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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12, 김인경 입다목사
세칭 동방교의 부산 '사상8교회' 김인경목사는 동방교의 명명이 ‘입다’였고 보통 입다목사라고 불리웠는데 동방교의 최고위직인 4명의 사주(四柱) 다음가는 또 다른 4명의 부주(副柱)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분은 시력이 아주 나빴다. 젊은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인데 내가 중학교 2학년의 어린나이에 세칭 동방교 사상 8교회에 입교하던 당시 30대의 말 혹은 40대의 초반이 될까 말까한 정도의 나이라고 짐작 되었는데 시력은 이미 많이 나빠져 있었다.
한지 종이를 잘라서 책처럼 묶어 거기에 싸인펜으로 글씨를 굵고 크게 쓰서 무엇인가를 잔뜩 기록해 놓고 있었다. 아마 동방교에서 말하는 ‘진리말씀’인것 같았다.
노광공의 설교를 메모 한다거나 상부의 지시사항을 받아 적어두고 체크하고 있는것 같았다. 어떤때는 그것을 눈 가까이 갖다대고 메모된 기록을 보면서 설교를 하곤 했었다.
그는 '사상8교회'를 책임지고 있었고 나도 친구에게 전도받아 그분의 인도에 이끌리어 동방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인자하게 얼굴에 웃음을 머금을 때는 얼마나 다정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한번 신경질을 내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운 고집불통의 사나이다. 나는 그 양면을 모두 경험한 소위 그의 수제자라 할 수 있겠다. 그만큼 그는 나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고 동방교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는 나는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사상8교회' 뿐만 아니라 부산경남지방의 책임자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부산경남지방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초량12교회'에 머물면서 이 지방의 여러 교회들을 상부의 지휘감독하에 관리하고 있었다. 동방교의 운영실태가 늘 그러하듯 문제와 사고가 그칠날이 없었다.
부산의 각처에 산재한 지교회뿐 아니라 김해, 밀양, 진해, 충무, 고성, 마산, 울산등지의 지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문제들, 이를테면 어린 학생신도들의 무단가출 문제, 집안의 귀중품들을 훔쳐와서 지성(헌금)이랍시고 바치다가 들통이 난 사건들, 이단사이비 교회라고 주변에서 들고 일어나 경찰관들이 출동하여 조사하는 문제, 연단이랍시고 시켜서 껌팔이를 하다가 지인들에게 들켜서 추궁당해 교회로 찾아오는 문제,
믿음이 특출해서 학교수업을 빼먹고 동방교에서 생활하다가 부모들에게 잡혀가는 문제, 집안 쌀독의 쌀을 훔쳐내어 가방에 넣어오다가 추궁을 당해 생기는 문제, 어떤 아이들은 아버지가 소 판돈을 그대로 몽땅 들고 나와 바치려고 하다가 들통난 문제등...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는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면 '초량12교회'로 보고가 들어오게 되고 그 뒷 수습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때는 경찰의 수배를 피해 셋방을 얻어 잠시 피해있기도 해야 하는데 그런때는 신분도 위장할 겸 시력이 나쁜 입다목사를 부축해서 데리고 다니기 위해 명명(동방교에서 부르는 이름)이 ‘사사’라고 하는 젊은 여신도가 옆에 항상 붙어 있었다. 그녀도 역시 빈집초월(무단가출)해서 동방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자 신도로서 원래부터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지 언제나 뼈만 남은것 같이 빼빼하고 축농증이 있는지 늘 코맹맹이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후 김인경 입다목사도 서울 대기처로 올라가게 되었고 나도 입대를 했고 군복무를 마친 이후 세칭 동방교와는 인연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동방교안에서 김인경 입다목사를 '사사'와 결혼시켰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50대 중반이 된 노총각 입다목사와 30대의 처녀 ‘사사’가 결혼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동방교 내부의 분위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혼란스러웠고 격변의 시기였다. 1대교주 노광공 사망이후 그 아들 2대교주 노영구가 교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에게는 창업자의 카리스마는 없었다.
단지 노광공의 핏줄을 타고난 아들이었다는것 뿐, 자라나면서 자기 아버지의 동방교에 심취하기는 커녕 방관자 내지 비판적인 자세로 일관했었다. 노광공의 큰아들 노영도는 대구 계명대 출신으로 얼굴도 핸섬하게 생겼고 풍채도 있었다. 두 형제가 어찌 그리 다른지, 2대 교주가 된 차남 노영구는 내세울 만한 풍채도 아니고 생김새도 빈상에 가까운데다 눈꺼풀은 늘 껌뻑껌뻑거렸다.
