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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다로 출근하는 해녀 이야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다로 출근하는 해녀 이야기
그림책 ‘바다로 출근하는 여왕님’의 저자 김미희 작가 인터뷰
Q. 해녀 경험을 하신 작가님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담으셨는데요. 어린 시절 제주에서 경험한 해녀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제주의 우도는 집집마다 해녀가 살고 있는 곳이었어요. 그러니까 각 가정의 모든 어머니들, 그리고 딸들은 거의 해녀로 살아왔고 그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볼 수 있죠. 해녀를 엄마로 둔 우도의 아이들에게 바다는 그 자체로 신나는 놀이터이자 생계를 위한 텃밭인 셈이었죠. 제 자랑을 잠깐 하자면 일곱 살 때 문어를 잡고, 해녀들이 심 봤다는 수준으로나 만나는 전복도 따고 그랬어요. 어르신들이 너는 비바리가 될 소질이 다분하니 나중엔 상군(깊은 곳에서 해산물을 제일 많이 따는 해녀)이 되라며 칭찬도 많이 해주셨어요. 바다생물들과 놀다 보니 해양생물에 관해서는 생태학 박사들이나 알 수 있는 지식수준까지 섭렵할 수 있었어요. 어릴 때는 잠수복을 입지 않고 보말 잡고 우뭇가사리를 캐고 얕은 바닷속을 누비고 다녔죠. 중학생이 되면서는 웬만한 해녀들만큼 깊은 바다에서 물질할 수 있었어요. 당시에는 제 친구들도 예외 없이 어른들을 따라 물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캐면서 가사를 돕고 그랬어요. 그게 당연했어요.
고등학교 때 육지로 나왔기 때문에 해녀가 되지 못했지만 그림책에 보시면 바다가 그리워 다시 제주로 돌아가 해녀 생활을 하며 위로받고 성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제 이야기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표현했어요. 어리긴 했지만 당시 물질을 했을 땐 정말 바다라는 큰 우주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어요. 사람과 물고기들이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물속을 다닌다는게 신기했죠. 그리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채취한다는 성취감도 좋았구요. 바닷속에서는 타인과의 대화가 불가능하잖아요. 그저 나 혼자 생각하고, 자신과 대화하는 그런 시간들이 일상적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참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Q. 해녀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드신 부분이 흥미로습니다. 왜 그림책으로 제작하셨고,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으셨나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해녀로 살아갈 뻔했지만 육지에 나오면서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해녀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있었어요. 눈보라 치고 손가락이 펴지지 않을 만큼 차디찬 날도 늠름하게 바다에 드는 사람들이 바로 제주 해녀들이었어요. 제 어머니도 그랬구요. 그림책 <바다로 출근하는 여왕님>은 비바리였고 상군 해녀의 딸이었던 제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당연히 써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Q. 유독 제주에서 해녀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이유와 자부심 강한 제주 해녀의 특징이 궁금합니다.
먼 옛날에는 깊은 바다에 잠수하는 사람은 여자가 아닌 남자들이었어요. 해녀가 아닌 해남이죠. 깊은 바닷속 전복을 따는 건 ‘포작’이라 불리는 남자들 몫이었고 얕은 바다에서 미역 같은 해조류를 따는 건 ‘잠녀’인 여자들이었습니다. 조정에 바쳐야 하는 할당량이 있는데 바다에 흉년이 든 해에도 할당량은 줄지 않았고 포작들은 추위에 잠수복도 없이 물에 들었는데 탐관오리들은 사욕을 채우기에 바빴지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관아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포작들은 거지가 되더라도 살기 위해 육지로 탈출했고 조정의 수탈과 탐관오리의 횡포를 못 이긴 포작들의 대거 탈출로 전복 잡는 일은 남겨진 여자들 몫이 되었습니다. ‘해녀’라는 직업은 그렇게 탄생했다고 해요.
해녀들은 숨을 참으며 수압을 거슬러 잠수를 해야 하니까 두통 같은 잠수병에 시달립니다. 제 어머니도 그랬구요. 두통약과 수면제를 달고 사셨어요. 지금 살아계셨다면 86세인데. 90세인 해녀도 더러 있으세요. 나이 든 해녀는 얕은 바다인 할망 바당에서 해조류나 해산물을 캐구요. 초보 해녀가 적응하도록 해산물을 나눠 망사리를 채워 주는 일과 나이 든 해녀들을 위한 구역, 할망 바당을 양보하는 것 또한 공동체가 함께 사는 제주 해녀만의 정이고 의리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제주해녀는 아직도 별다른 장비 없이 바다에 들어갑니다. 물론, 물안경과 잠수복은 입고 들어가지만 호흡을 위한 다른 장비는 장착하지 않죠. 다른 지역에선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는 곳도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유네스코는 제주 해녀 문화의 가치와 보전의 필요성을 인정해서 2016년에 제주 해녀를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했어요. 제주 해녀들은 자기의 능력껏 해산물을 채취하는 게 마치 자영업자인 듯 보이지만 공동체의 일에는 똘똘 뭉치죠. 일제강점기에는 해녀들의 권익을 보장해 줘야 할 해녀조합이 일제에 의해 어용화되고 해녀들을 착취하자 한마음으로 이에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1931년부터 1932년 1월까지 1만 7천 명이 참가한 집회와 시위가 230여 회에 달한 제주 해녀 항쟁의 역사를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Q. 오늘도 당당하게 삶의 현장으로 나가시는 해녀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아침을 먹고 물에 들어가면 속에 엄청난 부담이 오기 때문에 빈속으로 물에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셨고, 채취한 해산물들은 뭍에 나와서 바로 손질을 해줘야 제값을 받을 수 있어서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참, 고된 직업이었죠. 그렇게 일해서 자식들 다 키워내고, 학교 보내주셨으니 해녀의 딸들은 항상 자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교차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물질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늘 그립고 지켜드리지 못한 마음이 사무치게 남아있어요. 해녀를 가리켜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쓰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매일이 고되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언제나 직면해 있죠. 따뜻하고 온정 어린 마음으로 챙겨주신 해녀분들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처음 물질할 때 토닥여 준 어르신들의 손길은 지금도 제가 어려운 문제를 만나 힘겨워 할 때마다 큰 용기와 위로를 주고 있어요. 모두 건강하시기를 빌며 언젠가 바다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김미희
시인, 동화작가
제주 우도에서 나고 자랐다. 해녀가 될 뻔했으나 육지에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폰카 시가 되다>, <놀면서 시 쓰는 날>, <동백꽃이 툭,>을 비롯해 다수의 시집과 동화를 썼다.
어른에게 동심을, 아이에겐 상상력과 창의력을 선물하는 오디오클립 ‘동시메아리’를 진행한다.
첫댓글 선생님은 바다 볼때마다 어머니생각나겠어요.고된삶을견디고 지켜낸 어머니들께 감사한데 고맙다는말도 전하지못한채 저도 보내드려야했었네요
ㅠㅠ
잘봤습니다~
슬픈 이별을 간직한 동지네요.
오늘도 어머니가 보시기에 좋도록 행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