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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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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37년(중종 32) |
사망 | 1599년(선조 32) |
본관 | 안동(安東) |
승리를 이끌어낼 줄 아는 지휘관, 권율
200년의 평화 끝에 만난 임진왜란이라는 초유(初有)의 국난에 조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일본이 부산진을 공격하고 북상한 지 한 달여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와 조정은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친 상태였다. 전란 초기 조선 육군은 그야말로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해전에서 이순신의 승전보가 전해지면서 조선 육군도 곳곳에서 승리를 일궈내기 시작했고, 그 정점에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이 있었다.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라 불리는 행주대첩으로 일방적으로 밀리던 조선 육군은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권율은 1537년(중종 32)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아버지는 명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선조 초에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후에 영의정에 오른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기도 하다. 권철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이항복을 보고 자기 아들 권율을 깨우쳐 주기 위해 집으로 데려왔다. 그 후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권율은 이항복이 1580년(선조 13) 문과에 급제한 2년 뒤인 1582년(선조 15)에 4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전라도도사, 경성판관, 의주목사 등을 거쳐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광주목사에 임명된 후 권율은 임금의 행차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리고 방어사 곽영(郭嶸)을 따라 근왕군(勤王軍)을 이끌고 북진해 첫 전투에 참가했다. 6월 5일 용인에서 벌어진 이 전투의 결과는 참패였다. 이 전투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주도로 경상감사 김수(金睟), 충청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이끌고 온 5만여 명의 삼도 군사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참여한 중대한 전투였다. 이때 권율은 곽영 부대의 중위장으로 우선 임진나루를 확보할 것을 건의했다.
"전로(前路)의 적진(賊陣)은 험한 곳에 웅거해 있으니 쳐다보며 공격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주공(主公)이 경내의 모든 병사를 징발해 들어와 구원하려고 하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는데 되도록이면 신중히 해 만전을 도모해야 한다. 곧장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을 막는 것이 마땅하니, 그렇게 되면 서로(西路)가 자연히 견고해지고 식량을 운반하는 길도 트이게 될 것이니 사기를 축적해 틈을 엿보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이광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이지시(李之時)와 백광언(白光彦) 등을 선봉장으로 전투를 독촉했다. 결국 일본군의 매복 작전에 말려들어가 이지시와 백광언을 비롯한 수많은 군사가 전사했으며 2천여 명이 안 되는 일본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권율은 이후 광주로 되돌아가 전라좌도도절제사가 되었다. 그는 군사를 모으며 왜적을 물리칠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1592년(선조 25) 7월, 금산 이치(梨峙)에서 왜적과 다시 맞붙게 되었다. 권율에게 첫 승리를 안겨 준 이치싸움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가 전라도를 침범하기 위해 금산으로 진군하면서 시작되었다. 권율은 적병들이 전주를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 등과 함께 이치로 군사를 이끌고 가 맞서 싸웠다. 이때 권율이 최전선에서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고 전진을 격려하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로써 권율은 호남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에 의하면, 권율은 이치싸움을 행주대첩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이치싸움의 공으로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이후 권율은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陣地)가 되었지만 경성(京城)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경성을 수복해야 한다."라면서 12월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2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양 수복의 기회를 엿보며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진지를 구축했다. 전라도 군사가 수원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들은 한양의 왜군 수만 명이 독성으로 내려왔다. 권율은 전면전을 피하고 성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유격전을 펼쳤다. 이러한 수성(守成) 작전은 권율이 1593년(선조 26) 2월에 행주산성으로 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작전으로 권율은 일본군을 한양에 묶어두면서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효과를 얻어냈다.
조선 육군의 위용을 세운 행주대첩
권율이 수원 독성을 지키는 동안, 개전 이래 평양까지 일사천리로 진군했던 일본군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평양에서 개성으로, 또 개성에서 한양으로 퇴각을 거듭하는 형편이었다. 권율은 이 같은 전황을 파악하고 한양 수복을 노렸다. 기세등등한 일본군의 북진 의지를 차단하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옮겨가 행주대첩의 위업을 달성했다.
