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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좋은 책을 읽어 흥분된다. 06년도 배기찬저서 <코리아의 선택,다시 위기에 서다>라는 책을 읽고 한반도 역사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대립과 투쟁의 과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즉, 한반도에서의 역사는 내재적인 동인이 있는 동시에 외재적인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반도 민초들의 삶을 고난에 빠뜨린 역사적 큰 사건들은 이러한 변증법적 모순의 틀에서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김현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임진난이 육이오 한국전쟁과 어찌 그리 똑 같았는지 전율을 느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공부하고 배워서 오늘날 우리 삶을 보다 진보적으로 이끌기 위한 교훈을 얻어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특히 전쟁사가 그렇다. 전쟁은 정치의 실패이고 끝내 파국으로 가는 인간 행위이다. 왜 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으며 전쟁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전쟁속에 우리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내야 한다. 이 책은 논픽션 작품으로 중국의 시각으로 쓰여진 한국전쟁 보고서다. 작가 왕수쩡은 52년생으로 중국의 유명한 전쟁 논픽션 전문가다. 이 책은 천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나 내용은 흥미진진하다. 한국전쟁의 동인인 국제정치동향,정치가들의 행보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실려 있고, 구체적인 인물들의 전투 장면과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논픽션이라지만 실제 대하소설을 읽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기분이 언짢은 면도 있었다. 한국전쟁을 결국 중국과 미군과의 싸움이 주된 것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한국군을 오합지졸로 평가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어쩌리. 이 책의 시선이 그러한 것을. 독자가 읽으며 교정할 수 밖에. 그래도 한국전쟁을 다면적이고 중층적으로 그려낸 수작임이 분명하니 거인의 무등에 올라탄 난장이처럼 고마워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며 '한반도는 왜 분단이 되었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민초들의 자발적 활동으로 만들어진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가 각 지역 각 급단위에서 만들어졌고 이 조직을 그대로 권력화하면 되었을 것인데, 그리고 43년 카이로 회담이후 국제 정치는 한반도의 자주 독립을 인정한다고 수차 되풀이 했지 않았던가. 속내야 달리 있었겠지만 명분은 그러했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 명분을 이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분단이 된 이유는 미국과 소련이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진입을 했고, 그들이 서로 다른 체제를 보장하고 지향했기 때문이다. 사료에서 소련이 좀 더 지원군의 모습을 띤 것은 당시 한반도의 정서가 사회주의적 경향이 컸기 때문일 뿐이다.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의 지위로 인천에 상륙했다고 스스로 공언했으니 할 말은 없었을 것이고. 남북한은 각 자 그렇게 그 지역에 진주한 점령군의 입맛에 맛는 사람들이 지배권력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그렇게 해서 남북은 갈라진 것이다. 김일성이 남쪽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이승만이 북한에 있었으면 어떠했을까? 결국 박헌영꼴이 나고 조만식꼴이 나지 않았겠는가? 아~ 아니다. 이승만은 달리 비유를 해야할 것 같다. 애시당초 북한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니까.
분단이후 남북한은 서로 으르렁거렸다. 또한 동시에 한반도 통일에 대한 열망(?)- 내부 단속인지? 내부모순을 외부로 돌리려는 건지?-을 양쪽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다. 전쟁 전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기회있을 때마다 외쳤고 군비확장을 위해 노력한 흔적은 분명 있었다. 만약 이런 노력도 없이 말만 그렇게 해 댔다면 진짜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김일성도 마찬가지다. 중국인민군산하 조선출신 2개사단을 인계 받았을 뿐 아니라 소련에 군비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전쟁은 예고된 것이었고 어차피 터질 문제였다. 누가 먼저 총을 쐈느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전의 연속선상에서 한국전쟁이라는 확전이 이어진 것이지만 국제전과 이데올로기전의 성격을 띠었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성격상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개입이 안 될 수 가 없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 주변국이 약소국도 아니고 이념적 프레임이 강한 패권국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들 나라 입장에서 한반도 자체가 갖고 있는 인프라는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우기 각 자 나라들은 전쟁과 혁명후 내부문제 해결이 급선무였으니가 말이다. 그럼에도 한반도 내전이 국제전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던 것은 순전히 그 반도의 역할때문이었다. 중국입장에서는 순망치한의 존재이고 미국입장에서는 계륵의 존재이었던 것이 한반도였다. 그래서 중국은 내정간섭이라 관심을 끊으려 했고 미국은 애치슨라인으로 한국을 배제하려 했던 거다. 근데 이 남북한이 끝내는 붙어 버렸으니 중국과 미국은 할 수 없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거창한 명분을 각 자 내걸고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 각 자가 서로에게 뿌린 삐라를 보면 그림과 문구를 똑 같이 해서 뿌렸다는 거. 물론 주어와 목적어만 바꿔서 말이다.
