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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교회
시편 107편 23~32절 마가복음 4장 35~41절
한 문 덕 목사
[시편의 말씀과 인생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은 107편입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에 큰 축제가 열리면 제일 첫 행사로 여는 예배에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축제에 참석한 각 사람들이 제단 앞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각각 감사 제물을 드리며(22절),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광야 사막길을 걸어야 했던 상인들도 있고(4절),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사람들도 있고(10절), 자신의 실수로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17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여러 페니키아 항구로부터 지중해의 여러 섬과 해안지역을 다녔을 상인들의 고백입니다.
이 상인들의 절절한 삶의 체험이 오늘 성서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아무리 큰 배라 하더라도, 폭풍을 만난 파도의 물결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면,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집니다. 그럼 아무리 유능한 뱃사람이라 하더라도,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습니다.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립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지혜가 쓸모없게 됩니다.
저는 바닷사람이 아니라서 파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지만, 1989년도에 물의 무서움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장마로 한강의 수위가 높아졌고,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여 일산 쪽으로 내려오는 둑방이 터졌는데, 그 때 제가 살던 파주도 홍수로 인해 엄청난 농경지가 다 침수되고, 마을도 잠겼습니다. 그 때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고향교회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비 피해는 없는지, 도울 일이 없는지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온 사방이 물로 가득 차서 마치 노아의 홍수처럼 정말 무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순풍에 돛 단 듯 인생을 큰 격랑 없이 살아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면 정말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아버립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자신이 알던 그 모든 지식도 지혜도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 구해 주신다면, 주님께서 저 거센 풍랑을 잠재워 주신다면 그래서 그 위기를 넘겼다면, 그 감격과 은혜가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의 삶을 맡긴 사람들은 인생의 파도 속에서 꿋꿋하게 이겨 나갑니다. 어떤 면에서는 위기와 고난의 순간을 통하여 더 많은 깨달음도 얻고, 하나님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미처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그런 경험을 통해 더욱 성숙하고, 깊은 사람이 됩니다.
“키아누 리브스”라는 정말 잘생기고 멋진 미국의 영화배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의 페이스 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알지만 내 스토리는 모른다. 나는 3살 때 아버지가 눈 앞에서 떠났고,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니고, 난독증 때문에 고생했다. 고등학교 중퇴다. 23살 때 절친 리버 피닉스가 죽었고, 첫 딸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와이프는 18개월 후에 차사고로 죽었다. 이후 나는 아이를 갖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포기했다. 내 여동생은 치료는 됐지만 백혈병에 걸렸다. 이후 나는 내 수입의 70프로 이상을 병원에 기부한다. 나는 헐리웃 스타 중 집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보디가드도 없고 비싼 옷도 없다. 지금도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그러나 나는 비극의 순간에서조차 영롱한 사람들은 빛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인생에 무엇이 닥치든 우리는 극복할 수 있다.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키아누 리브스가 이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자신의 삶에서 겪은 고난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면에서 감당할 수 있고, 승화시킬 수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우리에게 약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어려움과 고난이 될 수도 있는 제안을 하십니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시점은 안식일 저녁이었습니다. 안식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쉬지도 않으시고, 회당에 들어가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고, 그에게 몰려든 많은 병자들을 또 고치시고, 산에 올라가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다시 바닷가에 나아가 큰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막 2장 23절~4장 33절) 그렇게 매우 바쁘고도 피곤한 하루를 보내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바다 저 쪽으로 건너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저 편으로 건너가자!]
