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십자군 이야기 3 / 시오노나나미
* 읽은 날짜: 8월 16일/9월 7일
* 줄거리:
제1장 사자심왕 리처드와 제3차 십자군(1188년 -1192년)
- 티루스성에 살라딘이 공격하나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나다.
- 유럽원군이 아코에 상륙하다. 이때 교황의 대리 주교 없이 군대만 오다. 예루살렘함락이는 소식이 유럽모두에게 충격이 되었기에 특별한 교황의 선동이 없어도 십자군이 일어났다.
- 살라딘은 시리아로 독일군대가 오는 것을 의식하고 아코를 점령하고자 나섰으나 붉은수염 황제 물에 빠져 죽다. 군대 해체되다. 황제가 죽은 후 제후들 충성할 이유가 없어졌다.
- 리처드가 키프로스 섬을 점령하다. 사라센의 수송배를 획득하다. 아코에 도착하다. 프랑스왕 5개월 일찍 왔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나 리처드는 아코의 총지휘를 하다.
- 튜턴기사단이 독일인만으로 구성된 기사단이다.
- 리처드는 살라딘과 전투하여 승리하여 야파로 가다.
- 야파에서 살라딘과 전투하여 승리하다 예루살렘으로 가다.
- 협약을 맺다(예루살렘 순례 안전하게 하다). 사자왕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수복하지 못했으나 26년 동안 평화와 안전을 주고 떠났다.
- 리처드 귀국길에 풍랑을 맞았고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잡혀 성에 감금되다. 독일황제에게 넘겨지다. 석방되다 프랑스 필리프에게 빼앗겼던 영지를 회복하다. 성을 공격할 때 화살에맞아 죽다(1199년 4월 6일 41년 7개월의 생애).
2장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 4차 십자군(1202-1204)
- 인노켄티우수 3세 교황 -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다.”
- 교황은 청년 프란체스코와 그의 동지들을 일찍부터 공인했다.
- 교황은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되는 프리드리히가 독일을 떠나는 21살청년에게 자금과 병력을 지원했다.
- 교황은 또 청년집단을 도운 구출수도회가 있다. - 노예가 된 그리스도교도를 구제할 목적으로 설립된 싱성한 삼위일체의 수도회인 활동은 지중해에서 해적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19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교황이 확보해준 재원이 600년동안 끊임없이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한 것이다.
- 4차 십자군 전쟁을 제후들에게 맡기기로 선동하면서 교황은 십자군 1년간 종군한 자에게는 그 어떤 죄도 면죄해주겠다 하였다.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사후의 공포를 상기시키는 징벌의 종교였기에 면죄만큼 중세인에게 강력한 마음의 구원을 안겨주는 것도 없었다.
- 6명의 제후들 베네치아와 협약을 맺다. 하지만 떠나기로 하는 날 인원은 삼분의 일로 줄어서 차질이 생겼다. 다시 자라(헝가리속한 항구도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기로 협약(십자군이 같은그리스도교를 치는행위)하고 출항하다.
- 뒤이어 교황인노켄티우스가 자라 공략사실을 알고 격노한다. 십자군 전원을 파문에 처한다는 통고가 전해졌다. 교황도 프랑스측의 사정으로 파문을 풀어주다.
- 동절기에 배를 움직일수 없다는 베네치아의 말로 내년 부활절까지 자라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비잔틴제국황자가 찾아와 왕위를 찾아줄것을 요청받았다.
- 콘스탄티노플 공략 10개월에 --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라틴제국초대황제로 베제치아 도제는 크레타 섬 확보하며 400년을 사수하면서 지중해의 여왕이 되다.
제3장 로마 교황청과 제5차 십자군(1218-1221년)
- 소년 십자군 - 1215년 5월 스테팡이라는 열두살 양치기소년이 프랑스왕 필리프2세 궁정으로 찾아와 그리스도가 직접쓴것이라며 십자군원정을 주창하는 서신을 내밀었다. 쫗겨났지만 소년은 프랑스 전역을 돌면서 어른들에게만 십자군을 맡길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나서자 라며 열광적으로 설파하니 많은 소년들이 그를 따랐고 마르세유에 도착할때는 수가 3만명에 달했다.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고 소년들은 실망하여 흩어졌고 돌아가는 길에 많이 죽었을것이다. 스테팡과 남은 소년들은 선장 두 사람이 성지까지 무료로 데려가겠다고 하니 받아들인다. - 노예로 팔릴 운명이다.
- 같은 무렵 니콜라스라는 소년도 바젤을 지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제노바에 도착했을 당시 상당한 수의 소년들이 따랐다. 로마까지 갔다. 교황의 권유에 소년들이 돌아가고 성지로 가고하면서 알려져 있는 것은 아들을 잃은 부모들이 분노하여 니콜라스의 아버지를 목매달려 했다는 것뿐이다.
-교황의 대리 추기경 펠라조가 예루살렘 왕 브리엔과 대립하였고 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도 그렇고 이집트 다미에타의 전세 상황이다.
- 아시시에서 프란체스코가 37살에 5차 십자군에 가담하다. 적진에 홀로 가서 돌아오다. 홀로 이탈리아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 2년의 공방 끝에 다미에타는 함락되고 상류로 진격하다가 댐파괴하는 작전에 병사들이 물에 잠기다. 유리한 상황에서 불리한 상황이 되어 이집트에서 완전히 철수하다. 유리할때마다 강화를 펠라조가 반대함으로 결국 5차 십자군은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책임지는 자는 없었다. 잘못되면 인간의 신앙심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여겼다.