그러나 전쟁의 책임을 그들에게 돌릴 수 있을까? 누가 남의 나라 전쟁에 자기 나라 젊은이들의 피를 뿌리고 싶어하겠는가? 결국 한국전쟁의 책임은 본질적으로 우리 한민족이 스스로 책임지고 떠 안아야 할 성질인 것이다. 공산화 음모니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니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이니 아무리 떠들어 대도 수 백만 동포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간 것에 우리는 스스로 반성을 해야 한다. 남한과 북한 위정자들은 결국 미국과 중.소라는 강대국에 의존했었다. 반성해야 한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고 주변국의 자문과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남북은 서로 통일의 대상이라고 점을 분명 인식한다면, 각 자 위치에서 국민과 인민을 위해 지도자들이 노력해야 한다. 그것도 목숨걸고.
한반도의 남쪽 한국만을 보고 이야기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년에 우리 최대 무역 흑자를 냈다. 분명 우리는 잘 살고 있다. 경제가 회복이 되고 있다. 근데 나라가 뒤숭숭하다. 아이러니라 할까?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난 책임과 권리가 같이 가는 정책이 좋다고 본다. 철도 민영화도 그렇다. 민영화를 하지 말자고 하면 안 하면 된다. 그렇다면 민영화 논의를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철도공사의 문제를 노조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면 된다. 로드맵도 제시하라고 하자. 그리고 국민과 전문가에게 찬반을 물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저 무슨 스포츠 중계하듯이 대중의 말초감각만 자극하는 보도만 되풀이 하지 말고 좀 진지하게 책임을 가지고 언론이 행동했으면 싶다. 어차피 우리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갈 수 밖에 없다.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는 초보적 민주주의는 명분과 행동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견제와 균형이라는 진보와 보수,좌와 우의 논쟁을 무시해선 안된다. 이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수구세력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반칙은 안 된다. 국가의 존망은 국민의 지지가 어떠냐에 달려 있다면 반북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저항세력을 종북세력으로 밀어 부치고 공안통치를 해대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이다. 아니면 그 주체세력들이 좀 깨끗하던가~! 그렇지도 않잖은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탓 하면 그게 온당한가 말이다. 그래서 국정원등 국가기관이 정치에 개입하고 댓글사건을 일으킨 것은 엄청난 국기문란인 것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정언명령이다. 그 명령은 선거를 통해 실현 된다. 근데 이 명령을 잘 지켜야 할 국가기관이 나서서 흐려 놓는다면 이건 체계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신뢰망이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가 먼저 신뢰를 쌓는 행동을 해야 그 다음에 누군가 그러한 행동으로 보답하면서 그 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근데 그러한 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다. 무너뜨리자면 순간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신뢰받는 국가기관이 가장 앞서서 모범적으로 행동해 줘야 한다. 민중의 지팡이니 공기이니 하는 말을 괜히 하는 것이 아니다. 현 정권은 내 탓 아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석고대죄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국민에게 용서를. 그리고 산적한 국가의 문제에 대해 국민에게 물어야 한다. 같이 해결하자고.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국가를 살리고 민족을 통일하는 과정인 것이다.
년보-
비극의 끈: 38선
1943년 카이로회담. 미,영,중 정상. 한반도를 자주독립국가로 만들 것을 결의
1945년 얄타회담. 미영중소 한반도 신탁통치안 결의
1945년 8월 8일 소련 대일선전포고. 8월 19일 평양점령
1945년 8월 9일 미국 정보부에 의해 38선 획정.(31쪽)
정치.경제,군사적 요소를 완전히 무시한 주관적 선. 250km에 달하는 이 일직선상을 통해 열두물길,200여 향촌도
로,8개의 등급도로,6개 철도, 수많은 생활공동체인 향촌을 갈라 놓아 버렸다.
