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야 한뼘도 안되는 얼굴 들고 살기 힘들다"
나의 아명은 은주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쁜데 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른다.
호적에 그리 되어 있어서 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내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은주로 불리던 시절, 그래도 내가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꽤 자라서까지 그리 불렸던 것 같다.
하루는 아버지가 술을 한잔 하고 들어 오셨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 행사
해망서원( 『역사』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에 있는 서원. 김종직ㆍ김굉필ㆍ정여창ㆍ김일손을 기리기 위해 중종 3년(1508)에 세웠으며, 고종 8년(1871)에 정여해(鄭汝諧)가 추가로 배향되었다. 1934년에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22호). 행사에 다녀오신 날이었다.
이 때는 그런 행사에 나가면 지역 그래도 괜찮은 분들이 봉투를 하나씩 내 놓아서 이름을 걸어 달아놓고 돈을 더 낼 수 있게 유도하던 때이다. 아무개 만원 아무개는 5000원
이러다보니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자리에 참석을 해서도 적게 내거나 안 내게 되면 기가 죽는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얼마를 냈는지 아니면 못 냈는지 술 한잔 하고 들어 오셨는데 기분이 별로 였다.
밭에서 일하다가 아버지 들어 오시는 것을 보고 집으로 들어 갔을 때 아버지는 한숨섞인 듯 그리 말씀 하셨다.
"한뼘도 안 되는 얼굴 들고 살기 힘들다!"
당시에는 그 말씀의 깊은 뜻을 몰랐다.
그러나 내가 살면 살 수록 그 말씀이 새록새록 마음에 새겨진다.
정신 못 차리고 닦치는 일 헤쳐나가다보니 일주일이 훌쩍 가버렸다.
금요일은 13일 기일인 시부님 제사 모셨다.
13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6시에 차량 출발 장소로 갔다.
신라호텔에서 있는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때부터는 내 책임하에 일이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지는대로 따라 하면 되었다.
내 몸 상태야 신라호탤 방 하나 주어져서 한숨 푹 자고 나면 살 것 같았지만 그런 상황은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가본 신라호텔 영빈관
식탁에 엎드려 자고 싶다.
한팀만 하는 결혼식이라 1부 2부로 나누어서 치러지는 결혼식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음식이 나오고 별반 먹을 것 없는 음식이 일인 식사대금이 20만원이라니
그래서인지 써비스는 나름 괜찮았다.
남자쪽 하객이다보니 폐백까지 해야 한단다.
외가 식구들까지 다 마치고 나자 집으로 시누이가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시누이 집에 도착을 하니 신부집에서 보내 온 음식이 식탁위에 가득했다.
쉴 수 있는 시간은 없다.
"형님, 이것은 형님 몫인듯합니다. 칼 질좀 해 주세요."
동서가 낼름 엄청 큰 문어를 내 앞에 놓았다.
시누이 역시 "언니 여기"
칼과 도마를 내 앞에 놓았다.
문어 쟁반을 다 처리하고 나니 벌써 술상이 차려져 있다.
그렇게 파티
저녁에 자려고 보니 자리가 만만치 않은 것을 나도 모르겠다.
그냥 빈 침대 있어서 차지하고 누워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간다하게 아침 먹고 서둘렀다.
갈 사람은 얼른 떠나주어야 혼주가 쉴 것 같아서다. 내려오는 길에 점심을 먹었다.
항아리보쌈집이었는데 돼지고기 보쌈에 맛있게 먹었다.
내려오는 길
명재고택과 돈암서원에 들러서 왔다. 노론과 서론이 나위게 된 배경이 되었던 명재고택
이야기는 다른 꼭지로 쓸 것이다.
구경 잘 하고 집에 도착할 즈음 기다리고 있는 팀이 있다
겹치는 일이라고
친정조카의 결혼식이 광주에서 있었다.
여기는 미리 축의금만 전달해 주고 갔었는데 막내동생 둘이 얼굴 보고 간다고 오고 있는 중이란다.
