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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찬송가 제목을 여러 가지 좀 불러드릴 텐데 공통점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인내하신 구세주여
나의 영원하신 기억 예수
나를 위하여
오 놀라운 구세주
잘 모르시겠죠? 모르는 게 당장은 아닙니다. 찬송가 한글로 됐다 이런 거 말고
첫 번째로는 이 모든 제목이 찬송가라는 거예요. 제가 찬송가를 미리 불러드렸죠. 공통점 두 번째로는 한 사람에 의해서 다 작곡이 되었다는 거예요. 세 번째로는 이 찬양의 작곡가가 맹인이라는 겁니다.
이 찬송가를 지은 사람은 페니 크로스비라는 여인이에요. 오늘은 이 여인의 이야기로 좀 말씀을 잠깐 열어가려고 합니다. 페니 크로스비라는 이 여인은 크로스비라는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가문은 되게 유명해요. 왜냐하면 하버드 대학을 설립한 설립자 중에 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크로트로스비 가문이 하버드가 선 그 땅을 제공을 했어요. 그래서 대개 명성이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가문이 명성이 있다고 해서 그 가문에 속한 사람이 다 부유하지는 않잖아요. 이 페니 크루스비라의 이 가정은 대개 가난했어요. 가문은 유명한데 이 가정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겁니다. 페니 크로스비는 불행하게도 눈에 생긴 질병으로 인해서 퇴원한 지 6주 만에 시력을 상실하게 됐어요. 요즘 말로 하면 의료 과실로 인해서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페니 크로스비라는 이 여인의 삶에는 이 여인이 실족할 수밖에 없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삶의 포인트들이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첫 번째로는 너무 가난해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 요즘처럼 의료 시스템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가 눈이 아픈 크로스비에 눈에 약물을 넣었고 이 약물이 오히려 이 크로스비의 눈을 녹여버린 거예요. 그래서 6주 만에 맹인이 되어버렸어요. 사람이 얼마나 이런 사실만 이 사연만 품어도 평생이 힘들겠어요.
우리는 사연을 하나 품어도 정말 견디기가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시력이 없다. 맹인이라는 이 사연만으로도 삶이 얼마나 어려웠을 거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의사의 실수로 시력을 잃었어요. 사람이 자기 실수로 뭔가 인생이 어려워진 건 그래도 납득이 되는데, 억울하게 인생이 어려워지면 참 납득하기가 어려워요. 평생 그것을 원한 삼아서 살게 됩니다.
세 번째로는 페니 크로스의 아버지가 이 여인이 21살 때 돌아가셨어요. 여러분 이 정도 주권이면 자기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질문을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만약 우리가 이 여인이었다면 매일 비관적인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페니 크로스비가 있다는 것은 그의 어머니도 있다는 거잖아요.
어머니의 관점에서 한번 봐봤어요. 자녀는 태어난 지 6주 만에 시력을 잃었어요. 그리고 남편은 중병에 걸려서 죽었어요. 이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서 이제 시어머니에게 자녀를 맡기고 도시로 가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페니 크로스비의 어머니도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이 여인도 신앙적인 의문을 품게 됐어요. 왜 하나님이 나에게만 우리 가정에게만 이런 어려운 시련을 주셨을까? 우리 가정이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는데도 왜 하나님이 나에게 고통을 주고 줄까라는 이런 신앙의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 이런 신앙의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가정의 생계를 지던 어머니가 크게 낙심하게 됐어요. 이런 의문을 품고 살다가 정말 마음이 다 무너지는 순간이 왔어요. 왜냐하면 이런 가정의 어려움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긴장을 하루 이틀만 해도 몸이 망가져요. 사람이 평생을 긴장하고 살면 그 몸이 남아 있는 게 있겠습니까? 당연히 페니 크로스베의 어머니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열심히 자녀를 키워서 일을 하고 가정을 돌봤지만 마음이 이렇게 무너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딸의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아주기 위해서 정말 뼈가 빠지게 노력은 했지만 딸의 시력은 좋아지지 않았고, 또 이미 11세에 남편을 잃고 가장이 되어서 가정을 돌아봤는데도 그 상황도 변한 게 전혀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페니 크로스의 어머니가 너무 이렇게 실족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녀의 시어머니죠. 그러니까 페디크르스에게는 할머니가 되고, 그리고 이 며느리에게는 엄마에게는 시어머니가 되죠. 시어머니가 이 페니크로스 어머니에게 한 말이에요. 제가 이 감정을 잘 담아서 표현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읽어드립니다.