1945년 9월 8일 미군 인천항 상륙
1945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9월 9일 북한 단독정부 수립
미군의 남한 지원: 1억9천만달러 무기장비제공: 소총 15만정. 대포 2천여문. 전쟁용도로정비,공항개설,항구정비
이승만: 2년내 국방군 15만 구축 선언. 북진통일론 주장
김일성: 48년 말 소련군 철수 후 무기장비 인계(?), 모택동에게서 조선군 2개 사단 인수.
=> 같은 민족, 두 이념체제는 이미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는 의미.
전쟁의 빌미,애치슨라인
1949년 12월 장제스 타이완 도주
45년 당시 국민당 군대는 800만. 미국의 무기 지원이 있었다. 그런대도 죽창들고 시작한 농민홍군에게 졌다.
정치가 어둡고 관료가 부패하면 민심은 등을 돌리게 되어 있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대통령. 타이완은 중국의 영토. 개입의지가 없다고 천명. 애치슨 라인선언.
한반도와 타이완 배제하는 미방어선 선언. 이 선언으로 신중국은 타이완 해방을 김일성은 남한 해방을 기도. 소련은
미국의 군사 개입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이들을 지원하기로 나섬.
1949년 12월 ~50년 4월(?) 모택동 소련 방문. 김일성소련 방문
초기 스탈린의 중국입장은 애매모호.양자강을 중심으로 남쪽은 공산당, 북쪽은 국민당으로 구획해서 통치하는 것을
바람. 트루먼 선언이후 입장이 바뀜.'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체결함. 같은 시기 김일성도 소련 방문.
한국전쟁 발발
6월 25일 북한군 철원-의정부라인으로 2개사단,1개연대 2만 8천명 서울로 진격.미아리방어선에서 27일 오전까지 전투.
6월 27일 새벽 이승만 탈출 27일 저녁,밤사이 북한군 3사단 9연대 서울 외곽 진입
6월 28일 새벽 2시 15분 한강교 폭파. 북한군은 폭파후 10시간 지나 서울 시내 진입. 12시간 지나 한강 도착.
국군 9만 8천명중 2만명만 한강 도하 함.
6월 27일 미 육군 참전 결정 맥아더 현지 도착.전장 분석. 6월 30일 맥아더 타이완 방문
7월 1일 미 육군 24사단 21연대 1대대 스미스중령 440명 이끌고 부산 도착.
7월 5일 오산전투. 북한군 중앙 습격, 좌우 측면 침투전술로 미군 격파. 500명중 150명 사망.72명 생포
7월 13일 중국 25만명 해방군 동북지역 배치
7월 14일 금강전투, 7월 20일 대전전투 24사단장 딘소장체포. 미군 병력 45%소실,장비 60%소실
8월 20일 북한군 4차작전 종료. 남한영토 90%장악, 국군 3만명 사살
8월 31일 북한군 5차작전시작. 이때부터 유엔군이 북한군보다 병력이 두배 많아짐. 미공군의 폭격,해안선 봉쇄,병참선이
길어지면서 북한군에게 불리해짐.
9월 10일 북한군 6만명의 병력 손실을 보면서 방어체제로 전환 함.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감행.이 과정에서 미군 203명 사상, 북한군 1594명 사살,생포.
9월 23일 김일성 전선을 38선으로 후퇴하라 명령.
9월 28일 북한군 전선에서 사라지다. 당시 7만명의 북한군-> 39선에 3만 집결.1만 사망.1만 2천 포로.2만명 게릴라전.
9월 29일 서울 수복. 90일만에. 선두부대 38선 돌파.
