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대한 대종교의 독립항전과 교세확장이 갈수록 확산되자 일제는 대종교에 대한 본격적인 해체작업을 위한 치밀한 계획과 행동에 들어갔다.즉 전술한 바와 같이 ‘삼시협정’을 근거로 1926년 12월 길림성 독군 겸 성장인 장작상이 대종교에 대한 포교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대종교의 공식적인 모든 활동이 금지되어 사실상 만주사변이 벌어지는 193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교주 윤세복은 이러한 침체를 타파하기 위해 1934년 1월 대종교 재만주시교권 인허신청을 만주에 주재한 일제의 전위기관인 관동군특무기관·합이빈총영사·조선총독부특파원에게 교섭하여 대종교 포교를 양해받게 되었다.마침내 대종교선도회가 합이빈시에 조직되어 활동을 재개하고 안희제에 의해 영안현 동경성에 대종교총본사 간판을 내걸 수 있었다.일제의 대종교 포교허가는 이를 계기로 대종교의 중심인물을 표면으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대종교를 근본적으로 폐쇄시키고자 하는 회유책이었다. 윤세복을 위시한 대종교의 지도자들은 종교적 의지가 앞선 나머지 일제의 교활하고 잔인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일제는 대종교에 대한 내사와 감시를 더욱 엄밀히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종교총본사 내에 교인을 가장한 밀정까지 잠입시켜 대종교의 동향과 간부들의 언행마저도 일일이 정탐하였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2년 여름, 윤세복이 당시 국내에 있던 조선어학회 이극로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빌미가 되어 일이 터졌다.그 편지에 「널리펴는 말」이라는 원고가 동봉되었는데, 일제는 검열 과정에서 이 글의 끝에 나오는 “일어나라, 움직이라!”라는 구절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날조하고 이것을 「조선독립선언서」라 하여 대종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 필화사건이 바로 임오년 대종교 지도자 일제 검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침내 일제는 “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중심(神道中心)으로 단군문화의 다시 발전하기를 표방하여 조선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 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 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 목적이다” 라는 반국가단체의 죄목을 만들어 1942년 11월 19일 국내에서는 조선어학회사건과 때를 같이 하여 만주와 국내 각처에서 윤세복을 비롯한 대종교지도자 21명을 동시에 체포했다.‘임오교변’은 한국종교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건으로, 일제가 우리 민족 정체성의 중심이라 할 정신대종교과 언어조선어학회를 없애기 위해 저지른 극악한 만행이었다.공교롭게도 임오교변과 조선어학회사건이 모두 당시 대종교의 중심인물이었던 이극로와 연관된 점도 흥미롭다. 임오교변이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널리펴는 말」이라는 글이 단서가 된 것 같다.조선어학회사건은 만주에서 윤세복이 「단군성가檀君聖歌」라는 가사를 지어 경성에 있는 이극로에게 보내 작곡을 의뢰했다. 이 가사가 조선어학회 이극로의 책상 위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조선어학회사건의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
이는 조선어학회가 대종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암시해 주는 부분이다. 조선어학회와 연관된 많은 인물들이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토대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을 감행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이것은 조선어학회가 대종교 정신으로 무장한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태동시킨 단체라는 점과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김두봉·이극로의 대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파악하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더욱이 대종교와 조선어학회의 정신적 일체성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이극로가) 귀국하여 전국 명사를 망라하여 어학회를 조직하고 한글큰사전 편찬, 10여 년 간 갖은 형극의 길을 걸어오다가 임오교변 2개월 전인 10월경에 국내에서 한글어학회가 선두로 전원이 검거되어 함남 홍원감옥에서 수감 4년만에 해방되었고, 대종교는 당년 12월에 간부 전원이 검거되어 만주 목단강 감옥에서 순국십현殉國十賢외 무기형을 받고 또 4년 만에 해방되니, 한글어학회 사건이 즉 대교大敎교변이요, 대교大敎임오교변이 즉 독립운동실기가 되는 것이다. 그 당시 어학회는 국어통일로 사상통일을 시켜 민족단결을 기한 것이고 대종교는 국가민족의 전통을 계승하여 민족혼을 새로이 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 지사는 대종교에 귀의한 것이며 진정한 독립운동자는 무조건 대종교를 신봉하였다. 그러므로 어학회도 대교大敎비밀간행물을 종종 간행하였고 모험은성冒險殷盛을 다 바쳐 왔던 것과 은밀한 연락이 내왕한 것도 그야말로 대교大敎의 비사가 된다.”이 기록을 남긴 이현익은 만주 대종교 항일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했던 인물로서, 흥업단에서의 활동과 함께 광정단에서는 북부외교장으로도 활약했다. 또한 신민부에서는 이승림(李承林)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대종교의 비밀조직인 귀일당에서는 이일림(李一林)이라는 가명으로 항일운동을 한 인물로, 당대의 정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물이라는 점이다.이현익의 기록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대종교의 임오교변과 조선어학회사건을 같은 대종교사건으로 기록하면서 조선어학회가 대종교의 비밀스런 업무를 수행하고 주고받는 연락장소로 사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조선어학회가 당시 대종교의 국내비밀결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이극로와 윤세복이 주고받은 서신으로 인한 양대 사건만 음미하더라도 유추할 수 있다. 대종교의 기록에도 “1942년 11월 19일 국내에서는 조선어학회사건과 때를 같이 하여 선만鮮滿각처에서 교주 단애종사 이하 21명을 동시 검색하였으니 이것이 교사상敎史上 영원히 잊지 못할 임오교변이다” 라는 기록으로 나타난다.임오년 사건으로 검거된 대종교지도자들은 4개월이 넘는 취조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안희제를 위시하여 10명이었다. 또한 신구서적 2만 3천여 권과 중요한 문서 600여 점을 압수당함으로써 사실상 교리·교사의 모든 자료를 상실케 되었다.일찍이 국내의 거점을 상실한 대종교는 임오교변으로 인해 모든 기능을 잃어버림으로써 해방 후 환국하여서도 불모지를 내딛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첫댓글 사진은 임호교번으로 투옥되었던 악명높았던 목단강 철령하에 있는 액하감옥
액하감옥이 주변 개발로 철거될것 같아 걱정 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담벽이라도 보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