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광동 수군제독이었던
오장경(吳長慶)에게 북양함대 군함 4척과 육군 3천 명을 주어 보내고 그들과 함께 40명의 군납
상인들이 따라 왔다.
이 상인들이 조선에 정착하게 되고 한국 화교의 시작이 된다. 한국 화교들은 현재도 오장경을
오무장(吳武壯)이라고 하며 그들의 시조로 섬기고 있다.
조선에 정착한 이 상인들은 비단 등 포목 원단을 중국에서 수입 판매해서 돈을 벌었다.
비단장사 왕서방이 이 사람들이다.
인천 제물포에서 뱃길로 가까운 게 중국 산동지역이라 한국 화교는 산동성 사람들이 주류이다.
그 당시 경성의 임금이 중국 산동의 3배 수준으로 높은 상황이었다.
1910년에 조선의 화교가 만 명 정도었는데 10년만에 2만 명이 되고, 1940년이 되자 10만 명
가까이 늘어나게 된다.
산동에서 들어온 중국인들은 양복점, 이발소, 음식점 등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중일전쟁(1937~1945)이 일어나자 일본은 전쟁 상대국인 중국 국적의 화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원단에 100% 관세를 붙였고, 포목 배급제를 시행한 후, 화교들에게는
배급을 끊어버렸다.
중국인들이 하는 포목점과 양복점들이 일시에 망해버린다. 그 빈자리에 제일모직과 선경 등
국내 기업이 차지해서 현재의 삼성과 SK의 모태가 된다.
일본의 다음 타깃은 중국 이발소였음. 중국인이 하는 이발소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하는 곳보다
가격이 싸면서도 귀를 후벼주고 간단한 안마 서비스까지 추가로 해 주었다.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다.
이번에는 제도를 바꾼다. 이발을 보건위생법으로 정의하고, 보건위생과 관련된 이발사 시험에
합격을 해야 이발소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발사 시험문제였다. 이발사 시험문제를 한글과 일본어로만 내버린다.
한글이나 일본어를 모르는 대부분 중국인 이발사들은 이발사 자격을 얻지 못해 현업에서
퇴출되게 되었다.
포목점, 양복점, 이발소가 정리되자, 중국인들이 하는 장사는 청요리 집이라고 부르던
중국음식점 정도만 남게되고, 해방이 됨.
그 당시 명동의 중국집 아서원은 자유부인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었을 정도로 유명했고,
조선에서 가장 큰 식당으로 번성을 하였다.
1961년,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안을 발표한다. 이 법은 외국인이 50평 이상의
사업장, 200평 이상의 주택 소유를 금지하는 법안이다. 이 법이 시행되자 아서원 같은 대형
중국음식점등은 더 이상 외국인인 중국인 소유가 될 수 없게 된다.
아서원은 롯데에 팔려 소공동 롯데호텔이 되었고, 다른 중국인 보유 부동산들도 혈값에
한국인들에게 팔려나간다. 외국인 토지법으로 중국인에게는 50평 이하의 소규모 중국집
정도밖에 장사 수단이 남지 않게되어, 한국에는 제대로 된 화교 자본이 커나갈 여지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마지막 하나 남아있는게 있었다. 화교들이 그때까지 벌어서 모아놓은 돈과 외국인 토지법으로
더 이상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자 보유 부동산을 매각한 돈들 이었다. 화교들은 부동산등에 돈을
묻어놓지 못하니 사채로 돈놀이를 많이 하게되었다.
1972년 8월 2일 밤 11시 40분. 통행금지20분 전, 대통령 특별담화로 긴급명령 15호가
발표된다.
사채업체에 돈을 빌린 기업들은 상환하는 것을 중단하고, 사채업체들은 일주일 이내 누구한테
얼마를 빌려줬는지 신고하라. 사채업체가 돈을 받으려면, 그돈이 어디에서 나온 돈인지 출처를
밝혀라. 사채업체가 신고 안 한 것은 안 갚아도 된다. 사채업체가 신고한 금액은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으로 공금리 이자만 내고 갚아도 된다.
명동 사채업자들의 가장 큰 자금줄이었던 화교들은 큰 손해를 보게된다.
마지막 남은 화교들의 수입원은 중국집이었다.
아서원같이 큰 중국집들은 외국인 토지법으로 한국인에게 매각이 되었지만, 50평 이내의
중국집들은 남아서 성업하고 있었음.
시청근처 소공동에 8천 명이 넘는 화교들이 거주하는 차이나타운이 있었고, 명동에는
화교소학교와 화교중고등학교가 현재 중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화교중고등학교는 1969년
연희동으로 이전한다.
1970년, 소공동과 서소문 일대 재개발사업이 진행된다. 차이나타운이 타켓이었고, 감정가 평당
30만 원 정도의 땅을 현금으로 평당 107만원에 사들인 것은 현재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아버지 김종희였음. 김종희 회장은 그 자리에 한화금융프라자, 프라자호텔 등을 올리며 소공동•
북창동 일대를 한화그룹 빌딩타운으로 만들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구리개라하였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고가네마치(黃金町)라 하였다.
1946년 을지문덕 장군의 성씨인 을지를 따다가 을지로로 개명하였다. 구한말부터 화교들이
밀집해 차이나타운 상권을 형성했던 곳이라, 중국인의 기세를 억누르기 위해 중국을 크게
무찔렀던 을지문덕 장군에서 따와 도로명을 바꾼 것이다.
역시 일본인 상권이 형성됐던 혼마찌(本町)를 해방 이후 일본인의 기세를 억누르기 위해 이순신
장군에서 따와 도로명을 충무로로 바꾼 케이스와 같다.
소공동•명동 차이나타운에 살던 대부분은 이미 이전한 화교중고등학교가 있는 연희동과 연남동
(연희동의 남쪽 의미)으로 옮기게 된다.
자연스레 이곳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중국집들이 많고 화교들이 많이 거주하는 하게 된다.
경의선숲길이 생기면서 더욱 활성화 되었다. 이곳 화교는 약 3,500명이다.
연희동에는 이연복의 목란 • 이화원 등 고급 중식당이 있으나 연남동 중식당들은 화교를
중심으로 집에서 먹는 가정식으로 운영하며 비교적 저렴하고 중국 음식답다.
- 소해(素海) 박영진 사장이 보내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