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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나태주 글가람 사공경현 안성은 김용칠 송재학 공광규 장옥관 정연선 배옥주
이병연 이승애 하록 이경 홍성란의 시
선물
ㅡ반경환 평론가님
나태주
설날도 한참 지나
사과 한 박스가 왔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글썽
사과 맛이 너무
너무 좋아서 글썽.
----애지 여름호에서
한글
글가람(본명 안태희)
글을 저울에 달아보았다
저울은 글의 무게를 달지 못했다
무게를 몰라 답답하던 차에
영국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가 말했다
세계 공통어로 수출한 나라 영국 국왕이
새로운 알파벳을 만들어도 한글 같은 우수한 글은 만들 수 없다고
세종대왕 눈을 빌려
환하고 밝은 세상을 사는 우리
인류발전에 이바지할 무언가를 찾으라고 만든 글
이 한글로
생태계를 살릴 경전을 쓰라는
맞지요?
세종대왕님
21세기 집현전역
지구 살려
魂 창조하는 훈민정음 발전소
글 길
말 길
숨 길
지구 길잡이 글
세계문자올림픽 대회 27개국에서
1위 소리 문자 한글
세종대왕 혼이 우주를 환하게 밝힌다.
----애지 여름호에서
인간의 범위
사공경현
인간의 범위는 생각보다 매우 광범위하다고 알려져 있다 생각을 할 줄 알고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면 일단 인간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인간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특징이다 개체마다 다른 생각의 차이만큼이나 천차만별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슬기로운 자라는 호모사피엔스는 포유류에 속하는 특정한 동물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인격’을 갖추면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인간류는 허다하며 그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국가는 일단 직립보행하고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외양을 갖추면 인간으로 인정한다 나아가 호적을 등록하고 존엄할 권리와 도덕과 규범 준수라는 의무까지 부과한다
이 세상을 한시적인 학교로 생각한 조물주는 애초에 인간의 범위를 확장해 놓았다 잡다한 인간류가 섞여 살며 부대끼면서 공부하라는 취지다 세상에서는 호모사피엔스 중간 정도의 진화 과정에 있는 부류를 ‘인간’이라 부르고 그 이상 수준의 인간을 ‘사람’이라고 명명한다 ‘인간’ 이하 단계의 인간을 ‘짐승 같은 인간’, 그 하위 수준을 ‘짐승보다 못한 인간’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조물이 학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준 이하의 인간들에게는 인두겁이라는 투명한 가면을 씌워 놓았다 하여 도둑이나 강도 강간 사기범 같은 부류는 짐승 같은 인간으로 분별된다 짐승들도 목숨을 다해 새끼를 보호하는데, 자식을 죽이는 아비가 있고 부모를 살해하는 자식도 있다 이러한 패륜과 살인자 등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 범주에 속한다 한편, 살신성인이거나 대자대비하거나 세상의 빛이 된 고매한 인격을 가진 최상위 수준에 있는 소수의 사람을 ‘성인’이라 칭하며 인간 진화의 최종 단계로 인식한다
인간은 오랜 세월 진화를 계속해 왔으며 상위 수준으로 거듭 발전하기 위해 광범위한 인간류의 복마전에 던져진 고립무원의 존재와 다름없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정신 바짝 차리고 인두겁에 휘둘리거나 인간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할지라
----애지 여름호에서
모래성
안성은
한 움큼 쥐었더니
그게 내 것이라는 술래
그렇게 사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바닷물의 둘레가 뭍으로 기어올 때
나는 나를 본 적 있다
내 늑골 아래 깊은 방아쇠를
한 주먹거리의 자재들을 이고
나는 나의 내부를 막아보려 했다
먹는 일 하나만이라도 나태해지고 싶었지만
그러는 사이 어머니가 나를 보고