“저 쪽”이라고 할 때 과연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건너가신 걸까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동쪽에는 데카폴리스라는 이방인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서쪽은 유대 땅이었지요. 그래서 어느 한쪽 편에서 건너가는 것이라면 유대 땅인 갈릴리에서 이방 땅인 데카폴리스로 가거나, 이방 땅인 데카폴리스에서 유대 땅인 갈릴리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 “저 쪽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 하시는데, 오늘 저 쪽으로 가는 길은 갈릴리에서 이방 땅 데카폴리스로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이 유대 회당과 유대 마을들, 그리고 산과 바다 근처의 유대 민중들에게 전해졌다면 이제는 저 이방 땅에도 전해져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저 쪽으로 건너가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의 제안에 힘이 솟고 기대가 넘쳤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걱정이 되고 불안이 들고 두려움이 몰려 왔을까요? 지난 주일 오후에 장기발전위원회가 모였습니다. 장이홍 장로님을 위원장으로, 김규룡 집사님을 총무로, 채경숙 집사님을 서기로 뽑았고, 2014년 만들었던 생명사랑교회 중장기 발전 계획을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다음 번 모임은 오월 마지막 주에 모일 것인데, 그 때는 우리가 지하를 탈출해서 지상으로 예배공간을 옮긴다면 어느 지역에, 어떤 규모로, 언제까지 할 것이며, 또 이에 따른 비용들은 어떻게 마련하면 좋을 지를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여러분은 기대가 되고 힘이 납니까? 아니면 걱정이 되고 불안합니까? 담임목사인 저를 불러 왔으니,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우리 전도도 하고, 교회 부흥을 위해 더 교회에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도 하십시다.”라고 제안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실 것 같습니까?
지금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이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 숭배를 자행하는 죄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 믿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구원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할까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다면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자신들의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합니다. 또한 불안과 걱정, 염려와 두려움도 몰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 땅인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을 때,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심지어 가족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도 제자들은 지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실패하는 씨앗도 있지만 결국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유대 땅에서도 힘들었는데, 과연 저 이방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을까? 아마 제자들의 마음 속은 무척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과감하게 제안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 쪽으로 건너가자”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일단은 배에 오릅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물설고 낯선 이방인의 땅으로 노를 저어가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일고의 계획도 없이, 일점의 준비도 없이, 이 밤이 다하도록 노를 저어 저 부정한 사람들의 땅으로 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두운 저녁이라는 시간의 상징은 어쩌면 제자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합니다. 이제 제자들은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이방 땅의 선교에 대한 의심의 먹구름을 가득 담고 노를 저어가는 제자들에게 결국 시험이 닥치고 맙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고 파도가 치고 물결이 일렁이며 배에 부딪히고 배 안은 물로 가득하게 됩니다. 바로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저 무시무시한 사탄의 세력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여 교회가 위기에 처한 것이지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다. 이 상황을. 지금 우리 생명사랑교회에도 이런 저런 고민들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를 불러 오긴 했지만 아직도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2014년 생명사랑교회 현황에 따르면 신도의 고령화에 따라 교세가 위축되고, 그래서 또 함께 교회를 이끌어가고, 활동할 수 있는 청장년층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간은 교회의 다양한 활동을 충분히 담보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사회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정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처한 재정적 한계와 교인수의 정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장로와 권사를 더 충원하고, 교회의 조직을 더 효율적으로 보강하고, 다양한 소모임을 통해 교육과 친교를 강화하면 나아질까요? 서로 다른 의견들은 어떻게 조율하며, 이전 생명교회와의 관계 속에서나 목회자, 또는 다른 교인으로 인한 상처들은 어떻게 치유해 나갈까요? 강권하기보다는 와 보고 싶은 교회로, 조급하게 교인 한 명 늘리기 보다는 잠재적인 교우의 저변을 확대하고, 예배 및 모임에 문호를 개방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또 특별히 청년들이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교회에 올 수 있도록 하고 싶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까지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잘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또 앞으로도 잘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또 우리 생명사랑교우들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꿈꾸는 교회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만약 혹시라도 지금 우리들의 형편에서 위기가 닥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제자들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컴컴한 어둠 속, 저 바다와 무시무시한 바람과 파도가 몰려 올 때, 이들은 스스로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제자들의 이러한 항변은 다소 무례한 느낌이 들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됩니다. 제자들이 저 편으로 건너가자고 했던 것도 아닙니다. 가자고 한 것은 선생인데, 이런 어려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고 있다니 말이 되는가!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보지 않는 이를 선생이라 부를 수 있나? 오만가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다소 실망한 것 같습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예수님의 이 한 마디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늘 따라다니며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지켜보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고, 기쁜 소식으로 행복해졌는지 보았으면서도, 또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실망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애쓰면서, 인내하고 기다리면 놀라운 성공이 오리라고, 모든 민족들을 품을 세상이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건만 제자들은 아직도 그런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예수님을 깨워라]