1593년(선조 26) 2월, 권율은 선거이에게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정예병 4천 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친 후 책(柵)을 설치하고 방비했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 얼마 되지 않은 군사가 들어간 것을 알고 이를 가볍게 여겼다. 그들은 단숨에 성을 함락하기 위해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행주대첩의 과정을 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2일 새벽에 척후(斥候)가 계속해서 보고하기를 "적이 좌우익으로 나뉘어 각각 홍기(紅旗)와 백기를 들고 홍제원(弘濟院)으로부터 행주를 향해 오고 있다." 했다. 권율이 즉시 군중에 동요하지 말라는 영을 내리고 대(臺)에 올라 바라보니 5리쯤 떨어진 들판에 적의 무리가 가득했다. 선봉 100여 기가 점점 접근해 오더니 조금 있자 1만여 기병이 들을 뒤덮고 와서 일시에 포위하고 바로 돌격해 왔다. 우리 군사들은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크고 작은 승자총통(勝字銃筒) 및 진천뢰(震天雷)·지신포(紙神砲)·대중발화(大中發火) 등 각종 화기를 연달아 쏘았는데도 물러가지 않고,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진격했다. 묘시(卯時)로부터 유시(酉時)에 이르도록 세 번 진격하고 세 번 물러갔는데, 적의 죽은 자는 수십 명이었고 부상한 자도 백여 명이 되었다. 적이 마른 풀에 불을 붙여 바람을 이용, 성을 불태우면 성중에서는 물을 부어 이것을 껐다. 처음에 승군(僧軍)으로 하여금 서북쪽에 있는 자성(子城)의 한쪽을 지키게 했는데, 이때 승군이 조금 물러나자 적들이 고함을 치면서 몰려 들어오니 군중이 흉흉했다. 권율이 칼을 빼어 들고 독전하자 여러 장수들이 죽기로써 힘껏 싸우니 적은 포위를 풀었다. 적의 시체를 네 곳에 모으고 마른 풀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는데 시체 타는 냄새가 10리까지 뻗쳤다. 아군이 남은 시체를 거두었는데 참획한 것이 130여 급이었다. - 《선조실록》 권 35, 선조 26년 2월 24일
싸움의 와중에 화살이 떨어지자 마을의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행주치마'의 유래이다. 행주대첩은 군은 물론 백성들까지 한마음으로 싸워 거둔 값진 승리였다. 권율의 행주대첩은 조선 육군을 무시하던 명의 장수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특히 한양에 머물던 일본군을 압박하는 성과를 거두어 조선 육군의 위용을 세운 전투로 기록됐다.
명의 참전과 조선의 입장
권율의 행주대첩은 분명 조선 육군의 위용을 보여 주고 사기를 진작시킨 승리였다. 그러나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륙한 적병을 무찌른 권율에게 보내는 명나라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송 경략이 강화의 의논을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의 변장에게 왜적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경계했는데도 권율이 여러 차례 남은 적을 쳐 죽였다는 기별이 있으므로 경략이 크게 노해 드디어 패문을 내려서 금지했다. - 《선조실록》 권 35, 선조 26년 3월 28일
기록을 보면, 조선이 일본을 공격하고 일본군을 사살하는 것이 강화를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 원군의 총사령관 송응창(宋應昌)은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권율을 질책했다.
명나라의 임진왜란 참전은 임진왜란 발발 한 달여 만에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구원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철저히 전쟁 준비를 해 온 일본에 비해 대비에 소홀해 전력 면에서 불리했던 조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에 넘어갈 경우 명나라에 가해지는 위협이 크다고 보고 자구책의 일환으로 파병을 결정했다.
하지만 파병 온 명나라 군사들은 조선을 구원하러 왔다고 으스대며 조선을 무시하고 깔보았다. 또한 일본과 일방적으로 강화를 진행하면서 조선을 소외시켰다. 뿐만 아니라 작전 지휘권을 차지해 일본군을 마음대로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 이순신은 해전에 나설 때 명나라 군사가 움직이지 않아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권율 역시 일본군이 한양에서 퇴각할 때 추격해 일본군을 섬멸하려다 명나라의 제지에 의해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목적은 일본이 조선을 점령해 자신들을 위협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일본에게 도륙을 당한 조선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었다.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한 후 강화협상이 지지부진하는 동안 일본군의 노략질로 조선 백성들의 고통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러한 사정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은 진전이 없는 상태로 시간만 끌다가 4년여가 흘렀다. 일본은 명의 황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궁으로 줄 것, 조선의 4도를 일본에 떼어 줄 것, 조선에게 임해군의 송환과 일본군의 철수에 감사하는 사절을 보낼 것, 명과 일본 사이의 무역을 재개할 것 등의 조건을 제시했고, 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 주는 조건으로 일본군을 완전히 철수시킬 것, 책봉을 빌미로 명에 대해 무역을 요구하지 말 것, 조선을 다시 침략하지 말 것 등을 강화조건으로 제시했다. 이렇듯 서로 요구하는 차이가 컸기 때문에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1597년(선조 30)에 일본군이 재침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임진왜란의 육군 명장, 종전과 함께 지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휴전상태가 지속되자 권율은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행주대첩의 공으로 1593년(선조 26) 6월 도원수에 올랐다. 그러나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것이 문제가 되어 1596년(선조 29)에 해직되었다. 이때 권율은 "대장된 지 3년 만에 한 사람의 도망병을 벤 것이 파면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도원수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은 진행 중인데다 권율만 한 인재도 없으니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권율은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되었다가 비변사당상관, 호조판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결국 도원수에 재임명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권율은 도원수로 다시 전장에 섰다. 당시 바다를 지키던 이순신은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한양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렇게 바다가 허술한 틈을 타 일본군은 충청도까지 치고 올라왔고, 다시 한양이 위협받은 형국이 되었다. 명나라 군대가 직산에서 일본군을 물리쳐 퇴각하자 권율은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까지 남하해 적을 공격했다. 그러나 사령관 양호(楊鎬)의 퇴각령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순천에 주둔한 왜병에 대한 공격 역시 충돌을 주저하는 명나라 장수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이순신이 이끈 노량해전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끝이 났다. 그러나 전장에 온 힘을 쏟아부은 탓에 권율은 병을 얻었다.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해 결국 1599년(선조 32)에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후에 권율은 선무공신 1등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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