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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오늘은 마가복음 3장 말씀의 교제를 계속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에 우리가 마가복음 1장 말씀을 통하여 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교제를 나누었는데요.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노예이신 구주 곧 죄인들을 위하여 세상에 노예로 오신 구주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요, 왕국 복음이라는 것을 여러분께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 마가복음 1장에서 하나님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예로 오신 구주라는 사실을 증명함에 있어서 이 복음
사역의 골격이 되고 내용이 되는 5가지 주제 중에서 가장 먼저 마가복음 1장 14절부터 20절 말씀을 통해서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복음을 첫 번째로 전파하심으로 사단의 왕국에 있는 자들을 주님의 왕국 안으로 이끌어서 생명을 소유하게 하는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진리를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갈릴리 바다 사망에 거한 자들, 어두움과 깜깜함이 임한 갈릴리의
그 사단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을 진리의 큰 빛을 비춰주기 위하여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주님께서
마가복음 1장 말씀을 통해서 계시해 주시고 있고, 세 번째로는 귀신들을 쫓아내는 장면을 통해서 사단에게 사로잡힌바 되어서
속박 받고 그 있는것 조차도 사단에게 모두 빼앗긴바 되었기 때문에 강탈되어진 이 사단의 세력 안에 있는 자들을 구출해내시기 위하여 귀신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는 복음 사역을 하시는 내용 가운데 아주 중요한 세 번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바로 이 병든 자를 고치시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여자에 대한 열병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오죠.
사단으로 인하여 기인된 죄들로 말미암아 병이 들므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해서 수종 들고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로 회복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자로 만들어주시는 것이 네번째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 모든 것들을 완성시켜주고 완결시킨다 라는 면에서 문둥병자를 깨끗히 하는 것이죠.
나병 환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격리되어서 교통이 완전히 단절되어진 상태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사회생활도
하지 못하고 사람과의 교통도 끊어져서 사람이 더 이상 사람으로 살 수 없는 그런 형편에 있는 문둥병자 나병 환자를
고쳐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복음 사역의 완결이 되고 완성이 되는 것을 바로 이 문둥병자를 고쳐주는 일로 인하여 온전케
하신다라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부터는 노예로 오신 구주의 사역의 5가지 방법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5가지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병든 자의 죄들을 사해주시는 중풍병자에 대한 얘기죠.
남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 인도함 받아 주님께서 어린아이야! 소자야! 나의 작은 아들아 내 죄들이 사함 받았느라라는
죄들을 사해주시는 것을 볼때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이러한 영적인 과정의 단계들에 있어서 가장 먼저 선제적으로 우리들의
죄들을 사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사함 받은 자들을 주님께서 세리 마태와 그리고 함께한 죄인들과 잔치를 벌이시고
바로 누리는 일을 갖게 하신 것처럼 죄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는 얘기입니다.
가장 먼저 선제적으로 죄들을 사함 받은 자들은 두 번째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일을 경험하게 되고
그리고 세 번째로 이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 다섯 가지 방법 중에서 세 번째가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배고프지
않도록 해 줌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더해주는 이러한 생배조각과 새 포도주, 가죽 부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혼인잔치집의 기쁨의 요인이 되는 신랑께서 바로 생베 조각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성육신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그 생베조각이 완성되어지지 아니한 바로 그 일을 성육신부터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시기까지 마감 처리하고 손질되어져서
바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 처리되고 마감되어지고 박음질이 되어지고 잘라지고 오려지고 완전히 마감 처리 공정이 끝나고
완성되어져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도록 용납받을 수 있도록 의의 완성된 옷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그 새 천
조각이 되셔서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바로 새 포도주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쁨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가진 자가 네 번째 안식일날 밀밭 사이로 거니시면서 이삭을 잘라 먹는 그들이 더 이상 배고프지 않고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계속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배고픔을 주의하시고 관심 가지신다는 것을 설명해준
다음에 마지막 이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 마지막 완성이 되는 그러한 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온전히 고쳐줌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냐면 뭔가 온전한 것 같으나 온전치 아니하는 또 온전치 아니한 것 같은데 대부분의 기능들이 상실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온전해 보이는 그러나 온전해 보이는 속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들므로 말미암아 온전치 못한 그러한
자들을 완전히 고쳐주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자유의 모습을 되찾게 해 주시는 내용에 대해서 나오는 것이
바로 마가복음 2장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3장 7절부터 3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이 무리들을 만나시고 다루심을 통하여 복음 사역을 위한 노예로오신 구주의
보조적인 아주 중요한 세부 사항들과 조치들을 이렇게 계시해 주고 있는 장면이 3장 7절부터 35절까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예로 오신 구주의 보조적인 행동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들임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그와 같이 일한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따르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가요한의 의도를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는 마가복음 3장 7절에서 무슨 내용이 나오냐면
3:7 〔많은 사람이 나아오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3: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멀찌감치 물러나셨습니까?
