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냐? 문전새(세)재냐?
현재 전국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를 때 대표적으로 불리는 가사는
교과서에 올려져 있는 대로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가 구부야 구부구부 눈물이 난다’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으로 되어버렸습니다.
이는 교과서에 쓰인 가사가 하필
진도아리랑의 많고 많은 가사 가운데에서 하필이면 ‘문경새재’로 시작된 가사가 올려 있어서 차츰 이렇게 굳어져 가는 실태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전새재’에 관한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진도 안에서는 본시 한 많은 여인네들의 삶에 빗댄 문전세재(門前三峙)라고 해서
①태어날 때 여자로 태어나서
②시집을 와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고
③북망산천으로 떠나간다는
이렇게 고되고 한 많고 기구한 진도 여인네들이 인생길 세 고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또 혹자들은 여인네들이 하루에도 바쁘게 수없이 들락대는
①안방하고 정재깐에 쪽문(안방과 부엌의 쪽문)
②정재깐하고 마당케에 정재문(부엌과 마당의 부엌문)
③샐팎이로 나가넌 대문{집 밖으로 나가는 대문)
여인네들이 이렇게 날마다 바쁘게들 넘나드는 세 개에 문이 있고 그렇게 수없이 넘어 다니는 문턱이 내나 문전 세 고개라고도 합니다.
여하튼 힘들고 고달팠던 우리 할머니랑 울엄매, 우리 아짐들에 한 많은 삶들이 담긴 진도아리랑 가사가 내나 그 ‘문전세재’란 이야기가 기존의 대세로 보입니다.
그런데 기록들은 ‘문전새재’로 적어 놓은 것들이 많고
또 ‘칠전 꿀재(굴재, 屈峙)가 아리랑고개고 문전새재이다.’
‘진도 읍성에서 나가던 큰 세 개의 고개로 동쪽에 정거름재(停車峙)하고 남쪽에 왕무덤재 그리고 꿀재(屈峙, 굴재)의 세 재가 문전세재다.’라는 설은 또 달리 있습니다.
이 얘기는 따로 드릴 얘기로 여기 64회 김명수 동문이 쓴 글도 참고 바랍니다.
https://m.cafe.daum.net/jindo100/O7wr/98
https://m.cafe.daum.net/jindo100/O7wr/99
하지만 또 3고개라면 진도말로 ‘싯’잉께 ‘문전시재’가 맞고 표준말로는 ‘문전세재’일 것인데 어째서 ‘문전새재’로 기록을 했을까? 말하지만
본래의 서울사투리(서울방언)도 그리고 진도사투리 등 서남방언도 ‘ㅐ’와 ‘ㅔ’의 구별이 모호하다는 발음 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로 문제는
진도 안에서나 진도인들조차 ‘문전세재’가 아닌 ‘문경새재’의 가사로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경우가 늘어 가고 일부 인사들은 진도아리랑의 근원에 대해 ‘문경 대갓집에 머슴살이 갔던 진도총각이 그 집 딸과 눈이 맞아서 문경새재를 넘어 도망쳐 오다가...’라는 뻘소리까지 해대면서... ㅠㅠ
그렇든 저렇든
문경새재가 맞는가?
문전세재가 맞는가?
정답은 ‘둘 다 맞다.’입니다.
왜냐하면 진도아리랑이나 여타 모든 아리랑은 그 중요한 특징으로 공히 즉흥성과 창작성과 개사(改詞)해서 부르는 자유스러움이 아리랑에 기본적 특성으로 있습니다. 모두들!
이는 기존 진도아리랑에도 기차가 없는 진도에서 ‘기차 정거장’과 ‘역전’이라는 가사도 있고 ‘만주봉천’에다 ‘일본대판’도 자주 나오고 하니 ‘샌프란시스코금문교’나 ‘런던브리지’가 진도아리랑 가사로 불린다고 해도 안 맞는 것이 아니고 이상할 것도 하나 없이 ‘문경새재’ 가사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해서 ‘문경새재’가 틀리고 ‘문전세재’가 맞다는 얘기는 아니고
또 이 점으로만 논쟁을 할 일이 아니고 문경새재 가사도 진도아리랑 가사이긴 한데 진도아리랑의 본고장인 진도와 호남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문전세(새)재’ 가사로 불리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경상북도 문경시에는 1886년에 쓴 아리랑 최초의 서양 악보라는 헐버트 선교사의 악보를 근간으로 한 ‘문경새재아리랑’이 따로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한데 하필이면 교과서에 진도아리랑 대표곡이 ‘문경새재’로 시작된 가사가 올려져 있어서 일반 국민들에게 '문경새재아리랑'인지 '진도아리랑'인지 혼동시키고 또 계속 이 가사만 고착화 되어간다는 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전주 출생으로 전주신흥중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했던 송현(1944~ ) 선생님은 ‘우리 할아버지께서 늘 문전새재는 웬 고갠가... 노래하시는 것을 어릴 때부터 항시 듣고 자랐다’라고 말하는 증언대로 예로부터 호남지역은 ‘문전세(새)재’로 불러왔었다는 현지의 엄연한 실태가 있습니다.
