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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수북이 내렸다.
아니지. 그냥 내렸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해도 한참이나 부족하다.
하늘이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밤이 새도록 그야말로 비현실적으로 보일만큼 마구 쏟아 부었다는 표현이 그나마 적합한 표현일 것 같다. 무자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차별로 눈을 쏟아 붓는 풍경이 마치 전쟁터의 비행기 공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눈 폭탄’ 이라는 표현이 더없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지나간 과거 속에서 돌이켜보면 어느 시절엔가는 눈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눈이 곧 낭만이라고 여기며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우가 눈밭에서 나란히 드러눕던 영화 <러브스토리>의 장면을 떠올리곤 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지극히 짧았다. 눈이 오면 일단 길이 미끄럽고, 쌓인 눈을 치워야 하고, 옷차림이 축축해지고, 운전에 각별히 신경 써야하고, 온 가족이 무사 귀가하기까지 여간 신경이 쓰이는 등 현실 속에서 눈은 거의 대부분 골칫덩어리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스키장을 가보기는 했지만 즐길 정도가 되지 못했으니, 여전히 눈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을 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내리는 폭설이라 여간 걱정이 아니네요. 이럴 땐 그냥 들어앉아서 안 움직이는 게 최고일 것 같습니다. 미끄러우니 조심해 들어가세요.’
‘저야 이제 들어가면 연휴겠지만 밤새 내린다는 예보였으니 내린 눈을 치우시려면 여간 힘드시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조심하시고 수고하세요.’
아파트 경비아저씨와 명절을 앞두고 덕담이라도 나누었으면 좋으련만, 쏟아져 내리는 눈을 맞으며 나눌 수 있는 현실적인 인사는 덕담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보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밖을 내다보니 이미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수북이 눈이 내려 쌓였다. 평상시도 여유 주차공간이 별로 없는 우리 아파트 사정에서 설 명절이 낀 연휴기간이다 보니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고, 계속 밀려들어왔다 주차공간을 찾지 못하고 어디론가 돌아서서 나가는 차량 행렬과 그 사이사이를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경비원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보여 질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수시로 거듭해서 밖을 내다보는데....... 정말로 쏟아져도 너무 심하게 쏟아진다 싶어질 만큼 함박눈이 계속 내리면서 아파트 주차장을 거의 마비상태로 몰아붙이고 있다. 차가 드나드는 통행로마저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눈을 치우던 흔적은 느껴지는데 더 이상 눈을 치우는 경비원들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차량 왕래가 이어지는 것도 아닌 이상 염화칼슘만 마구 뿌려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 듯 보이고, 경비원아저씨들의 체력에도 한계가 분명 있을 터, 폭설이 잦아들기를 바라며 날이 샐 이른 새벽까지 무리한 제설작업을 미루더라도 좀 쉬면서 마닥난 체력을 회복하시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긴 겨울밤이 지나고 날이 샜다.
설 명절의 하루 전날이다.
이른 새벽부터 아파트 주차장이 부산하다.
명절을 맞으려고 어디론가 가야하는 사람과 서둘러 새벽에 도착하는 사람과 무엇인가 볼일을 보려고 서둘러 움직이려는 차량들로 주차장은 벌써부터 거의 난장판 수준이다. 젖은 폭설이 엄청나게 쌓인 이유로 차량 위의 눈을 쓸어내는 일만도 보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안쪽에 주차된 차량이 움직이려면 이중으로 가로막고 있는 차량의 눈까지 쓸어내리고 앞쪽이던 뒤쪽이던 떠밀어서 통로를 확보하고 빠져나와야 하는데, 쌓인 눈 때문에 한 두 명이 밀어서는 주차된 차량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설 명절맞이 난장판이자 포성 없는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날은 무조건 움직이지 말자.’
‘아참. 아들에게 문자부터 보내야겠다. 오늘은 절대로 움직일 생각하지 말라고. 안 와도 되고, 꼭 오고 싶으면 눈 그치고 조금 녹은 다음에 차라리 내일 움직이라고 해야겠다.’
오늘은 우리 아들 짱구가 겡구랑 태리랑 세리를 데리고 집에 오는 날이었던 것이다.
‘명절이 뭐 대수라고..... 그냥 건너뛴다고 무슨 탈이 나는 것도 아니고, 또 다음 주에 우리가 병아리들과 캠핑이 계획되어 있기에 데리러 갈 텐데 말이다’라고 무리하지 말라고 서둘러 문자를 보냈다.
‘그러시면 상황 살피다가 내일 아침에 일찍 서둘러 가겠습니다.’라고 답신이 왔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내일 보자.’
일단은 안심이다. 이 험악한 날씨와 엉망인 도로 사정에 우리 소중한 병아리들이 차를 타고 한참이나 달려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와야 한다는 무리수에서는 벗어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그냥 집에 콕 처박혀서 병아리들과의 지난 여행 사진 정리나 해야겠다. 네 번째 여행 사진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정말 어이가 없는 풍경이다. ‘이거 하늘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아니야?’
눈 내리는 아파트 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다니 불현듯 어떤 분 생각이 난다. ‘오겡끼 데스카?’(お元気ですか?)
5층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15층에서 내다보던 풍경에 결코 비할 바가 못 되는 것 같다.
탁 트인 전망에서 월악산 영봉이 보이는가 하면 호암지의 사계절이 그대로 드러나고, 뒤 베란다에서는 충주시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벗어나려면 일단 채무를 갚아야 하는데...... 그 액수가 너무도 상당하여 감히 언제쯤 다 갚을 것이라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채권자가 어디 웬만해야 떼어먹고 도망이라도 칠 터인데..... 내 속을 나 보다 더 훤히 들여다보는 마눌님이 채권자인데다가, 그 채권을 고스란히 승계할 아들놈이 또 쏘아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 여기를 벗어나기는 아예 틀려버린 것 같다.
우리 집안을 통털어 장모님 사진이 오로지 딱 한 장만 벽에 걸려있는데, 딸들(챠밍과 처형) 방도 아니고 아들(처남) 방도 아니도 엉뚱하게 내 방(막내사위) 침대 맞은편에만 걸려있다. 언제 철거(?)되려나는 몇 번인가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차후로 이제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
헐!!!!!
그렇다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항명이나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다. 적어도 장모님(이이순 권사님)에 대해서는 염치가 없어서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비밀이 장모님과 나 사이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장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25세 이후의 내 삶이 어떠했을지,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는 전혀 상상조차 안 되기 때문이다. 막내딸을 볼모로 차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실로 엄청날 정도로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것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 시작이 바로 이 아파트였다.
적어도 당시 충주에선 최고의 입지 조건을 갖춘 이 자리에 최초로 유명 브랜드의 건설회사가 야심차게 고층 아파트를 지었다. 소위 충주에서 잘나간다는 부류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하루는 막내 사위집(당시 용산아파트)에 다니러 오셨던 장모님이 모델하우스엘 가자고 하시더니 그 자리에서 당시 최고급이자 최고로 비싼 아파트 32평 1503호와 1504호를 즉석에서 계약하시는 것이 아닌가? 서울에도 버젓이 집이 있는 마당에 장차 투자 가치를 보고 매입해 두시려는가 했다.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충주 최초의 양식이었으니 15층은 그냥 장모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참 지나 중도금을 내러 내려 오셨는데, 함께 분양 사무실에 가자고 하시더니 1504호를 다른 동으로 바꿀 수 있느냐고 하신다. 마땅하게 옮길 수 있는 집이 없다고 생각하시던 판에 후원 쪽의 27평형 동에만 여분이 있다고 했다. 한참을 고심하시더니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겠다고 하시며 1504호를 27평형으로 바꾸어 중도금을 치루셨다.
‘입주 날짜에 맞출 수 있게 자네 집을 내놓아 적당한 값에 팔도록 하게. 27평은 자네 집이니까 등기 비용과 이사비용은 자네가 대도록 하고. 나란히 같이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양쪽 집안에서 오가면서 데릴사위가 되었는지 뭐니 흉 볼 수도 있고, 자네가 앞으로 살아나가는데도 처갓집 쪽이 어떠니저떠니 할 수 있다고 주변에서 하도 그러기에 고심 끝에 그렇게 결정을 했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지현동에 처음 둥지를 틀었다.
그 다음해에....... 내 인생에 실로 엄청난 불행이 다시 찾아왔다.
장모님이 인파선 암에 결리셔서 시한부 판정을 받으신 것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꼿꼿하게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와 창조주로부터 어떤 소임을 부여받은 기독교인으로서 충분히 귀감이 될 모습을 지키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많은 일을 나에게 시키셔서 한 평생을 다 바쳐서 받들고자 노력했는데, 이제 내 할 만큼은 다 했다고 좀 쉬라고 부르시는 것이라 이제 세속적인 몇 가지만 잘 정리하면 맘 편히 떠날 준비가 되어있단다.’
