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7] 이정옥(李貞玉) 일심봉천(一心奉天) - 2. 교편생활과 결혼 - 2
9 모교에서 3년 동안 교편을 잡다가 1949년 3월에 전라북도 제일 갑부 인씨(印氏) 가문의 3남과 결혼을 했다. 우리 양친은 유난히 청렴하셔서 큰언니 때부터 부자를 기피하시고 가난하더라도 가풍이 좋은 양반의 자제들 가운데 대학도 독학으로 졸업한 사람을 사윗감으로 고르셨다.
10 나의 이 결혼도 부자라는 이유로 3년을 끌다가 인씨 댁에서 양친의 고집을 꺾고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당사자의 실력과 인품에 만족했다. 누군가가 우리 결혼에 대해 ‘제일 잘 어울리는 멋진 한 쌍’이라고 했다.
11 나는 결혼생활에 만족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하늘은 이것을 원하지 않으셨는지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고, 동란 중에 첫 아들을 낳았으나 생후 9개월 만에 잃었다. 12 나는 산산조각이 난 마음으로 한동안 허탈 속에 빠져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절망 속에 나 자신을 영영 묻어버린다면 너무도 한스러워 어떻게 해서든지 소망을 가지려고 했고, 나 자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13 6.25이후 3~4년이 지난 어느 날 시동생이 말하기를 전주 사회에서 모모 인사들이 모이면 가끔 나에 대한 말을 한다는 것이다. 6.25로 혼자된 여자들이 많지만 가족이 많고 경제가 어려우면 생활하기에 바빠서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지만 자녀도 없고 경제적으로 걱정이 없는 여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몇 년 동안 한결같이 꿋꿋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14 세월이 갈수록 내 앞에 무엇인가 밝은 길이 있을 것만 같았다. 혹시 헤어졌던 그 사람과 만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도 가졌다. 하지만 휴전이 되고 동란 이후 6년이 되어도 다시 만날 가망은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사는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쓸쓸히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15 혹시라도 내가 운명을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나의 티 없는 순수한 마음을 아무에게나 주는 행동은 나로서는 할 수 없었다. 결혼 전에도 많은 구혼자들이 있었지만 교제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봉건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16 그래서 1956년 정초에 이런 결심을 했다. 즉 그 해 12월 31일까지 살다가 다시 희망이 없다면 깨끗이 이 세상을 청산하겠다고……. 많지는 않았지만 내 재산을(그 당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처리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