인생을 살다보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리스도인 한 명 한 명에게든 아니면 교회공동체에게든 위기가 찾아옵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갈 때도 위기이고, 더욱 열심히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려고 하다가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과감한 제안과 도전 즉 선교의 영역을 저 이방 땅으로 넓히는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수님은 또 제자들에게 서로 아쉬운 부분을 토로하고 신뢰보다는 약간의 불신의 그림자마저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을 확고히 믿었더라면, 그 능력에 힘입어 저 광풍 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더라면 굳이 예수님을 깨우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를 온갖 곤경에서 구출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그런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도 그 위기를 넘을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제자들이 해결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잘한 것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되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여, 호소를 하고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바다를 꾸짖어 저 사탄의 세력이 교회에 침입하는 것을 막아 주셨고, 그래서 무사히 저 이방 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아무 일을 하시지 않고 주무시고 계실 때에, “저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하면서, 예수의 제자로 충분히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혹시 목사가 없어도 이 생명사랑 신앙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며 유지하실 수 있겠습니까? 전도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의 믿음의 분량에 이르렀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직 그런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좀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잠든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그래서 더 기도하고, 더 열심을 냅시다. 예수님께 의지하면 어떤 곤궁함도 능히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케 하는 믿음을 지녀라]
예수님은 먼저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잠잠케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는 모습에 경탄하면서 “이분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 생명사랑교회 교인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원합니다. 예수님께 의지해서 그저 고난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라 저 거센 세상의 풍랑을 꾸짖고 바다를 잠잠케 하는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놀라며 “이들은 누구이기에 저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가는가? 이 사람들은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이렇게 바꾸는가?”라고 감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사명은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저 세상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고 설득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삼을 수 있도록 우리가 실력을 쌓아 나갑시다. 실력을 키우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모험과 도전에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폭풍의 현장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배우는 데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나라 가정에서 금붕어나 열대어를 어항에 넣어 키우듯이 일본인 가정에서 관상어로 키우는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빨간 무늬에 흰 반점이 있는 잉어과에 속하는 물고기이지요.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던 엔도 슈샤쿠라는 소설가는 자신의 수상록인 ‘회상’에서 이 코이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잉어가 사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사는 공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cm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cm까지 자란다.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도 자란다.”
이 말에 덧붙여서 엔도 슈샤쿠는 이렇게 말합니다.
“큰 꿈을 가진 사람은 훗날 큰 사람이 되고, 작은 꿈을 품으면 작은 사람이 된다. 명심하라, 꿈의 넓이가 사람의 넓이고 인생의 넓이이자 미래의 넓이다.”
여러분의 꿈의 크기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어디에서 행복을 찾습니까?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5가지 방법이 있답니다. 뭔지 아시나요? 첫째, 여행을 간다. 둘째, 근사한 곳에서 외식을 한다. 셋째, 가방을 사 준다. 넷째, 옷이나 보석을 사 준다. 다섯째, 돈을 준다. 그럼 남편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먹인다. 둘째, 재운다. 셋째, 가만히 내버려둔다.”입니다.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작은 행복이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이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훨씬 더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저 세상에 나아가 한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꾼다는 높은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불평등을 고치고, 전쟁을 막고,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과감히 나서서 저항하는 굳세고 당당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코이라는 잉어처럼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족의 행복, 나만의 행복, 우리교회만의 행복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서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말고도 다른 배들이 함께 예수님의 배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배들도 아마 폭풍과 파도의 위협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고 그래서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당연히 이 배들에 탄 사람도 평안을 되찾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활동과 우리의 행동,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더 큰 꿈, 즉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꿈꿀 때만 우리는 저 거센 풍랑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거센 풍랑 속에서도 비바람 속에서도 편하게 고물을 베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이 굳건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제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사랑 가족들의 믿음이 모두 우리 예수님의 그러한 장성한 믿음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물으실 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생명사랑교인들 되시길 빌겠습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의 나아갈 길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당신이 지시하신 땅으로 과감하게 나아가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제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 귓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저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갖게 하여 주소서. 돈이라는 우상을 숭배하여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더 큰 믿음을 갖게 하소서. 이제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서로 한 마음으로 과감하게 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며,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저 거센 풍랑을 잠재워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거친 세상도 이겨내고, 온갖 방해물도 뛰어 넘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삶 터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내 안에 잠들어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일,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었던 배말고 다른 배들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
새롭게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