장모님은 남은 짧은 기간에 자신과 연관된 세속의 모든 일들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매듭짓고 싶어 하셨다. 내가 그나마 효도를 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시기를 내가 옆에서 지켜 드렸다는 것이다, 친정 식구들을 비롯해 이승에서 만난 모든 가족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셔서 내가 모두 모시고 다녔다. 체력이 떨어져 내 차에 겨울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누우셔서 30분마다 쉬셔야 하고 수분을 거즈를 통해 입술을 적시는 것으로 대신하시면서도 올 곳은 정신으로 가족들을 찾아 다니셨다.
‘나 떠나면 내 집은 막내딸에게 줄 거야. 그렇게 알고 있게. 남자로 살다보면 큰돈이 필요할 때도 있고 사업을 벌일 기회가 올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자네 집을 팔아서 하게. 내 집만은 그대로 두고 싶네. 자네 사업에 상관없이 내 딸과 짱구는 따뜻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만 해줄 비밀이 있는데........’
내가 28살일 때, 지현동 아파트 2채에 상당(?)하리만큼 현금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타고 다니던 에스페로도 장모님이 사주신 차였다. 장인에겐 프라이드 한 대와 현금을 선물로 받은적이 먼저 있었다. 제일 로터리에 있는 은행에 볼 일이 있어서 가면 지점장실에서 커피를 얻어 마실 정도의 처지가 되었는데....... 그런데 글쎄...... 그것이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 될 줄이야......
난 도박이라는 걸 해 본적이 없다. 이상하게 그런 잡기(?)에는 관심조차 없다. 한 때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바다이야기) 같은 것도 전혀 모른다. 빠찡고를 해 본적도 없고 아직 카지노 근처에도 가 본적이 없다. 룸싸롱 같은 것도 모른다. 그저 호프집이나 허름한 식당에 주저앉아 삼겹살이나 짜글이에 소맥이면 충분한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큰돈을 들이는 판이 큰 사업이라는 것을 벌여 본 적도 없다. 부동산 투기를 한 적도 없고, 주식투자는 아직도 계좌를 튼 적도 없다.
그런데 폭삭 망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말이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아주 초라한 인생이다. 아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는 한심한 인생이기도 하다.(하물며 마눌님에게 미안하기야 이루 말할 수조차 없겠지만)
가진 것 좀 있다고 소문이 나니까 거머리들이 달려들었는데.......
아무런 대가를 받은 것도 없이......... 남 보증을 여러 번 서 주고 말았다.
날 등치고 지금 버젓이 충주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이 좀 있다. 한 때는 엄청 속상하고 분노가 치밀고 속으로 복수를 다짐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것도 다 팔자일 테니 말이다.
비관하고 좌절하고 술독에 빠지고 방황하다가 차라리 죽어야겠다고 생각도 해보고....... ‘아직 한참 뒷바라지 해 줘야 할 아들을 두고 죽을 수 있겠니? 미안하지도 않아? 지난 것은 다 지워버리고 털고 처음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그럴 용기도 없니? 못하겠으면 아들 눈 쳐다보면서 직접 얘기해. 아빠는 포기할까 생각한다고...... 꼴도 보기 싫지만 아들 때문에 나는 참을 수 있어. 시간이 더 필요하면 더 기다려 줄게. 하지만 아들과 내가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나한테 빚을 갚을 게 많잖아? 안 갚을 거야? 난 끝까지 받아야만 하겠어. 그러니까 죽으려면 빚 다 갚고 나서 결정해. 욕심 없이 그저 아들 크는 거 지켜보면서 낙으로 생각하고 우리 새로 시작하자.’
그 이후가 바로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내 주변에 머물렀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별반 걱정거리가 없고 자식들 보면서 매우 흡족하고, 오로지 우리 부부 둘만 걱정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지금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임대 아파트로 이사해서 다시 시작을 했고........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외국회사에 취직해 최초 최연소를 연실 갈아치우고, 시에미(구미호)를 쏙 빼닮아 꼬리가 일곱 달린 무결점 며느리(칠미호)를 색시로 맞아 현재 태리(삼미호)와 세리(꼬리가 나오기 시작)을 둔 지금에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 인생 살면서 이루고 싶은것들을 이미 다 이룬 것을.......
어느 날 불쑥 마눌님이 이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러시라고 했다.
그런데...... 새로 이사 가려고 오랫동안 보아 둔 아파트가 하필 지현동의 바로 그 아파트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1503호면 딱 좋겠는데...... 다른 동이긴 해도 무조건 지현동으로 이사가서 살고 싶단다.
아니. 하고많은 새 아파트들을 두고...... 투자 가치가 높다고 사람들이 몰려가는 아파트들을 놔두고...... 왜 하필 거기냐고? 왜 슬픈 아파트, 왜 악몽 같은 아파트냐고?
'아들하고도 이미 상의 했어. 처음엔 아들도 반대했지만 엄마 설명을 듣고는 좋다고 했어. 내게는 우리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곳이기도 하고........ 거기가면 아침저녁 드나들면서 당신은 매일 반성할 것이 있을 테니까, 죽을 때까지 더는 말썽을 못 부릴 것 아니야? 그래서 거기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어. 당신이 나한테 빚 다 갚으면 그땐 다른 데로 이사 가도 얼마든지 좋아.’
'난 싫어. 어디든 다 좋은데 지현동 거기만은 죽어도 싫어. 누구 피가 말러 죽는 꼴 보려고 그러니?’
‘아들이 이미 좋다고 했어. 그럼 당신이 아들한테 직접 죽어도 싫은 이유를 설명하고 납득 시켜 봐. 그럼 다시 생각해 볼게.’
그래서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들. 엄마가 이사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이야기 들었니?’
‘처음엔 아픈 추억이 떠올라서 싫다고 했는데, 엄마 이야기 듣고 나니까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느꼈어. 엄마의 기억엔 아픈 상처보다 외할머니와의 마지막 추억이 남아있는 장소일 테니까요. 아빠가 반대할 것이라고 엄마가 그랬어. 그런데 아빠, 이젠 다 지난 일이잖아요? 우린 지금 모두 건강하고 나름 모두 행복하잖아요. 그럼 된 거잖아요? 나만해도 지현동 추억이 다 나쁜 것은 아니 예요. 초등학교 친구들 다 거기 살면서 만났고 지금도 모임하면서 자주 만나는데, 태리 세리 데리고 거기 놀이터에 가서 놀고 싶어요. 아빠가 싫어할 이유는...... 이제 엄마나 저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앞으로 엄마를 더 아끼고 떠받들어 주시면 아무렇지도 않을 거예요. 그냥 좋게 생각해 주세요.’
‘아덜. 엄마가 아빠의 과거를 빌미로 구박하고 아빠 위에 군림하려고 들면 아빠는 골병들어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저희 집으로 이사 오세요. 그리고 그런 게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어요? 아빠가 살이 쪽 빠져서 옛날 우리아빠 모습으로 돌아가면 저는 좋겠는데요?’
‘하이고...... 아들이 항상 엄마 편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잠깐 깜빡했다. 들어가.’
결국 난 지금 지현동에 산다. 매일매일 반성하고 충성을 다짐하면서....... 생각과는 다르게 빚은 점점 늘어가고........
모두 털어버리고, 모두 용서 하고, 모두를 더 사랑하고, 더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리라.
하늘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말이다.
그러고보니 예전엔 참 자주도 꿈에 장모님이 나타나셨는데...... 요즘엔 통 나타나지를 않으시는게 아닌가?
혹, 내가 너무 잘하고 있어서 이젠 우리 걱정을 안하시는 때문일까? ㅎㅎㅎ. 그건 죽었다 깨어나도 아닐것 같고......
모처럼 오늘은 장모님 사진 청소라도 해 드려야 할까보다. ‘오겡끼 데스카?’(お元気ですか?)
오늘 온다던 병아리들이 눈보라 때문에 내일 오기로 미루어 다행이긴 했는데, 조금은 무료한 듯싶게 집안에서만 멍 때리고 있으려니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음식 준비한다더니 안 해?’
‘애들이 오늘 온다고 했으면 새벽부터 시작을 했겠지? 내일 온다니까 내일 일어나서 시작하면 돼. 벌써 배고픈 거야?’
‘아니야. 어제 오늘 눈 내리는 것만 계속 보고 있으려니 좀 따분한 듯싶어서...... 장 볼 때 빼놓은 것은 없었나?’
‘이런 폭설엔 안 움직이는 게 최고라면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면 돼.’
