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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글은
2014년 11월 1일 포스팅하였습니다.
성경의 고수를 찾아서
오랜 세월 동안 머나 먼 여행을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경을 애독하면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하루 아홉 번의 성경책을 펼쳐 읽으면서
말씀으로 몸에 밴 어린 시절을 참으로 순전한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때부터 새벽기도를 다녔고
오직 말씀과 기도로 유년과 청소년 시절 순전한 믿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씀과 기도로 무장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신학을 하였지만
제 나이 스무 일곱 해에 미래적 삶의 절망이 찾아왔고
골든 타임의 위기를 두문불출하고 오직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이 해를 넘겼고.....
또 다음 해를 넘겼고 그 다음 해를 또 넘겼습니다.
종일 주의 말씀믈 묵상한다는 시편의 기자의 고백은 나의 신앙이 되었고
성경의 깊이와 넓이를 체험하는 인고의 세월을 송현동 자취방에서 보냈습니다.
그 후 총신을 다니면서
하루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학문의 숲을 산책하며
성경과 신학의 유기체적 관계를 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덧 신학의 쾌도난마의 경지......
성경의 고수, 그 노화순청과 천의무봉의 경지를 가진 성경과 신학의 달인과 고수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책을 읽고 인테넷 동영상 설교를 들으면서
책에 대한 비평과 설교에 대한 성경적인 분석이 저절로 되었습니다.
구속사적 알레고리 영해 설교....
알미니안 설교.....
성공과 번영을 위한 기복과 무속 설교....
인본주의적 실존 설교....등등
안타깝게도 그 많은 설교 가운데
성경 저자의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설교는 거의 들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개혁주의 옷을 입고도.....
인본주의 가치의 설교를 하였고 성경의 복음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구속사의 옷은 양의 탈이 되었고
복음적인 설교로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진리의 복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구약 설교는 언약적 복음의 제로에 가까운 설교를 하였고
제대로된 신약의 복음서 설교는 거의 전무하였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는 제대로 된 설교.....
또한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설교자 수 만큼 다양한 내가복음을 제조하여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으로 쏟아내었습니다.
정말 본문으로 성경 저자가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
무척 궁금하기만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는
성경을 우물안 개구리식의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1학년 1반의 수준으로
교회를 성장시켜 교조주의 체제 수호를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설교의 적폐는
많은 이단과 사이비 유사 기독교와 보수 교단의 타락을 낳았습니다.
마치 보습과 괭이와 삽과 같은 농기구로
블레셋의 철병거를 상대하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블레셋의 철병거와 같은 이단의 돌풍과 안티 기독교의 거친 대항을
농삿일의 보습으로 막아내는 모습은 처연하기조차 합니다.
이단을 대항할 아무런 힘이 없는 무기력한 모습.....
이단자들이 공개 토론 하자면 모두들 겁에 질리고 주눅들어 쥐구멍을 찾았습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구분되지 않는 혼동의 시대......
적그리스도의 거짓 영의 역사는 광명한 천사로 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상이 흐미하던 사사시대의 혼동이
오늘날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데 언제까지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고착화된 주일 성수와 십일조로
교조적 체제주의를 유지 보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계시된 복음과 믿음의 진보로 성경의 바른 이해에 역동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끝없이 이단의 밥이 되고 개티들의 조롱과 농락을 당할 것입니다.
세상은 신바벨탑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학의 문명과 문화의 혁명을 이루었고
종교 다원주는 개혁주의 복음 신앙을 백척간두의 풍전 등화가 되게 하였습니다.
더 더욱 한국의 교회는 위로부터 내적 부패로
구조적 붕괴 위기에 놓였습니다.
기독교란 이름을 내건 단체들......
대부분 천주교와 연합하였고, 또한 종교다원주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과 밀접한 기독교 이름의 단체들......
한국 교회에 깊숙히 파고들어 어느덧 그 본질을 이루었습니다.
가만히 들어와서....
양떼를 농락하고 이리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개혁과 갱신의 주체가 인본주의 가치여서
성경적인 개혁의 슬로건을 가진 기독교 단체는 거의 없습니다.
실로 두렵고 무서운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세의 로만 카톨릭이 교인들에게 성경을 공개하지 않았듯....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는 이정표를 잃어 버렸습니다.