자신을 따라온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복음 봉사를 위한 일련의 조치로서 특별한 어떤 보조적인 조치들이며 아주 중요한 세부 사항들 속에서 첫 번째가 바로 주님께서 무리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통해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시고 바다로 나가신 그분이 미리 사전에 이러한 일이 펼쳐질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바다에 대기시키도록 사전 조치를 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9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여기에서 복음 사역을 위한 예수님의 특별한 보조적인 조치들 가운데 가장 먼저 행하신 것이 무리에 에워싸임이 있는 것을
피하신 다음에 그곳에서 주님을 접촉하는 자들, 생명 공급을 소유받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과 갈망을 가진 자들을 높은 산으로
이끄셔서 그들 가운데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사도들을 임명하여 복음을 전파케 하신 장면이 두 번째로
나옵니다.
3:13 〔열두 제자를 세우시다〔마 10:1-4; 눅 6:12-16〕〕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3: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3: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세 번째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 가운데 식사를 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있는 상황을 설명해 주신 다음에 3장 22절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에 의하여 바로 이 사단을 묶고 그의 집을 강탈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바알세블에게 사로잡혀서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냅니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이러한 자신에게 주어진 그런 상황과 환경을 통하여 완전히 사단의 세력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고 사단을 친히 묶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집을 오히려 주님께서 강한 자로 이렇게 나타나셔서 빼앗고 강탈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그리고 나서 31절부터 35절까지 자신의 친척들이 식사도 하지 않고 이 무리들에게 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그분을 오히려
미쳤다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노예로 오신 구주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이 천국 백성
아버지의 자녀들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에 자신의 친척들을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인정하는 천연적인 생명의 육신적인 혈통의
관계의 그러한 영역에 있지 않고 영적인 아버지의 그 생명의 관계에 머무심으로 말미암아 특별히 우리의 이 천연적인 관념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들을 선별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신 주님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가복음 3장 7절부터 성경을 잘 읽어보십시오.
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3:9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3: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3: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여러분 여기에 세 종류의 유형의 부류들이 있습니다.
세 종류의 유형의 다른 무리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이 환경들을 통해서 노예로 오신 구주의 아주 중요한
세부 사항들과 보조적인 조치들과 보조적인 행동을 우리에게 계시해 줌으로 말미암아 어떤 삶을 주님의 길을 따라서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천연적인 관념을 가진 우리와 영 안에서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주님이 행하시는 일들과 너무나 구분되어지고 분별되어진 삶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이 복음 사역을 위한 이러한 여러 가지 중요하고도 아주 보조적인 조치들로서 세부 사항들
이런 것들을 첫 번째로 보여준 것이 무리들이 모여서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이 무리들이 찾아왔죠? 7절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과 함께 물러나 바다로 가셨는데 갈릴리에서 온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그분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하신 그 이적과 표적과 기사 그리고 그 하신 모든 일들을 듣고 허다한 무리가 노예로 오신 구주이신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큰 무리를 오히려 피하여 배를 미리 대기 시키도록 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피해서
바닷가로 가시는 장면이 이 성경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허다한 무리가 쫓으면 좋을 것 같고 예수님께서 인정받을수 있는 상황인데 왜 그 허다한 무리를 벗어나서
바다에 떠 있는 배 위에서 분별되고 구분되어진 특별한 사람들에게 복음 선포를 하셔서 생명 공급을 받게 하셨는지를
우리가 의아함과 의문을 한편으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 일반적인 보편적인 사람들인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쫓았을때 그 허다한 무리들은 비교적 천연적인 관념을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 바다 가운데 배 위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이유는 바로 에워싸미는 것은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이적과 표적과 기사의 얘기와 선포하신 말씀을 듣고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인하여 주님의
얼굴을 보고자 했던 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가지신 생명의 말씀을 주입시키는 일에 해당되지 아니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주님을 에워싸 밀어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찾아온 그들은 참된 주님의 사역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생명 안에 있는 사역을 주입시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님으로 말미암마 그 자신을 보고자 한 이 군중들을
피해서 미리 대기시켜둔 배 위에 올라가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주님을 만나기를 주님을 접촉하기를, 주님의 생명을 공급받고 주님을 영안에 모시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그러한 특별한 조치를 펼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과 10절에 무슨 말씀이 나옵니까?