엄마, 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다음 생에는 내 딸이 되어도 좋아요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는데
비극은 현재를 좋아한다
이제 다 모르겠고
숙인 것들의 명칭 같은 거
시절의 발목에 난 흉터 같은 거
그런 이름이나 정해본다
영원한 사각에 갇힌 딱딱한 이름으로-
철썩인다
파도의 둘레에 서걱서걱 잘려나갈
내 가녀린 목들이
석양 아래서 철렁대면
여전히 부실한 내 기둥들은 허물없이 무너질까
밤에 나간 배 오래 돌아오지 않고
그간 나는 모래성이나 쌓고 있겠다
귀, 자가 붙은 글자들이 무언가를 기다리게 되었듯이
귀향이랄까 귀가랄까 귀소랄까
첨벙이는 발자국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척
파도에 발목이나 적시어보겠다
그러면 짠 물에 딸려오는 모래알도 반가우겠지
----애지 여름호에서
여우전설
김용칠
어린아이 솜털 머금은 여리고 순한 양은
큐피드화살 콩깍지 단단히 씌어
방탄복 나일론 같이 모질고 기센 여우가 이상형 이었어요
새침데기 여우 다가와 꿀 바른 입으로
살을 후벼 파는 고통의 고질병을 제발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두 손 모아 싹싹 비비며 애원 했지요
편작과 비견되는 양의 뛰어난 치유능력으로
여우는 고질병이 씻은 듯 나아서 닭똥 같은 눈물 흘리며
나와 함께 살아 달라 하소연
백년해로 천지서원 후 함께 살게 되었는데
여우가족들은 하나같이 고질병을 앓고 있어
천사 양은 아무런 대가 없이 엄마여우와 그 가족들 위해
여러 달 밤새워 병 치유해 주었어요
그래요 새로운 삶을 탄생케 한 생명의 은인이 된 거죠
그렇게 빛의 속도로 흘러간 10여년의 주마등 세월
양의 정기를 달콤하게 빼먹고
나르시시즘에 취하여 순결둔갑 옷을 입은 여우가
그만 숫여우를 만나 아이코 바람이 났네
그러면 그렇지 드디어 아홉 꼬리가 대명천지에 드러나는 구나
뒷간 갈 적 맘 다르고 올 적 맘 다른 여우
백년해로 천지약속 헌신짝으로 버리고
결국 오월춘추 서시로 다가와 동시 아니 똥시가 된 여우
요즈음 양의 식스센스 섬찟섬찟 오한 전율의 이유가
여우 때문이라는 걸 알고는
너무 기가 막혀 큐피드화살 부러트렸으나
가슴을 할퀴고 후벼 파는 철근 박힌 콘크리트 멍울이
재생의 은혜를 던져버린 배은망덕 요망함의 독침에 찔려 커져만 가고
철저히 씹어 먹힌 삶이
한의 덩어리 맺어 천지에 퍼져나가니
어찌 오뉴월에 서리가 맺지 않으리오
어느새 춘풍을 몰고 온 봄비가 내리고
화기를 품은 진달래 개나리 벚꽃물결 출렁이며
꽃비가 봄 향기를 타고 내리는 봄기운 완연하건만
양의 마음은
추풍낙엽 되어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차디찬 한의 얼음 속에 갇혀
녹지 않는 울음비 흘리며
한 겨울 속 세한도의 고목되어 떨고 있구나
----애지 여름호에서
폭우 속 노크 소리가 점점 커진다
송재학
수요일, 산 1번지가
저물고 있다
오랫동안 비를 쳐다보는 건 슬픈 일
표정을 가진
수많은 발자국의 이유가 번지고 있다
검어지려는 집은
다른 생각을 하는 비에 잠기는데
비가 그치면 유월이 멀지 않다는 이곳,
물이 깊은 곳과 다르지 않다
빗방울의 강약 때문에
체온을 가진 창문이
슬며시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우기 생활사를 넓히면
몇십 년의 강우량이
먹물처럼 산 1번지를 에워싼다
비안개 속에서 우레가 뭉클거릴 때의
높은 노크 소리,
고독의 심리와 만나는 순간이다
----애지 여름호에서
겨울동화
- 공광규
아이들 키를 덮을 만큼 눈이 내려
아이들도 어른도 보이지 않는
지붕을 흰 눈이 푹 덮은
바이칼 겨울 호변 마을은
나무들이 눈뭉치를 들고 서서
눈싸움 놀이를 한다
어느 나무는 얼굴에 눈덩이를 맞아
얼굴을 수그리고
어느 나무는 허리에 맞아
몸을 타원으로 휘었다
붉은 벽돌집과 검은 나무담장
자작나무와 소나무와 관목에
이르쿠츠크 행 열차속도로
눈보라가 비껴가는 호변 마을
----애지 여름호에서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
장옥관
태어나 보이 모태신앙인기라. 봉제사 접빈객이 헌법이고 족보가 경전인 경상도 땅인기라. 꿈에도 생각 몬 해본 배교(背敎)는 오직 분선이 이모 때문이제. 이모는 내보다 딱 한 살 더 뭇는데 분해서 분서이, 다섯째 딸인기라. 우에 히는 필선(必宣)이고, 그 우에 히는 필조(必助). 삼신할매한테 우짜든동, 우짜든동, 손바닥 닳도록 치성 드리가 얻은 아가 또 딸인기라. 낳자마자 웃목에 던져짔던 분서이는 큰히의 큰아들인 날 딴 별에서 온 사람으로 여겼을끼라. 외가 가믄 분서이 이모는 방금 낳은 알을 몰래 내 손에 쥐키줬지. 그기 새 새끼 심장메로 팔딱이는 기라.