내가 물을 건널 때 너와 함께하겠고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해. 머시야 머시 크로스비에요. 이 엄마 이름이 머시야.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거야. 치료될 수 없는 것은 견뎌야만 한단다. 만일 그분이 지금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앞으로 더 좋은 길을 축복해 주시려는 것임을 기억해라.
이게 이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한 위로예요. 여러분 이런 위로를 할 수 있는 시어머니가 있다는 것도 복이고 이런 위로를 우리가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복이죠.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그게 목회자든 동료든 가족이든 간에 이런 영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참 이건 엄청난 복인 거예요.
그런데 이 소리를 누가 들었냐 하면 딸인 오늘 찬송가를 지은 펜디 크로스비가 듣게 된 거예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한 말을, 이 딸이 그 말을 잘 들었어요. 그리고 이것을 마음에 새기게 됐습니다. 엄마에게 한 말이지만 자기도 맹인이잖아요. 엄마가 열심히 살지만 여전히 가난했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자기를 향한 메시지로 받아들인 거예요.
치료될 수 없는 것은 견뎌야만 한단다. 여러분 우리는 그것을 우리는 견디는 것을 무력한 사람들의 행위라고 힘없는 사람들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견디는 것 우리는 견디는 것을 패배자 실패자 같이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오늘은 그 말씀을 좀 나누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를 온전하게 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견디는 것이 우리를 성도로 온전하게 하고 조금더 부족함이 없게 한다는 거죠. 우리를 완성시키는 것이 견디는 거라는 거예요. 더 많은 화려한 뭔가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 나를 성도를 완성시키고 나를 목회자로 완성시킨다는 말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 보면 견디는 것은 패배자의 삶이 아니래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패배를 견디는 것을 패배자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이길 힘이 없으니까 졌기 때문에 패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견뎌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못 견뎌요. 패배자가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빚진 거지 패배한 걸 견디지는 못해요.
패배자는 다른 거예요. 오히려 패배를 견디는 것이 저는 승리자의 삶이라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람들은 견디는 것에 유익을 잘 몰라요. 그냥 견디는 것은 선택이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의 선택이다. 견디는 것은 이상 뭔가를 할 수 없는 능력이 없는 사람의 선택이다.
견디는 것은 아무 그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내 말씀은 결코 견디는 거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견디는 것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견디는 것이 우리를 더 성숙하게 하고 더 완전하게 한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고통스러운 건 나쁜 것이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4절 우리 말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온전하고 성숙하게 돼 아무 것에서도 부족한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는 정도가 아니라 잘 인내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게 해준다는 거죠.
우리가 언제 예배자가 될까요? 예배자가 더 훈련을 받고 예배에 대한 강의를 더 듣고 사람들의 지적을 받으면서 그래야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될까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를 예배자 되게 하는 것은 견디는 거라는 거예요. 견디는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할 수 있는 예배자로 우리가 성숙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 두 부분에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여러 부분에서 나를 성숙하게 하는 것이 견디는 거라는 거예요. 우리는 인내 견디는 것의 유익을 정말 잘 몰라요. 저도 잘 몰라요. 왜냐하면 힘드니까 여러분 견디는 것이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차라리 누군가랑 말로 싸우고 다투고 주먹질하는 것이 훨씬 더 쉽지 견디는 건 정말 어려워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힘이 있는 사람이 견디기 때문에 견디는 건 패배자의 삶이 아닌 거예요.