3:9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3: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여러분 9절에서는 예수님을 에워싸 미는 몰려드는 자들이 있었고
10절에서는 그분을 만지려고 하는 접촉하는 자가 있었다고 하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성경은 계시와 암시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몰려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에 오르기를 원하셔서 작은 배를 대기시키기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따로 배가 있는 곳으로 가셔서 자신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는 자들, 곧 만지고자 하는 자들,
접촉하는 자들을 생명 공급을 주어서 그들에게 생명에 속한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에워싸 미는 자들 곧 몰려오는 자들이 아닌 직접적으로 노예로 오신 죄인들을 위한 죄를 사해주는 죄인들을 위하여 구원자라는 사실을 그 자들에게 생명 공급을 주시기 위하여 미는 자들을 피하시고자 이 바닷가의 작은 배들을 이렇게 조치를 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는 자들은 주님의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보고 주님을 보고자 한 자들이며 또 진실한 말씀을 듣고자 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생명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고 오히려 접촉하는 자들, 주님을 만지고자 하는
자들이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그 말씀을 통하여 생명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접촉하는 자들에게 생명
공급을 주어야 하는데 이 밀고 몰려오는 그런 자들은 오히려 주님의 일을 방해할 수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주님을
에워싸 미는 자들, 몰려오는 자들을 피하시고 멀리 하심으로 말미암아 접촉하는 자들에게 생명 공급을 주시기 위하여
의도적인 행동을 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몰려오는 자들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주님의 얼굴을 보고자 했던 것이며 부정적이고도 조금은 소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만지는 자들은 주님을 만져서 자기가 그 주님을 자신 안에 죄인들을 위해서 구원자로 오신 그분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생명 공급을 받기 위해서 생명의 갈망을 가진 그 접촉하는 자들 만지거나 하는 자들은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그들이 바로 천국
백성이 될 자격에 부합될 수 있는 자들이라 보시고 주님께서 선별하시고 구분하시고 분리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천연적인 관념을 통해서 그렇게 허다한 무리가 주님을 에워싸서 쫓고 그런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고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의 그 하늘에 속한 그 생명이 노예로 오신 자신으로부터 그 접촉하는 자들
만지는 자들에게 분배해 주어서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짐을 통해서 접촉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분배해주고 생명을 공급해
주기 위한 것이 주님의 영적인 통찰력에서 나온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몸에 손을 대기 위하여 접촉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거룩한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생명 공급을
그들에게 주입시킬 수 있고 공급해 줄 수 있고 분배해 줄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접촉하는 자들 만지고자 하는 자들에게 거룩한 이 생명의 공급을 분배해 줄 때 그들이 영접하게 되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따라간 그자들 가운데서 또 선별된 12명의 제자들을 주님께서 임명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9절 말씀을 통해서 이 작은 배를 제자들에게 대기시키도록 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서부터 분별하는 구분시키는 일을 이렇게 하고 계신 예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들을 떠나서 바닷가로 가시고 바닷가에서 또 바로 이 작은 배를 준비하고 예비케한 그 작은 배에 올라가시기 위하여
구분되어지고 분별되어지는 이러한 행동을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피하여 왜 바닷가로 가시고 왜 바닷가에 있는 그 배 위에 올라가셨습니까?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수 많은 군중들이 몰려드는 것이 좋아 보이지마는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이 자신을 에워싸 미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몰려들고 에워싸 미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그 제자들에게 준비시킨 그 작은 배에는 몇 사람 밖에
타지 못하는 적은 배였기 때문에 그 적은 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그 무리와 구분되고 분별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배였다는 것입니다.
배가 없었다면 아주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쌀 때 피치 못하게 그냥 용납할 수밖에 없지만 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쫓는 수많은 무리들과 분별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미리 선제적으로 이 영 안에서 통찰력을 가지고 작은 배를 준비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배 위에 올라가기를 원하셨는데 그 작은 배는 오늘날의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서는 그것이 지성소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차후에 우리가 얘기하기로 하고
이 작은 배는 바로 땅도 아닌 바다도 아닌 바다 물속에 있지만 바다 위에 떠 있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는 마태복음 13장 말씀을 통해서 여러 가지의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나라는 뭡니까? 예 땅으로 상징된 곳이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예 바다는 무엇입니까? 타락한 세계인 이방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바다인 것입니다.
그래서 물로 상징된 이방 세계도 아닌 것이 이 배 입니다.
왜냐하면 배는 물에 있지만 물에 속한 것이 아니라 물 위에 떠 있기 때문에 물로 상징된 이방 세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땅 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땅으로 상징된 이스라엘 나라도 아닙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나라도 아니고 이방 세계도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나라로 상징된 땅으로부터도 완전히 구분되어져 있고
그리고 이방 세계로 상징되어 있는 바닷물 위에 있지만 바닷물 위에 속하지 않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다에 발을 담고 있다면 바다에 속해 있는 것이 되지만 바다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 놓여 있는
그 작은 배에 승선함으로 말미암아 그 교회는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땅도 아니고 그리고 이 이방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바다도 아닌 땅에도 바다에도 속해 있지 않은 특별히 선별되고 구분되고 분별되어진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배라는 것입니다. 배는 물 위에 있지 물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땅에서 그 배가 갈 수 있나요? 아닙니다. 배는 바닷물 위에 떠 있는 것입니다.