내가 어무이 뱃속에 들앉아 있을 때 이모는 외할매 몸에서 불안한 숨 몰아쉬었을 끼라. 부른 배 때매 사우 피해 츠마 밑으로만 댕깄다는 할매, 한 지붕 아래 뒤뚱뒤뚱 딸내미와 어매가 서로 마주치는 거도 을매나 민망시러운 일 아니었겠노. 누가 등 떠민 것도 아인데 또 아를 가진 할매, 고마 죽은 아들 손잡고 저세상으로 가시뿌고. 분서이는 뺑덕어마이 눈칫밥이 떠밀어 국민학교 졸업하자마자 대처로 떠났는기라. 큰히의 아들은, 아부지 어무이 다 잃고 교복 차림으로 난생처음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는데 이모는 주인 몰래 나왔다카미 구개진 지폐 한 장 쥐키주고 캄캄한 골목으로 사라지는기라.
그 후에사 말해가 뭐하겠노. 우째우째 내가 얼치기 박사 따고 교수 되는 동안 이모는 나이 많은 신랑 만내 노점채소장사하다 덜컥 암종에 발목을 잡혔는기라. 여러 해 방사선에 항암제에 조리돌림 당하다 서둘러 가고 말았으이,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남자와 여자, 아니 여자와 남자 그 한 끗에 누린 것들, 당연해서 당연하다 여기고 저질렀던 것들 미안코 미안해 때늦게 신앙 고백하는기라. 수지븜 많았던 이모는 외가 삽짝 밖에 핀 분꽃을 닮았었제. 살구꽃 이파리 날리듯이 눈발 흩뿌려지는 이 겨울 아침, 난데없는 까치 울음 속으로 분서이 이모가 사부잭이 내리와 내 어깨를 다독이는기라.
*송재학, 『슬프다 풀 끗혜 이슬』,문학과지성사, 2019.
----애지 여름호에서
지는 꽃
정영선
어스름 녘
여섯 시를 대기하는 북 앞에서
그는 정적을 모으고 있다
계단 걸음마다에 고인 장엄
비가 내릴 듯
숲을 압도하는 고요
텅.