중국 참전
10월 4일 중국지도부 참전 결정
10월7일 유엔군 공식적으로 38선 통과
10월 8일 마오쩌둥 '중국인민지원군 편성에 관한 명령'을 내림
둥베이 군구 사령관 가오강등 지도부 김일성 특별대사 박일우만나 전세 공유
10월 9일 인민지원군 제 1차 간부회의 슬로건채택 抗美援朝 保家衛國
10월 10일밤 소련의 공중 지원 약속 철회.모택동 딜레마에 빠지다. 펑더화이 급거 베이징 복귀.
모택동은 스탈린이 중국공산당원을 이해 못하고 있다고 생각. 펑더화이 이렇게 말함
" 나라는 사람은 팔자가 사납소.혁명에 참가했던 당시 고생스러운 곳에 있었고 장정에서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항일
전쟁에는 타이항 산에서, 해방전쟁때는 서북부 지역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북한으로 가야 하오. 가는 곳 마다 모두 고
생스러운 곳이니 이게 사나운 팔자가 아니면 무엇이겠소? ..우리 공산당 당원들은 고통과 빈곤이라는 글자와 가까이
지내야 할 운명이오. 고통과 빈곤 없이 우리 공산당 당원들이 무얼 하겠소?"
결국 소련의 공군 지원없이도 참전하기로 결정.
10월15일 트루먼과 맥아더. 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회동.중국의 전쟁개입 오판. 크리스마스전 미8군 철수 고려.
10월 16일 펑더화이 선양으로 복귀 후 전술 채택. 도하후 북한군과 연계해 방어선 구축 후 먼저 한국군 격파 후 미 8군
섬멸하기로 함
10월 19일 평양 함락,중국인민지원군 도하 시작. 26만명. 당시 유엔군 병력 40만. 전선에 10만 집결.밤에 이동 낮에 숙
영. 각 군단별 집결지로 이동. 펑사령관 안동 도착. 박일우와 면담.
10월 21일 펑사령과 김일성과 회담. 북한군 3만 보유. 유엔군 예상보다 빨리 진격. 지원군은 작전지역 미처 도달 못함.
그러나 상대가 아군의 도하를 모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 수십만이 도하하고 움직임에도 정찰,정보력이 못 찾아 냄.
10월 25일 인민지원군 지휘부 결성. 지원군의 전술을 기동전,진지전,유격전으로 전환.
유엔군은 크게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으로 나눠 작전전개. 서부지역 워커군단장 휘하 미 제8군,한국 6,8사단 중심
동부지역은 미 제 7사단, 제1해병대, 한국제1군단. 병력 총 10만 지원군 작전 가능 병력 15만. 11개 사단.
동부전선은 견제.서부전선에서 한국군 3개 사단 섬멸 계획
제 1차 접전 유엔군입장: 유엔군.국군진격전투. 지원군입장: 항미원조 제 1차 전역
(1950년 10월 25일~ 11월 5일)
서부지역: 공세전
10월 25~28일 온정전투
국군 6사단 2연대 vs 지원군 40군 118사단 354연대, 360연대 측면 저지전.
국군 6사단 19연대 1개대대 vs 40군 119사단
국군 8사단 10연대 1,3대대 vs 40군 120사단
국군 6사단 7연대 vs 40군 118사단 353연대
결과: 서부지역 미군 우익을 담당한 한국군 타격.
10월 30일 운산전투
39군 운산공격. 116사단 348연대 vs 미 제 1기병사단 8연대. 346연대 vs 8연대 3대대 M중대 백병전
38군 구장,원리,군우리,신안주 돌아 유엔군 퇴로 차단. 희천지역의 완강한 저항으로 우회 배후침투 실패. 국군 8사단 섬
멸 못함. 미군 24사단 안전하게 후퇴.
비호산전투: 국군 7사단과 접전. 일지에 서로 유리하게 기록.
40군 영변지구로 침투 국군 1사단 제압하고 미 제1 기병여단 퇴로 차단
42군 125사단. 덕주로 전진해서 유엔 지원군 저지.
결과: 유엔군 청천강 전선 방어진지로 철수
동부전선
42군 370연대 2대대 vs 수도사단: 원산-흥남-> 개마고원,압록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황초령에서 접전
연대봉전투 42군 124사단 371연대 2대대 4중대 vs 국군 3사단 22,23연대
제 2차 접전(11월 25일~12월 11일)
유엔군 크리스마스전까지 전쟁을 종결하기로 하고 압록강변까지 진격할 것을 전군에 명령.