배는 땅에도 속해 있지 않고 바다에 속해 있는 것 같지만 배가 물에 떠 있음으로 말미암아 절대 바닷물 속에 있지
아니하는 것을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물이 배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 안에는 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더 이상 바다도 있지 않더라 라는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것을 계시하고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은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고 바다는 이방 세계를 상징하는데 이 땅과 바다로부터 완전히 구분되어지고
분별되어지고 분리되어 있는 곳이 땅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바다 위에 떠 있는 물 위에 있지만 물속에 전혀 있지
아니하는 그 배 안에는 물이 전혀 없는 바로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바로 이와 같은 위대한 삶의 장소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도 아니고 이방 세계의 물도 아닌 분별되어진 곳인 이 땅과 인접되어 있는 그 바다 속에서 떠 있는 것을 통하여
물이 배 안에 있지 않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방세계의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아니하는 유대의 바로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바로 이 구약의 그러한 약속들과 예언들과 예표들과 바로 율법 이런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은 오늘날의 신약 교회를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땅을 상징하고 있는 이스라엘 나라로부터 분별되고 그리고 이방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바닷물로부터도
완전히 분별돼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 선생님은 고린도전서 10장 32절을 통하여 바로 당신들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 절대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그래서 바로 주님께서는 이 땅도 아닌 그리고 이방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물도 아닌 특별히 분별되어진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의 거룩한 생명의 공급을 분배해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요? 교회를 통해서
오늘날 주님께서는 생명을 공급해 주시고 분배해 주시고 주입시켜 주시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교회가 아닌 땅에서나 또는 배가 아닌 바다 물속에서 이 복음의 사역을 하려고 하면은 이 주위에 많은
무리들이 에워싸 몰려오는 일로 말미암아 많은 걸림돌이 되고 고통을 받고 심지어는 장애물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복음을 합당하게 전하는 사역은 주님께서 이렇게 마가복음 3장 7절부터 10절까지 이렇게 계시해 주고 있는 말씀처럼
배 안에 있는 삶의 사역 땅에서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방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타락한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바다에서도 주님께서는 온전한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에워싸 미는 수많은
쫓는 자들을 피해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만지려고 하는 자들 자신을 접촉하여서 생명 공급을 소유하고자 하는 그런 생명의
갈망이 있는 자들에게 거룩한 생명의 공급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배 위로 올라가셔서 배 안에서 땅도 아니고 바다 물속도 아닌
배는 물위에 있지만 물속에 전혀 있지 않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그 교회를 통한 말씀 교제를 통해서 생명 공급을 나눠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좋은 교회를 여러분들이 만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모든 보편적인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들은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쫓고 교회를 따라온다면 군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실제적으로 거룩한 생명을 공급해 주고 주입하는 주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사역에는 절대
유익이 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들의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이고도 천연적인 생각과는 전혀 달리 그 자신을 쫓는 허다한 무리들,
3장 9절 말씀에 보면 몰려들어오는 수많은 무리들, 군중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군중을 피하기 위해서 바닷가에 배를
대기시킴으로 말미암아 바다 위에서 특별히 선별된 곳에서 생명의 갈망이 있는 자들에게 거룩한 생명의 공급을 전달해 주는
사역을 하시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가 그러한 방법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쫓는 수많은 군중들 에워싸미는 바로 그러한 무리를 피하시기 위하여 떠날 수 있도록
작은 배를 예비하라고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만지기를 원하는 10절 말씀에 그분께 손을 대려고 하는 그 손을 댐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 공급을 접촉하여서 그 노예로 오신 구주를 자신의 구원자로 삼기를 원하여서 영접하는 자들만이 바로 자신을 만지기를 접촉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진실된 자들이며 생명을 갈망하는 자들이죠. 노예로 오신 구주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고 죄를 사해주시는 분
그래서 자신들의 병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문둥병을 고쳐줄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접촉하는 자들에게 그 생명 공급을 나눠주기를 원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만지고자 하고 접촉하고자 하고 손을 대려고 해야지 주님이 어떤 분인가 알기 위해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무리가 되어서 군중들 속에 합류 되어서 주님을 쫓는 무리에 에워싸 미는 자들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노예로 오신 구주의 복음 사역을 위한 첫 번째 일련의 사건으로 중요한 세부 사항들인 보조적인 조치들로서
첫 번째가 군중이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시고 만지고자 하는 자들, 접촉하는 자들, 생명을 갈망하는 자들 그들에게
생명 공급을 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무리들이 이렇게 에워싸미는 그 허다한 군중들에 의하여 자칫 잘못하면
참 생명의 공급을 받아야 될 자들을 간과하고 놓쳐버리게 될 수 있는 생명 공급을 분배해주고 나눠주고 공급해 주는 사역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수많은 군중들로 인하여 속임을 당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쫓는 허다한 무리들 에워싸 미는 자신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주님을 보고자 하는 자들을
뒤로하시고 그들이 아닌 먼저 선제적으로 그분을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생명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놓치지
않기 위해서 참되고 거룩한 생명의 공급 사역을 그 자들에게 먼저 주시고, 그리고 나중에 20절부터 21절까지 보면은 그 무리에게 들어가서 식사도 하지 못하시면서 까지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을 통해서 결코 자신을 따르는 그 수많은 허다한 군중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잠깐 뒤로 미루신 예수님의 이런 놀랍고 지혜로운 행동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11절과 12절에 복음 봉사를 하심에 있어서 이렇게 허다한 자신을 쫓는 무리들이 방해가 되고 복음 사역과
생명 공급을 전달해 주는 일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의도적으로 피하신 그분께서 또한 11절 12절 말씀을
통해서 더러운 영들까지도 복음 사역을 전해 주시고 생명을 공급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3: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이토록 복음 사역에 큰 방해가 되는 허다한 무리 뿐만 아니라 더러운 영인 악한 귀신들 에게도 주님의 복음을 전파
해 주시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 봉사를 위한 보조적인 일련의 조치들과 중요한 세부 사항들을 계시로 말씀해 주신 다음에
주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시는 장면을 13절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되는 것은 주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사도들을 임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안배와
뜻에 따라 사도들을 세우기 위하여 에워싸 미는 무리들 가운데서 구별시켜주시고 또 바다에 가심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 또 구분시켜주시고, 배에 오르심으로 말아 또 구별시켜주셔서 계속 아버지의 뜻에 따른 합당한 자들을
임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행동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허다한 군중들이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할 수 있기 위하여 먼저 바다가 등장하고 있고요.