‘차로는 안 움직이는 게 당연하지. 빠진 게 있으면 운동 삼아서 걸어서 시장 다녀오면 어떨까 해서 말이야.’
‘빠트린 거야...... 세리가 메추리알 장조림을 먹으니까 해볼까 했었고, 역시 세리에게 필요한 사과나 조금 사면 좋을까? 다른 것은 없어.’
‘병아리들이 있었으면 지금쯤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 하느라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병아리들하고 놀았다 치고 우리 산책삼아 시장까지 걸어갔다가 올까?’
‘자동차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언덕길이 미끄러울 텐데? 괜찮을까?’
‘시간 맞춰서 나가 점심도 아예 밖에서 먹고 들어오면 어떻겠어?’
‘시장가면서 점심까지? 뭘 먹을 건데?’
‘보리밥. 조금 전에 옛날 잡지 기사 중에서 보리밥에 대한 기사를 읽었거든. 당신 기억나니? 아주 옛날에 우리가 몇 번 다녔던 공설시장 초입의 그 보리밥집?’
‘그 만두 가계들 옆에 있던 할머니 보리밥집? 지금도 하나 몰러?’
‘그냥 시장가는 김에 들려보고, 문을 닫기라도 했으면 순대국밥이든 뭐든 다른 것으로 점심을 먹으면 되지 않겠어?’
‘그럼 한 번 가볼까?’
눈송이의 크기가 어찌 이리도 크더란 말이냐?
더불어 부는 찬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그 큰 눈송이들이 추풍낙엽처럼 흩날리고 있다. 사무치듯 몰려들다가 잦아진 듯 사라지기를 거듭 반복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결코 흔하지 않은 풍경이 도심을 강타하고 있다.
그런데 웬걸....... 눈 내리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멍멍이들이 벌이는 한바탕 난장판이라더니....... 지금 이 태리할망구는 병아리들이 있으나 없으나 마냥 좋아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여간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다. 신이 났다 신이 났어....... 신바람이 났어!
어디 눈이란 놈이 지금 하늘에서만 내리고 있는가?
나뭇가지에서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흩날리고, 건물 지붕과 처마에 쌓였던 눈도 세찬 바람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눈가루가 되어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가 흩뿌려진다. 그런가하면 이미 땅바닥에 내려앉아 쌓여가던 눈들도 바람에 휩쓸려 다시 하늘을 날아다니게 되는데 이를 ‘날린 눈’이라고 따로 적은 것을 보면, 아마도 본래 하늘에서 내려온 순순한 눈과 일단 땅에 내렸다가 다시 치솟아 올라 얼핏 다시 눈처럼 보여 지는 눈을 굳이 구분하고자 했던 옛 선조들의 식견을 감히 나로서는 따라가기가 좀 벅차게 생각될 뿐이다.
세찬 바람에 휩쓸리듯 몰아쳐 내리는 눈을 옛 어른들은 폭풍설(暴風雪) 이라고 불렀다. 지금 눈 내리는 풍경이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을 훨씬 지나쳐 매우 세찬 폭설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폭풍설이라고 부르기는 무엇인가가 좀 부족한 듯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바람에 흩날리는 비를 ‘비바람’이라고는 하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눈을 ‘눈바람’이라고 흔하게들 부르지 않는 이유는 또 왜일까? 그렇다고 ‘눈바람’이라는 용어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옛사람들은 ‘눈바람’ 대신에 ‘눈보라’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눈바람’과 ‘눈보라’는 또 어떻게 다른 것일까? ‘물보라’라는 용어에서 느껴지듯이 본시 ‘보라’는 ‘잘게 부스러져 한꺼번에 가루처럼 흩날리는 눈송이나 물방울을 가리킨다’고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눈바람’ 보다 ‘눈보라’가 어떤 언어적 뉘앙스처럼 영롱 거리며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맛은 옛사람들의 멋스러운 고즈넉한 정취 때문이 아닐까 싶어진다.
자고로 폭설(爆雪) 이라는 것은 낮은 온도와 강한 바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한랭습윤한 현상에서 발생한다. 맹렬한 눈보라를 수반하는 폭설이라 하면 최소 풍속이 14m/s 이상이어야 하고, 시정 거리가 500ft 이하인 상태를 가리키는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날씨는 그 정도는 못되지 싶다. 그리고 집을 나설 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잦아든 느낌이다.
‘저기 저 자리 정도면 <러브스토리>의 나 잡아 봐라 장면을 찍어도 충분하겠다.’
‘저쪽 계단으로 해서 한참 돌아내려가야 하는데? 한번 찍어 볼 테야?’
‘미쳤니? 우리가 애들이니?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지?’
하천변을 따라 내려가다 말고 도랑가에 수북이 쌓인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보고 태리할망구가 영화 이야기를 꺼낸다. 옛날엔 눈밭에 털썩 자주도 드러눕더니 이젠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아파서 못하겠단다. 그러면서 꼭 따라 붙이는 말.....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헐! 어처구니가 없다.
대답대신 내가 한 영화음악을 들려준다. ‘나~~~ 나나~~~~나~~~~나나나~~~~~’ 그러자 이내 마눌님도 익히 아는 멜로디라 따라 부른다.
라라의 테마(Lara’s Theme)로 영화 음악의 거장인 이탈리아 작곡가 모리스 자르의 작품이며, 영화 <닥터 지바고>의 주제곡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러브스토리> 보다 눈 내리는 시베리아 벌판으로 눈썰매를 타고 지바고와 라라와 딸이 얼음궁전을 찾아가던 그 장면이 쌓인 눈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올라.’
‘그만큼 인상적이긴 했지.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가 꽤 긴 상영시간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온통 겨울 영상으로 가득 찼잖아? 지바고가 말을 타고 라라를 찾아가는 장면 빼고는, 시작부분에서 혁명가가 라라의 출산을 엿보는 혹독한 겨울 장면에서 시작해, 눈 쌓인 숲속에서의 전쟁장면 하며, 마지막의 얼음궁전까지...... 온통 겨울이 전부였어.’
‘가장 멋진 그 겨울 장면이 시베리아가 아니라 스페인에서 눈 대신에 석회가루를 뿌리고 찍었다는 전설 같은 후담을 남겼지만 말이야...... CG가 없어도 겨울을 날조할 수 있었던 그 위대하신 양반들이 지금의 영화를 보시면 뭐라고 할까?’
‘그 스산한 겨울 풍경과 지바고 역을 맡았던 오마 샤리프의 우울한 눈빛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
‘원작자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던 일화마저도 동서냉전 시대의 스산하고 암울했던 시대상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잖아.’
‘난 <닥터 지바고>보다 겨울이면 더 떠오르는 영화가 있어. 그 일본 영화 있잖아? 넌 잘 있니? 난 잘 지내고 있어 하는 겨울영화......’
‘오겡끼 데스카?(お元気ですか?)’
‘그래. 그거...... 뭐 였더라? 맞아. <러브레터>. 그게 가장 많이 떠올라.’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나카야마 미호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울려 퍼져 나가는 장면이 그야말로 압권이었지. 우리시대의 가장 완전한 겨울영화라 할 수 있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까맣게 잊고 살았던 그 누군가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제가 남아있습니까 라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울었을 거야.’
하염없이 눈이 계속 쏟아진다.
돌아보니 내 발자국이 내리는 눈 속에 점점 파묻혀 사라져 간다.
걸어온 발자국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길을 걸어 온 내 추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따가 우린 그 눈길 위로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며 다시 걸어갈 것이다.
(전통재래시장) 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충주를 대표하는 재래시장으로 (무학시장)이라는 용어가 대중적이 상황이 되었지만, 내가 자라고 성장하는 시절에는 충주의 대표시장은 (공설시장)이었다. 교현천이라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동쪽인 (공설시장)은 항상 장마당이 펼쳐있는 상설시장이었고, 개울건너 무학시장은 우시장을 비롯해 장날에 이런저런 임시 장마당이 펼쳐지는 비상설시장터였다. 그러다가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하나로 묶어 전통 재리시장으로 탈바꿈 하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시장으로서의 주도권이 (무학시장)쪽으로 넘어간 상태에서 지금은 쉽게 (충주 전통시장 = 무학시장)으로 인식을 굳혀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때, 그 전통시장의 출입구 역할을 하면서 주요 통로로 이용되던 지역을 (대수정다리 권역) 이라 했는데 그야말로 황금상권을 이루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근에 상류 쪽으로 하천을 복개하여 주차장을 만들었는데, 도시환경 문제로 모두 철가하여 본래의 하천 되살리기 운봉이 벌어졌고, 대수정다리 상권 전체가 안전진단 문제로 철거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충주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가면서 도시의 흐름과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는 입장에서 어떤 지역의 쇠락과 뜯겨나가고 사라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는 것은 적지 않게 슬픈 추억이 되고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되기도 한다.