제4장 황제프리드리히와 제6차 십자군(1228-1229년)
- 치사에 여름별궁을 노르만왕조(시칠리아 - 프리드리히 -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되다)가 아랍신하에게 짓도록하다.
-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원정을 약속하였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예루살렘의 왕의 후계자 여인과 결혼함으로 시칠리아의 왕, 신성로마제국황제에 이어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 황제 파문당하나 6차십자군을 이끌고 가다.
- 이슬람측과 성도예루살렘의 공생으로 10년간 협약을 맺으나 주교와 교황은 그리스도의 피로 성도예루살렘을 이교에서 탈환하지 못했다고 반대하였으나 주위 대부분은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 교황이 파문한 황제의 로마제국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갔기에 황제는 귀국하였지만 이교와도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는데 같은기독교도에게도 피흘릴수 없어서 서서히 명성만으로도 땅을 차지하였다. 로마교황이 고립되다. 파문이 풀리다. 프리드리히 편지로 강화한 이슬람과 사후관리를 하다.
제5장 프랑스 왕 루이와 제7차 십자군(1248-1254년)
- 프랑스 성왕 루이는 루이9세로 56년동안 열명의 아이를 얻었는데 모두 왕비 마르그리트에게서 얻은것이다. 독일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는 스므명의 아이를 열세명에 이르렀다.
- 1244년 시리아의 한 부족이 이집트에 전념하는 술탄의 허를 찌르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것이 구실로 십자군원정이 필요하고 루이9세가 적임자였다.
- 하지만 예루살렘은 곧 술탄이 평정하고 프랑스는 해군의 군대가 아니어서 배를 구하기가 힘이들었고 3년이 지체되고 제노바의 배로서 2만5천명의 병력이 출전하였다(약 5천명만 귀국). 적은 분열된 상태에서 루이9세는 이집트에 도착하다.
- 다미에타를 탈환하고 나일강을 전진하다가 만수라에서 말탄 기사(300여명)들이 거의 죽고 1만이 모두가 포로가 되다. 십자군 전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왕과 패자들의 요구는 영토에서 몸값으로 바뀌었다.
제6장 최후의 반세기(1258-1291)
- 이슬람교 바그다드 496년만에 함락되다. 중동을 정복한 후 북쪽으로 모술은 바그다드의 참상을 듣고 스스로 성문을 열었다. 알레포 함락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도 함락하고 이집트까지 넘보았다.
- 바이바르스(노예출신으로 병사가 되어 이슬람교로 개종한자를 맘루크로 부름)는 자신과 같은 맘루크병사와 같이 갈릴리 지방에서 몽골군을 맞이하여 싸움을 계획하고 몽골군은 우군과의 합류도 없이 요르단강 서쪽으로 건너간것이다.
-1260년 9월 23일 바이바르스는 몽골의 용맹한 기마군단을 숲속으로 몰아넣는 전술을 구사했다. 아인잘루트회전은 맘루크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은 이슬람세계의 서쪽절반을 몽골의 위협에서 구했다는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몽골군이 가진 불패의 전통이 깨졌다. 노예출신 남자는 이슬람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자신은 술탄이 되고 바그다드 함락시 아바스왕조 핏줄을 찾아내 칼리프로 불러들인다. 자신은 권력을 가지고 칼리프는 종교적 권위만 인정하고 이후 17년을 더 살다가 이후 맘루크 왕조의 술탄들은 성지의 그리스도교측 세력의 목을 조금씩 조여오기 시작한다.
- 프랑스왕이 직접 8차 십자군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가다. 동생의 군대를 기다리면서 루이9세는 예루살렘으로 역병으로 쓰러져죽는다. 두달만에 8차 십자군원정은 끝나다.
- 1291년 5월 18일 아코 최후의 날 - 사라센이 대거 공격하고 -- 명예로운 퇴거, 몸만 나가다.
- 성도 예루살렘을 해방 한 1099년부터 아코가 함락된 1291년까지 가톨릭. 그리스도교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전역에서 일소되었다.
제7장 십자군 후유증
- 성지없이는 존재할수 없는 기사단은 로도스섬으로 병원기사단은 거처를 옮겼다. 베네치아공화국이 원조했다.
- 템플 기사단은 맘루크 세력에 몰살당하고 프랑스인이 대부분이어서 철수하기로 프랑스로 돌아가서 왕에게 모략을 받아 기사전원이 체포 고문당하다. 성지에 세운 십자군 국가를 2백년동안 지탱해온 기둥중 하나로 그동안 2만명이 넘는 단원을 희생해온 템플기사단이 그릇된 신앙방식을 고발하는 이단재판의 심판을 받게 된것이다. - 십자군 원정의 책임을 지우고 십자군을 회피할수 있고 템플기사단에게 주고자하는 빚을 갚지 않아도 되고 그들의 재산까지 빼앗을수 있고 이러저런이유로 템플기사단은 해산되고 거의 다 감옥에서 죽는다. 한달 뒤 교황 클레멘스가 세상을 떠나고 같은해 11월 마흔일곱살인 미남왕 필리프도 사냥을 하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다. 역시 신은 존재하나보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아비뇽 유수는 미남왕 필리프 이래로 70년동안 프랑스 왕들이 역대 로마 교황을 아비뇽으로 납치한 일이다. 왜 교황의 권위가 실추된것일까 - 한쪽으로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 이후,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전쟁에 종교를 덧입혔을 뿐 실상은 전쟁과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