바다가 구분되어지게 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를 대기시킴으로 말미암아
작은 배가 또한 구분시켜주는 그러한 형태로 나타나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허다한 무리들이 자신을 에워싸 미는 것이 거룩한 생명의 공급을 주는 복음 사역에 큰 요소가 되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군중들로부터 분별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바로 바다로 가셔서 바다에 있는 그 배에
올라가셔서 또 생명을 갈망하는 자들, 주님에게 자신의 손들을 대어서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생명 공급을 주입받고자
하는 자들을 선별하셔서 바로 바다에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는 장면이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13절 말씀입니다.
3:13 〔열두 제자를 세우시다〔마 10:1-4; 눅 6:12-16〕〕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산은 대지보다 바다보다 높은 곳에 있는 곳이 산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산에 오르신 것은 원하는 자들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임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먼저 군중들로부터 무리들로부터 떨어지기 위하여 주님께서 먼저 바다로 가셨고 그리고 바다에서
또 높은 곳인 배로 가셔서 땅에도 속해 있지 않고 바다에도 속해 있지 아니하는 배는 그 바닷물 위에 있지만
전혀 바닷물 속에 들어 있지 아니한 물이 배 안에 전혀 있지 아니한 바로 그 교회를 상징하는 그곳에서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갈망하는 진실된 자들을 선별하신 다음에 또 그분은 그들을 따르는 그 원하는 자들을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열두 사도들을 임명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주님의 행동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3장 14절에 그분께서 열둘을 임명하셨으니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친히 그들을 보내서
복음 선포도 하고 병 고치는 권능과 마귀들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심이라
그리고 열두 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명의 갈망을 가지고 그 바다에까지 쫓아오고 바다 위에 배 안에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고 접촉하는 자들을 위해서 거룩한 생명의 공급의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산으로 올라가셔서
자신이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12명의 제자들을 세우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12명을 통하여 복음 전파를 하게 하시고 귀신을 내쫓게 하시고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는
장면이 마가복음13장 14절과15절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복음의 주된 목적은 사단에 의해 억압되어지고 강탈되어진
그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지게 하고 사단의 세상으로부터 분별되어져 하나님의 왕국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한 이 일 때문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노예로 또 죄인들의 구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도를 임명하신 것이 마치 예수님께서 임의대로 세우신 것 같지만
누가복음 6장 12절 13절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셔서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그 후에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허다한 무리 가운데서 선별되어진 주님을 접촉하는 자들 그 주님의 생명을 소유하고자 갈급해하고
갈증을 느끼고 갈망하는 마음을 가진 그 목마른 자들에게 거룩한 하늘의 생명 공급을 해 주었을 때 그들이 그 생명 공급이신
주님을 소유 받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속한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왜 누가복음 6장 12절 13절에 밤이 새도록 그렇게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 하셨을까요?
6:12 〔열 두 제자를 택하시다〔마 10:1-4; 4:23-25; 막 3:13-19〕〕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 자신을 쫓는 무리 가운데 허다한 군중들의 사람들 가운데 성별되어져서 주님을 만지고자 하는 자들, 주님을 접촉하고자
하는 자들, 생명을 갈급해하고 갈망하는 자들 가운데서 그 열둘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부담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밤새도록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의논을 하신 끝에 이 열두 사도를 임명하시는
이일을 이루신 것과 자신을 배반할 가룟유다를 택하신 일까지 우리가 알수 있는 것입니다.
