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山에 눈 노긴 바람 / 우탁
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잠시 동안 빌려다가 불리고자 머리 위에
귀 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늙음은 시인의 오랜 주제였다. 늙고 병든다는 것은 인생에서 당연한 귀결리며,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지만, 늙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현대 사회는 놀라운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더 이상 노년의 상징을 방치하지 않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는다.'고 하고, '언제나 마음은 청춘'이라지만, 그러나 한해 한해가 날수로 늘어가는 흰머리는 어느새 새치에서 백발로 명칭이 변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니 어디 마음대로 될 일인가.
시적 화자도 자신의 흰머리에 실망하기는 머찮가지다. 늙어가는 것이 한탄스러운 모양이다. 귀 밑에 늘어가는 흰머리를 보며 저 따뜻한 봄바람으로 녹여 보겠다는 심상이 새롭다. 봄이 주는 따스함, 그리고 봄바람의 생명력은 어느새 눈과 서리로 상징되는 백발을 녹이기에 충분하다. 하얗다는 시각적 이미지를 노년으로 치환하는 것은 너무 흔한 비유인지도 모르겠지만, 요즈음 같이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를 억지로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것보다, 저 따뜻한 봄바람으로 녹여내고 싶다는 상상력은 훨씬 자연스럽다. 흰머리를 염색한다고 어디 그 흰머리가 사라지겠는가. 따뜻한 봄바람, 그리고 지나가버린 옛 청춘의 활기로 흰머리를 돌려놓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현대 과학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늙음의 문제를 시인은 자연의 힘을 빌려 해결해 보려 한다.
'탄로가'는 말 그대로 늙음을 한탄하는 노래이다. 하지만 우탁의 시조는 단순한 탄로가의 범주에 묶어두기에는 작품이 주는 의미 녹록지 않다. 말 그대로 늙음을 한탄하기 보다는 오히려 늙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귀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는 소망은 어찌할 수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현대인들처럼 억지로 그 서리를 검게 물들이기보다는 담담하게 자신의 노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봄바람이 서리를 녹일 수 있어도, 자신의 흰머리가 다시 검어지지는 못할 것은 화자는 잘 알고 있다. 늙음을 한탄하기 보다는, 그냥 담담히 스스로에게 다가오는 노년에 젊은 시절을 잠깐 아쉬워하고 있을 뿐이다.
[우탁 禹倬 1263~1342]
고려시대 문인으로 본관은 단양이다 . 시호 문희, 백운, 단암을 썼다. 역동선생이라고도 불렀다.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이 되어 민심을 현혹한 요신의 사당을 철폐한 것으로 유면하다 강직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려말 정주학 서적을 해득하여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으며, 성리학의 도입에 있어 선구적인 학자이다.
출처: 한국시조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