철거가 확정되었으면 확 뜯어 없애 버리던가,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흉물스런 추악한 도시 이면이 몰골만 드러내고 있고, 또 이곳을 지나쳐 다녀야만 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희로애락의 시간과 사연들이 이곳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인가? 하루빨리 어떻게든 정리가 되고 결론이 매듭지어졌으면 좋겠다.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는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설대목이 한창이었을 시간이지만 내린 폭설과 험악한 날씨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한산한 편이었다. 어떤 간절함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상품이 진열된 앞쪽만을 내다보고 있는 대다수의 상인들 모습을 생각하니, 감히 함부로 점포 앞을 기웃거리며 사진이나 찍을 수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손님이 많아야 슬쩍 그 틈에 파묻혀서 자연스레 사진 포커스를 맞출 수 있으련만........ 그래서 평소 안면을 익혔던 분들과 가볍게 인사만 나누면서 상가지역을 서둘러 통과하기로 했다.
우리 마눌님은 단골 이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한 번 여기가 좋겠다 싶으면 기를 쓰고 그곳만 찾는다. 장날 길이 막히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다음날 기어코 그 단골집을 찾아간다. 한번 품질에 공신력을 갖게 되면 어느 정도의 가격차까지는 그냥 허용된다. 대신 한 번 기본적 신뢰도가 깨지면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는가. 정말 깐깐하다.
손녀가 먹을 사과를 사러 단골인 시장통의 청과점엘 갔는데 문이 잠겼다. 한참 대목시장을 보아야 할 상황에 문이 닫혔다는 것은, 주인이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아프거나, 급작스레 우환이 생겼거나, 아니면 고향이 아주 멀고 노모가 계신데 명절 대목보다도 부모님께 찾아가는 것이 더 중요해서 일거라고 하면서 가볍게 발걸음을 돌린다. 사과 담으려고 배낭까지 메고 왔는데...... 사과는 다음번에....... 대신 큰 배낭에 작은 메추리알 작은 플라스틱통 하나를 사서 바닥에 까는 것이 전부다. 다른 청과점엘 들리기는 했는데...... 당연하게 그냥 패스해 버린다.
요즘 충주 전통시장을 대표할 정도로 급성장고 있는 만두 골목을 지난다. 점포마다 출연했던 방송 프로그램 사진들로 시장 골목을 도배하다시피 할 정도로 빼곡하게 진열해 놓았다. 이것은 좀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점포 사장님들 입장에서는 가계홍보에 있어서 죽어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 치명적인 영역인 것이다. 여기 전통시장에도 자본주의의 시장 생리는 그대로 여실히 적용되고 있다.
여기저기 문을 닫는 점포가 끊이질 않는가 하면, 좀 잘나간다 하는 점포 옆으로 동종 업종의 새로운 가계가 계속 생겨나는가 하면 현대화되고 대형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상종가를 구가하던 순대 국밥집 골목이 스산해 지는 반면, 여기 만두 분식 가계들과 야채전문점 들이 밀집해서 대형화하기 시작하고 있는 형국이다.
예전에 이 점포의 하천변 쪽으로 생닭집과 칼국수 가계들과 묵과 두부를 파는 가계와 전을 파는 가계들과 보리밥집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미 상당수가 업종을 바꾸거나 다른 가계가 새로 들어선 상황이 바로 지금의 형국인 것이다.
그 변화는 우리의 예측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그것이 지금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보리밥집이 어디에 있었지? 못 찾겠어.’
더군다나 이 부근에 보리밥집이 하나뿐이 아니었다. 작은 구역에 서너 개의 보리밥집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유독 손님이 많이 드나들었던 그 가계를 지금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단 하나의 보리밥집도 보이지를 안았으니...... 헐.
내가 다니고 기억하는 보리밥집은 본래 하천 반대편의 아주 작고 좁은 건물에 겨우 들어앉아있는 동시에 받아서 수용할 수 있는 손님의 수가 지극히 낮은 초미니 점포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건너편의 점포가 비우게 되자 서둘러 인수 했는데, 그곳이래야 4인용 테이블을 겨우 4개 들여놓기는 했는데 만약 테이블마다 정원인 4명씩을 채운다면..... 그야말로 음식 서빙과 드나들기에 불편을 넘을뿐더러, 여름에 푹푹 찌는 폭염으로부터 해방이란 기대를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할 정도였다. 테이블마다의 음식을 골목 건너 편의 좁은 주방이랄 수 없는 주방에서 만들어 둥근 쟁반에 담아서 골목을 건너 매번 배달아닌 배달을 해야 한다는 것, 비가 오는 날이나 장날이면 거의 곡예에 가까운 쟁반 나르기 쇼가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 건너편 좁은 테이블에서 기어코 이집 보리밥을 먹고야 말겠다는 사람들도 장날이면 길게 줄을 서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도 그중의 하나였고 말이다.
나이가 제법 지긋하신 아주머니와 할머니의 중간쯤인 분이 혼자 이 모든 과정을 수행하시고 계셨는데, 바쁜 날에는 이곳의 오랜 단골이신 아주머니들이 자진해서 서빙과 식사후 수거를 도와주시는 풍경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다시 들러보니 그 아주머니는 어느새 완전한 할머니가 되셨고, 모든 움직임들이 몹시 버거워 보였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서도 그 보리밥집이 보이질 않는다.
더불어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른 보리밥집 조차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대신 대형 체인점들처럼 만두집들이 가득하다.
두 번을 찾아보았고, 이제 포기하고 대수정 다리쪽으로 출구를 찾아 나가려는데........
‘여기 아직 있었네? 원래 그 집이네.’
챠밍여사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보니 옛날의 그 보리밥집이 그곳에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건너편을 살피니 거기 또한 그대로가 아닌가?
‘사람이 아무도 없네? 문을 닫은 것은 아닐까?’
그때....... 옆으로 비스듬히 말아 올린 비닐 바람막이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손가락으로 건너편을 가리키며 그리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틀림없는 옛날 옛적의 그 할머니가 아니신가.
건너편 가계로 들어가 문가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곧바로 또 한 팀의 노부부가 들어와 옆 테이블에 앉는다.
와!!! 참 신기하다.
두리번거리며 살피니...... 무엇인가가 사뭇 변한 것도 같고...... 또 아무런 것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거....... 모두가 그대로인데 할머니랑 우리만 변한 것은 아닐까?
마침내 보리밥이 나왔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옛날에 우리가 함께 먹었던 바로 그 보리밥 그대로였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보리밥을 먹어 보셨습니까?)
지금 당장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보리밥)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나에게는 음식에 대해 소개하거나 평가하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외국 음식이나 퓨전 음식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전통 한식이라면 남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아주 극한에 가까울 정도로 실로 엄청난 단점이자 난맥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난 분명히 순수한 한국인이었던 부모님으로부터 충주에서 태어났고 교육받고 자라났으며 이곳에서 아내랑 결혼했고, 여기에서 하나뿐인 아들 짱구를 얻었고, 이천 출신 겡구를 며느리로 맞아서 지금 아들 가족이 이천에 살아가면서 소중한 태리와 세리를 얻었다. 우리 가문의 혈통을 들여다보고 세세하게 분석해 보아도 드러나는 것은 온통 확실한 (Made in Korea) 문양이 너무도 선명한 한국인 가족이라는 사실 뿐이다.
그런데 내가 가진 치명적 단점이라는 것이 실로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고추장 된장을 전혀 먹지 않고 자라난 순수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나름으로 많이 적응을 해나가고 있지만 말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쌈 요리를 먹는데 고추장이나 된장이나 막장이나 쌈장을 올려서 싸서먹는 쌈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나서 신혼살림이란 것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들었던 꾸중이....... ‘헐!!!!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위대하신 거니? 아니면 당신이 유별난 거니? 60년대 70년대를 살아가면서 고추장 된장을 못 먹는 한국인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니? 앞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어떻게 될지 눈앞이 깜깜하네?’ 라는 경악스런 표정과 함께 튀어나온 푸념이었다.
그건 모두 사실이었고........ 나 스스로도 그저 신기할 정도의 써프라이즈일 뿐이었다.
왜 그렇게 시작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무튼 고추장 된장이 들어간 음식은 일단 무조건 먹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온 가족이 칼국수에 수제비를 자주 먹었지만, 나만은 언제나 라면을 혼자 먹었다. 농활을 나가서 함지박에 단체 비빔밥을 만들려고 된장이나 막장에 찌개를 쏟아 부어 함께 비비면 저만치 혼자 떨어져서 건빵을 먹었다.