예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여서 예수님께서 그냥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 12명의 사도들을 임명한 것으로
흔히 알고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이 마가복음 3장 19절에 보면 가룟 유다를 언급하신 것으로 보아 철저하게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제자들을 임명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 사역을 수행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이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는 바로 이 노예로 오신 구주를 통하여 가룟유다를 포함한 그 12명의 사람들을
모두 임명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들을 택하라고 주님의 영 안에서 권고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천부의 뜻에 따라서
12명 모두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16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그래서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은 아버지와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은 논의를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 16절부터 20절까지 보면 1:16 〔제자 넷을 부르시다〔마 4:18-22; 눅 5:1-11〕〕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시몬의 형제 안드레와 베드로가 그물을 바다에서 던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자신의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때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좇았고 19절에서도 바로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을 때
그들을 부르셔서 이 4명의 제자들, 처음에 주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이 사단의 영역 안에 있는 갈릴리 지역이죠.
갈릴리는 둥근 고리 반지 이런 뜻입니다. 감옥이라는 뜻이죠. 사단의 왕국에 있는 그 4명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처음에 그 4명이 부름 받았고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을 택하신 후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70인의 제자들을
또 택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12명의 제자와 70명의 제자를 택하신 것이 공생애의
전체적인 보여지는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 많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12명의 사도들과 후에 70명의 제자들 이 82명에 속해 있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천국 복음이 초대교회를 통해서
확산되어지고 확장되어진 이 놀라운 장면을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여서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고자 하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늘의 거룩한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
우리의 생각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왕국 복음의 사역을 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을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셔서
주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파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바로 이러한 주님께서 이 12명을 자신의 뜻에 따라서가 아니라 전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임명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노예로 오신 구주의 사역은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역인 것입니다.
그 12명의 사도들을 부르셔서 온전케 하시고 70명의 제자를 택하셔서 온전케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이 생명의 복음의 말씀을 듣는 그 성도들 또한 온전케 하는 것이 사도들과 70인의 제자들의 사역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사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고 사도들의 사역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고, 성도들의 사역은 복음을 세상 사람들 가운데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역을 따른 주님의 교훈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땅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움직인 것이지 스스로 개인적으로
자의적으로 한 행동이나 말씀이나 하는 일들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이 제자들을 임명하시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보통 이렇게 한 부류에서 사람들을 취하시고
또 이 한 무리에서 주님 자신의 몸을 만지고자 하는 접촉하는 자들을 또 이렇게 취하시고 또 높은 산에 가셔서 그들 가운데서도
또 생명 공급을 받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복음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자들을 또 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일이 얼마나 지대하고
얼마나 가치가 있고 중대차한 것임을 밤이 맞도록 기도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3년반 동안의 공생애를 통해서 12명의 제자 맨 먼저는 4명의 제자, 그다음에 4명의 제자를 포함한 12명의 무리들을 취사 선택하시고 70명의 제자들을 이렇게 택하셔서 노예로 오신 구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복음 사역을 위한 중요하고도 보조적인 세부 사항과 조치들로서 이러한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으며
이일이 얼마나 중대차한 일이라는 것을 밤이 맞도록 기도함을 통하여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그 복음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12명을 택할 것을 결정하심을 통하여 우리가 교훈 받아야 되는 것은
이 12명의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들과 많이 간격이 벌어져 있는 자들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특별히 베드로라는 사람을 보세요.
베드로가 얼마나 성급하고 얼마나 조급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천연적인 관념을 따라 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자가 베드로 선생님이신 것입니다.
베드로 선생님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통해서 많이 다루어 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베드로 선생님을 볼때
어떤 면에서는 좀 합당치 않은 자로 보여짐에도 불구하고 그 베드로를 가장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에 찾아오셔서
그분을 부르셨고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또 어떠한 자들입니까? 주님께서 오죽하면은
요한에게 이 보아너게스라는 천둥이라는 뜻을 가진 우레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그들이 불같은 성격과 성급한 성격이었는지를 우리는 알수가 있습니다.
마가:3:1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에게는 보아네게란 이름을 덧붙여 주셨으니,
이는 천둥의 아들들이라.
마가복음 9장 38절에서도 이들의 성급한 이 불같은 성격에 대해서 나옵니다.
누가:9:54 그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말씀드리기를 "주여, 우리가 하늘에서 불이 내리도록 명하여
마치 엘리야가 한 것처럼 그들을 살라 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하니
9:55 주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알지 못하고 있도다.
