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나무Cape Jasmine , 梔子 , クチナシ梔子
분류학명
꼭두서니과 |
Gardenia jasminoides |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 가는 고향의 슬프디 슬픈 해안통(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천막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청마 유치환의 시 〈치자 꽃〉이다.
치자 꽃은 살짝 우윳빛이 들어간 도톰한 여섯 장의 꽃잎이 활짝 피어 있어서 마치 예쁜 아기 풍차를 보는 듯하다. 으스름에 바라보는 꽃은 새치름한 눈매에서도 가버린 이에 대한 아쉬움을 찾아낼 수 있는 소복의 여인처럼 언제까지나 지켜보아야 할 것 같은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노란 꽃술 무더기에서 퍼져나와 코끝을 살짝 스칠 때 느껴지는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더더욱 기다리는 이를 감질나게 하는 꽃이다. 유치환은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시조 시인 이영도 여사와 연서를 주고받으면서 이렇게 치자 꽃에 비유한 것 같다.
치자나무는 불가(佛家)에서는 흔히 담복(薝蔔)으로 쓴다. 영어로는 ‘케이프 재스민(Cape jasmine)’이라고 하는데, 재스민과 비교될 만큼 향이 진하기 때문이다. 유마대사가 대승의 진리를 설명한 《유마경(維摩經)》에서는 “치자나무 숲에 들어가면 치자 향기만 가득하여 다른 향기는 맡을 수 없다”라고 했다.
강희안은 그의 원예전서인 《양화소록》에서 “치자는 꽃 가운데 가장 귀한 꽃이며, 네 가지 이점이 있다”라고 했다. “꽃 색깔이 희고 기름진 것이 첫째이고, 꽃향기가 맑고 풍부한 것이 둘째다. 겨울에도 잎이 변하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열매로 황색 물을 들이는 것이 넷째다” 라고 하여 치자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꽃이 지고 나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치자나무는 이런 아픔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듯, 쓰임새가 무궁무진한 열매를 매달아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아 놓았다. 치자나무 열매에는 크로신(crocin)과 크로세틴(crocetin)이라는 황색색소를 가지고 있어서 천연염료로 먼 옛날부터 널리 쓰여 왔다. 열매를 깨뜨려 물에 담가두면 노란 치자 물이 우러나온다. 농도가 짙을수록 노란빛에 붉은 기운이 들어간 주황색이 된다. 이것으로 삼베, 모시 등의 옷감에서부터 종이까지 옛사람들의 생활용품을 아름답게 물들일 수 있었다. 걸핏하면 발암물질이 들어 있다고 난리를 피우는 지금의 인공색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무공해 천연색소의 으뜸자리에 있다. 옛날에는 각종 전(煎) 등 전통 음식의 색깔을 내는 데 빠질 수 없는 재료였다.
열매의 또 다른 쓰임새는 한약재다. 《동의보감》에 보면 “가슴과 대장과 소장에 있는 심한 열과 위 안에 있는 열기, 그리고 속이 답답한 것을 낫게 한다. 열독을 없애고 오줌이 잘 나오게 하며, 황달을 낫게 한다. 소갈을 멎게 하며, 입안이 마르고 눈에 핏발이 서며 붓고 아픈 것도 낫게 한다”라고 소개할 정도다.
치자나무는 중국에서 들어왔다. 《삼국유사》 〈탑상〉 제4의 ‘만불산’ 이야기에 담복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에 벌써 우리 곁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늘푸른나무로서 따뜻한 곳을 좋아하여 주로 남해안과 도서지방에 심어야 잘 자라며, 키가 2~3미터 정도로 작은 나무다. 잎은 마주나기로 달리며 긴 타원형이고, 표면이 반질반질하며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고, 초여름에 흰빛으로 피어 짙은 향기를 풍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장미과에 속하는 꽃들의 대부분은 꽃잎이 다섯 장이지만, 치자나무는 여섯 장의 꽃잎을 갖고 있다. 열매는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긴 타원형이고, 세로로 6~7개의 능선이 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주황색으로 익는다.
치자나무와 비슷하지만 잎과 꽃이 작고 꽃잎이 만첩의 여러 겹으로 된 것을 ‘꽃치자’라고 한다. 꽃치자는 향기가 너무 강하여 가까이서 맡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은은한 향을 즐기려면 홑꽃을 달고 있는 치자를 심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