이런 이상한 나의 먹성 때문에 아버지께 여러 번 혼이 난 적은 있었지만, 내겐 너그러우신 어머니가 있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굶기시진 않으셨다. 60년대를 유년시절로 보냈으면서 고추장 된장을 먹지 않았으면 그대로 쫄쫄 굶어서 싸리나무 같이 깡마른 체형이거나 기아로 일찍 죽었어야만 되었을 것 같은데........ 키 180cm에다가 서양에 내놓아도 전혀 밀리지 않는 아주 당당한 체구로 성장했으니....... 내가 아무리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그저 신기할 뿐이라고 하겠다.
다행스럽게 하나뿐인 아들은 엄마 식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 다행이라 하겠는데, 지금 당장 우리 병아리들의 먹성이 지극히 까다로워 아무리 죽을 맛이라 해도....... 내 처지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아내랑 충주댐 근처의 횟집에 가서 송어 회를 시켜놓고......... 비빔회를 먹는 아내 앞에서 회를 토마토 캐찹에 찍어먹었던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법한 나의 흑역사가 전설로 우리가문엔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 음식에 대한 흑역사는 고스란히 할망구의 시집살이로 가중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지만 말이다.
별다르게 가진 재산이 없으니 우린 분명 부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매우 가난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 엥겔 계수는 무척이나 많이 높다. 역사 시간에 엥겔계수가 높을수록 후진국이라고 배웠는데....... 어쨌거나 우리 집 엥겔계수는 대한민국의 평균 수치에 비해서 많이 높은 편이다. 먹기 위해 산다고는 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게 절대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우리 두 식구는 가끔 손님이나 아들 가족이 오기는 하지만........ 1년에 쌀 20kg 한 포대면 족하다. (아참, 내일은 쌀 사러 마트엘 가야한다. 1년 더 된 것 같다.)
그런 처지인 내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보리밥) 타령을 하고 있다니.......
아무렴 어때? 지금은 나도 보리밥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 된 것을......
물론, 지금도 내 보리밥에는 고추장이 전혀 얹혀 지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고추장이 빠진 보리밥을 무슨 맛으로 먹니?’ 하고 할망구가 비아냥거린다.
‘어허!!! 원재료 고유의 맛을 고스란히 느끼기엔 이 방법이 최고라니까?’
‘개뿔. 하여간 유별나요 유별나?’
‘임진왜란 때 고추가 들어오기 전까지 전해 내려오던 고유 전통방식 보리밥이여. 내가 먹는 이 보리밥이 말이여. 진짜라니까?’
그런 내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보리밥)을 먹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식당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보리밥집)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제일 맛있는 보리밥)에는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과 판단이 들어가지만, (제일 맛있는 보리밥집)에는 남들이 고르게 수긍하고 인정할 수 있는 나름의 객관적 평가가 반드시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나에게 최고라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남들도 모두 그럴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지금 당장 내가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름 맛있다고 소문이 난 보리밥집이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그중에서 내가 가본 곳이 기껏 얼마나 된다고, 전통 장맛의 차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최고의 (보리밥집)을 내가 평가하고 고를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반면에,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모두 가보지 않았고 모두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맛있게 먹고 있는 여기 이 보리밥이 적어도 이 순간에만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또 그리 어긋난 표현만도 아니지 않겠는가?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을 먹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충주 공설시장’ 초입에 유구한 세월을 품고 있는 <미소 식당>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집) 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가격에 이정도 반찬이면 그것은 분명 커다란 축복이며 정성 가득한 선물이 아니겠는가?
버섯, 참나물, 고사리, 애호박, 콩나물, 무생채에다가 가계 주인장 마다 제철마다 종류와 가짓수까지도 달라지는 선물 선트 말이다.
쌈장, 고추장, 젓갈류도 나와서 그냥 각자의 기호에 맞게 쓱쓱 비벼먹으면 된다. 나처럼 된장찌게 세 숟갈만 넣어 비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댕그릇에 썩썩 비벼서 한 그릇 뚝딱 하고 나와서 계산하려는데.........
1인분에 7,000원에서 9.000 사이의 가격을 듣고 나면 저절로 놀라 자빠지지 않겠는가?
보리밥에는 언제나 정성과 착한 가격에 추억 한 숟가락이 담겨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은 먹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집)은 그 누구라서 감히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정성과 착한 가격과 추억 한 숟가락을 담아 낼 수 있는 (보리밥집)은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집)이라고 나는 인정하고 싶다.
그럼 왜 이렇게 폭설이 마구마구 쏟아지는 날에 느닷없이 보리밥 타령이냐?
그것은 새벽에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에 쎼프이자 음식 평론가로 활동하시면서도 꾸준히 글을 쓰고 계시는 박찬일씨의 <백년 식당> 기사를 읽다가 그 분이 쓰신 <보리밥집>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내가 박찬일씨의 팬이기도 하기에)
박찬일씨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으로 <양평 신내 보리밥집>을 꼽으셨다. 그 역시 어디까지나 그 분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에서 내리신 결론이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도 그곳을 다녀 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보리밥이다.
구수한 된장찌개가 딸려 나오는데, 나물 반찬만 아홉 가지다. 비름나물에 냉이무침, 무나물, 시래기와 고춧잎무침도 달다. 계절별로 나물 구색은 바뀐다. 나물을 밥에 올려 고추장 넣어 비벼도 되고, 반찬처럼 그냥 먹어도 맛있다. 하나같이 맛이 순하고 깊다.
“왜 아홉 가지가 되었냐면, 한 상 낼 때마다 둥근 쟁반을 쓰는데 나물 그릇이 딱 아홉 개 들어가요. 찌개 놓고 장도 놔야 하니까 거기에 맞췄지 뭐.”
계절별로 나물 아홉 가지를 맞추려면 고된 일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세팅’되는 바람에 늘 그렇게 해왔다며 선하게 웃는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식당이 원래 전형적인 농가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홀은 원래 마당이었는데, 하늘을 가렸다. 비가 떨어지니 지붕을 올린 것이다. 주방 자리는 외양간이었다고 한다. 소, 돼지 키우고 마당에 닭도 기르던 평범한 농가였다.
“사랑채, 안방, 건넌방 다 손님이 들어차서 방을 쓸 수 없었어요. 정신이 없었죠 뭐.(웃음)”
딸이자 이 노포를 물려받은 배연정(49) 씨의 말이다. 어머니 한 씨가 언젠가 해외여행을 가려고 했을 때 지문이 안 나와서 애를 먹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런 우리의 엄마들이 오늘을 만들었다.
“어휴, 일을 많이 했어요. 요새도 일이 많아요. 밭일도 해야 하고…. 딸에게 물려줬어도 내가 도와줘야지. 나물 간 맞추고 그런 건 아직도 내가 해요.”
-- 글쓰는 셰프 박찬일의 <백년식당>중에서 (양평 신내 보리밥집)
대한민국 땅에 (보리밥집)은 도대체 얼마나 있는 것일까?
여러 채널에서 음식에 관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연일 상종가를 갈아치우며 꾸준히 방송되고 있는데, 그 방송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몇 몇 분들이 손에 꼽는 최고의 (보리밥집)은 과연 어디일까? 그렇다고 그 분들이 전국에 모래알처럼 산재한 (보리밥집)을 모두 순회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금에 그분들이라 해도 손에 꼽는 것은 역시나 지극히 한정된 선에서의....... 누가 손을 끌고 갔던, 강력 추천을 했던, 어디서 주워들었던, 아니면 지나다가 우연히 들렀던 간에, 제한되고 한정된 경험과 판단에 의해서 일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그분들 역시 지극히 주관적이고 시간적 장소적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는 전제하에서 단편적인 평가와 선택이 이루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누구나 나처럼 나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은 따로 있을 수 있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집)을 딱 골라서 주장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 하긴 뭐..... 그분들의 평가와 호평이 가끔씩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집)을 탄생 시키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누가 갔던 곳이래, 누가 방송에서 거명했던 곳이래, 누가 아주 가까운 지인만 따로 동반하고 몰래 드나드는 집이래...... 등이 삽시간에 퍼져나가 맛 집 명소로 하루아침에 길게 줄을 서는 상황을 곧 잘 볼 수 있는 오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백종원씨가 극찬했다고 해서 누구나가 정말로 좋아할 수 있는 최고의 맛 집일까? 허영만 선생님이 찾아가 극찬을 했음에도 실제로 찾아가 보니 방송에 나온 음식과 질적인 차이가 있느니, 소금 간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더라니, 먼 길을 찾아갔는데 조미료 맛이 너무나 강해 먹지도 못할 정도였다느니, 우리 동네 구멍가계가 열 배는 더 맛있다는 등 수많은 찬반의 댓글들이 난무하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은 오늘 나처럼 충분히 무대포로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세 끼쯤 굶고 나서 눈앞에 보리밥이 놓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양평이던 전주이던 부산이던 강릉이던 소문난 맛 집이면 어떻고, 장사가 안 되어서 폐업직전이면 어떠리. 죽을 만큼 배고프면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이 언제든 그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집)을 고르라면 선뜻 내세우기가 좀 그렇겠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집 Best 10)을 꼽으라면 저마다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나름의 (보리밥 맛 집)들이 수두룩하게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가정 하에서면 당연히 (양평 신내 보리밥집)도 엔트리에 포함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말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서 (최고의 보리밥집)을 골라 뽑아본다는 가정 하에서 (베스트 10)이 아니라 (베스트 5)를 뽑는다 해도..... 어쨌거나 반듯이 들어갈 만한 (보리밥집)을 하나 내가 알고 있다. 이 또한 내 주관적 생각을 기반으로 어느 정도 세상사람들의 평가까지 동반해 내린 판단이라는 것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흔히들 대한민국에서 온갖 맛있는 음식은 모조리 서울에 있다고들 말한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어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고 또 현실적으로 그런 것이 사실이다. 서울에 돈이 몰려있고, 그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극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다 진귀하고 황홀하리만치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면서 지갑 열기를 추호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더 이상 음식은 허기를 면하거나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섭취의 한 방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보리밥집)은 과연 서울에 있을까? 없을까? 그 또한 단정짓기는 쉽지 않다.
