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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의
로마서 3장 21-31절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심신산골길을 통해서 전라도에서 보름을 걸려서 갔습니다. 그런 다음에 새로운 ‘신작로(新作路)’라는 길이 생겼습니다. 한양까지 2-3일 만에 갈 수 있도록 생활이 정말 많이 편해졌습니다. 그러나 점점 다리가 놓아지고 새로운 길이 뚫렸습니다. 이제는 서울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과거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길에 대해 해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아직까지도 옛날 길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바울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창조주와 심판자이신 한 분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 모두를 의롭게 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움도 나타내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다시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실함이 가지는 결정적인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21-22)
멸망 앞에 있는 인류에게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어떤 작은 희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21-22절에서 요약합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1-26)
바울의 고발은 강렬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 아래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1:18-3:20).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단정합니다. 모든 인류를 자연 상태로 두면 아무런 소망이 없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해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21-22)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나) 이제’(21)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시작합니다. 1:18-3:20의 긴 단락을 할애하여,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논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위한 구원을 자기고 오셨습니다. ‘이제’, ‘율법과 상관없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의 의로움’은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약속을 끝까지 이행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언약적 사랑과 신실하심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의롭다’는 개념은 어떤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행동이나 상태를 포함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신실함을 더하며 정상적인 관계 속에 머물러 있음을 표현하는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들을 향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움은 그들이 먼저 파괴한 언약적인 관계를 회복하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선지자들과 더불어(12) 율법도 복음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로움이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났다는 것은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참조 10:4). 이 단락의 31절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말합니다. 물론 31절의 율법은 구속사 전체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재해석된 율법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 하나님의 의로움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21절에 이어 22절에서도 재차 언급하며, 즉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한정적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실패했지만, 유일하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인 예수는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뢰와 신실함 곧 ‘피스티스’를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예수의 믿음/신실함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과 의로우심이 드러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로움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미칩니다(22).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성취하시고, 열방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언약적 믿음/신실함’이 먼저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22에서나 갈라디서 2:16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통해 의롭다함 받는 것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그 상호관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을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번역 때의 장점은, 그것의 결과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우리의 의로움의 근거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두게 합니다.
⑵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23-26)
‘하나님의 의’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심, 죽으심 그리고 부활 승하심으로, 즉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서 들어났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① 사람의 입장에서 설명(23-24)
바울은 다시 죄의 노예 되어 있는 인간의 현실과 그것으로부터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다룹니다. 바울은 1세기 사람들이 노예시장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속량이라는 상업용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예비하신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23). 그리스도께서 노예인 우리의 몸값을 자신의 죽음으로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다시 백성의 지위를 회복하였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로 붙잡혀 있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그 몸값을 지불하셨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24)입니다.
② 하나님의 입장에서 설명(25-26)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5절에는 몇 가지 중요한 주석적 난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힐라스테리온’을 ‘화목제물’과 ‘속죄소’ 모두로 번역할 수 있음은 도움말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 25절에 등장하는 첫 부사구 두 개의 용법 또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피스티스’가 누구의 믿음(신실함)인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화목제물 속죄소로 세우신 것’이 그의 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입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해석은 아니지만,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가 화목제물/속죄소로 세워진다는 생각은 예수의 사역을 우리의 믿음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의 ‘피스티스’를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해 보여주신,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그를 화목제물(속죄소)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스스로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당신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은 25절과 26절에 두 번이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피스티스 예수로 말미암은 자들도 의롭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피스티스 예수’도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그들도 예수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동시에 ‘예수의 믿음(신실하심)으로 말미암는 자들’이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의 믿음(신실하심)에 의지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 ‘예수의 믿음/신실함을 공유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바울 신학의 중심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낌없는 헌신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배풀어 주신 사랑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세 가지 문제(27-31)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는 율법이 말하는 원리대로라면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율법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의롭게 되었다면 자랑할 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은혜와 믿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27-31)
우리가 의로움을 얻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이, 21-26절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해 있다면, 그 어떤 인간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길을 설명할 때 나올 수 있는 세 가지 문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자랑의 문제(27-28),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29-30), 율법의 기능에 대한 문제(31)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⑴ 구원에 대한 자랑의 문제(27-28)
바울은 먼저 ‘자랑할 데가 어디냐?’라고 묻습니다. 유대인이 어떻게 자기들의 특별한 위치에 대해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17-20,23)? 바울은 ‘있을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자문자답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22,25-26) 은혜로만(3:24)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은 배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인류의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온 해결책이기에 사람들이 서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법을 따른다면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자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스스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28절은 27절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는 ‘무슨 (율)법으로냐? 행위로냐?’라고 묻습니다. 율법이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행함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런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그리므로 사람이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대답합니다.
⑵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29-30)
여기에 제기된 질문은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29)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본 유대인의 특징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다룹니다. 이방인들이 거짓 신인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참되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예레미야 10:10)만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유대인만이 여호와를 알고 경배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창조주이시며 만민을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신명기 7:6)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후에도 자신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심을 부명하게 보이셨습니다(참고 요나서). 게다가 이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어서(로마서 3:23) 그들 사이에 ‘차별’이 없고, 구원의 유일한 근거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토대 위에서 취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쉐마’를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명기 6:4).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할례자든지 무할례자든지 배경에 관계없이 똑같은 믿음의 조건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모든 자를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⑶ 율법의 기능에 대한 문제(31)
마지막으로 바울은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바울은 특징적인 감탄조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하고 난 뒤에,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개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끌었을 때(20;갈라디아서 3:23-25), 율법의 목적은 성취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전체 계획 가운데 그 위치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듭 구원의 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확언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3장 22-31절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무려 여덟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은 무기치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기능에서 7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교의 고백을 재정의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인 쉐마를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재정의 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직 믿음만을 통해서 열방을 차별 없이 부르십니다. ‘믿음의 율법’(27)이란 표현은 31절에서 다시 설명됩니다. 바울에게 율법은 그리스도의 믿음 혹은 성도들의 믿음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구속사 속에서 율법은 이 믿음의 출현을 기다립니다(갈라디아서 3:23-25), 그런 점에서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냅니다. ‘율법을 굳게 세운다’(31)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로는 구원의 길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을 새롭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깨닫고 흔들림 없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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