앞에서 문전세재로 예시한 진도 여인네들에 한이 담긴 가사랑 가락도 있고, 진도가 섬이고 세계적으로 물살이 센 지역이라서 세찬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고난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진도에 유독 피해가 많았던 삼별초 전쟁 이후 몽골로 끌려간 만여 명의 군민에다, 오랜 기간에 걸친 숱한 왜구들의 침입, 동학혁명 때도 큰 피해지로 진도읍 송현 솔개재에서 수백 명이 처형돼서 그 유골이 일본에까지 갔다가 되찾아 온 등에 직접적인 피해지였다는 점도 있고,
조선시대 최다의 유배지라는 등에 진도의 역사적 배경으로도 한도 많고 슬픔도 많고 그 고된 삶 가운데서 죽은 시신을 곁에다 두고도 어떡하던지 이를 극복해 내야만 살 수가 있었던 진도인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죽은 자 곁에서도 산 사람들은 살아야만 했으니
그 슬픔과 고뇌와 한들을 다 녹이고 승화시켜서 이를 딛고 일어나고자 한 몸부림에 의지들로
슬픔도 아픔도 한도 모두 한곳에다가 쏟아붓고
이 모두를 흥과 정열과 희망으로 녹여낸 진도아리랑의 가락에는
그러한 특유에 한을 녹여서 끌어낸 깊은 신명과 흥이 넘치다 보니
진도아리랑 특유에 경쾌성으로
거의 모든 국악 공연의 마지막 한바탕에 어울림판은 진도아리랑 합창으로 마무리 짓기가 제일 좋은 음악으로도 널리 쓰이고 있지 않던가요?
그런데 거의가 꼭 그때 부르는 진도아리랑 가사는 교과서에 실린 그대로 ‘문경새재가 웬 고갠가...’로 시작들이 되고 있다는 그 현실이 제일로 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 연유로 외지인들이 가락은 진도아리랑 가락을 따라 부르고 흥얼대면서도 정작 문경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과 혼동한다는 얘기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란 얘기입니다.
이 모두가 일찍이 교과서에 올려져 있는 진도아리랑의 ‘문경새재 가사’를 다른 가사의 진도아리랑으로 바꾸어 놓지 못한 원인 때문에
지금도 ‘문경새재...’로 시작하는 진도아리랑이 진도 안에서조차 자꾸자꾸 불려진다는 점이 슬픕니다.
물론 ‘문경새재 가사도 문전새재 가사도 모두가 다 우리 진도아리랑 가사인데 그게 무슨 문제냐?’ 할는지 모르지만
앞에서 이야기해 드린 대로 <문경(새재)아리랑>이 따로 있다 보니
가뜩이나 대처에서 <진도아리랑>이 <문경새재아리랑>인 줄로 잘못 알려지고 헷갈리게 하는 점이 참으로 짠하고 안타깝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진도인들은 진도아리랑의 가사 가운데서 예의 이 ‘문경새재’ 가사는 되도록 ‘문전세재’로 바꿔서 부르든가 그 연유를 되새겨 보면서 또 주변에다가도 후손덜한테도 알려줘야만 하겠다고 여기는데
정작 진도 안에서는 자꾸 애만 짓에다 근거 희박한 소리만해대고 똥뽈차듯 나부대는 판이니... ㅠㅠ
진도아리랑 보존회장님이신 박 모 씨가 <예향진도신문>다가는 맨당 그 문경머심 애기를해도 그냥 보고만 있었제만
어느 날 느닷없이 전군에 배포되는 <국방일보>에다가도 예의 그 근거 없는 소리로
▶*‘문경 대갓집에 머슴살이를 갔던 진도 총각이 그집 따님과 눈이 맞아 진도로 도망쳐 오다가... ’ 그케 허구에 소리를 걱다까지 하셔서
지가 진중 24회 동창인 조정현 장군한테다 얘기해가꼬 반박글을 낼라고 했었제만
‘국방일보라는 성격상 반론 게재는 불가하다’라고 해서 두루뭉술한 얘기로 우회적이로 적었든 원고럴 보냈는데 그남둥 반박이라고 거슬리는 부분은 편집에서 칼질당하고 저케 기사가 나온 적도 있는데
근래에도 진도문인협회 회장님이라는 시인 분도 예향진도신문에다가
▶**'(진도로) 유배오면서 강을 넘고 산을 넘어오는데... 험한 고개... 문경세재(이 분은 확실하게 세재라고는 했소만)는 왠 고개인가 구부야 구부구부...'라고 진도 안에서덜
이케 똥뽈들을 씨게 차대는 판이다 봉께... ㅠㅠ
-------------참고 사항-------------