견디는 건 승리자의 삶이라는 거죠. 승리를 준비하는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이 위대해졌다면 무언가를 자유에서 위대해졌기보다는 잘 견뎠기 때문에 위대해진 거예요. 우리 삶에 어떤 성취가 있다면 내가 뭔가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견뎌낸 시간이 있었고 그것을 내가 잘 통과했기 때문에 내가 위대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견디는 것의 유익을 잘 몰라요. 그래서 못 견뎌요. 못 견뎌서 다투고 못 견뎌서 싸우고 못 견뎌서 자리를 피하고 못 견뎌서 달아납니다.
근데 만약에 우리가 견디는 것의 유익을 제대로 안다면 견딜 거예요. 견디는 것 유혹을 몰라서 못 견딘 건들이지, 견디는 것의 유혹을 알면 우리는 잘 견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너희로 온전히 구비하여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을 이렇게 풀어 풀어 풀어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의 의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 이 말은 인내하지 못하면 참이 아니다. 인내하는 시간을 통해서 내가 참되게 된다는 거예요. 참된 사람이 결국 인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과 저는 인내하는 시간을 가진 거예요. 신앙이 참되게 하는 시간이 견디는 시간인가라는 거예요. 내가 참고 내가 인내하는 그 시간들을 통해서 나의 신앙이 견고해지고 튼튼해진다는 것입니다.
인내를 통해서 우리가 진짜 신앙을 갖게 됩니다. 반대로 인내하지 못하면 진짜 신앙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신앙이 참되게 되기 위해서는 인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는 서신이에요. 인내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의미인 거죠. 너희가 잘 참고 잘 견뎌서 너의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진실이라는 것을 참이라는 것을 니가 너의 삶으로 증명해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메시지입니다.
인내는 나의 신앙이 참인지 아닌지 결국 드러나게 해요. 인내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진짜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견디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견뎌야 믿음이 증명이 되고 견뎌야 열매가 무르 익게 되고 견뎌야 결실이 맺어지는데 우리는 자꾸 견디는 시간을 피해요. 그러다 보니 무길 시간이 하나님의 응답이 만들어질 시간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 뜻대로 즉시 즉시로 말씀에 응답하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기다리심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더욱 성숙시킨 후에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도 있어요. 그러면 기도가 기도 응답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없어요.
못 참으면 그래서 기도는 하지만 결실이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인내하지 못해요. 기도가 만들어진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기도하지만 기도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견디는 것은 무르 익는 것과 같은 겁니다. 과일은 익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맛있어져요. 여러분도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샤인머스켓이라는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최고의 포도예요. 사람의 손이 그만큼 많이 가서 만들어낸 포도였기 때문에 이 포도가 맛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근데 어느 순간 포도가 맛이 없어지고 가격이 급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추석이 자꾸 빨라지면서 포도가 덜 익은 상태로 시장에 나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맛있는 포도인데 정작 국민들이 먹을 때는 맛이 없었던 것입니다. 포도가 익는 시간을 농부도 줘야 되고 소비자도 기다렸어야 돼요. 근데 소비자도 급하고 농부도 급해서 이 포도를 시장에 빨리 내놓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정말 최고의 포도가 맛없는 포도가 되어서 여러분과 저의 입에 들어왔던 겁니다.
샤인머스캣이라는 포도는 조생종이 아니라 만생종이에요. 만생종은 늦게 읽는다는 의미예요. 늦게 열매를 맺고 결실한다는 의미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큼 시간을 많이 줘야 돼요.
