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앞 5만여 군중 전두환 화형식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아침부터 운집한 5만여 군중이 도청앞에서 전두환 화형식을 비롯한 성토를 시작하며 대대적인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궐기대회에서 어느 한 서점에서 제작한 전두환 화형식을 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이 대회에는 계층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민이 참가하였다. 대회가 한창 진행중인 16:30분 경부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시민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미쳐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음에도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계속 비를 맞으면서 대회를 지켜보았다. 한편 계엄분소에 다녀온 수습위는 계엄사측으로부터 약속 받은 8개 사항을 인쇄한 '계엄분소 방문협의 결과보고'라는 전단을 배포하였다. 이날도 도청내에서는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시체가 여러 구 발견되었으며 시내 외곽에서는 계엄군과 시위대가 서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대치하며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다. 광주 시가지에 수습대책위와 계엄군의 협상내용을 전단지로 인쇄한 유인물로 발표하였다.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며, 연행자 9백27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으며 보상계획 수립과 치료대책 완비, 사실보도에 대한 노력, 폭도나 불순분자라는 용어사용 중지, 비무장 민간인의 시외통행, 사태수습 후 보복금지 등을 약속하였다. 계엄분소장은 이날 오전, 전날 오후 6시 개통된 광주 KBS방송을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무기 소지자 중 광주시내 거주자는 국군통합병원에 반납토록 하고 기타 지역은 군부대와 경찰서에 반납하라'는 내용과 이 담화는 계속 '무기를 반납하면 일체 불문에 부치겠으며 만약 시한까지 반납하지 않아 중대결심을 하는 괴로움을 없게 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민들도 무기반납을 원했으며 시위대들도 전일빌딩에 자진 '무기회수반'을 설치 운영하였다. 한편 시민대책위원인 신부, 변호사, 목사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휴대하고 군과 대치중이던 시민군 38명과 지원동에서 13명 등을 도청으로 데리고 와 울면서 설득. 1시간 만에 무장 해제 시키는데 성공하였고 그러나 화정동 등 시외로 빠지는 6개 외곽도로에서는 아직도 일부가 무장, 대치하고 있었고 특히 화정동 공단입구에서는 인근 서광제재소에서 옮겨온 대형 원목 1백여개와 버스, 트럭, 지프차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20여 무장대원이 지키고 있었으며 시내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시민을 신분 확인후 통과시키고 있었다. 낮 12시가 지나면서 사태수습은 급진전 선회하여 총을 들고 도청을 경비하던학생들이 총기를 회수반에 내주었고, 학생, 시민들이 착용하고 있는 헬멧, 방석복 등 군경복장 및 장비도 폭도로오인 받을 것을 우려하여 모두 반납하였다.
제 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 청년들에 의해 '제2차 민주수호 범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이름을 궐기대회라는 딱딱한 용어를 피해 '자유성토대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대회는 도청 광장과 금남로 그리고 인근 도로를 꽉 메운 10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스피커 소리가 끊기기도 했는데, 주최측은 도청에서 방해한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궐기대회 도중 마이크가 자꾸 꺼져버렸다. 그때는 앰프시설이 좋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궐기대회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정보원이 도청으로 들어가 방송시설을 분해해서 들리지 않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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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등장과 민주시민 강령 광주시의 표정은 점차 안정을 되 찾아가는 듯했으나, 시 외곽 지역에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총성 때문에 여전히 긴장감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새벽 6시부터 남녀 고교생 7백여 명(여학생 50명)은 시내 전역의 청소작업에 앞장섰다. 이에 대해 수많은 시민들이 호응, 청소를 함께 했으며 대다수의 상가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한빌딩 앞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날 처음으로 전일빌딩 앞에 '민주시민 강령'을 공고하면서 '시민군'이란 말이 등장하였고 4개항으로 된 강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1) 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2) 시민군은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3) 질서회복에 힘씁시다. 4) 평소 생활로 복귀합시다. |
