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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8. 비류왕의 일본 재건(재위306~343)
주임교수 추천 1 조회 42 15.08.06 05: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8. 비류왕의 일본 재건(재위306~343)

 

 

비류왕(比流王)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은 166년부터 일본에서 활약하고 214년부터 백제왕으로 재위하여 234년에 죽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비류왕이 그 둘째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비류왕이 166년에 태어났으면 180년을 산 것이 된다. 따라서 구이왕의 아들이거나, 구수왕의 손자로 본다. 일본에 진출한 것으로 보아서 구수왕의 손자로 고려된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였고 또 힘이 세어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백성들 사이民間에 있었지만 명성은 널리 퍼졌다.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로써 비류가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5년(308) 봄 정월 초하루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월 31일인데 남반구 일식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 추산으로 기록한 일식으로 보인다. 0306 Jan 31 02:46 T 84 -0.374 1.041 39.1S 147.9E 68 147 03m23s

 

9년(312)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순행하면서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하고,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 아이, 자식없는 늙은 이鰥寡孤獨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세 섬을 주었다.
여름 4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10년(313) 봄 정월에 남쪽 교외南郊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는 데 왕이 제물로 쓸 짐승을 친히 베었다.

 

13년(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넘치더니 검은 용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17년(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쏘는 돈대射臺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를 익혔다.

18년(321) 봄 정월에 왕의 서제(庶弟)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22년(325)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풍랑(風浪)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았다. 11월에 왕이 구원(狗原) 북쪽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24년(327) 가을 7월에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였다.

내신좌평 우복이 근거한 북한성이 대동강 평양성이니 비류왕의 수도가 요양시 비사성이었을 것이다. 550년에 대동강 평양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어서 고구려 양강왕이 쫓겨간 곳이 비진류도(比津留都)라고 하였다. 바로 요양시 태자하 비사성을 의미한다.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0년(333)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 가을 7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진의(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우뢰가 쳤다.

 

32년(335)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2월 31일인데 한반도는 밤중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 추산으로 기록한 일식으로 보인다. 0335 Dec 31 21:28 P 95 1.143 0.715 64.7N 164.9W 0

33년(336) 봄 정월 신사에 살별彗星이 규(奎) 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
41년(344)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근초고왕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비류왕 즉위초에 일본 재건을 위한 진출이 활발하였다.

 

 

선비족 전연국의 강성

 

313년 고구려가 백제 서쪽의 낙랑을 뺏어갔다. 314년에 대방, 315년에 현도를 뺏어갔다. 백제 분서왕을 죽인 백제 낙랑태수 장통이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318년 고구려의 전연 수도 대극성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대릉하의 양평과 요하 하구 서안의 평곽성 등 요동군은 전연국이 다시 가졌는데 그 선봉이 백제인 장통이었다.  
333년 전연의 모용외가 죽고 모용황이 승계하였다. 이때 작은아들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켜 평곽성에서 모용황과 대치하였다. 

336년 모용황은 창려로부터 얼어있는 바다를 도보로 건너서 평곽성으로 진군하여 모용인을 토벌하였다.
336년
6월에 단료段遼의 동생 단란段蘭이 곡수정에 주둔하여 전연의 유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다. 모용황이 출병하니 단란은 후퇴한 후에 다시 유성으로 돌아오는데 전연군은 이에 대비하여 유성 부근에 매복柳城左右設伏以待했다가 치기로 하는데 매복한 곳이 마도산馬兜山이었다. 그리하여 전연군이 승리하였다.
전한시대 유성柳城에는 마수산이 서남쪽에 있었다.馬首山在西南.

이는 요동국의 요서군 유성이었던 조양시가 아니다. 전한시대 유성은 북쪽에서 삼류수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해안이 가까운 곳이니參柳水北入海 이는 조양시가 될 수 없다.
마수산과 마도산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마도산馬都山 전투는 734년 발해가 당나라와 전쟁을 한 곳이며 이는 신당서 <오승체전烏承?>에 나온다. 