북소리는 몸을 관통하고
너머로 갈 때
인간의 북소리가 천지를 아프게 때린다
비가 거세어진다
북소리
빗소리
우리는 비에 젖고 북소리에 젖는다
마지막 북채가 둥글게 활을 그리느라 공중에 머문
여음은 점점 소리의 꼬리, 꼬리로 가늘어지다
사라진다
천천히 돌아서는 검정 고무신
속세를 막 건넌 젊은 스님 뒷모습이
지는 꽃처럼 슬프다
---애지 여름호에서
소설小說
배옥주
겨울이야기 한 마리를 소설小雪에 잡았다
노안을 호소하는 회원들을 불러 판을 벌였다 눈에 좋다는 머리말은 피데기처럼 말려 잘게 찢었고, 목록은 자작하게 볶아 내놓았다 행간에 들러붙은 살점들은 적당히 쫄깃했다 다들 탄력적이라고 엄지를 세웠다
작은도서관 회원답게 301호는 단편마다 추려낸 부속물들을 조목조목 품평했다 잡내를 잡으려면 기름기 번지는 복선을 걷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첫눈을 기다리다 눈사람이 되어버린 결말은 곱씹을수록 단물이 올라왔다
독서회를 세 개나 끌어가는 607호는 표제에 솟은 뿔부터 표사 꼬리까지 툭툭, 질문을 던졌다 정답 없는 서술형의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눈 덮인 장독에서 쩌억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라 먹고 조려 먹고 소설 한 마리를 오지게 뜯어 먹었다 트림소리가 들리거나 소화불량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렸지만 살얼음이 녹을 때까지 우리의 겨울은 살냄새로 충만했다
----애지 여름호에서
백색 사원
이병연
황금 사원에서는
제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어도 빛을 잃는다.
무릎 꿇고 엎드린 사람들
오직 빛나는 것은 황금뿐
백색 사원에서는
초라한 차림새도 빛이 난다.
사뿐히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
색색의 꽃이다.
하얀 눈 위에
촘촘히 보석처럼 박아 놓은 작은 유리 조각들
그 안에 들어앉은 햇살이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맞이한다.
삶의 파도에 휩쓸려 생기를 잃은
사람들의 눈빛이
설원에 빛나는 호수처럼 되살아난다.
사원은 배경이 되고
사람들은 더없이 아름다운 주인공이 된다.
부처님의 얼굴이 대보름 보름달처럼 환하다.
----애지 여름호에서
저녁의 방향
이승애
먼 산등성이로
해가 넘어간다
일찍 집을 나선 새벽이 그 사이 늙어
서쪽하늘에 붉은 발자국을 찍으며
집으로 가고 있다
지친 몸을 흔들리는 허공에 묶고 꾸벅꾸벅 졸거나
휴대폰에 코를 박고 앉거나 서 있어도
참,좋구나 저녁이란 말
퇴근이란 말
각자의 아침을 매고 나온 사람들
빌딩 숲 어디쯤 짐을 부려놓고 오는 것일까
미로를 헤매고 먼 길에 절뚝이며
출구를 찾던 하루가 묵묵히 마스크 속에
입을 숨기고 말을 삼켜도
집이 다가올수록, 숨이 트인다
차창을 넘어온 금속성의 날카로운 바퀴소리도 귀에 걸치고
금세 겉잠이 드는 도시의 유목민들
따끈한 밥상과
어딘가에 발을 뻗고 잘 방 한 칸이 있기에
모두 연어 떼가 되어
오던 길 거슬러 가는 중이다
이내 멀어지거나 우르르 다가오는 낯선 얼굴들
저녁에 승차해서 모두 한 방향으로 달린다
역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어둠이 짙어진다
멀거나 가깝거나
모든 저녁은 기다림을 향해 저물어 간다
----애지 여름호에서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하록
인적이 드문 풀밭에 앉아
흐르는 별을 머금은 빛나는 물결을 보며
총총 수 놓듯 네가 절망을 말했을 때
위로도 동의도 하지 못하고
움켜쥐었던 것은 숨
한 줌 숨
침묵은 더 이상 다정하지 않고
포옹도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아
막다른 곳에 다다른 우리는
막다른 곳을 뚫고 넘어왔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일 때
나 벼랑의 바닥이 궁금해
우리 떨어지면 어딘가 닿기나 할지
나 절벽의 속살이 궁금해
우리 부딪히면 어딘가 금이나 갈지
떠도는 별을 잡아 수호성을 삼고
우리를 지키는 신이한 존재라도 빌어
그래도 너 서 있노라
서 있으라 우리
----애지 여름호에서
여름이 먼저
이경
가야지
꽃피기 전에 가야지
마음먹다가
꽃
다
피네
오려나
혹시
그대가 오려나
기다리다가
여름이 먼저
오네
---애지 여름호에서
홍성란
너
담을 넘어와도 죄 아니라는 꽃처럼
오려거든 오렴, 말 모르는 꽃처럼
흔적만 놓아두고 가는 바람처럼 물처럼
---애지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