그들 맛있는 고급 음식에 환장인 사람들 앞에 작은 양푼 그릇에다가 오이무침. 도라지나물. 고사리나물. 오이무침. 콩나물. 시금치무침을 얹어서 고추장 한 스푼에 계란 프라이 하나를 살짝 덮어서 내준다고 가정해 보면, 혹시나 누군가는 ‘지금 추억놀이 하자는 거야?’ 아니면 ‘요즘 새로 나오는 가축 사료야?’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나버린 과거시대의 소시민적 생활과 먹거리 풍경을 나이 지긋한 우리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그러하기로 우리 세대가 결코 ‘보릿고개’ 세대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보다 앞서 사셨던 부모님 이상 세대의 ‘먹을 것이 없던, 정말로 배고픈 세대’의 처절하기만 했던 까마득한 이야기일 뿐이다.
보리밥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체양곡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뿐더러, 설사 있다고 한들 얼마나 있었을까? 마지못해 허기를 채우려고 먹었던.... 그것마저도 결코 넉넉하지 못했던 그 당시의 깊은 상처였고 아픔이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이 되자 일부러 옛날 보리밥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성장 발전했고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 졌기 때문이었다.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실컷 먹지는 못해도 노력만 한다면 굶지는 않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보리밥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도 달라져갔다.
보리밥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음식이 결코 아니다. 거칠고 까슬까슬해서 익숙해지기 많이 힘든 음식이다. 언제부터였던가, 거친 음식이 오히려 입에 좋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덩달아 천대받던 보리밥이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되는 호시절을 만나게 된 것이다.
격세지감 (隔世之感) 이란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심지어 평판이 자자해 일부러 멀리서도 찾아가는 보리밥집이 여기저기 생겨나면서부터, 가능한 자신의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들을 사용한다거나, 화학조미료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던가, 야채무침에 사용하는 참기름과 들기름조차도 인근의 믿을 수 있는 지인이나 친척들이 직접 재배한 것을 사용한다는 부연 설명들이 반듯이 따라붙고는 했다. 반찬의 가짓수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보리밥을 비빌 때 사용되는 참기름과 고추장의 맛있는 집인지 아닌지를 결정 나게 한다. 거기에다 보리밥의 완성을 결정짓는 핵심적 요소로는 일단 된장찌개가 맛있어야만 한다. 거기에 지역이나 주인의 취향에 따라 계란찜이나 계란 프라이가 추가로 따라 붙는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도 사실 가만히 따져보자면, 그런 모든 것이 주인장(음식 만드는 아줌마나 할머니)의 정성과 손맛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불어 보리밥을 아주 친숙하고 편하고 가까운 음식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데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착한 가격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말로 필자는 보리밥의 가격적인 면에 대해서는 어떤 부연 설명도 하고 싶지 않다. 우리의 생활터전 어디에서나 경제 발전의 어느 시대에서나 항상 보편타당한 선에서의 사회적 물가에 비교해 정말로 착한 가격대를 꾸준히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달라진 세상에서 저마다 보리밥을 대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어떤 감회에 젖어들곤 했다. 보리밥을 떠올리면서 허기졌던 지난날과 아궁이 앞에서 혼자 우시던 어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맵고 달고 짠 음식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졌듯이 늘 쫓기듯 바쁘게만 살아 온 자본주의의 속성에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보리밥을 지켜보기도 했다.
삶에 지치셨습니까?
이제 어느 정도 삶을 정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득히 먼 과거속의 그리움이 아직 남아있으십니까?
커다란 검은 솥에 보리쌀 한 줌에 주먹만한 감자 서너개를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눈물을 삼키며 큰 한숨을 짓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당신은 지금도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저의 뒤를 따라 오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머니의 손길로 가득했던 그 허름한 부엌과 아궁이와 커다란 가마솥에서 퍼 낸 (진짜 보리밥)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진짜 보리밥)의 맛을 아직 기억하실까요?
전라도 순천 땅 조계산 자락에 아주 먼 옛날부터 기가막히게 끝내준다고 소문이 자자한 보리밥집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인지 아닌지는 딱 부러지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보리밥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이나 대한민국의 소문난 맛 집을 좀 찾아다녀 보았네 하는 사람들에겐 적어도 보리밥에 관한한 ‘절대 성지’처럼 추앙받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보리밥을 먹어보지 않고 어디 가서 보리밥 좀 먹어봤네.’ 소리를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한 것이 어언 40년이 훌쩍 넘은 것 같다.
‘자! 이제 저랑 같이 그 조계산 보리밥집으로 미식 여행을 한 번 떠나보시겠습니까?’
‘그런데 먼저....... 등산을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평소에 꾸준히 체력관리를 하시는 편이십니까?’
‘그것이 아니시라면 이쯤에서 조계산 보리밥을 그냥 포기하시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평범한 맛집 나들이를 생각하신다면 크게 오해하신 것입니다. 여기 보리밥은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만 먹을 수 있는....... 조금은 특별한 보리밥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기 살기로 보리밥 한 번 먹어보시겠습니까? 아니면 포기하고 피자나 한 판 때리러 가시겠습니까?’
헐!!!! 보리밥 한 그릇에 죽기 살기라니...........
허니 어쩌겠는가? 돈이나 빽이 많아서 헬기를 타고 가던가, 아니면 길이 있기는 있으니까 빽을 써서 사륜구동 트럭을 타고 올라가시던가........ 그런데 그렇게 가면 아무래도...... 보리밥 맛이 제대로 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순천 땅엘 가면 조계산(887m)이 있는데, 강원도 내륙의 해발 1.000m 이상의 산만 수두룩 보다가 왔다고 얕보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웬만한 도시나 등산로의 시작이 이미 수백 미터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바닷가의 높이는 강원도 두메산골의 골짜기를 오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튼 이 조계산 자락에 대한민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두 곳의 천년 사찰이 있는데...... 먼 옛날의 고승들께서 꽤나 짓궂으셨음인지 하필 선암사(仙巖寺)는 동쪽 기슭에 세우셨고, 송광사(松廣寺)는 정반대 서쪽 기슭에 세우시고 말았다. 거기다가 천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두 사찰의 스님들이 꾸준히 서로 교류하도록 하였으니 오늘날 그 ‘교류의 길’을 ‘천년불심길(千年佛心路)’이라 바꿔 부르고 있는데 분명한 것은 산책로가 아니라 엄연히 등산로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암사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조계종의 승보사찰(僧寶寺刹)인 송광사(松廣寺)는 우리나라 삼보사찰로 평소에도 수많은 불자와 여행자들이 찾고 있는 명찰이다. 그중에 여행자의 상당수가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혹은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천년불심길을 걷기위해서 찾아오고 있다. 천년불심길(총길이 6.8km)은 좀 빠르면 편도로 4시간 정도가 걸리는 난이도가 좀 상당히 있는 길인데, 일반인의 경우는 대략 5시간 정도를 예상하면 좋겠다.