<거란전>에서 732년 거란이 당나라를 칠 때는 유관도산?關-都山 전투라고 하였으니 바로 임유관 앞이다.  한편 [대진국본기]에는 요서의 대산(帶山)이라고 하였다. 이는 수나라가 유성(산해관)에 설치한 요서군의 대방산과 같은 것이다.
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鳴山、松山。有?水、白狼水。

따라서 모용황과 단란이 싸운 유성은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아니라 한나라 요서군 유성이었고 뒤에 당나라 유성, 평로성이었다.
338년 4월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수십만 대군으로 전연국 대극성을 치러왔는데 모용황은 이를 막아냈고 석호에게 항복했던 연나라 장수들은 죽거나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때 조군을 물리친 모용각이 341년에 평곽에 부임하여서 고구려, 백제를 막았다.
339년 모용황은 동진의 책명을 받아서 결호하였다.
342년 10월 모용황은 조양시 화룡성으로 천도하였다. 조나라가 바다로 침입해오기 때문이고 333년에는 모용인도 바다로 극성을 치려고 했었다.
342년 11월에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5만명을 끌어왔다. 화룡성의 배후를 안정시킨 것이다.
345년 1월 연국왕 모용황은 용성에 끌어모은 타부족인 구려,
백제,우문부, 단부인 들로 고민하여 이들을 서부로 옮긴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백제인들이 전연국 모용황에게 잡혀간 기록은 따로 없다. 그러나 313년에 고구려에 쫓겨서 모용외에게 투신한 낙랑태수 장통이 바로 백제인들이었던 것이다.

345년 10월 모용각은 고구려 남소성을 빼앗았다. 慕容恪攻高句麗南蘇,克之,置戍而還
346년 1월에는 모용준과 모용각이 부여를 쳐서 그 왕 여현(餘玄)을 사로잡고 5만여명을 끌어갔다. 
본래 부여는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에게 침략을 받아서 연나라 근처에 왔다고 하였다. 
夫餘居於鹿山,爲百

 

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부여를 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녹산은 발해 녹군현이었던 요나라 건주로서 보면 의무려산 남단이다. 의라왕이 이곳에 있다가 일본에 가서 숭신천황이 되었고, 백제 분서왕의 낙랑서현 공략 때에 이 곳의 부여는 백제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모용황이 친 부여는 곧 백제다. 

이때 끌려간 부여왕의 이름도 백제 왕자 이름으로 고려되는 여현(餘玄)이다. 여현은 모용황의 사위가 되었고 여현의 아들은 여울(餘蔚)인데 부여왕자라고 칭했으며, 370년 부견이 전연국을 멸망시킬 때에 전연국 수도 업성 문을 열어 부견을 들어오게 하였고, 384년 모용수가 후연국을 세우니 후연국의 재상까지 되었다. 
후연은 요하 하구 평곽으로부터 요동반도 남단의 복주 부여성을 친 것으로 고려된다.
전연국으로 끌려간 여현은 비류왕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9. 걸왕의 일본 진출(재위343-346)

 

걸왕(契王)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처음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은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3년(346)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283년 왜여왕 일여(개화천황;244~283)의 사후에 사비왕의 아들이자 일여의 숙부인 효안천황(222~298)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遼寧省
요서遼西에 있던 부여夫餘에서 285년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일본으로 새로 도래한 부여 의려왕依慮王이 백제 일본을 빼앗았다. 의려왕은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이 되었다. 효안천황은 오오사카의 대화를 빼앗기고 미와산으로 피신하였다.
미와산
三輪山의 전설에 의하면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라고 하였고, 이때 미와산의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235~318)와 대물주신이 만나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태어났다.

일본에 제 12세 천황으로 기록된 경행천황景行天皇(273~358)은 백제 분서대왕汾西大王(재위300~304)의 아들 걸대왕契大王(재위343~346년)이다.
걸대왕은 분서대왕의 암살 당시에 32세나 되었으니, [삼국사기]기록과 같이 어려서 즉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지 못했고, 대신에 요양시에 위치했던 비류대왕이 즉위하였다.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日本足彦國押人天皇인 효안천황(222~298; 백제 사비왕의 아들)이 298년에 서거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서 백제 걸대왕이 일본에 가서 오호타라시히코
大帶日子가 되었다. 타라시帶는 대방에서 온 것을 의미한다. 

