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의 팔씨름
"작년 시월에 선생님은 '라스트 인터뷰'에서 빅뱅처럼 모든 게 폭발하는 그런 꿈을 꾼다고 하셨죠. 너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어둠, 죽음이 곁에 누웠다 간 느낌이라고요. 평생 '죽음을 기억하라'고 외치던 선생님은 드디어 곁에 가까이 와서 누운 죽음을 잘 사귀어보기로 하셨고, 그렇게 알게 된 그 미스터리하고 섬뜩한 친구에게 대해 저와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기로 하셨어요. 요즘엔 어떻게 밤을 보내고 계십니까?"
"요즘엔 밤마다 팔씨름을 한다네."
"팔씨름을요.....? 야밤에 누구와 팔씨름을 하십니까?"
근육이 빠져 더욱 얇아진 스승의 팔뚝을 나는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매일 밤 나는 죽음과 팔씨름을 한다네. 어둠의 손목을 쥐고서 말이야."
어둠의 혈관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포효하는 하는 나의 스승을, 상상해 보았다.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띤 채, 그는 파일을 열어 시 한 편을 읽어 주었다.
한밤에 눈 뜨고
죽음과 팔뚝씨름을 한다.
근육이 풀린 야윈 팔로
어둠의 손을 쥐고 힘을 준다.
삭은 땀이 밤이슬처럼
온몸에서 반짝인다.
팔목을 꺾고 넘어뜨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어둠이
팔뚝을 걷어 올리고 덤빈다.
그 많은 밤의 팔뚝을 넘어뜨려야
겨우 아침 햇살이 이마에 꽃힌다.
심호흡을 하고 야윈 팔뚝에
알통을 만들기 위해
오늘 밤도 눈을 부릅뜨고
내가 넘어뜨려야 할
어둠의 팔뚝을 지켜본다.
감정을 자제한 드라이한 목소리에 힘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부터 자네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이야. 이해하겠나? 어둠의 팔뚝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
이생에 마지막 수업이 될 테니,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다고 했다. 어둠의 심연을 직면했던 현자의 눈에 파르르 지혜의 불꽃이 일었다. 예일대 교수인 셀리 케이컨이 했던 유명한 이야기로 수업의 서문을 열었다.
" 한 사람이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친구와 작별인사를 했어. 우주의 시간은 달라서 돌아오면 2백년이 훌쩍 지나버려. 지구 시간으로는 마지막 만남이니, 그게 결국 죽음인 거라. 그런데 이를 어째. 그 우주선이 출발하다가 중간에 폭발을 해버린 거야. TV로 그걸 지켜보던 친구가 깜짝 놀랐겠지.
'아이고, 내 친구가 죽어버렸네.' 그제야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럼 아까 죽음은 뭐고, 지금 죽음은 뭔가?"
"글쎄요...... 내 눈앞에는 없어도, 다른 시공간을 살아도 '어딘가에 있다'라는 인식이, 우리를 견디게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 존재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좀 더 드라이하게 이야기해보지. 고려청자가 있어. 사람이 아니고 사물이네. 고려청자는 무덤 속에 있었어. 이걸 5백 년 후에 발굴했다면, 내 눈앞에 없었어도 고려청자는 5백 년을 존재한 거야. 그런데 이게 깨지면? 그 순간 '아이고 이걸 어째' 한탄을 하지. 그런데 그 청자는 무덤 속에 있을 때, 이미 우리 앞에 없었던 것 아닌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서양에서는 지금까지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을 가지고 삶과 죽음을 설명했네. 소크라테스도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육체와 마음과 영혼, 삼원론으로 삶과 죽음을 설명할 참이야."
그가 유리컵을 가져다 내 앞에 두고 결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죽음에 관한 느슨한 아포리즘을 기대했던 나는 당황했다. 선생은 마치 새로운 물리법칙을 발견한 후 실험 도구를 앞에 두고 흥분한 과학자처럼 보였다.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보이차를 따르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네. 날씨처럼 변하는 게 감정이지요."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거운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컵 하나로 바디와 마인드롸 스피릿. 현존과 영원을 설명하는 이어령 선생님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토록 심오한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히 풀어버리다니! 스승은 풀피리 불 듯 말을 이었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리컵 안의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