서부전선
펑더화이는 적을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는 전략을 구상. 특히 38.42군에 서부전선 우익 국군 7,8사단 섬멸 후 유엔군 서
부전선 좌익의 탈출로 봉쇄를 명령
- 덕천,영원에 있는 국군 7,8사단 하루만에 붕괴. 군우리 방향 진격중간지점인 천연요새 알일령에서 터키부태5천명 섬멸. 유엔군 퇴로 길목인 삼소리토착. 42군과 함께 뒷문을 걸어 잠그고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8군과 격렬한 전투.
그중 송골봉전투가 가장 압권.(436쪽)
# 맘이 우울하고 기분 나쁜 점: 당시 중국군과 미군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우습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음. 마치 유격대
가 국군을 무서워하고 경찰을 우습게 여기는 것과 같음.
터키군이 중국군을 섬멸했다고 미군에 연락하자 사실 알고 보니 후퇴하는 한국군이었음. 이중근편저 625전쟁 1129일의 일지에는 "11월 29일 터키군.덕천지구 서남쪽 20KM 지점에서 중공군과 백병전 끝에 격퇴"로 기록된 것 같음.
동부전선
미 10군단장 아몬드는 제 1해병사단을 주공격부대로 장진호로 진격. 7보병사단은 우측, 3보병사단은 좌측을 맡게 함
해병대 스미스사단장은 아군 병력의 분산,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추위, 적정이 평가가 안되는 것을 이유로 진격을 조심스럽게 함. 유담리,신흥이,하갈우리,고도리,사창리등 곳곳에서 지원군과 충돌
지원군 9병단 20,26,27군과 하갈우리 전투: 전투영웅 양건쓰의 활약(482쪽)
하갈우리 전투
장진호지구 미군후퇴작전.
11월 30일 유엔군 전면 철수. 해병대 스미스사단장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의 철수 명령
12월4일 5,6연대 철수 성공. 그 과정에서 1500명 사상자. 그중 500명은 동상자. 총 22km거리를 선두 59시간 후미77시
간 걸림
12월 11일 오후1시 해병사단 주력부대 진흥리 통과 총 718명 사망,192명 실종,3504명 부상. 전투인원 4418명,비전투인
원 수천으로 줄음
# 엄청난 비대칭전력으로 중국군이 미국에 큰 타격을 준 것은 중국군의 정신력때문. 죽음을 각오한 돌격.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최후의 한 명은 끝까지 전투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러한 지도자의 명령에 충실히 따를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 것은 단순히 강제와 명령에 의한 젓은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과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 그리고 현재 치러지고 있는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는 굳은 믿음이 군 장병들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다! 그들의 골수 깊숙이 파고든 것이 분명하다!(526쪽)
12월6일 평양 진입 제39군 116사단 346연대 1개 대대
12월 24일 흥남항 철수 완료 10만5천명. 차량 1만7500여대, 물자 35만톤
제 3차 접전(1950년 12월 31일~ 1951년 01월 08일)
30만명의 북한군,지원군. 임진강,한탄강 전역에서 도하. 37선까지 중공군 진격. 1월 4일 서울 재점령.
펑더화이 진격명령을 철회하고 1월10일 김일성과 전투계획에 대해 이견보임(667쪽)
유엔군의 반격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중국군의 1,2,3차 전역이 8일에 걸쳐 이루어 졌고 이는 그들에게 탄약과 식량,전투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 유엔군이 그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중국군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계속 공격을 가함으로써 체력을 소진시키면 된다고 판단. 펑더화이의 예측과 다르게 조기에 공격전술로 전환 함.
1월 15일 울프하운드작전 시작.
정찰부대 전선으로 진격. 중국인의 방어선을 발견할 때까지 진격. 8일동안 진행
1월 25일 썬더볼트작전
5개 군단 16개 사단 23만명 전력 투입. 서부전선 주 공격방향, 동부전선 보조.