송광사에서 선암사로(혹은 반대로) 넘어가는 가파른 고갯길의 대충 중간쯤에 ‘굴목이재’가 있어서, 이 고갯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선암사의 말림이 되고, 서쪽으로는 송광사의 말림이 되는 사찰의 경계선이기도 했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의 배경이기도 한 곳이다. 또한 이 길은 승주와 낙안읍성을 이어주는 지름길 역할도 해서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왕래를 하던 중요 길목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부터 화전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이 이 고갯마루에 더러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옛날 옛적에 하루는....... 선암사의 큰 스님이 송광사에 일이 있어서 굴목이재를 넘고자 하셨는데,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허기가 몰려오고 목이 타는지라 무너지기 직전의 화전민 움막에 물을 얻어 마시려고 들렀는데....... 하필이며 화전민 가족이 가마솥에서 보리밥을 막 퍼내려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늙은 노모의 부탁으로 있는 보리쌀을 톡톡 털어서 모처럼 배불리 먹으려던 참이었다. 허니 어쩌겠는가? 이 또한 부처님의 인도함이시오 부처님의 은덕에 늘 감복하면서 살아온 순박한 산골무지렁이 처지였으니 말이다. 화전민 부부는 온 정성을 다해 있는 나물 없는 나물을 모두 꺼내서 커다란 바가지에 보리밥과 함께 담아서 건네 드리며 큰스님께 자리를 권해 드렸다.
그 소박한 불심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인지, 시장이 반찬이어서 그랬는지....... 암튼 그날 큰 스님은 출가한 이래로 최고로 맛있는 공양을 받으셨던 것이다.
송광사에 다녀 다시 선암사로 돌아오신 스님은 도저히 그날의 보리밥 공양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겨울동안 쓰려고 절간에 공양으로 들어 온 음식재료를 점검하시고 남은 여분을 모두 모아 화전민 가족에게 올려보내셨던 것이다. 지극정성이 통했다고나 할까?
감복한 화전민 부부는 이날 이후로 늘 굴목이재를 지나가는 스님들을 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붙잡아다 보리밥 공양을 꾸준히 이어갔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 송광사에 적은 둔 스님이나 선암사에 적을 둔 스님이나 굴목이재를 넘어가는 볼일을 서로 자청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것이 조계산 자락 굴목이재의 보리밥에 대해 오래전부터 꾸준히 전해 내려온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일제의 수탈과 6.25 전란 기간 동안 빨치산 토벌 등의 결과로 굴목이재 화전민 촌은 아스라한 기억 저편으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60년대 이후에 시류에 밀려난 일부 사람들이 다시 굴목이재에 나타나 화전을 가꾸거나 약초와 나물을 채취하거나 숯을 만들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생활문화가 바뀌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갔는데...... 예나 지금이나 왜 굴목이재 근처에만 오면 배가 고파지는 것은 옛 스님들이나 현대인들이나 차이가 없었는데........ 허기에 지친 어떤 등산객이 허름한 화전민가에 찾아가 요기할 것을 부탁하니....... ‘가진 게 나물과 보리쌀 밖에 없어서요.’ 하는 것이 아닌가? ‘어려서 매일 먹은 게 보리밥인데 지금 마다하겠습니까? 부탁하겠습니다. 밥값도 지불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배가 고프면 고플수록 음식은 그만큼 맛이 증가하기 마련이다. 증가를 뛰어넘어 폭주할 수도 있다. 조계산을 올라오면서 두 세 시간, 다시 돌아서서 내려가는데 두 시간........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에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굴목이재 정상의 그 보리밥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지인들을 바리바리 끌고서 기어코 굴목이재를 찾았다. 억지로 거기까지 끌려와 보리밥을 먹어 본 사람이, 이번엔 자기가 바리바리 회사 사람들을 끌고 또 굴목이재를 찾았다.
그러자, 1977년에 산에 들어왔던 최석두씨가 굴목이재 마루에 정식으로 보리밥집을 열게되었다. 산에 직접 올라서 나물을 뜯고,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고, 키운 채소로 김치를 담구고, 키운 콩으로 메주를 쒀서 장을 담그고, 가마솥에 보리밥을 짓게 된 것이다.
그렇게 차려진 보리밥상에 딸려 나오는 반찬이 된장국 빼고도 모두 12가지나된다. 무생채. 상추절임. 매실장아찌. 겉절이. 오이무침. 참나물. 취나물. 머위나물이 모두 산에서 뜯어왔거나 텃밭에서 가꾼 것들이다. 고추장과 참기름이 바닥에 깔린 스뎅 그릇에 보리밥 한 공기를 쏟아 붓고 온갖 반찬을 모두 한꺼번에 얹은 다음 숟가락으로 쓱싹하고 비비면 산채비빔밥으로 변신한다.
'무슨 맛일까?'
나에겐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릇 바닥에 깔린 고추장을 고스란히 종재기에 덜어냈으니 말이다.
'조금이라도 넣어 봐. 도대체 무슨 맛으로 보리밥을 먹니?'
'나물과 야채 등 천연재료의 그 순수한 본연의 맛을 음미해 보려........'
'개뿔! 본연의 맛은 무슨......... 장맛도 모르면서 전통 한식이 어쩌니저쩌니....... 참기름 맛이겠지?'
'어허! 여기까지 오느라 흘린 땀이 얼마인데......... 여기 보리밥은 고진감래의 맛이여. 함부로 초 치지 말아줘.'
'입맛은 몰라도 입은 살아가지고.......'
'내가 이래도 굴목이재 보리밥을 먹어 본 사람이라고. 어허 왜 이래? 보리밥 매니아라니까?'
'저쪽집 맛은 어떤데? 먹어 봤어?'
'저쪽집?'
어느 날인가 굴목이재에 보리밥집이 하나 더 생겼다.
그래서 본래의 보리밥집은 상호에 (원조집)을 추가했고, 나중에 생긴 집은 (아랫집)이라고 붙였다.
그러다보니 호사가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마구마구 생겨났다.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기도 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분명히 민주주의 자유 시장경제에 입각해 돌아가는 사회다. 이쪽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쪽은 저렇게 이야기 한다. 다분히 그런 것 또한 이해 당사자가 아니면 내막을 속속들이 알기가 어려울뿐더러 섣불리 다른 사람이 토를 달수도 없는 경우라 하겠다.
시간이 제법 지나면서 함께 공존의 길을 모색해나가는 것 같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 방법으로라도 굴목이재 보리밥이 꾸준히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고, 또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전통의 맛은 고수하되 서비스나 시설의 개선에 이바지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개중에 귀를 기울여 보면 전통의 원조집이 맛있다고 꾸준히 찾아가는 부류들이 있는 반면, 아랫집의 맛이 무엇인가 더 좋게 느껴진다는 부류들도 분명히 있다. 모두 다 각자의 소신과 주관적인 맛 개념에 따른 평가와 판단이지 싶다.
우리는 이 둘 중에 한 곳을 다녀왔다. 설사 두 곳의 보리밥을 모두 먹어 보았다고 해도, 어느 한곳을 우위에 두는듯한 평가는 하지 않았을 것이고 옳게 생각되지도 않는다. 혹여 세 개나 네 개쯤의 가계가 성업 중이라면 용기를 내서 선택과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여, 여기 이 전설같이 전해오는 (굴목이재 보리밥)을 먹어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그럼, 정말로 (굴목이재 보리밥)이 들리는 소문만큼 정말로 기가막힐 정도로 맛이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일단 노 코멘트로 하겠다. 대신하여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을 바탕으로 확실하고도 자신 있게 나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수는 있다.
‘내가 아는 한, 내 고향 충주에 있는 (000 보리밥)이 훨씬 더 맛있어. 정말 최고로 맛있는 보리밥을 먹고 싶으면 충주로 와. 내가 대접해 줄께.’
<내가 기억하는 충주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은 무조건 문화동 000 보리밥>
도시의 어느 동네 어느 골목을 가나 보리밥집이나 칼국수집은 흔하디흔하게 만날 수 있다. 저마다 주인장의 정성과 손끝에서 우러나오는 맛이라 감히 어느 집이 진짜 맛있고 어느 집이 별로라고 말하는 것조차 창조주 앞에서 불경을 저지르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집은 찾아오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어느 집이 새로 건물을 지어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거기에도 분명 자본주의 시장논리가 적용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깔끔하게 현대화된 칼국수집이 있는가 하면, 찾아가기도 힘들만큼 허름한 가정집을 방불케 하는 소규모 보리밥집도 여전히 성업 중인 것을 보면 말이다.