학생, 청년수습위 민주인사들과 만남 5월25일 오전 11시경 학생, 청년 수습위는 민주인사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광주시내 YWCA 2층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당시 참석했던 민주인사 를 보면 홍남순(변호사), 이기홍(변호사), 이성학(장로), 송기숙(전남대 교수), 명노근(전남대 교수), 장두석(신협 이사), 윤영규(장로), 조아라(YWCA 회장), 이애신(YWCA 총무), 박석무(대동고 교사), 윤광장(교수) 등이 참석했고, 학생.청년 대표로는 정상용과 윤상원이 참석하였다. 명노근 교수는 '더 이상의 시민희생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박석무는 '그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협상이다. 최소한 김대중을 비롯한 구속인사들이 석방되고 폭도라는 말도 취소해야 협상이 되지 않겠느냐'고 발언을 하고, 이기홍은 '강경파 학생들이 도청으로 들어가서 학생위원회와 경비원을 장악하고 김대중 석방 할 때까지 투쟁을 해야 한다 우리 재야인사들도 도청 수습대책위원회를 장악할 것이니 염려말고 투쟁하라. 다른 것은 몰라도 김대중 석방은 관철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홍남순도 이를 적극 지지하며 반복하여 이를 강조하고 시민대표를 장악하겠다'고 말하여 정상용, 윤상원으로 하여금 도청 폭도조직을 장악하도록 하고 최종적으로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을 정부에 요구하여 관철될 때까지 강력하게 계엄군과 대치하여 투쟁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학생. 청년측은 '민주화를 앞당기고 지금까지의 투쟁을 무의미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싸워야 하며 무기반납은 할 수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학생.청년들은 '싸움은 우리가 할테니 어른들은 새로운 도청 수습위에 합류하여 우리들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무기반납 식을 도청 앞 광장에서 갖기로 했던 것이 백지화되고 다시 도청앞에서 제3차 시민궐기대회가 약 5만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개최된 궐기대회에서 애국가를 부른 후 사망자에 대한 묵념과 상황보고에 이어 우리의 결의,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껍데기 정부와 계엄당국을 규탄한다, 희생자 가족에게 드리는 글, 전국 종교인에게 보내는 글, 전국 민주학생에게 보내는 글을 순서대로 낭독하였다. 제3차 시민궐기대회 마친 후 시민과 학생들은 검정 리본 달고 가두시위에 참가하였고 '계엄 철폐하라'는 등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며 도청앞을 출발, 금남로, 광주역, 광주고속버스터미널, MBC 등을 돌아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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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대책위 시민생활 정상화에 노력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는 그 명칭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민주시민투쟁위원로 바꾸고 무장투쟁을 준비해 가는 한편, 시민들의 민원사항 등을 처리하기 위해 행정체계를 정립해 갔다. 아침 일찍부터 각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시민생활 정상화에 노력했으며, 기동타격대로 재조직된 무장병력은 시내순찰과 계엄군의 동태 파악, 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농성동 한전 앞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자 전 시민군에 비상령이 떨어졌다. 계엄군은 세 차례에 걸쳐 계속해서 최후통첩을 보내왔으며,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은 기정 사실화되어 갔다. 이날은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시민들은 심한 고립감과 불안 속에 밤을 맞았고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끝까지 광주를 지키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최후의 항전을 대비했다. 기동타격대 요원과 투쟁위원회,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예비군, 학생 등으로 조를 편성하여 도청 방어작전에 돌입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는 길목에도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이미 지역방위군이 편성 운영되는 곳도 있었다.
시민수습대책 위원들의 죽음의 행진 계엄군이 농성동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바짝 압축해 들어오고 있다는 제보를 접수한 수습위는 도지사실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계엄군이 진입하면 광주는 피바다가 될 것이 자명하다며 '17명이 총알받이로 나가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일시적이나 막자'고 결의 수습위원을 중심으로 농촌진흥원 앞까지 죽음의 행진을 벌였다. 진입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탱크 앞에 드러누워 '우리 먼저 깔아뭉개고 지나가라'며 목숨을 걸고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저지하였다.