# 펑더화이는 각 군단의 전력손실이 심각하고,신규 부대의 입북이 진연되고,보충병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엔
군과 접전을 치르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 그러나 마오쩌둥은 1월28일자 전보로 4차 전역을 명령. 36선에 있는 대전과
안동을 점령할 것을 요구(이른바 4차접전). 이에 근거하여 서부전선쪽에 38,50군배치,해안과 서울쪽은 북한군 제1군단배치, 동부전선
은 39,40,42,66군 배치. 결국 방어적 진격작전을 수립. 결국 서부전선에 3개 군단 정도로 유엔군 최정예 병력과 대치
하게 됨
- 서부전선 전투
수리산 전투(698쪽) 1월 31일~2월6일. 미군 25사단 <-> 제 50군
한강 저지전투(710쪽): 제 38군<-> 미 제 1기병사단,3사단 돌격부대. 1월 28일 태화산 전투.
2월 17일 한강이북으로 철수. 막판 18일 중국군 도하시 리지웨이 공격 중단. 적의 함정이 있을 것으로 판단.
- 동부전선 전투
횡성 반격전투(723쪽): 2월 11일:40군 횡성북서쪽 돌격 <-> 한국군 8사단. 42군 124,117사단 한국군 8사단 퇴로차
단. 42군 125사단 원주 쪽 증원군 차단. 42군 126사단 지평리쪽 증원군 차단
66군 196,197사단 횡성남쪽 돌격: 중국군의 전형적인 우회전술과 분할포위전술.
전투는 2월 12일 저녁 종결.한국군 3,5,8사단 미군 2사단일부,187공수연대 3350명 희생.철수
지평리 전투(2월 13일~15일) 미 제 2사단 23연대,프랑스군 대대: 끝까지 사수. 중국군과의 진지사수전에서 처음 승
리. => 서부전선 중국군 후퇴 시작
펑더화이: 4차전역 실패 후 2월 20일 급거 귀국. 3월 9일 한반도 전방으로 복귀.
2월 20일 킬러작전
중국군에 휴식과 재편성할 시간 주지 않고 바로 공격 개시.
3월 5일 유엔군 횡성 점령.
개전 이후 중국군 20만 6천명 병력 손실. 그 중 사망자 18만 5천명. 질병,부상자 2만 천명. 미군 병력손실 5만2400명
그 중 사망 8553명. 부상자 3만 3781명. 실종자 8724명.
3월 7일~20일 리퍼작전
중국군 42,50,40,39군을 확실히 섬멸하지 못했다고 판단. 서울 동쪽 춘천방면으로 돌진 이후 서울방면으로 38선 이남
주요지역 점령.
중국군은 3월 10일 부터 북쪽으로 철수 명령.
3월14일 중국군 서울 철수. 70일간 점령. 3월 15일 오전 한국군 1사단 서울 진입
3월 20일 러기드 작전
임진강어귀에서 판문점거쳐 연천 화천저수지에 이르는 길까지 진격
20일 문수공수작전 실패
화천저수지 전투
4월 11일 맥아더 해임
유엔군 38선을 넘는 것에 대한 견해 차 돌출
맥아더: 한국전쟁을 확전하여 아시아전쟁으로 몰고 가려 함. 최종목표는 아시아의 공산 세력을 몰아냄
트루먼: 한국전쟁은 소련이 동맹국 군사력을 가지고 벌이는 파워게임으로 인식,동맹국 방어 중심은 유럽이므로 한국전쟁은 국지전으로 간주해 빨리 종전할수록 좋다
=> 유엔군이 38선에 다다렀고 그 정도면 체면은 차린 것이니 종전협상을 시작하여 적당한 시기에 물러나자고 판단. 이에 대한 준비에 맥아더가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행동을 보임.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에 취임. 제8군 사령관은 제임스 밴 플리트중장을 선임(4월14일).
중국군 5차전역(1단계: 51년 4월 22일~29일),중국군 제1차 춘계공세
중국군 병력 충원 총 70만 <-> 유엔군 총 30만.