마가:9:38 요한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기에 못하게 하였나이다."라고 하니
주위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멀쩡하게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노한 우레 소리, 천둥 소리가 들리면 깜짝 놀란 것처럼
아기가 그냥 놀래가지고 깨어서 큰 소리로 우는 것처럼 주위 사람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상한 불같은 성격 성급함 조급함, 이 베드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이들을 주님께서 이 야고보와 요한을 이렇게 택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한1,2,3서와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였고 또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
그들의 불같은 성격과 결함이 드러나는 그러한 그들의 품성과 본성이 전혀 엿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3년 반의 기간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그분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발하는 그런 품성들과 본성들이 다 사라지고 상실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여기서 보면 가나안인 시몬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18절에 가나안 사람 시몬이라고 하니까 이 사람은 가룟인 유다처럼 유다를 뺀 나머지 11명이 다 갈릴리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 사람이 가나안 사람이구나 라고 시몬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가나안 사람 시몬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 가나안인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칸나 열심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 가나안인 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이라는 뜻은 열심이라는 그 어원이 이렇게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열심 당원이라는 뜻이지 가나안땅을 언급하는
가나안 사람이 아니라 성경에 가나안 사람 시몬이라고 하니까 여러분이 오해 할수 있지만 열심당원이라는 열심을 가진
이 칸나라는 뜻에서 유래된 열심당원으로 알려진 갈릴리 사람들의 당파를 언급하는 것이 바로 가나안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나안 땅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고 누가복음 6장 15절과
6: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①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열심당원〕
사도행전 1장 13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①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②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열심당〕
이 열심 당원들은 아주 극단적으로 유대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 죽기까지 희생하고자 그렇게 아주 극단적인
어떤 행동을 하는 애국자들이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열심당원인 시몬이 바로 유대인의 전통과 그 율법들을 사랑하고 전통들 어떤 그런 관습들을 사랑하는 열심당원 중의 하나인 이 시몬이라는 자를 사도로 택하신 것은 주님 자신의 안배와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는 상태에서
이 제자들을 임명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서도 마가복음 2장 14절에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세리 마태 그때 당시에 창기와 같은 부류로 취급했던 조롱받고 멸시받고 바로 유대 동족들이 상종하기를 전혀 원치 않았던
이 세리 마태라는 자가 바로 주님께서 12명 가운데 하나로 삼으신 것은 주님의 안배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 10장 3절에서도 또 마가복음 2장 14절에서도 세리마태를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리마태는 자신은 항상 직업을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리가 세금 징수원을 말하는데요. 그때 당시에 유대 백성들에게는 정말 매국노 자신의 동족들의 피를 빨아서 로마 제국의
대리인이었던 빌라도를 위해서 로마 황제를 위해서 이렇게 동족의 돈을 빨아먹는 흡혈귀와 같은 자들로 상종을 안 했던
그들이 사는 집 쪽으로는 가지도 않고 그 집을 바라보지도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싫어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조롱받고 멸시받고 죄인들 창기와 같은 동류자로 여겨왔던 세금 징수원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세리 마태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노예로 오신 구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다 라는 것은 그분의 구원의 은혜, 자기를 뽑아주시고 선택하신
것에 대한 큰 은혜를 깊이 기억하고 마태복음을 기록했을 때도 항상 자기는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했을때 마태입니다 라고 얘기하지 않고 나는 원래 세금 징수원인 세리마태 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가장 자기에게 흔적이 되고 큰 불명예가 되는 그 직업을 먼저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얼마나 주님께 자기가 택함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 구원에 대한 기쁨을 영원토록 기억하기 위해서 세리 마태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롯유다가 가리옷이라는 지역의 출신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이스카리옷: יהודה איש קריות) 에서 유래된 말로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11명의 제자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었는데 하다못해 이 가나안인 이라 불리는 시몬까지도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었는데, 이 가룟 유다만큼은 갈릴리 사람이 아니라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격이 없는 자들 야고보와 요한처럼 불같은 성격 때문에 그냥 우레가 치고 천둥이 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불편하게 하는 정말 몹쓸 짓을 하는 그런 자들 베드로와 같은 자들, 열심 당원인 시몬 같은 자들, 가룟유다
같은 이런 자들을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권고와 뜻에 따라 임명함으로 말미암아 정말 주님께서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택하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율법학자이고 성경에 대해서 박식한 서기관들 중에 아주 대표적인 자들을 임명하는 것이
옳아 보일 수 있을 것지만 왜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사도로 세우셨을까요? 그들이 학문이 있었던 자들도 아닙니다.
사도바울 선생님처럼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잘 알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해보면 세리 마태 같은 자들, 열심당원인 시몬 같은 자들, 가룟유다 같은 자들, 야고보와 요한 같은
우레의 아들이라고 주님께서 친히 별명을 지어줄 정도로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냥 큰 해를 주는 그런 사람
베드로와 같은 자들 우리 생각에는 이것이 이상합니다.
우리들의 천연적인 생각을 통해서 나온 것은 정말 부유한 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얼마나 부유했습니까?
그리고 명망 있는 자 니고데모 얼마나 공회원으로서 명망 있고 얼마나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얼마나 점잖고 얼마나 멋진
사람입니까? 우리들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을 제자들로 삼으면 그들을 바라보는 유대 백성들 모두가 우와~ 저런 훌륭한
학문이 있고 덕망이 있고 정말 부유하고 명예가 있는 사람들이 제자라면 도대체 에수님은 얼마나 그들보다도 위대한 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통찰력에 따른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권고에 따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연적인 관념과 천연적인 생각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영 안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바로 자신이
그 권고에 따라 제자들을 임명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선택이 아닌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주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 사역을 수행하시는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복음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주님의 특별한 일련의 조치들로 보조적인 어떤 행동들로 중요한 세부 사항들로 바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의도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권고의 뜻에 따라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도들을 우리의 천연적인 관점에 따라 보기엔 모든 자들이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였고요 덕망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부유한 자들도 아니었어요.