오합지졸의 설교로 깨닫는 성경 이해는
어둠의 빛을 잃어 버리고 더욱 미로에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성경적 복음을 떠난 설교의 한계는
QT의 내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아전인수식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한국 교회 시스템은
오류로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조하는 불량 공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를 듣고 기독교 신앙의 종교적 열정으로 넘치는 교인은
소위 말하는 이단의 추종 세력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이단자들을 대하면 철저하게 남이라는 생각이 들듯......
기성 교회 성도들을 만나도 남이라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성경의 바른 이해로 복음의 정수를 깨우친 바로 그 한 사람을 찾아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탄성을 기쁨으로 느끼고 싶습니다.
이단은 샘의 물처럼 악을 쏟아내듯 우후죽순 처럼 일어나고......
이단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기성 교단은 기복과 무속 신앙으로 타락하였습니다.
김성주 목사의 성경에 대한 가장 바른 이해라는 언약과 구속사적 관점의 시각은
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편협한 관점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보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이광호 목사는
주일 성수와 십일조라는 교조주의적 체제수호의 종교적 철옹성으로 제명 처분을 받았습니다.
성경의 중심을 십자가 신학으로 집대성한 이근호 목사는
교조적 이데올로기인 주일성수와 십일조의 걸림돌에 면직 되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기로 유명한 에스라 하우스의 노우호 목사는
천년왕국의 초막절이라는 율법적 이해에 갇혀 율법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보수 신학의 온상인 고신과 합동 교단에서
성경 연구의 끝을 보여 주는 학자의 혀를 가진 목사에 대한 제명은 신학이 없는 교단의 정체성을
스스로 증명하였습니다.
보수의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허울뿐인 교단의 위상은
진부한 교조주의 체제를 유지 보수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정치 행태였습니다.
복음의 진보와 믿음의 진보를 개혁주의 정신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스콜라 철학의 도그마를 고집하는 교조주의는 변화의 시대를 리더하는 주역이 될 수 없습니다.
신학을 학술로 연구하는 자세를 잃어 버리고
신학을 정치로 대응하는 모양새는 로만 카톨릭의 종교 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를 살면서 중세의 고질을 답습하는 기성 교단의 진부한 행태는
성경의 유기체적 생명의 역동성을 잃어버린 앙상한 기둥 하나 남은 교조주의 고대의 유물일 뿐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살아 역사하는 생명의 역동적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의 살아 역사하는 부활 신앙입니다.
약속과 성취의 복음적인 언약 신앙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유기체적인 생명의 관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완성된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속 사역은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과 다윗 언약과 이사야의 영원한 언약과 예레미야의 새언약과
에스겔의 화평 언약과 레위의 평화 언약을 모두 완성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아브라함 언약의 실상이었지만
솔로몬 이후 분단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는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였습니다.
포로 귀환 후 스룹바벨 성전 중심으로 레위인의 시대를 맞이 하였지만
레위인과 맺은 평화의 언약을 제사장들이 파기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말라기서의 십일조는 마지막 남은 레위인과 평화의 언약을 맺은 것을 파기한 심판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버리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판결문의 조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이후 스룹바벨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서 유기되었고 헬라에게 짓밟혔으며
로마 시대 헤롯의 통치적 목적으로 성전을 증축하였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 오순절 강림으로 신약의 교회가 탄생하였고
헤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바리새인의 십일조와 예루살렘 교회의 연보는 대조를이루었습니다.
"사도적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구약의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 성경이 그 확실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회향과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를 하였던 바리새인의 십일조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는 예수님의 책망과 함께 탐욕 가득한 외식으로
지옥의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십일조의 문제는 "갑"이 아니라 "을"입니다.
물질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십일조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이해는
성경중심의 개혁주의적 언약 신앙의 근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로서의 초대 교회는
말라기서의 십일조 정신을 계승하여 연보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득 담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본질적으로 이루었습니다.
말라기 시대 하나님의 성전에 바쳐진 십일조와 봉헌물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룰 공의로운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러운 제물을 드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였고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구제할 공의로운 제물은 제사장과 이스라엘이 도적하여
저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스룹바벨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 받지 않으시고
헬라에게 짓밟히도록 유기하고 방치하였습니다.
해롯이 정치적 목적으로 스룹바벨 성전을 증축하였지만
솔로몬 성전에 가득하였던 하나님의 영광은 완전히 떠났습니다.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는 말라기서의 예언을 따라서
영원히 깨끗한 제물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화목 제물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하 각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영광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연보는 공의로운 제물의 십일조와 봉헌물을 계승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담아 율법의 대강령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준수하지 않았던 헤롯 성전의 십일조는 중세시대.....
봉건 영주들이 농노들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습니다.