내 고향 충주에도 이름난 보리밥집이 여러 군데 있다. 아니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아주 허름한 가계에서 시세에 비교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가계가 있는가 하면, 신축 건물에 현대화된 시설과 서비스로 보리밥이 일만 이천 원(물론 겸해지는 메뉴가 따라붙지만)이나 하는 가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보리밥은 저렴한 서민음식이라는 공식이 물 건너 저만치 사라진지 오래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보리밥이나 칼국수에 대한 생각은 지극히 옛날 방식이다. 그것을 보수적이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소시민적인 로컬 방식의 사고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적어도 보리밥이나 칼국수가 가져야하는 나름의 인식과 의미와 정취와 시대적 배경과 특별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분히 촌놈인 까닭이리라.
충주에만 해도 내가 아는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보리밥집이 많이 있다.
나에게 (보리밥)에 대한 인식을 처음으로 새롭게 깨닫게 해준 집이 바로 처음에 언급했던 <미소식당> 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보리밥이라는 음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랬음에도 보리밥이 자주 즐기고 싶을 만큼 나에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고추장이나 된장 보다는 캐첩이나 마요네즈나 버터에 더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리밥이나 칼국수 보다는 라면이나 돈가스나 부대찌개가 내 취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챠밍여사가 완전 한식 매니아다. 살면서 그녀가 내 취향을 맞춰주고 해외여행을 다니다보니 지금은 상당히 서구화된 편이지만 본래는 주구장창 한식 매니아다. 아내의 비위를 맞추려고 자신해서 한식집을 쫓아다니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칼국수집과 보리밥집이다,
(구) 중앙병원 옆의 하천변에 있는 보리밥집을 가장 많이 다녔다. 시청 옆의 할머니들이 시니어 복지 차원에서 운영하는 공익 식당이랄 수 있는 보리밥집도 많이 다녔다. 중앙 초등학교 인근의 탈북한 여성들이 공동 운영하는 보리밥집도 다녔다. 안림동과 연수동의 나름 현대화된 고급 보리밥집들도 꽤나 찾아 다녔다. 칼국수집에서 보리밥집을 병행하는 맛집도 있고, 분식집에서 보리밥집을 함께하는 경우들도 있다. 수제비와 병행해 운영하는 집들도 여럿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젠 꽤나 보리밥집을 부지런히 드나들은 쪼매 매니아 정도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챠밍여사가 애호하는 가계중에서 장칼국수와 만둣국과 수제비를 함께 취급하는 집은 좀 힘들지만 말이다. 장칼국수는 아직도 나에겐 넘기 힘든 산이다.
그러다가 정말로 우연히 파트너들과 공동 작업을 하다가 후배의 소개로 점심식사를 하러 우연히 문화동 럭키아파트 후문 근처의 보리밥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슈퍼 옆으로 허름해 보이는 보리밥집이 있었는데 색이 다 바랜 간판은 글씨를 읽을 수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별 기대 없이 일을 하려면 배는 채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고소함이 풍겨져 나왔다. 그것이 첫 인상이었다.
그저 그런 허름한 보리밥집........ 보리밥집에서 무슨 진수성찬을 기대할 것도 아니겠고,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를 기대하는 것도 아닌 처지에....... 쟁반에 갖가지 반찬이 접시에 담겨 올려 져 나오는 방식이 아니라 뷔페식이라는 점이 첫인상에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반찬을 골라서 수북이 담을 수도 있는가 하면, 뷔페식이 아닌 곳에서는 보리밥 위로 이미 고추장 한 숟가락과 참기름이 얹혀 나오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뷔페식에선 내가 고추장 코스를 그냥 통과해 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이 식당의 특징은 손님이 들어오면 맞은편에서 사장님이 손님의 숫자에 맞춰 일단 계란 프라이를 만들기 시작한다. 반찬 가짓수만 열 두 가지인가 되었고, 야채가 이제껏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을 만큼 수북이 쌓여있다. 정말로 야채에 진심인 것으로 보인다.
보리밥을 퍼서 지나가면서 여러 가지 반찬을 골라 담으면 야채 코너가 나오고, 돌아서면 사장님이 계란 프라이를 얹어 주시면서 참기름을 권하고 또 권한다. 그러면서 참기름은 아침마다 새로 직접 짜고, 야채 중에서도 쌈 채소는 직접 정성을 들여 재배한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을 해 주신다. 이 가계의 단골이고 아니고는 여기서 판가름 난다. 사장님이 열심히 설명해 주는 손님은 이곳에 처음 찾아오거나 초짜 손님들이다. 딱 봐서 단골에게는 일절 설명이 생략되니까 말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열심히 비비다 보면 펄펄 끓는 된장찌개가 나온다. 전혀 짜지 않고 깔끔한 된장찌개가 양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충분하게 담겨져 나온다. 이제껏 많은 보리밥집들 다니면서 먹어본 된장찌개 중에 단연 으뜸이다.
정말 맛있는 보리밥에 싱싱한 채소를 더해서 먹다가 한 숟가락 된장찌개를 떠먹고 나면......... 이게 행복이구나. 맛있는 음식으로도 얼마든지 행복을 경험할 수 있구나 하고 스스로 놀라했을 정도였다.
‘더도 덜도........ 보리밥은 이랬어야만 한다. 이게 진짜 맛있는 보리밥이다.’
이틀 뒤에 아내(챠밍여사)의 손을 이끌고 다시 방문했다.
결론은........ ‘이제까지의 모든 보리밥에 대한 기억을 지우게 만들어 주네. 일부러 차를 타고라도 오고 싶고, 아들네를 비롯해 누구라도 밥 한 끼를 같이하고자 한다면 여기로 데려오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휴일하고 영업시간을 알아서 가고 싶어.’
그 정도였나? 혹시나 실망하면 어쩌나 하고 한참 가슴을 졸였었는데...... 기우였다.
‘이곳은 일요일엔 쉬시고....... 평일에도 오전 11시에 문을 열어서 오후 3시면 닫는데.’
헐!!!!
메뉴라고 할 것도 없이 오로지 보리밥 한 가지 뿐인데, 그나마 장사도 하루에 4시간 밖에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게는 비록 허름해 보이지만..... 그래도 보리밥 장사에 관한 사장님의 자부심은 엄청난 것으로 보여 진다.
더도 덜도 다 필요 없다.
적어도 ‘맛있는 보리밥집’ 이라고 하려면 적어도 ‘문화동 000 보리밥’ 정도는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충주에 대한민국에 내놓으라 하는 보리밥집은 쌓이고 널렸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먹어보고 자신 있게 남에게 권할 수 있는 보리밥집은 ‘충주시 문화동 000 보리밥’이 당연히 원픽이다.
살다가...... 그 이상의 보리밥집을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대 다시 보리밥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약속하면서 말이다.
모처럼 (보리밥) 이야기를 적어 올리다 보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고향 충주에서 60년을 훌쩍 넘겨가며 살아오면서 변해가는 많은 것들을 지켜보았고 많은 생각들을 했었기 때문이겠지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전통 5일장)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국밥집)(구판장) 이야기도 언젠가는 해 보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골 버스 좀점마다 있던 (점빵)이며, 다용도로 쓰이던 (사카린)과 (제과점)(대장간) (넝마) (월남) (참외서리) (양조장) 등등의 이야기도 한 번씩은 해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충주 야현 성당 잔디밭에서는 성서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상영되는 (야외극장)이 열렸습니다. 영하 10도로 떨어지고 함박눈이 날려도 말입니다. 나는 빠지지 않고 해마다 그곳에서 내나름의 한겨울의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겼습니다. 언제부터 없어졌는지는 이제 기억에 없습니다. 해마다 1월이면 호암지에서 스테이트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60세 전후이거나 이상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탄금대 지금의 장례식장 자리에는 강 건너(운교)로 다니는 커다란 뗏목선이 있어서 차(버스 트럭)을 싣고 밧줄을 당겨서 강을 건너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 또한 나이가 지긋하시겠지만......... 노루목 싯계가 충주시민의 여름 해수욕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겠지요? 상수원 보호 구역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수주팔봉엔 실제 방앗간으로 활용하는 물레방아가 아주 커다란게 있었습니다. 팔봉까지 가는 어떤 차편도 도로도 없던 시절에 말입니다. 노루목에서부터 걸어다녔다는 사실은 아마도 현지인만 알 것입니다. (우시장) 또한 무학다리 에서 안림동으로, 다시 풍동으로 옮겨다니면서 주변으로 새로운 풍경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안림동 천운사 약수터에 여름에 가서 목간을 하고 막걸리에 부침개나 닭백숙을 먹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탄금대 세계 무술공원 여울 백사장에서 재첩을 잡아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럼 (충주 비료공장)을 기억하시나요? 전화번호가 두 자리일 때는 충주우체국 21번, 네자리일 때는 2121번이었습니다.
-- 시간이 허락된다면 그런 이야기들도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