여러분 배추도 60일 배추가 있고 90일 배추가 있어요. 조생종 만생종이 있고 포도도 조생정이 있고 만생종이 있어요. 근데 사인 머스캣은 만생종이에요. 그러니까 오랫동안 이 포도나무에 달려 있어야 되는 거죠. 그 시금도 무르 익어야 그 맛을 그 진짜 맛을 우리가 즐길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최근 저희 50 목장에서 제대로 익은 사인 머스켓을 먹어볼 기회가 생겼어요. 정말 맛있어요. 계속 이렇게 입으로 들어가요. 향도 너무 향긋하고 당도도 너무 높고 그리고 과일의 속도 너무 탱글탱글하고 맛있어서 계속 이렇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시골에는 과수 남매가 많아요. 아마 웬만한 건 다 있는 것 같아요. 포도도 있고요. 포도도 몇 종류가 있어요? 복숭아도 있고 배도 있고 앵두도 있고 자두도 있고 웬만한 건 저희 시골에서 다 키워요.
근데 저희 시골에서 키우는 이 과일이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어요. 왠지 아십니까? 늦게 따거든요.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땄기 때문에 너무 맛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말하면 안 되는데 나주배 저리 가라예요. 정말 맛있어요. 어디 포도 김천 포도 저리 가라예요. 너무 맛있어요.
왠지 아세요? 익을 시간을 충분히 줘요. 조희는 그것을 따서 파는 게 아니라 다 익으면 맛있게 먹으려고 키우고 있는 것이라서 맛있는 과자를 먹게 됩니다.
충분한 시간이 과일에게도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요. 신앙도 읽는 시간이 필요해요. 막 열심을 내어서 막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그 신앙이 진짜인지 정말 증명되는 읽는 시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잊게 하는 것이 고난을 견디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익어야 온전해지고 완전해져요. 고난을 견디고 상처를 견디고 아픔을 견디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예배자가 되고 그리고 사명자로 더 온전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견디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견디는 것은 패배의 시간이 아니라 무르 익는 시간입니다. 견디는 걸 통해서 더 온전해지고 더 완전해질 것입니다. 설 익은 과일은 크기와 외모는 똑같지만 제대로 익은 과일의 향과 맛은 나지 않습니다.
성도도 읽는 시간이 필요해요. 성도의 고백이 참인지 성도들의 삶이 참인 건지 성도들이 지금까지 고백했던 것, 믿었던 것이 참인 건지 증명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이 견디는 시간인 거죠. 그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무르 익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이 되어져 가는 겁니다.
문제는 견디는 것이 엄청 어려워요. 우리는 잘 못 견뎌요. 여러분 그렇잖아요. 잘 못 견뎌요. 여러분 저도 견디는 게 너무 힘들어요. 설교 중에 이런 말씀드려 죄송한데 오늘 아침에는 갑자기 막 어머니 생각이 나는 거예요. 이거는 어머니가 어떻게 견뎠을까? 시집 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저희 집은 여전히 가난했고 집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이 있었고 자녀들에게도 여전히 문제는 많았고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고 계속된 문제가 있었는데 어떻게 긴 시간을 견뎠을까 이 생각하면서 내가 견디는 힘이 어머니보다 적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견디는 힘이 여러분 우리는 승리하지 못해서 성도답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이기지 못해서 승진하지 못해서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 좋은 집에 살지 못해서 성도답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리고 성도는 실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어떤 싸움은 절대 지면 안 되는 싸움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실패보다 정말 더 무섭고 나쁜 삶이 있어요. 그것은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는 삶이에요. 실패를 인정하게 되면 견디게 되고 견디는 걸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온전해지고 든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의 시간이 교회를 더 강하게 만들고 성도를 더 강하게 만들고 여러분의 가정을 더 온전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지금 잘 견디셔야 돼요.
저는 지금 여러분의 삶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자녀들에게 여러분 개인의 마음에 육체에 여러분 회사에 여러분의 직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확신한 것은 견뎌야 된다는 거예요. 힘은 들지만 버티는 힘이 거의 다 수진되어 가지만 그래도 우리는 견뎌야 된다는 것입니다.