17,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교회는 종교개혁의 후속으로 십일조를 중단하였고
19세기 미국에서는 당시 이단으로로 정죄되었던 순복음 교파에서 축복의 씨앗으로 십일조가 강조되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이단을 비롯한 미국의 근본주의가 전례되었고....
율법적 주일 성수와 십일조는 한국 교회의 정체성으로 고착화되었습니다.
옛 언약의 성취로서 새 언약의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의 탄생으로 바라보는 복음적인 관점보다
구약과 신약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일점일획도 버리지 말고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는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한국형 신앙의 표상으로 삼았습니다.
십일조와 주일 성수로 면직과 제명, 그리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한국의 교회가 유일합니다.
한국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보다
율법적 십일조와 율법적 주일 성수를 더 강조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하고도 교회와 교단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
오히려 신사참배로 투옥되고 순교당한 목사를 파면하는 교회가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의 실상입니다.
신사참배로 1939년 면직되었던 주기철 목사는
2015년에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이라는 합동측에서 복권되었습니다.
바리새적 안식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저 정죄하였고.....
바리새적 십일조는 화있진저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는 예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였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갈등은
바리새적 안식일 개념과 바리새적 십일조 개념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의 가르침과
극단적으로 대립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바리새적 안식일 개념을 주일 성수로 계승하였고.....
바리새적 십일조 개념을 복의 근원으로 또한 계승하여
교조주의 종교적 보수 체제를 철옹성으로 구축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대립과 갈등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복음적 이해와 율법주의가 극단적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율법의 유기체적 생명의 관계를 요철의 조화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합한 말씀으로 정립히여 창과 방패의 대립과 갈등의 구조를 한국 교회는 극단적으로 가졌습니다.
한국 교회의 교조주의는 성경의 복음적인 시선과 관점을 무시하고
율법주의에 입각하여 안식일적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도그마로 고집하여 보수적 체제를 옹립하고 있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도그마를 고집하는 율법주의 고착화라는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는
복음의 진보와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개혁주의 신앙을 백척간두 풍전등화의 위기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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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일마다 쏟아내는 기복과 무속 신앙의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설교는
할렐루야 아멘으로 받아 들여 시온의 대로가 되고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의 날선 검은
적폐의 궤적을 만났습니다.
올바른 성경 이해를 하려고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단으로 매도하는 한국 교회의 풍토는
신탁 받은 선지자를 핍박하였던 영적 암흑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3년 동안 눈물로 복음을 가르쳤던 바울이 떠난 에베소 교회는
사나운 이리가 와서 교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의 경고를 잃어 버리고....
성경적 개혁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한국 교회는 교조주의 적폐와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침식당하고 말 것입니다.
종교 개혁의 선봉에 섰던 루터와 칼뱅이 로만 카톨릭에 의해 생존권이 박탈되었듯
성경의 바른 이해를 위한 성경적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면 제명하고 면직하고 이단으로 몰아 버립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왜정 시대 신사참배 허용 이후......
성경의 기독교가 아닌 무속적인 유사 기독교로 기형 성장을 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교단과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았지만
신사 참배를 반대한 교회와 목사는 오히려 핍박을 당하였고 제명되고 면직 되었으며
고난과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잃어 버린 한국 교회는
세상의 악한 권세에 기생하여 기형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역대 정권의 악행을 조찬 기도회로 축복하며
더 이상 고난이 없는 신앙으로 경제 성장의 종교적 촉매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 가에는 관심이 없고.....
아전인수의 복을 종교적 적폐의 궤적으로 하늘 높이 쌓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복을
십자가 고난의 신앙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현세적 복을 구하는 갓바위와 바알 신앙을 추구하였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성경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아전인수식의 이해로
현세적 인본주의 실존 신앙으로 도배하였습니다.
성경을 성경 저자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달인과 고수는
천외천에서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천외천의 성경 고수와 달인은 종교적 적폐의 궤적이 남긴 시대의 악을 탄식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묵묵히 복음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경 원어에 박학다식한 사람은
성경을 글로 읽지 않고 글자로 읽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은
율법과 복음의 유기체적 생명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주의에 빠져듭니다.
신학으로 성경을 이해는 사람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근거를 제공하는 고전일뿐입니다.
QT식의 설교는
성경의 오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조하는 불량 공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데도 여러분은
정말 안녕들 하십니까?
예루살렘 거리에서 공의와 정직을 행하는 바로 그 한 사람을 찾는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지는 끝없는 성경의 모험으로
성경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가진 바로 그 한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