제 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계엄군의 진입 소식이 전해지자 궁금한 시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도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어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임시로 개최되었다. 계엄군측의 협상을 위반한 사실, 그들의 시민 이간 책동을 성토하였으며 16일부터 26일까지의 시민군의 투쟁보고와 계엄군과 허수아비 최규하 과도정부에 대한 성명서 낭독, 계엄군에게 보내는 글 향토예비군에게 알리는 글 고등학생에게 알리는 글 전 언론인에게 보내는 글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이 채택되었다. 3만여 군중이 모인 이날 궐기대회는 엄태주의 사회로 실시되었다.
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오후 3시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계엄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시민 5천여 명이 화정동 대치지점까지 시위를 한 후 도청으로 돌아왔다. 이날 궐기대회 집행부는 성명서를 낭독하던 종전의 대회와는 양상을 달리하여 시민행동강령을 채택하여 발표했다. 5차 대회 때는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연단에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체험담과 목격담을 토로했다. 또 해방 후 현재까지의 정치, 경제적인 문제점 등을 성토하기도 했다. 한 아주머니는 연단에 올라가서 교도소 부근에서 공수들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얘기를 하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통곡을 하였다. 어떤 여교사는 현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이냐고 진지하게 물었고 또 시민궐기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는 아주머니는 폭도와 깡패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TV 보도를 듣고 무서워서 나오지 않았는데 직접 와보니 전혀 다르다는 말을 하면서 시외지역이나 변두리에 와서도 홍보를 해달라는 부탁의 말까지 하고 연단을 내려갔다. 3:00에 시작된 제5차 궐기대회가 거의 끝나갈 5시 30분 무렵, 30대 초반의 한 고교교사가 연단에 올라와, '나는 학생수습위의 한 사람으로 고생하는 후배들을 옆에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주책없이 끼어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여러분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궐기대회가 거의 끝날 무렵, 상무대에 근무하는 방위병으로부터 내일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군병력 증강 소식과 계엄군의 사기앙양을 위한 돼지고기 파티가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 상무대에 근무하는 장교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위험하니까 절대 집 밖에 나오지 말라는 말을 통해서 짐작한 것이다. 우리는 왜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 등의 성명서를 낭독하고, 이 대회가 끝나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워서 광주를 지켜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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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의 충정작전과 최후의 항쟁 외곽지역의 시민들로부터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제보가 속속 들어오고 도청 행정전화가 끊기자 도청 상황실은 술렁거리기 시작 하였으며 홍보부 에서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결정하고 광주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마지막 가두방송을 하였다"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애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공수부대의 특공조는 26일 오후 6시에 도청의 항쟁지도부를 '소탕'하기 위한 예행연습을 완료했다. 이들은 밤 11시경 이동을 시작,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하여 조선대 뒷산에 집결, 작전계획을 최종 점검한 후 3시와 3시 30분경에 각기 도청,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도청의 시민군은 도청 전면과 측면에 2∼3명씩 1개조로 담장을 따라 배치되었고 도청 안에는 1층부터 3층까지 유리창 옆에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하였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가 맹렬히 총을 쏘아대자 곧이어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하여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그야말로 '폭도소탕작전', 바로 그것이었다. 동이 터오기 사작하는 오전 5시 10분경 이미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 당했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났다. 완전히 소탕했음을 확인한 3공수 특공조는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한 후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한편 라디오 방송에서는 폭도들은 투항하라', '도청과 광주공원도 군이 장악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한다', KBS 광주 방송은 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이 같은 방송을 되풀이하였고 간간이 행진곡도 들려줬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 왔다.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폭도'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계엄군은 작전을 개시한지 약 1시간 30분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짓고 항쟁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80년 5월 광주민중의 무장투쟁도 열흘간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피로 물든 아침은 밝아오고 80년 5월의 광주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타오르던 5·18민중항쟁의 불꽃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함께 쓰러져버렸다. 그러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면서 그 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결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민주화의 횃불로 지켜주고 있다. |
출처:5.18 민주부상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