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의 표징(출 4:6-8)
성경은 우리에게 참 지혜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에 대한 믿음’이다. 오늘 본문 8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을 믿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은 지팡이가 뱀이 되고 후에 다시 지팡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 표적의 표징은 모세의 손에 나병이 생기고 다시 손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있다. 그것은 “표적의 표징”이라는 말씀이다. “표적의 표징” 이라는 어구에서 ‘표징’이라는 단어의 뜻은 ‘그 음성, 그 소리’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영어 성경에서는 “표적의 표징”을 “그 표적의 소리(KJV, the voice of the sign)”라 번역했다. 따라서 표적의 표징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징조를 통해, 현상을 통해 하나님의 소리를 전달한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하나님의 원함을 전달하는 도구인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표적을 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듣기를 원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적을 보기 원한다. 표적을 보기 원한다는 의미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모세의 노래를 부르기 원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내가 위급한 상황에 직면해 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나를 위경에서 구원해 주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표적을 보았던 1세대는 모조리 광야에서 죽임을 당했다. 왜 그런가? 표적을 소리를 듣지 못하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표적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갈라지시는, 대속의 죽음을 통해 죽어야 할 자들이 죽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바다 건너편.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적 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중의 표적의 표징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
나중 표적의 표징은 두 가지 소리가 있다. 첫 번째는 죄인의 회복을 의미한다. 모세의 손을 생각해 보자. 모세의 손은 40년 전에 애굽 사람을 죽인 살인자의 손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히브리 사람들의 싸움을 말리며 구원자로 자처했던 손이다. 따라서 그 손을 가슴에 넣었을 때 나병이 생기는 것은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려 준다. 즉 신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신이 행한 의로움으로 자신을 구원에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사악하고 거짓되고 또한 부정한 나병환자와 같아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쫓겨난 자를 의미한다(민 5:2). 여기서 진영 밖으로 쫓겨난다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사망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 다시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될 것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7절).
그리고 두 번째 소리가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따라서 모세의 손이 정상이었다가 나병이 생겼다가 다시 정상의 손이 된 것은 이는 여호와 하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고(히4:15),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셨지만(고후5:21), 나병환자와 같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고후5:21) 부정한 자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의미한다(벧전 2:24). 주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신다. 왜 그럴까?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자리이기 때문인데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가셔서 대신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주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신다. 그리고 다시 통치자의 자리로 오르게 하셨다(행 2:34-36).
이렇듯 그 표적을 통한 하나님의 소리는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회복된다는 것을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출 4장과 마 8장은 시간적으로 많은 간격이 있지만 유사성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산 위에서의 그 나중 표적의 표징. 그리고 예수님께서 산 아래에서 처음 만난 사람. 그 사람은 앉은뱅이도, 소경도 아닌 나병환자. 그리고 그 사람을 치유하시고 제사장에게로 보내시는 사건의 내용.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산에서. 즉 하나님의 뜻이 있었는데, 그 뜻을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이 사건을 정리하자면, 나병환자를 치유하는 사건은 일반적인 치유사건이 아니다. 이 치유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행동이다. 마 11:5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의 메시야 됨을 의심하는 세례요한에게 당신의 메시야 됨을 알리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 35장을 인용한 말씀으로서 나병환자의 치유는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지만 포괄적으로 나병의 치유는 예수님의 메시야 됨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불완전하고 병든, 부정한 모든 것을 치유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갖게 하시는 분. 즉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마 8:4절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신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나병환자에 대한 정결예법과 제사장의 위임식의 절차가 매우 비슷하다.
레 14장과 레 8장을 보면 나병환자의 정결예법과 제사장 위임식을 볼 수 있다. 먼저 나병환자가 치유를 받았다면,
- 1단계 정결예식. 새 두 마리중 하나를 흐르는 물 위 질르릇 안에서 잡아 물과 피를 7번 뿌림(5-7). 깨끗한 옷 을 입음(8절).
- 2차 정결예식. 장막에서 속건제물의 피를 취하여 오른쪽 귀부리.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에 바름(14) 기름도 마찬가지(17-18).
제사장의 위임식 절차와 순서를 보면,
- 1차 . 레 8:6-13절에서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힘. 레 14장과 같다.
- 2차. 레 8:23-24절을 보자.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아들들의 오른쪽에 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바 름. 30절에서 기름과 피를 뿌려 거룩하게 함.
왜 나병환자의 정결예법과 제사장 위임식이 유사할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메시야 사역).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깨끗함을 받아 원래의 자리, 즉 제사장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은 진 밖에 있는 자들로서 하나님과 단절되어 사망의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고,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기 위해 성막 안 성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과 신분과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에 대해 히브리서는 아래와 같이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3절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새번역 성경).”
그리스도의 피와 물을 통해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자들은 얼마나 감겨할까? 그 사랑, 그 은혜, 그 자비하심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섬김의 삶을 살고자 하지 않을까? 유튜브에서 ‘꼬니(2번 파양된 애완견)’를 찾아 시청하면 조금이마나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