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있게 만든 그 유명한 ‘탑 체험’의 진술을 담고 있다.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 루터는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끊임없이 의로운 행실을 요구하시며 처벌하시는 무자비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구원하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롬 1:17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게 되었다. 구분선 아래에서 루터 글에 대한 번역자의 해설도 곁들여 보면 좋겠다.
[작품 해설]
루터는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어 시편(1513~1515)과 바울서신(1515~1518)을 강의하였다. 성서주석을 하는 가운데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를 놓고 실존적으로 씨름했다. 결국 성서를 주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깨달았고 이러한 인식은 새로운 구원의 경험과 신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루터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르친 구원론은 "네 안에 있는 것을 행하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은 최선을 다해 구원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라는 의미다. 하지만 루터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죄에 중독된 자처럼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졌다. 그러다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만나게 된다. 루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의인에게는 상을 주시며 죄인에게는 벌을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했다. 따라서 루터는 스스로 구원의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깊은 내면의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께 벌과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의'는 루터에게 즐거움을 주는 단어가 아니라 절망의 단어였다. 그런 그가 수도원의 연구실에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던 중 바울이 말하는 복음인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깨닫는다. 죄인 된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구원하시는 의라는 내용으로,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사상의 발견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존재이고 죄인에게 구원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스스로 충족시키시고 이에 필요한 것을 은혜로 주시는 분이다.
루터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발견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체험을 했다고 회고하며 그 과정을 1545년 "비텐베르크 라틴어 전집 제1권 서문"에서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루터의 신학적 통찰은 비텐베르크의 어거스틴 수도원의 탑에 있는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해서 '탑상체험'으로도 불린다. 이 전환의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루터 연구가들이 논쟁 중이다.
[작품]
한편 그해 나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라는 바울서신과 히브리서 강의를 통해 성서해석에 자신감을 가지고 시편을 다시 해석했다. 나는 로마서에서 바울을 이해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를 방해한 것은 차가운 내 마음이 아니라 로마서 1장 17절, "하나님의 의가 그 복음 안에 계시되었다"는 말씀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한 단어였다. 나는 이 '하나님의 의' 개념을(잘못 이해하여) 미워했다. 지금까지 교사들의 언어 용법과 관습에 따라 그 개념을 철학적으로, 소위 형식적 또는 능동적 의로 이해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죄인들과 불의한 자들을 벌하시는 의였다.
나는 나무랄 것 없는 수도사로서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매우 불안한 양심 속에서 죄인으로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보속)행위를 통하여 나를 용서하시고 나와 화해하셨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의롭고 죄인을 처벌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미워했다. 나는 침묵 가운데 하나님께 격분했고, 무언의 신성모독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불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련하고 원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버림받은 죄인들을 십계명이라는 율법을 통해 온갖 불행으로 짐 지우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다시 한번 아픔에 아픔을 더하시고 우리에게 의와 진노를 주시는구나!"
나는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양심으로 화를 냈다. 그렇지만 열렬히 바울의 그 구절에 집중했고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자 갈망했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속에서 밤낮 묵상하며 그 단어들의 맥락에 주의하면서 그 의미를 점차로 깨닫기 시작했다. 즉 하나님의의는 복음에 계시되었고 쓰여 있는 것처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임을 깨달았다.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 즉 수동적 의가 계시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느니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깨달음으로 이제 나는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갔음을 느꼈다. 이때 곧바로 성서 전체의 다른 모습이 보였다. 기억에 따르면 나는 그 후 성서 전체를 훑어보았고 다른 개념들에서도 이와 상응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지혜로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강함,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 등도 똑같은 의미였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의란 말을 그토록 미워했던 만큼의 사랑으로 이제 나는 다정스럽게 된 이 말을 찬양하게 되었다. 바울의 이 말씀 구절은 실제로 내게 천국에 이르는 문이 되었다. 후에 나는 『영과 문자에 관하여』(De spiritu et littera)라는 어거스틴의 작품을 읽었는데, 여기서 나는 기대와 달리 어거스틴 역시 하나님의 의를 비슷한 방식으로, 즉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시면서 나에게 옷 입히시는 의로 해석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이 아직 불완전하게 말해졌고 전가(轉嫁)에 대해 불분명하게 말해졌을지라도 우리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가르쳐졌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1) 이에 대해서는 권진호, “하나님의 의, 루터의 칭의 이해의 열쇠”, 「신학과 현장」(2021), 121~150 참조.
