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삼국지의 얼이 깃든 무후사(武候祠)
무후사 입구(비석:三國聖地) / 입구의 현판(武侯祠)/ 제갈공명(諸葛孔明)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는 춘추전국시대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의 수도로 삼국지의 무대였으며 익주(益州)라 불렸던 곳이다. 성도(成都)에 있는 무후사(武候祠)는 유비의 군사(軍師)이며, 대 전략가(戰略家)였던 제갈량(諸葛亮)의 혼백을 모시는 사당(祠堂)이다.
이곳 무후사(武侯祠)는 도원결의(桃園結義)로 초야(草野)에서 일어나 천신만고 촉한제국(蜀漢帝國)의 기틀을 세우고 제위(帝位)에 오른 유비(劉備)를 비롯하여,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 촉한의 모든 장군과 제후들을 함께 모시고 있기도 하다.
무후사(武候祠)라는 명칭은 제갈량의 시호(諡號)인 충무후(忠武候)에서 비롯되는데 경내에는 유비(劉備/漢昭烈皇帝)의 시신(屍身)을 모셔와 안치한 거대한 묘소인 혜릉(惠陵)도 있다.
경내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피로써 형제의 결연한 도원결의(桃園結義) 장소도 꾸며놓았는데 우리가 갔을 때 복숭아꽃이 한창이었다. 유비의 고향인 하북성(河北省) 탁현(涿縣) 누상촌(樓桑村)의 정취를 느끼며, 우리 세 사람은 이곳 도원(桃園)에서 옛 삼국지 주인공들을 흉내 내어 손을 모아 잡고 우정이 변치 않기를 도원결의(?) 흉내를 냈더니 지나가던 중국 관광객들이 웃는다.
대학 후배와 세 명이 함께한 이번 여행은 너무나 즐거운 여행이었다.
도원결의(桃園結義) / 유비(劉備) 석상(石像) / 도원(桃園)
삼국지를 보면 조조(曹操)가 한(漢) 왕조의 헌제(獻帝)를 폐하고 스스로 위(魏)나라의 황제를 칭하자 제갈량의 권유로 유비도 촉한(蜀漢)의 황제로 즉위하는데 유비가 한(漢) 왕실의 정통성을 이은 후손이므로 황제로 존칭하지 않고 선주(先主)로 불렀다.
유비는 자(字)가 현덕(玄德), 사후 시호(諡號)가 소열제(昭烈帝)이며, 아들 유선(劉禪)이 제위(帝位)를 이어받아 후주(後主)라 불렀는데 후주 유선(劉禪)은 군사(軍師) 제갈량(諸葛亮)이 죽자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즉위 40년 만에 한(漢)의 조조(曹操)에게 나라를 바친다.
제갈공명(諸葛亮)을 모신 사당 / 유비, 관우, 장비를 모신 삼의묘(三義廟)
삼국지(三國志)를 읽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파란만장한 사건들과 수많은 영웅들의 충의(忠義), 술수(術數), 모략(謀略), 신출귀몰한 전략과 영웅담, 그리고 전편을 통하여 흐르는 심금(心琴)을 울리는 인간미(人間美) 등이 우리를 매료(魅了)시킨다.
그러나 이 불세출(不世出) 영웅들의 허무한 죽음과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세운 제국이 2대(二代)를 채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던 기억이 새롭다.
유비(劉備/漢昭烈皇帝)의 묘 혜릉(惠陵) / 잡목만 무성한 혜릉(惠陵)
유비는 한날한시에 죽기로 도원에서 결의한 두 아우(關羽/張飛)들이 먼저 죽자 제갈량의 만류에도 무릅쓰고 전쟁을 강행하다 쓰촨성 양쯔강안(揚子江岸) 펑제현(奉節縣)의 백제성(白帝城/永安)에서 제갈량에게 아들(劉禪/後主)을 부탁하며 63세로 숨을 거둔다.
무후사 한쪽, 제법 큼직하게 세워진 유비의 무덤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惠陵)’은 무성한 잡목들만 멋대로 자라고 있어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다.
제갈량(諸葛亮)의 자(字)는 공명(孔明), 별호는 와룡(臥龍) 혹은 복룡(伏龍)이라고 하는데 삼국지(三國志)에서는 귀신도 부리고 천지조화(天地造化)도 마음대로 바꾸며 앞일을 예측하는 등, 신(神)의 경지를 넘나드는 뛰어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일찍이, 수경(水鏡) 선생 사마휘(司馬徽)는 유비에게 복룡(伏龍/제갈량)과 봉추(鳳雛/방통)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유비는 두 사람 모두 얻어 대업(大業)을 이룬다.
그러나 방통(龐統)은 제갈량(諸葛亮)보다는 기량(技倆)이 조금 부족했던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