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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을 보여주신 하나님
33: 12-23
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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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16일 이후로 출애굽기 강해를 못해서 외상값을 갚지 못한 빚진 마음이었습니다. 기회 닿는 대로 출애굽기 강해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어디까지 출애굽기를 강해했는가 하면, 모세가 시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만나 율법이 새겨진 돌 판을 받아가지고 내려와 보니 이스라엘은 그새를 못 참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아론을 압박하며 하는 말이, 모세는 죽었고 하나님도 떠났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졸라서 아론이 금 조각을 모아 송아지를 만들어 주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선포하자 온 백성이 그 송아지를 섬기며 뛰놀고 있었습니다. 40일 만에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온 모세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금송아지를 태워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고는 하나님의 법을 받을 자격이 없는 백성들 앞에서 그 돌 판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 중 3천명을 죽이셨으며, 이제는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행진에 큰 위기가 닥쳐온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일에 대하여 완전히 자신감을 상실했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적의 지팡이와 율법의 말씀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 40일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을 잃었습니다.
지도자가 자신감을 잃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은혜를 체험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모세에게 다시 힘을 주시는 내용이 본문입니다.
여자가 시집가면 모든 것이 낯설고 손에 익지 않습니다. 친정에서 하던 대로 하면 모든 것이 시댁 식구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집 식구들은 며느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너는 그것도 못하느냐고 핀잔합니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지혜로운 남편이라면 아내를 데리고 여행이라도 가거나 외식이라도 하면서 “당신 힘들지? 내가 다 알아, 조금만 참아봐, 당신이 훌륭한 것을 다 알아 줄 거야”라고 위로해주면 아내는 금세 마음이 풀려서 남편의 식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감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힘들고 어려울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위로와 격려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들은 힘들 때 마다 기도하게 되고,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자기 힘든 것을 극복할 뿐 아니라 다른 힘든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고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알아주신다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것을 체험하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더 큰 은혜
어떤 부부가 심히 다투면서 할 말 하지 못할 말을 다 하고, 헤어지려고 하다가 겨우 수습이 되었다고 합시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습이 된 것이 보이지만, 이 부부 사이에는 메우기 어려운 골이 파였고 서로에 대해서 혐오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만 봉합이 된 것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다시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게 되려면 뭔가 새로운 전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 있었던 일을 덮을 수 있는 새롭고 행복한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벌을 주셨고,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다시 돌아오고, 모세와 친구처럼 다시 대면하셨으니 다 된 것 같은데, 모세는 새로운 은혜를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금송아지 사건으로 깨달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데에는 율법이나 기적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기적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율법 이상의 은혜를 달라고 애원합니다.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데에는 기적이나 교육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내려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비상하게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신 일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죠지 휫필드나 죠나단 에드워드가 설교할 때 사람들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픈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양심이 괴로워서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였는데, 그것은 휫필드나 에드워드의 능력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침체되어 있습니까? 큰 고난과 낙심에 빠져 있습니까? 그러면 비상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한번 실패했다가 다시 바른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원합니까? 더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그동안의 공백과 나쁜 상처를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예전의 신앙으로 회복되는 것은 회복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덕스럽기 때문에 다시 악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전보다 갑절의 은혜를 주시고 예전보다 갑절의 열정을 주셔야 그동안의 모든 불순종을 이기고 남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큰 은혜를 달라고 요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요구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만민 중에서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15-16)
모세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과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3)
대신 ‘사자를 보내어 가나안땅을 주시겠다.’(2)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사자’라고 할 때 정관사가 있는 ‘그 사자’는 제 2위 하나님인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정관사가 없는 ‘사자’는 그냥 천사이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내 사자’라고 칭하는 분을 보내어 이스라엘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난 후에는 ‘내 사자’가 아니라 ‘사자’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내 사자’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신 분이며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의 군인들과 싸우시고 항상 모세와 대화를 나누시며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자인데, 바로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내 사자’가 가는 것과 ‘사자’가 가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내 사자’가 함께 가시면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며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누립니다. 그러나 다른 천사가 가게 되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나안으로 갈 때 내가 함께 가지 않고 사자를 보내어 너와 같이 가주겠다는 말씀은 그리스도 없는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주지 못했다고 할 테니까 가나안땅은 차지하게 해주겠지만, 구원과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는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이 없는 껍데기나 차지하고 살다가 죽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본질은 주지 않고 부수적인 것만 주겠다는 아주 심각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대신에 병이나 낫고 돈이나 버는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천국 없이 땅에서나 잘 사는 것, 사죄와 영생 없이 병이나 낫고 유명해지는 것이나 누리라는 말씀이나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으로 만족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죄 사함과 주님과 동행하는 영생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돈이나 명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은 마치 조난당한 사람에게 굶어죽지 않도록 제공된 비상식량 같은 것입니다. 조난당한 사람이 비상식량을 확보했다고 해서 완전히 구조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좀 더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보탬이 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조대가 와서 그들을 그 위험한 곳에서 구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복은 비상식량과 같은 돈과 권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내구주가 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요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리스도 보다는 눈에 보이는 돈이나 건강이나 명예만을 달라고 하게 됩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듣고 겁이 더럭 나서 “그것은 안 됩니다. 제발 ‘그 사자’를 보내주세요. 그리스도를 우리와 동행시켜 주세요.” 라고 간청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15) 모세는 만일 우리에게 그 사자를 주지 않으시려면 가나안도 싫다고 합니다. 모세의 기도는 가나안을 포기할지라도 그 사자는 포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은 다 누린다 해도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껍데기일 뿐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의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껍데기 신앙을 붙잡고 그것이 본질인줄 알고 그것으로 만족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과 껍질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다른 것은 주시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동행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14)