▶*'진도 농사 수확 1년치므는 진도군민 3년치 양석이 나온다'라 했고, 호남이 곡창지대라서 머심도 호남서 하므는 될 것을 해필 깊고깊은 두메산골 문경까장 머심살이럴 진도 청년이 갔단 것도 허구 같으고
문경서 진도로 내롤라믄 남쪽 아래 평탄한 질로 빨리 내롸사제
도망치는 놈이 어째 해필 한양 가는 북쪽 젤로 험한 구부구부럴 넘고넘어가꼬 올라갔다가... ㅠㅠ
그라고 진도아리랑 자체가
‘일제강점기 시절 당시 읍내 신청에서 대금국수 박종기 선생이 박진권, 박동준, 채중인, 양홍도씨 등이랑 항꾼에 모태가꼬 진도랑 인근 지역에서 전하는 아랑타렝, 아롱타렝, 산아지타령... 등을 모태가꼬 진도아리랑이로 한테 묶어서 맨들었다’고덜 그케 전하는데라.
박종기 국수에 한참 때라므는 일제강점기 후반이고, 문경댁을 달고 진도로 둘온 머심이라므는 광복후 60년대라 해도 다덜 문경댁이 누산네네라고 진도바닥이 기냥 다덜 알 일을... ㅠㅠ
그랑께 그 당시 누구네 아부지가 그 문경 머심이고 엄매가 문경댁잉고... ???
▶**유배자들이 한양에서 진도를 오르내리는 길목에도 ‘문경새재’가 또 있당가라?
진도 유배자가 경북의 문경새재를 넘어가꼬 유배 올 일은 눈꼽삐자구만침도 없넌데...
※중요한 내용이라 외지인덜도 공감하라고 앞에 본문은 표준말로 많썩 적어서 썼구만이라.
-진도사투리사전 저자 송현인 제59회 조병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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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글*************
누군가 우려를 전해서 노파심으로 첨언드립니다.
이 글은 진도 안에서 좋은 업적들도 많은 회장님들이신 누구누구를 까내리려했다거나
그 분들을 공격하자는 글은 절대로 아닙니다.
논문도 '반론이 없는 논문은 죽은 논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논리나 논조에는 정당한 반론을 제기하고 또 그 반론에 대해서 재반론이 있고 또 다시 재재반론... 등으로 서로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되고
보다 완벽함과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반론들입니다.
제 글을 다시 잘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문경새재도 옳고 문전세(새)재도 다 옳은데
다만 진도아리랑 입장에서
‘문경새재’ 가사만 교과서에 올려져 있는 관계로 이 문경새재만 부각되고 고착화 되는 점은 우려스럽다는 뜻입니다.
진도 본향에서는 문전세(새)재로 불렸던 선인들에 가사가 계속 있어왔고
그에 관해 깊은 연고와 내력들을 담고 있는 문전세(새)재인데 진도 안에서 조차 그 가사가 잊혀지고 문경만 퍼진다는 점이 걱정스러우니
이 점에 유의해서 우리 진도 고유의 문전세(새)재를 꾸준히 부각시키고 각인시키자는 얘기가 그 주제입니다.
1930년대인 김소희 명창의 축음기판 이전이나 그 시대에 문전세(새)재란 기록물이 찾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아울러
진도 안에서도 자꾸 문경새재을 언급하면서
그 뿌렁구랍시고 누군가가 허접하게 꾸며서 지어 낸 ‘문경에 머슴살이 간 진도 총각’ 얘기는 전혀 가능성이나 실체성이 없는 허구의 얘기이니 더 이상 삼가 주든가
아니면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이야기이니
누구네 할아부지 누가 문경머심이었고 어뜬 함씨가 문경서 데꼬 온 문경댁이라는 근거를 밝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진도인들 스스로가 문경새재아리랑의 홍보를 해주는 결과를 만들고
'진도아리랑'이 아리랑 비석거리와 아리랑 최초에 헐버트 악보로 적극 홍보되고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의 둘러리로 차츰 전락하는 바가 없도록
진도인들과 향우님들 모두가 함께 각성하고 노력하자는 취지의 글이었습니다.
꽃울고 새피넌 봄에 모도모도 건강덜 하시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