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 저자-이지함
이지함은 극히 짧은 벼슬 기간을 빼고는 거의 전 생애를 방랑 속에서 보냈다. 그는 대지팡이 하나를 벗 삼아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다가 졸음이 오면, 두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의지해 고개를 수그린 채 잠을 잤다. 이렇게 잠을 잘 적에는 코고는 소리가 우레(천둥소리)와 같았고, 소나 말도 그 곁을 지나가다가 부딪치면 도리어 물러섰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꼼짝하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그는 제주도에도 몸소 작은 배를 저어 세 번이나 왕래하였다. 작은 조각배의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를 주렁주렁 달고 풍파에 대한 아무런 걱정도 없이 제주도를 드나들었다. 어느 날 제주도에 다녀오는 길에 해남의 명사(名士) 이 발의 집을 찾아들었다. 며칠을 굶은지라 그는 들어서자마자 몇 말의 밥을 해 내오라고 소리쳤다. 밥이 들어오자 그는 손을 씻은 다음, 수저를 제쳐둔 채 밥을 맨손으로 주먹만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밥을 입에 넣고, 왼손으로 반찬을 집어넣으며 순식간에 그 밥을 다 해치웠다. 밤에 주인이 비단 이불을 싸들고 들어와 함께 자며 담소를 나누고자 했으나, 그는 한사코 혼자 자겠다고 고집하였다.
주인이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어보니 악취가 풍겼다. 깜짝 놀라 이불을 젖혀보니 똥, 오줌을 그득하게 싸놓았다. 설사가 났는지, 아니면 벼슬아치 출신이 잘사는 꼴에 눈이 시어서인지 아무튼 간다온다 한마디 인사말도 없이 떠나간 뒤였다.
그는 한양 마포의 빈민굴 한가운데 토굴을 짓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흙 정자에 산다고 하여, ‘토정(土亭) 선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집안에 무슨 일만 생기면 사람들은 토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혼인날을 잡아달라거나 점을 쳐달라거나 약 처방을 해달라거나 하며 온갖 일을 부탁했다. 토정은 처음에는 웃으며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토정은 이 일을 모두 당해낼 수가 없어 책 한 권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 책이 바로『토정비결』이다.
『토정비결』은 평생의 운수를 보는 당사주((唐四柱, 중국 당나라 때에 성행했던 사주학. 사람의 생년·생월·생일·생시와 열두 별의 운행에 따라 길흉을 점침)와 더불어 민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토정은 이 책을 만들 적에 ‘너무 잘 맞으면 사람들이 일은 하지 않고 이 책만 붙들고 있을 것이다.’라고 염려하여 내용을 어느 정도 맞지 않게 뒤섞어 놓았다고 한다.
토정 이지함은 젊었을 때부터 가난한 하층민에 대해 동정심이 각별하였다. 신혼 다음날 추위에 떠는 걸아(乞兒, 거지 아이)를 보고 자기의 옷을 벗어준 일화도 있다. 충남 아산 현감(縣監, 지방 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종6품)에 올라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장사도 시키고 기술도 가르쳐 생계를 삼도록 했다. 고독한 국외자(局外者, 아웃사이더)의 길을 걸으면서도 항상 세상을 구하고 민생을 윤택하게 하고자 힘썼던 것이다. 이런 원님을 백성들은 부모처럼 섬겼다. 그러나 채 1년도 못되어 그가 죽자 고을 백성들은 친부모의 상을 당한 듯이 통곡했다.
이지함(1517년-1578년)은 조선시대의 사상가로서『주역』에 통달하고 의약, 천문, 지리와 같은 학문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의 근본은 오직 백성’이라고 하는 민본 사상에 입각하여 구민(救民)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걸인들에게 각자의 재능에 따라 기술을 배우게 한 일,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산을 증대케 한 일, 배를 만들어 어업에 종사케 한 일, 가내수공업을 장려한 일 등은 모두 그의 업적에 속한다.
한편, 그 자신은 물욕(物慾)을 배제하고, 청빈낙도(淸貧樂道,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즐김)의 생활을 행위의 지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