깍듯이 불렀었지요. 하기는 백번 생각해도 과보다 공이 많으신 분이셨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아산병원 대나무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재미있는 일화네요. 암튼 제가 복이 많습니다. 좋은 동료들에게 도움되는 이야기를 얻어들었으니 또 아는 척을 해야지....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건강 챙기시고 오시게 되면 전화주세요. 저는 어머님이 병환 중이셔서 조금 고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쓴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제가 좀 주책인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날이 생각이 나기도 하고 끝 까지 좀더 2 3 년 만을 가족들의 반대.. 다 제 탓이지요
어려움 속에서 다 이루지 못한 꿈
과하객님 저도 책을 꼭 사서 보렵니다 어쩜 쉽게 볼수 있게 요점 정리를 잘 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정주영 회장님의 일화를저도 많이 보았습니다 전임 대통령 이명박님의 스토리도 들었지만 모두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신 분들이라 본 받을 만한 점이 많으신 분들입니다
왕회장님의 책은 헌책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허름한 책도 괜찮다면 010-9434-6318로 전화주세요. 이명박 씨의 책과 더불어 구해 보겠습니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사신 분들 중 성공한 분들은 누구라고 할것없이 노력이 대단한 분들이었지요. 4대강 때문에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명박 씨도 대통령으로서 충분히 나라를 사랑한 분이셨습니다. 공과에 대한 논란은 접어두고 저 개인으로서는 존경하는 분 중의 한분이십니다.
눈물이 흔한 건 감성이 온화하다는 뜻인데 카타리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좋은 어머니시고 할머니시이시겠지요. 박수를 보냅니다.
진행형이신 님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과하객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계속 응원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개인의 성취욕이 과하고 불도저처럼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는 현대의 이미지 때문에 일부 욕을 먹는 부분이 있기는 하나 크나 큰 어려움 속에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왕회장과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담은 미래의 발전을 추구하는 꿈많은 사람들이 눈여겨 보아 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글평으로 유명인의 자서전을 압축 해석한 듯한 형님의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저는 7월 초중순 경 책방에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고... 모친도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면세계 일은 우리가 모르는 바니 차치하고 본다면 그분들은 우리 시대의 영웅들입니다. 말씀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한....구태여 성공담을 논하여 글로 만들지 않아도 일세의 거인들이시지요.
아무 때나 들리십시오. 요즘 부모님 두 분이 차례로 병원행을 하시는 바람에 맘이 편치 않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때문이라고 체념하려 해보아도 자식된 입장에서 영 마음이 안 좋네요. 다 내가 지은 죗값이려니 하고는 있지만.... 위로의 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친정 어머님을 막내로서 오빠 언니들이 다 출가하여 병수발 임종하시는 것을 보았고 ~~ 우연에 일치라고 할까요 시어머님도 병수발 임종을 제택 간호사와 둘이서 보았답니다 두분 어머님들이 다 착하시고 남에게 피해주시지 않은 분들
그러나 돌아가실때는 두 분이 다 무척 고생을 하시는 것을 보아 마음이 아팠지요 죽음 복도 타고 나야 되는지....
돌아가신 후 후유증이랄까 육체적인 몸도 억망이고 정신적인 충격이 ~~ 오래 갔지요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저도 집 양반이 장남이라 당연히 제 임무라 생각하고 노력했지만 ~~ 좀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사람이 풍부할 때라도, 그의 생명은 자기의 소유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2:15)
전도용 소책자에서 발견한 성구입니다. 잠시 맡아가지고 있는 것을, 내 것이라고 놓치기 싫어 아등바당하는 사람들의 속됨을 지적한 듯합니다.
부모님.... 영원히 함께 갈 수는 없지만 절대로 보내드리고 싶지 않은 인연.... 어제 퇴근해 보니 늦은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고 계시네요. 다행히 많이 좋아지셔서 조금 마음이 놓입니다.
다섯 살 지능이 되셔서 사탕을 까서 입에 넣어주시는 아버지.... 나중에 후회가 없도록 싫컷 놀아드리며 살고 싶은데 생활이 여의치 못하니.... 못난 자식이라 한숨만 나옵니다.
@과하객 오호! 좋은책들을 줄거리까지 소개해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가내모두 평안하시길~!!
@백작 읽어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재벌가의 이야기는
언제나 세간에서
회자되는 바이지만
현대家의 신화가
제일 재미있지요
왕회장이란
뛰어난 히어로의
대담무쌍한 도전과
통쾌한 성공담은
읽는 이의 마음ㅇ을
후련하게 하지요
여기서
돋보이는 건
현대가에서 나온
세사람의
인물 비교
객관적이라기 보단
글쓴이의
주관적 평가지만
시사하는바가 크고
공감도 많이 갑니다
개인적으로
골치아픈 일이 많아
미뤄 뒀다 읽었지만
재미 있었어요
정몽준씨의 내공을?
알아보셨다고요?
그게 그의
잠재력이 되라라
기대하는 마음-
옳게 보셨습니다. 책장사라서 세권의 책에 나타나는 그림을 옮겨 본 것인데 아무래도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몽준씨의 경우 한몫을 할 상이라 주의 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다음 대선이 그 분의 인생에서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마는. (역시 제 개인적인 생각이니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항상 좋은 말씀으로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곧 장마라 하니 건강 유의하시고 계속 성원해 주세요.
좋은 책을 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워낙 글 솜씨가 없어서 그러나 세간에 회자되던 스토리 보다 훨씬 마음에 닿습니다책을 다 읽고 또 책을 빌려 주고 있지요거운 날 되세요
훌륭하신 분들의 책을 읽으며 제가 알지 못하던 많은 부분을 알게 되어
여기 낄 수도 없는 제가 좋으시고 훌륭하신 분들을 알게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과하객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들려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위에 열거한 분들은 나름 일가를 이룬 분들이지만 요즘 약간의 시련을 겪고 있기도 하더군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곧 명절인데 편안하신지요. 다녀가신 후 대접이 소홀하여 내내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항상 좋은 글로 용기를 주시는 분이신데 제가 많이 무심했던 듯하여....
집안에 우환이 있어 답글이 늦었습니다. 노인네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살얼음판을 걷는 듯 늘 불안합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오랜만에 읽습니다 만, 역시 항상 과하객님의 글에 감동을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심천님이 들려주셨군요. 명절 연휴 재미있게 보내셨는지요.
변변찮은 글을 늘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주영 동상을세워 국민이 기려랴할 영웅이라고 생각됩니다.우리나라가 일본을앞지르고 미국을위시한 세계각국에 진출 경제영토를 넓히고 민족의자신감 우수성을 일께워주신분이지요.삼성의 이병철님과 혜안을가지고 국민의역량을 한데모운 위대한 박정희대통령도 빠질순없다고 생각되네요. 세운공이 너무나 커서 허물를덥고도 우리역사에 찬란하게빛납니다 정치 경제 사회가 자신감과 역동적인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옳습니다. 그 분은 단순 기업인이 아니라 시대의 영웅 중 한분이지요. 그분 스스로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셨으니....
요즘 서민경제가 너무 어렵습니다. 부의 분배에 장애가 있는데.... 자영업자들 다 죽어가도 대기업은 외형이 커지고 있어요. 왕회장님 때는 기업이 공존의 지혜를 알았었는데....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