말을 할때의 음성도 이상했고 발음 자체가 어눌한 눌변(語訥症-어눌증)이라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억센 동방교의 간부들을 다스리고 동방교 전체의 조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행적이나 카리스마는 전혀 없었다. 대구에서 당시 줄만 서면 들어가는 모 대학을 다니긴 했는데 리포트를 쓸 줄 몰라서 대신 써 주었다고 동방교 목사인 누군가가 늘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한 마디로 능력이 부족한데다 문제는 연속으로 터지고, 1대 교주 노광공 휘하에 있던 간부들은 억세기 그지없어 통솔이 어려운 터에 2대 교주 노영구 자신도 지명수배가 되어 이리저리 피해다니게 되니 어수선 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통솔하기 힘든 간부들 여러명을 ‘지시’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으로 구실을 붙여 다시 부를때 까지 집에 가 있으라고 보내기도 하고 절에 가서 부를때까지 기도하고 있으라고 사찰로 보내기도 하고 오래된 처녀 총각들은 ‘지시’라고 하면서 서로 결혼도 시키고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국졸 총각 신도와 대졸 여신도가 결혼했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려오곤 하던 시기였다. 시력이 나쁜 김인경 입다목사의 뒤 치닥꺼리를 어찌 할 수 없다보니 '사사'와 결혼시키는 묘수가 나왔던 모양이다. 지시라는데야 어찌 절대복종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원래 동방교에서는 결혼이란 것이 없었다. 세칭 동방교에 전도되어 들어와서 지방의 동방교에 출석하는 부부들은 그렇지 않지만, 기혼부부가 동방교에 들어와 대기처에 들어가게 되면 부부는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사례가 여럿 있었다. 정재덕 요나단, 양학식 베드로, 김태문 삼손, 권병찬 아마샤 등등 그들은 모두 지방에 가정과 자식, 마누라가 있었고 그들은 모두 지방의 동방교 지교회에 출석하고 있었고 본인들은 대기처에서 홀아비 생활로 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고 있었다. 어쨌든 늙은 총각 입다목사는 젊은 처녀 ‘사사’와 결혼 후 아들 하나가 태어났는데, 유전이었던지 태어난 아들 역시 시력이 나빠서 점자를 배우고 있으며 장성해서는 군대를 못갔다고 한다.
그후 입다목사는 다시 부를때까지 어느 절에 가서 기도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고 사찰로 들어가 기도생활을 했는데 곧이 곧대로 하는 그의 성격대로 연약한 체력에 무리하게 기도생활에 정진하다가 그만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동방교에서 들리는 이야기로는 지시사항에 중도(中道)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마음데로 하다가 죽었다고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오호... 통제라...
(김인경 입다목사)
세칭 동방교에서는 후일 ‘이봉상 사건’이라는것이 터지게 되는데 2대 교주 노영구의 바로 측근에서 일을 보면서 매주 전국의 순회자들을 서울의 비밀스런 장소에서 만나 전국에서 수금한 지성(헌금)을 챙겨 받아 2대 교주 노영구에게 전달하고 각종 지시, 시달사항을 순회자들에게 전달하던 이봉상 갈렙전도사가 교주 노영구의 동거 행각, 각종 잡종교리로 뒤범벅이 된 비성서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
주장하는 이적기사의 탐문결과 알게된 허구, 무단가출 연단선님들의 껌팔이 행상, 일부 이탈신도들의 관계당국 진정사건등으로 인해 좁혀오는 수사압박등 세칭 동방교의 사이비 이단성을 깨닫고 전국의 순회자들에게 사실을 실토하고 각 순회자별로 맡은 지역에 내려가 전도사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사실대로 알려 그들이 각자의 판단대로 처신하거나,
그래도 좁은길(세칭 동방교)이 참길이라고 믿어 계속 남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아서 적은 월급이라도 받으면서(그때까지는 아무도 월급받는 사람은 없었음) 계속 전도사 일을 할 사람은 하고 혼기가 찬 사람들은 결혼도 하도록 길을 터 주도록 하자는 의논 결과, 많은 전도사들이 그때 세칭 동방교의 사이비 이단성과 허구를 깨닫고 떠나게 되었던 사건을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록을 이어가다 보면 자연히 상세한 이야기가 나올것 같다.
지금도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이봉상 갈렙전도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선전하고 욕을 퍼붓고 있을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75년 이봉상 사건’이 터졌을때 부산,경남지방에서 그것을 잘 수습하여 막지못한 책임이 김인경 입다목사에게 있다고 하면서 김인경 입다목사는 지옥에 갔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후에는 다시 지옥에서 건져 올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 . . , 지옥에 집어넣었다 꺼냈다도 마음데로 하는 재미있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세계. . .
세칭 동방교에서 나의 스승이라 할 수 있고 그의 수제자라고 자타가 이야기하던 나는 늦게 태어난 그분의 아들을 만나면 용돈이라도 좀 주고 싶었고 김인경 입다목사의 부인 '사사'와는 세칭 동방교시절에 서로 친하게 지내던 동료였기 때문에 아직 동방교 안에 있는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여 그녀에게 나의 연락처를 주어서 꼭 좀 연락이 닿게 해 달라고 부탁해 놓았는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이 이야기를 적어 나가다보니 생각나는것이 하나 있다. 한번은 김인경 입다목사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래 할아버지(노광공을 지칭하는 용어)께서 어느 총각 성민에게 어떤 처녀 성민과 결혼 하라고 하면서 신방을 꾸며 준 일이 있었는데 그 총각 성민이 그날 밤에 합방까지는 했는데 이래 할아버지께서 자기를 시험하시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처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않고 밤을 새우고 그냥 나왔다고 했다.
이 남자 성민이 그후 이래 할아버지께 시험을 잘 통과했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는 예화 한가지를 이야기 해 주면서 믿음생활 하는 중에 어떤 시험이 와도 꼭 이겨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그 남자 성민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이야기는 기억에 생생한데 입다목사가 어떻게 젊은 여신도 ‘사사’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하나 얻었는지 의아하기 이를데 없다.
첫댓글 동방교에서는 지교의 성민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같은 형제(?)끼리 결혼하면 안 된다는 희한한 이론을 내세웠지요. 그러면서도 대기자나 수도자들은 임의로 짝을 지워서 결혼을 시켰습니다.
내 동생과 한 여인은 주위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서로 좋아하는 연인이었는데 그걸 매정하게 자르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라고 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동방교를 뛰쳐 나왔을 것이라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동방교를 나오게 되었으니 그것도 동생에게는 다행한 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