2) 이에 대해서는 권진호, "루터의 회심, 탑상체험", 「기독교세계」 1072 (2021.2), 34~37 참조.
3) 사전적인 의미는 한 개인의 의나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아담의 죄가 우리의 죄로 여겨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그를 믿는 자들의 것으로 간주된다는 의미이다.
마틴 루터 저, 권진호 해설 및 번역, 『루터, 구원을 말하다』(서울: 신아사, 2023), pp. 85-89.
첫댓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좋은 분이시라는 이해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단과 종교에 세뇌된 분들은 하나님을, 교회를 통해 헌금을 요구하거나 화가 나 심판하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회개의 시작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는 것입니다.
"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믿는 것이 신앙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노베 아멘!
루터의 탑 체험, 루터의 고백
...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를 깊이 들여다보며 '벌 주는 하느님'을 넘어섰다. 그리고 '사랑의 하느님'을 만났다. 루터의 영성에는 드라마틱한 순간이 있다. 사람들은 그걸 '탑의 체험'이라고 부른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가 머물던 수도원의 탑이 있는 공간에서 루터가 아주 특별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
https://v.daum.net/v/20110609001506901
중앙일보의 기사 잘 보았습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루터 당시의 여러 상황들을 알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번 글은 종교개혁사의 기초를 배우는 중요한 포스팅 같습니다.
루터의 유명세 때문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이름도 바뀌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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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Martin-Luther-Universität Halle-Wittenberg)는 독일 작센안할트주 할레와 비텐베르크에 있는 대학교이다. 1502년에 세워진 비텐베르크 대학교와 1694년에 세워진 할레 대학교가 1817년에 합쳐지면서 설립되었다. 비텐베르크의 교수로서 종교 개혁을 이끌었던 마르틴 루터에서 비롯한 지금의 이름은 1933년 11월 10일에 붙여졌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비텐베르크 Wittenberg
요약) 베를린 남서쪽의 엘베 강변에 있는 도시. 루터가 그 유명한 〈95개조의 의견서〉를 작성해 1517년 10월 31일자로 만성교회의 목조 대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된 곳이다. 이 대문은 1760년 화재 때 소실되었으며, 루터를 포함한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무덤이 들어 있던 그 교회는 1813~14년에 크게 파괴되었다. 교회는 복구되었으며 1858년에 청동으로 지은 대문에 루터의 〈95개조의 의견서〉의 라틴어 본문이 새겨져 있다. 하항과 철도교차점이라는 위치가 이 도시의 공업화에 도움이 되었다. 화학공업이 발달했으며 특히 피슈테리츠에 있는 국영 질소공장이 유명하다. 1970년대 후반에는 대규모의 비료공장이 건설되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0b3557a
링크 글을 올려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비텐베르크가 프랑스에 합병된 시절이 있었군요. 구 동독 지역이었고, 지금은 루터 시라고 할 정도로 관광이 활성화되었네요. 유네스코 등재 유적지라고 하니까요. 중세 때 있었던 성과 교회, 수도원, 루터하우스, 멜랑크톤의 집, 대학, 루터가 오랫동안 설교했던 시립교회 등등, 가보면 좋겠어요.
로마서(롬) 1장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17. For therein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아멘!
루터의 탑 체험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기존의 가톨릭 신학에서 말해 오던 대로의 의가 틀렸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은 거였죠. 그가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의 의는 수동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의라는 것이었죠.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을 필요로 하지 않고 믿음만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의 칭의사상이고,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대해서는 칭의 후에 선한 행실도 따라올 수 있다고 했죠. 내적 변화가 먼저 있은 후에 외적인 변화도 생길 수 있고, 외적인 행실만 있는 것은 위선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정리와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종교개혁 이야기를 들으며 피상적으로 익숙했던 단어를 더 풍성하게 설명으로 알게 해주는 좋은 포스팅입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