그냥 변변치 않은 그런 사람들을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천연적인 관념과 예수님의 어떤 영 안에서의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행하시는 일과는 너무나 큰 차이를
나타나게 된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19절에 가롯유다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가롯유다가 자신을 배신하여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밤새도록 밤이 맞도록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깊은 논의를 통해서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롯 유다를
12명 가운데 하나로 임명하셨다라는 것은 그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영을 따라 영 안에서 행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허다한 무리들에 의하여 바다로 가시고 바다에서 또 접촉하는 자들을 위해서 생명 공급을 허락해 주시기
위하여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배 안에서 선포하시고 또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12명을 임명하시는
이러한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고단하시고 배가 고프셨을까요?
그래서 마가복음 3장 20절에서는 다시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3:20 〔예수와 바알세불〔마 12:22-32; 눅 11:14-23; 12:1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그렇게 식사할 겨를도 없이 무리들을 위해서 이렇게 바다에서 배 위에서 선포하시고 또 산에 올라가서 밤새도록 이렇게
기도하시고 또 12명을 임명했다는 이 이야기들을 듣고 정말 자신을 위해서 어떻게 밥도 안 먹고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느냐 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 친족들의 관점에서는 그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미쳤다.
이상한 일이야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라고 얘기할 때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리가 다시 함께 오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포함한 제자들까지도 밥을 먹지 못했다는 얘기죠.
이 얘기는 뭐예요? 예수님을 따르면 이와 같은 일이 발생되어질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이와 같은 일을 선제적으로 보여주신 것은 그분이 얼마나 성실하시고 얼마나 노예로 오신
구주로서 주인이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얼마나 수고하시고 얼마나 충성스럽게 근면함과 미쁘심과 바뿌심 안에서 얼마나 성실히 주인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충실히 일하셨다는 것을 이와 같은 구주의 모습을 보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무리 얘기가 나오는 것을 예의주시하면서 봐야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디서부터 무리 얘기가 나와요? 마가복음 3장 9절에
3:9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3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무리가운데 열둘을 임명하시고 또 내려가셔서 어떤 집에 들어 가시니
다시 또 무리가 모여들어 무리 가운데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또 무리를 챙기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서는 그분이 3장 9절 말씀을 통해서 무리 군중들을 피해서 그렇게 떠나신 것처럼 아마도 무리를 떠나셔서
또 사역의 일들을 하실 것이다 라고 기대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전혀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식사를 중단하기까지
하면서 무리 가운데 있는 자들의 그 거룩한 생명 노예로 오신 구주 자신의 생명의 공급을 전달해 주어서 그들이 생명의 공급을
받을 수 있도록 긴박하게 식사를 거르시면서 까지 그들을 돌보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3장 9절을 통해서 먼저 그분께서는 군중을 피하여 바다에 가셔서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에 올라가셔서
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그곳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쫓아오는 무리들을 포기한다는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 것이며 우선순위로 12명의 제자를 임명하기 위해서 생명을 갈급해하는 자들, 갈망하는 자들, 접촉하고자
하는 자들은 잠시뒤로 조금은 제외시키셨던 것이지 그 무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라는 것이 바로 3장 20절에 식사하시기
위해 어떤 집에 들어가셨으나 그 무리들이 다시 몰려 옴으로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또 그들을 돌보시는 자애로우신
주님을 우리가 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3:21절 말씀을 보면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천연적이고도 육적인 혈통에 따라서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육신의 형제들이 자신을
미쳤다라고 생각하고 찾아와서 왈가불가 할 때 그분께서는 육신의 형제들이 아닌 자신을 쫓는 허다한 무리들인 군중들
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먹는 것까지도 관심 갖지 않고 육신의 형제들까지도 관심 갖지 않고 그 무리들을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우선순위로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우선순위는 12명의 제자들 생명을 갈급하고 갈망하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그 일의 중요성 때문에 우선순위 때문에 잠시 그들을 간과하였던 것을 3장 20절과 21절에서 무리들에게 다시 관심을 가지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간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생명을 소유하게 할 그러한 생명의 돌보심을 위한 존재자들이라는 것을 아시고 염려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까지 되면서까지 그들을 위해서 일을 하셨을 때 이 육신의 친족들이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 그분에게 미쳤다라고 얘기하면서 붙잡으려고 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마가복음 3장 7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주님의 복음 봉사를 위하여 주님께서 어떤 일련의 행사들, 일련의 어떤 중요한 세부 사항들, 아주 보조적인 조치들,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복음 사역을 위해서 보조적인 아주 중요한 행동들이 이러한 식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통해서 무엇이 선제적으로 중요하고 무엇이 차선적으로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가 알아서 주님의 뜻을 쫓아 복음 사역을 집행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교제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