유엔군: 차근차근 천천히 진격. 새로 부임한 밴 플리트는 지속적인 북진계획을 세움. 오이오밍선 설정
중국군.유엔군이 적극적으로 밀고 올라오면 조직적 철수후 돌결,분할,우회포위전술로 재 반격할 것을 고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유엔군의 상륙작전과 측면공격을 우려하여 조기에 전선을 압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 김화와 가평사이 산악지구에서 적을 돌파 좌우로 분열시키고 양쪽을 우회해서 측면을 공격하기로 함
=> 밤에 중국군 공격.유엔군 후퇴 낮에 유엔군 공격 양상 전개. 일진일퇴 공방전.
유엔군: 조밀하고 정연한 방어선을 유지하고 질서 있게 후퇴하면서 중국군의 예봉을 피한 후 1주일공세가 끝나기를 기
다렸다가 곧바로 반격에 돌입 대규모 병력 손실을 입히는 전략을 세움
중국군 서부전선에서 3만명 희생
중국군 5차전역(2단계: 51년 5월 15일~21일),중국군 제2차 춘계공세
1단계 종료후 서부전선이 밑으로 중부전선이 위로 올라간 S자 전선이 형성. 펑더화이는 중부전선 측면이 노출된 한국군 3군단 3,5,9사단을 섬멸할 계획을 세움
(# 미국국가안보위원회: 전쟁 이전의 38선을 회복하는 선에서 회담을 통해 적대 행동을 종결하자고 결정.5월16일 트루먼 승인.)
=> 소양강 남측 7사단 붕괴. 3군단 퇴로길 오마치 함락. 전투 3시간이 지나 3개 한국군 사단 철수 시작. 중국군 추격으로 궤멸됨. 오미치는 원래 미군방위선에 위치. 한국군 퇴로 길이여서 한국군 배치. 이를 미군이 거절. 결국 이 고지의 방어가 허술해 지면서 자멸 초래. 미10군단은 한국군의 무능을 비난하고 한국군 제3군을 해산시킴.
미군 2사단 38연대 3대대는 견고히 방어하며 퇴각. 19일 이후 중국군의 공세가 약해 지면서 유엔 4개 군단 13개 사단 동원하여 역공을 가하기 시작. 임진강어귀-연천-영평,화천,양구,대포리잇는 캔자스선까지 진격 계획
중국군 동부전선에서 1만명 희생
유엔군 반격(5월 22일~6월 10일 )
전선에 미군 최정예 부대와 한국군 1개군단 참여. 전차기동부대로 일직선으로 홍천-인제길을 따라 진격. 소양강북측까지 진입.10군단 주력의 돌파로 지원군 15,60군 우익 노출. 서부전선도 한국군 1사단의 뷱한군 1군단 문산까지 후퇴. 이에 우익이 노출된 65군 의정부를 제 때 사수 못 하고 5일만에 후퇴. 마지막 저지를 맡은 60군 180사단의 궤멸-5월 23일~26일.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사이)사수명령(5월 31일): 펑더화이는 19병단에게 15~20일 철원 사수명령: 63군 행동 돌입. 189사단 3일만에 전멸. 188사단 인계. 10일동안 저지전 완수
5월 26일 유엔군 38선 돌파
50일간의 전투에서 중국군 8만 5천명 희생. 유엔군 8만명 희생.
1951년 6월 중순 전선은 문산,고랑포리,삼곶리,철원,김화,양구로 형성. 38선 부근으로 대치. 전쟁발발전과 비슷해 짐
군사 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정치와 전쟁에 관한 견해
" 지금까지의 전쟁은 맹목적인 충동에 의해서가 아닌 정치적 목적의 지배를 받아 일어난 행위였다. 따라서 그 정치적 목적의 가치에 따라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를지,얼마동안 희생을 감수할지가 결정된다. 이러한 이유로 힘을 과도하개 소모해 정치적 목적을 초과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정치적 목적을 포기하고 화해의 데스처를 취하게 된다.
이후 중국군과 유엔군은 더 이상의 공격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전면승리를 단념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하여 이후 정전까지 38선 부근의 전선에서 지리한 고지전 진지전등 국지전을 벌이면서 협상에 임하게 된다.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해 향후 있을 모든 분쟁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 그만큼 희생을 치루면서 까지 이루고자 하는 바가 우리의 이상에 충분한가? 적합한가?"
- 정리및 독후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