엄마가 여름이면 두 세 차례는 드셔야 했던 하모를 사 들고 집에서 먹겠다고 왔다.
또 어쩌랴 다행이 육수 만들어 둔 것이 있고 재료 있던 것들 챙겨서 하모 샤브 해 먹을수 있게 해 주었다.
단 한점도 입에 넣을 수가 없다.
그렇게 다 먹고서 싸 줄것 또 챙겨 보내고 나니 8시다.
나도 모르게 비그르르 누워서 짐이 들었는데 새벽에 배가 아팠다.
뭐가 잘못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도 점심 때 먹었던 돼지고기 보쌈이 나와 맞지 않았던 듯
배속에 있는 것을 다 쏟아내고 나서 그대로 무너져다.
기운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일어날 기력이 없다.
그냥 몸이 하자는대로 누워서 뒹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서야 하얀 밥 한숟갈 끓여서 먹었다.
그것은 또 괜찮았다.
그런데 우유가 먹고 싶어서 먹었다. 그리고 누릉지 끓여서 저녁을 먹었다.
아! 그런데 또 다 쏟아 냈다.
배 속이 정리가 안 되었다.
또 비그르르 누워서 저녁을 났다.
월요일이 되었지만 몸을 가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어디가 심하게 아프거나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힘이 없다. 배나 머리가 아프지도 않다.
그냥 그렇게 하루를 나고 화요일이 되었지만 난 일어나서 움직일 힘이 없다.
수요일 아침 출근해야 한다.
남편이 내심 걱정이 되었는지
살피러 왔다.
"괜찮아. 출근은 할 정도 돼."
그렇게 또 한뼘도 안 되는 얼굴 들고 츨근을 하였다.
현관에 버려져 있던 담배꽁초부터 또 내 할 일은 그렇게 늘어져 있다.
누구야? 소리라도 지럴본다지만 그래봐야 내 심성만 거칠어 지는 일이라 그만 두기로 한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막 펜들고 라인 좀 그려볼까 했더니 학생이 내려왔다.
웃으며 이야기 하는 사이 점심시간
밥 먹으러 공양간에 가니 모르는 스님들이 몇 분 공양중이시다.
들으니 실상사에서 오셨다기에 잠시 인사하고 소리공부하러 템플들어 왔다는 분과 문학관으로 왔다.
소리를 하시는 분이여서 인지 참 명랑하고 활달했다.
노래방 기계를 틀어 놓고 노래로 점심시간을 보내고 잠시 쉬려고 하니 차를 가져갔던 남편이 왔다.
라인 한장도 못 그리고 퇴근, 가지도 따고 오이도 따서 오라고 히였더니 하나도 안 해 왔다.
다시 원봉 집으로 들어가서 가지 따고 하니 콩이 너무 많이 자라서 잘라주지 않으면 콩 수확은 어림도 없다.
웃자란 콩 잘라주고 정사로 향했다.
일주일 사이 호박이 주렁주렁 오이도 주렁주렁 다 따 담고 출발하며 식당하는 분께 전화를 했다.
"예말이요 호박 사시요"
내 말에 사장은 깔깔대며 호박 몇 개 안 심었다면서 나 줄것까지 열었냐고 해서 암튼 갈 테니 호박 사라고 했다.
도곡에 있는 식당에 도착을 하여 호박 오이 가지 다 주고 왔다.
내가 한뼘도 안 되는 얼굴 잘 살았기에 처리 곤란한 것들도 전화 한 통화로 해결하고 집에 도착을 하였더니 복날 지났다고 아들이 전복을 한상자 보냈다더니 도착을 해 있다.
뭐 뒤도 볼 틈없이 전복 들고 들어가 손질하여 저녁 먹게 해 주었다.
씻고 나니 또 8시 안마기에 앉아 잠이 들었다.
그래도 잘 자고 나니 오늘은 좀 움직일만 하다.
한 뼘도 안 되는 안되는 얼굴이지만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게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