하나님께서 함께 가주시지 않고 사자만 동행시키실 바에는 차라리 우리를 여기서 그냥 죽게 해달라고 떼를 쓰며 간구하자, 하나님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가나안을 다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느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름으로 너를 안다.’ 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이지요? 내가 이명박 당선자를 잘 안다고 말한다면, 그분이 당선자라는 것을 안다는 말이 아니라 그분과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름으로 안다고 하시는 말씀은 특별한 개인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고 개인적으로 간구하여 응답받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분께서 내게 특별한 지시를 하셨고, 내가 그분의 분부를 받들어 순종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개인적으로도 알아주시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에 참석도 해야하지만 혼자서도 예배드려 보세요. 함께 하는 기도회에도 참석하지만 혼자서도 기도해보세요. 개인적인 약속도 드리고, 개인적인 헌신도 해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알아주시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당돌한 요청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가주신다고 대답해 주셨음에도 간구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자기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여 달라고 당돌한 요청을 합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대접을 받은 사람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고, 하나님이 친구처럼 그와 대면하여 대화하셨으며, 율법을 기록해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에는 한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한계에 부딪힌 줄 알았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한계에 부딪힐 때 마다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에 보내실 때 두 개의 표적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이고, 하나는 손을 품안에 넣었다 내면 문둥병이 들었다 낫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두 가지 기적을 가지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써도 바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해방은 커녕 더 고생스럽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체험한 것이 있습니다. 모세의 능력은 바닥났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일강물이 피가 되고, 무수한 개구리와 파리 떼가 온 나라를 뒤덮고, 우박과 흑암이 그들을 놀라게 하는 등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홍해에 가로막혀 있을 때에는 바다 가운데로 길을 만들어 주셨고, 광야로 들어선 뒤에는 아침마다 음식을 주셨고, 목말라 죽어갈 때에는 반석 밑에 엄청난 저수지를 열어주셨습니다. 모세가 거기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끝이 하나님의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량이 없어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낙심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이때에 주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때에 하나님만이 아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 은혜를 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선한 형상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 천사들의 영광스럽고 위대한 모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국군의 날 행사 때 여러 부대가 가장 최정예 무기들을 앞세우고 열병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천사들이 모세 앞으로 하나씩 지나가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행렬이 계속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됩니다. “나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는 선포였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구원과 축복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억지로 구원하셔야 할 의무도 없고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의인도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고 싶으면 은혜를 주고, 버릴 자는 버리시는 주권자라는 선언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은 꼭 구원하셔야 합니다.” 라거나, “이 사람은 구원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상황을 보여주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무참히 짓밟고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써주신 율법의 돌 판들이 깨져서 땅에 나 딩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기력해 보이고 하나님이 종인 모세도 무시를 당합니다. 바로 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을 가지고 당신 마음대로 세상과 사람을 주관하고 계시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섬겨주면 영광스러워지고 사람들이 버리면 초라하게 되는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니라, 인간의 생사화복과 구원을 당신 마음대로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려는 배려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랑하셔서 이번에는 당신의 얼굴까지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얼굴을 보면 죽게 되므로 얼굴은 보여주실 수 없어서 대신 이렇게 하셨습니다.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갈 때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21-23)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직접 목격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직접 그 영광의 광채를 다 보게 되면 그가 죽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바위 사이에 두고 손으로 덮어주셨다가 지나가신 뒤에 등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에게도 얼굴이 있고 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같은 몸을 가지시지 않았고, 따라서 등과 얼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란 하나님의 영광의 가장 빛난 부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등이란 영광의 주변부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양을 볼 때 중심부는 너무 밝아서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고 태양의 주변부만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가장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너무나 큰 은혜였습니다. 그 일을 겪은 뒤로는 모세의 얼굴에도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그의 배경이 되어 주셨고, 모세는 다시 용기가 충만하여 백성을 이끌기 시작하였습니다.(34:33) 고전 12:31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그때마다 부어주시는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여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용기와 믿음과 능력이 전보다 더 강하게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아 전해준 사역자입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는 아니었습니다. 영광의 본체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실 복음 안에 있습니다. 모세가 전해준 율법에도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는 배려와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은 깨달을 수 있지만, 자기의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공로를 믿어 죄를 용서받게 하고, 공로 없어도 믿고 시인하여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가장 빛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개인적으로 알아주시는 사이가 되도록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확립합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좌절하고 있을 때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모세처럼 간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 은혜 위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여 받아 누리며, 새 힘을 얻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