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8-25 8 즉경即景 보이는 경치 그대로 25 박모薄暮 해질 무렵
파풍서작료송지怕風棲鵲閙松枝 바람을 겁낸 둥우리의 까치가 솔가지에서 우짖네.
천기층음일모시天氣層陰日暮時 천기는 층층이 그늘져 해 저물 때일세.
설타명창청좌구雪打明窓淸坐久 눈이 밝은 창에 뿌리어 맑게 앉기를 오래 하다가
갱간산월상성수更看山月上城陲 산의 달이 성 모퉁이에 올라옴을 다시 보네(陲↔陬)
로회여설화성홍爐灰如雪火猩紅 화로의 재 눈 같으나 불빛은 벌겋구나.
석정팽잔명일종石鼎烹殘茗一鍾 돌솥에 차 한 잔 끓이는 일이 남았네.
끽료상방고와처喫了上房高臥處 먹고 나서 上房에 높이 누운 곳에
수성청경화풍송數聲清磬和風松 두어 마디 맑은 경쇠 소리 솔바람에 화답한다.
바람이 두려워 나무에 깃던 까치 소나무 끝에 시끄럽고
하늘 기운 층층이 어두워져 저물어 가는 때
눈발이 창을 때려 오래도록 고요히 방에 앉아
산의 달, 성 모퉁이에 떠오르는 것을 다시 본다
화로의 재가 눈 같은데 불빛 고기 살같이 붉고
돌솥에는 차를 끊이고 있다
차 마시고 상방에 높이 누운 곳에
몇 차례 맑은 경쇠소리 솔바람에 화답한다
►박모薄暮 해가 진 뒤로 껌껌하기 전까지의 어둑어둑하여 지는 어둠, 땅거미, 황혼黃昏.
►‘변방 수陲’ 변방邊方. 부근附近. 근처近處
‘구석 추陬’ 구석, 모퉁이. 굽어진 곳. 산기슭. (좌부변阝=阜)+(가질 취取취→추)
►성홍猩紅 성성이의 털빛과 같은 약간 검고 짙은 다홍색(紅色)
‘성성이 성猩’ 성성이猩猩(오랑우탄) 개가 짖는 소리. 붉은빛
►차 싹 명茗 차茶의 싹. 차茶. 늦게 딴 차茶
►‘경쇠 경磬’ 경磬쇠(옥이나 돌로 만든 악기의 한 가지) 경석磬石. 목매다, 죽다
부처 앞에 절할 때 흔드는 동銅으로 만든 바리때 모양의 종鐘.
●薄暮 황혼/두보杜甫
강수장류지江水長流地 강물이 길게 흐르는 곳
산운박모시山雲薄暮時 산 구름 낀 저녁 때
한화은난초寒花隱亂草 찬 꽃은 어지러운 풀 속에 숨고
숙조탐심지宿鳥探深枝 잠자려는 새는 깊은 가지를 찾는다.
고국견하일古國見何日 고국을 어느 때 볼 것인가?
고추심고비高秋心苦悲 하늘 높은 가을에 마음은 고통스럽고 슬프다.
인생부재호人生不再好 인생에 다시 좋은 때 없으려니
빈발자성사鬢髮自成絲 귀밑머리가 절로 흰 실이 되었구나.
(763년 9월 낭주에서)
●슬픈 薄暮/심재휘(1963-)
가을 저녁의 해는 항상
우리가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져버립니다
그러면 어두워지기 전에
사람들은 서둘러 사랑을 하고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낡은 구두를 벗고
손자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서툴지만
더 어두워지기 전에
해 지고도 잠시 더 머무는 저 빛들로
세상은 우리의 눈을 잠시 미숙하게 하고
낮과 밤이 늘 서로를 외면하는 이 시간이면
강변대로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해 지고 어두워지기 전 흐르는 강물을
아직은 똑똑히 바라볼 수 있을 때
어디론가로 무섭게 달려가는 차들을 보며
이루지 못하였던 한때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 지고 어두워지기 전
보이지 않는 빛을 머금고
자꾸만 멀어져가는 저 구름들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는 졌지만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잠기는 세상이
눈을 뜨거나 혹은 감아도 자꾸만
어쩔 수 없이 환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대여 해 지고 아주 어두워지기 전
언제나 내 마음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박모의 머뭇거리는 밝음이 어둠보다도 더욱
나의 시력을 아프게 할 줄 알았더라면
해 지고 바로 어두워질 걸 그랬습니다
그게 더 손쉬운 일이었습니다/블로그: 내 마음의 격렬비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