 

부여 의라왕의 침략에 의해 책계왕責稽王이 300년에 전사하고, 뒤이어 백제의 일본 땅을 부여 의라왕이 숭신천황이 되어서 침탈하였으니,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대왕, 즉 경행천황은 복수하기 위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도일하였다. 따라서 경행천황의 자손이 80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80명중에서 태자太子라고 불린 사람은 셋이었는데, 성무천황成務天皇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와 야마토타케루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으로 일컬어지는 야마토오구나倭男具那(295~333) 그리고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 등이다.
이 중에서 성무천황이 된 와카타라시히코
若帶日子命(326~370)만이 경행천황의 아들이다.
두번째인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백제 비류대왕의 쌍둥이 아들중 동생인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세번째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태자였다. 그는 호무다노미와카品陀眞若(305~361)을 낳았고 그의 세 딸이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하였다. 그의 세 딸은 타카기노이리히메高木入日賣命(318~366)와 나카쯔히메中日賣命, 오토히메弟日賣命(324~368)인데,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한 오토히메가 384년생일 가능성은 없으므로 324년출생이 확실하고, 그의 조부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273년생이 되며 경행천황과 동갑이니 경행천황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호키노이리히코
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장왕자로서 백제 태자이며, 백제에서 숭신천황을 치기 위해 건너온 정벌군의 대장이었고, 그는 318년 6월에 숭신천황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고려된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걸대왕이 이나비노오호이라쯔메伊那毘能若?女命(278~318)을 통하여 얻은 야마토네코倭根子命(302~348)와 카무쿠시神櫛王命(308~350)가 경행천황이 도일하여 초기에 얻은 아들들이다. 그보다 큰 아들로 기록된 쌍둥이 두 아들인 오호우스大?命(295~318)와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6~343)의 아들들이다.

일본에서 전사한 근초고왕의 형인 오호우스大?命(295~318)묘와 그를 모시는 원투신사. 아이지현 도요다(豊田市)시에 있다.


구이대왕仇台大王(재위 234~238)의 아들 비류대왕이 343년에 죽고, 분서대왕의 아들 걸대왕契王이 343년에 백제로 돌아와 백제대왕이 되었다.
그러나 346년 초에 선비족 전연국의 모용황이 백제 부여부를 쳐서 부여왕 여현
餘玄과 5만명의 포로를 끌어갔다.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환도성을 함락하고 5만명을 끌어간 모용황에 의해서 백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백제 걸대왕은 선비족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서, 재위 3년만에 강제 퇴위 당하고 일본으로 다시 떠나가서 경행천황
景行天皇이 되었는데, 전쟁에서 패전하면 왕이 죽거나 물러나는 것이 본래 부여인의 국법이다.

 

백제 걸왕인 경행천황은 일본 정벌에서 거울을 앞세운 것으로 고려되는데, 경행천황의 지시를 받고 정벌에 나선 일본무존은 배를 타고 갈 때에 배 위에 큰 거울을 걸었던 사실이 있고, 계, 걸과 경의 일본 발음이 “게이”로서 같고 “걸”은 우리말 거울 옛 발음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경행천황의 이름은 오시로(於-斯呂, 忍-代)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히시로日代 궁이었다. 시로는 흰색의 발음과도 같다.
시로
斯呂는 대로도 썼지만, 백제 걸왕의 걸, 를 일본에서는 《게이》로도 읽지만 《시루시》라고도 발음했다.

[일본서기/인덕천황기]의 원년 기록에서 후엽지계後葉之契는 “시루시(=증표證票)”로 읽었다.

따라서 위덕왕이 된 백제 창왕昌王과 같이 걸대왕의 본래 이름은 여설餘契, 혹은 여걸餘契이 되고 일본에서는 시로왕, 후에는 게이고우천황景行天皇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행천황은 효안천황처럼 이름 앞에 타라시
를 경칭으로 썼는데, 경행천황은 키가 크고 특히 다리가 길었다고 《고사기》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대는 백제 대방 출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행천황이 죽은 일본내 궁성 이름이 근기近畿의 시가국滋賀國성이다. 칠지도에 기록된 백자국百慈國의 위치로 고려된다.

경행천황의 높은 이름은 그의 일본 정벌에 의한 것인데, 규슈를 탈환한 것이다. 또한 비류대왕의 쌍둥이 둘째 아들, 일본무존日本武尊,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295~384)이 일본 본토를 정벌하였다.
또한 걸대왕의 마지막 영지는 오사카大阪의 대화大和가 아니라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므로, 343년 백제 걸대왕이 되었다가 346년 근초고대왕에게 양위하고 백제에서 되돌아왔을 때에는 왜국의 대표자에서도 밀려난 것이다.

경행천황은 근초고왕자 형제들과 일본 정벌에 동참했다가 아이지현 풍전시에서 살았고, 근초고왕자가 333년에 백제로 돌아온 후에 일본 천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43년에 백제대왕으로 왔었고 3년만에 실각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교토에 살았던 것이다.
이때 일본은 근초고왕의 직할로서 길비(吉備) 주재 대신인 주길대신이 오오사카를 다스렸다.


풍전시 경행천황 히시로궁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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