페니 크로스비란 여인이 자기가 맹인이라는 사실, 자기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못 견뎠으면 이 여인은 만곡이 넘는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만곡이라는 찬양을 작사할 수 있을까요? 만 곡 한두 곡도 아니고 만 곡을 왜냐하면 자신이 맹인이라는 이 사실을 인내했기 때문인 거예요. 잘 참고 견뎠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도는 늘 이기는 삶을 살아야 된다,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실패해도 괜찮지만 대신 실패를 잘 견뎌야 합니다. 이 페니 크로스비가 실패를 잘 견뎠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더 온전하게 찬양할 수 있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영혼을 뜨겁게 하고 간절하게 하는 찬송가를 지을 수 있었어요. 페니키스빌은 가난도 견뎠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삶도 견뎠어요. 그리고 장애도 견뎠어요.
여러분 한국 찬송가에 이 여인의 찬송가가 몇 곡이 들어있는지 아십니까? 무려 23곡이 들어 있습니다. 놀랍죠. 맹인인 여인이 23곡의 찬송가를 작사 작곡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는 잘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입술과 행위로 죄를 짓습니다. 인내하지 못한 이 열매에 무섭냐 하면 우리의 신앙을 파괴했기 때문인 거예요. 인내하지 못해서 포도가 벌레가 먹는 것과 과일이 벌레가 먹는 게 같은 거예요.
인내하지 못함이라는 것은 인내하지 못해서 무르 익어야 될 과일이 썩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인내하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든든해지고 견고해지는데, 우리가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이고 썩은 과일처럼 쓸모없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내했다면 우리의 삶의 결실이 되었을 것이 인내하지 못해서 썩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왜 내 삶에 결실이 없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죠. 한 문제 하나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늘 말씀을 근거로 단정을 좀 지어보면 인내하지 못해서 무르 익을 시간이 없었던 거죠. 기도를 하고 인내하지 못해서 기도가 시간이 무르 익을 시간이 없었어요. 교회를 위해 충성 봉사하고 인내하지 못해서 그 무 이길 시간이 없었던 거예요. 땀을 흘리고 평생 주를 위해 헌신해 자랐는데, 인내하지 못해서 무르 익을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를 인내하는 것, 슬픔을 인내하는 것, 아픔을 인내하는 것, 힘듦을 견디는 것,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우리를 더 온전하게 합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제발 달아나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제발 인내하지 못해서 달아나지 마십시오. 제발 범죄하지 마십시오. 인내하지 못해서 여러분의 입술과 행위로 범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썩습니다. 제발 하나님을 욕하지 마십시오. 내가 힘들다 보면 하나님을 욕을 해요. 교회를 안 다니고 나 이딴 교회 다니나 봐라, 나 이딴 하나님 믿나 봐라 하고 하나님을 욕을 해요. 욕하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욕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의 수고가 썩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완성이 되고 우리의 섬김이 더 온전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예배 전에 옛날과 달리 찬양의 영상을 틀어드리죠. 뭔가 교회가 바뀔 때 담임 목사가 의도가 없이 막 아무거나 막 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그 정도 생각이 없지는 않거든요. 제가 이렇게 한 이유는 청년들의 모습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도 우리도 저렇게 찬양하게 해 주십시오.
저게 아이들의 삶으로 이어질지 저는 그 삶을 잘 모르지만 찬양하는 모습만은 우리도 저렇게 되게 해 주십시오. 저런 예배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가만히 이렇게 돌아보면 인내하는 시간이 우리를 예배자로 만들어 가요.
여러분 한 주간의 삶도 잘 인내하며 사십시오. 그래서 다음 주에 더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달아나지 마시고 범죄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기도가 썩습니다. 여러분의 수고가 다 썩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몇십 년 눈물을 흘린 그 수고가 다 썩습니다. 만약에 지금 여러분이 아쉽고 괴롭고 불편하시다면 기다리십시오. 좀 더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무르익게 하실 거예요. 그걸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 기다림의 시간을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목장 교회가 잘 견디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