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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장 16-21절. 사도직과 교회를 위한 어리석은 자랑
1. 지난 시간에는, <사탄에게 속지 말고, 하나님께 충성합시다>란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비방하기를, 바울은 참 사도가 아니므로,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또 거짓 사도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굳이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고수했습니다.
2. 오늘은, 바울 사도가 거짓 사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3. 설교의 제목은 <복음과 사도직을 위한 어리석은 자랑>입니다.
4. 서언
(1) 바울은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10:12, 11:1).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사도직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도 자신의 정당한 업적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자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2) 거짓 사도들의 자기 자랑이 어리석으며, 그것에 현혹되는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은 것처럼, 바울도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자신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야기가 서로 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일단 어리석은 자와 동일하게 자랑을 하자면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업적이 있었습니다(22-33절).
(4) 본문은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1-6절) 이후 잠시 다른 주제를 다루다가(7-15절) 다시 본 주제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일을 결코 쉽게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한편 바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고 말한 1절과 모순되게도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설득하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①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자랑은 자랑을 위한 자랑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사도들의 거짓된 자기 자랑을 폭로하여, 결과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적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②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을지라도 그 자랑은 자신의 지혜와 권위를 스스로 과시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고린도 교회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6) 바울 사도도 거짓 사도들처럼 기탄없이 자랑을 하려고 하니, 어리석은 자로 용납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 바울 사도는 22절까지 어리석은 자랑, 가문 자랑 혈통 자랑을 하다가, 23절부터는 주님을 위해서 희생한 고난들을 자랑하게 됩니다.
16절.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gain I say, let no one think me foolish; but if you do, receive me even as foolish, so that I also may boast a little.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Πάλιν λέγω, μή τίς με δόξῃ ἄφρονα εἶναι·
again I say, no one me should think fool to be
‘말하노니’(λέγω)는 현재형으로서(I say)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어리석은 자로’에서 동사(εἶν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be), ‘여기지 말라’에서 동사(δόξῃ)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should think) 확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만일 그러하더라도--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εἰ δὲ μήγε, κἂν ὡς ἄφρονα δέξασθέ με,
if however otherwise, even as fool receive me
‘받으라’(δέξασθέ)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receive) 확실히 받으라는 뜻입니다.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ἵνα κἀγὼ μικρόν τι καυχήσωμαι.
that I also little some I may boast
‘자랑할 수 있도록’(καυχήσωμαι)은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may boast) 확실하게 자랑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길(G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을 많이 자랑했고,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을 오랫동안 용납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랑하더라도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조금 자랑하는 것을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이 자랑할 특별한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the false apostles boasted much of themselves, and they bore with them, and had done so for a great while; and therefore it was no unreasonable request he made, that they would also suffer him to boast of himself a little, especially since there was such an absolute necessity for it.)
1. 바울 사도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비방하기를, 바울은 참 사도가 아니므로,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또 거짓 사도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굳이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고수했습니다.
2. 오늘은, 바울 사도가 거짓 사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10:12, 11:1).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사도직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도 자신의 정당한 업적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자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의 자기 자랑이 어리석으며, 그것에 현혹되는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은 것처럼, 바울도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자신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야기가 서로 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26:5.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일단 어리석은 자와 동일하게 자랑을 하자면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큰 업적들이 있었습니다(22-33절).
본문은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진술한(1-6절) 이후 잠시 다른 주제를 다루다가(7-15절) 다시 본 절의 주제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일을 결코 쉽게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한편 바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고 말한 1절과 모순되게도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설득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울의 자랑은 자랑을 위한 자랑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사도들의 거짓된 자기 자랑을 폭로하여 결과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적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자랑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을지라도 그 자랑은 자신의 지혜와 권위를 스스로 과시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고린도 교회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3. 이처럼 바울 사도도 거짓 사도들처럼 기탄 없이 자랑을 하려고 하니, 어리석은 자로 용납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 바울 사도는 22절까지 어리석은 자랑, 가문 자랑 혈통 자랑을 하다가, 23절부터는 주님을 위해서 희생한 고난들을 자랑하게 됩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1. 바울은 1-6절에서 자기 자랑이 어리석은 일임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7-15절에서 자신이 사례비 받지 않는 것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16절부터 자랑이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다시 말한다>고 했습니다.
2.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다시>라는 말은 앞에 1-6절에서 말한 것을 다시 말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1. 이 말은 바울이 자기 자랑을 하더라도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앞에서는 자기 자랑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면서도 여기서 자기 자랑을 어리석게 여기지 말라고 했을까요?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의 자기 자랑은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고, 바울이 여기서 자기 자랑하는 것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고린도 교회의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하고, 자기들이 참 사도인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추천서를 써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을 받지 않고 올바른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자기 자랑을 해도 순전히 주님을 위한 것이고, 복음을 위한 것이고, 고린도 교인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자기 자랑을 하면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에 유익을 주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억지로라도 하기 싫은 자기 자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자기 자랑을 고린도 교인들이 억지로 시킨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2. 이처럼 바울은 오직 교인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서 자기 자랑을 했으므로, 교인들에게 자기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3.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와서 제가 고려대학교 나왔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고려대학교를 대단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와 제 아내는 늘 다니던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김*환) 저에게 고려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는데, 거짓말한다고 교회의 중직자들에게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러자 저는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서 할 수 없이 고려대학교 나온 것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제가 세상 권세 버리고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시골에 파묻혀서 조용히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짓밟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신을 밝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35년 만에 동창생들을 찾게 되니까,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한 대학교 동창생은 현재 법무부 장관(이*남)을 하고 있는데, 35년만에 연락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건강의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지난번에는 고등법원장(정*주)이 여기에 찾아와서 이곳 지방법원장에게 저를 소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수에게 말해서 저와 함께 나로도 우주발사장 구경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면, 장관이나 고등법원장이 시골에서 목사하고 있는 저를 우습게 볼 것이지만, 정중하게 <목사님 목사님>이라고 하고, <선배님 선배님>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높은 분들이 찾아온다고 하니까, 공무원들은 대단하게 생각해서, 박*종 군수도 저희 교회에 오기로 했습니다.
3. 이처럼 바울 사도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억지로 자기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어리석은 자랑을 하더라도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2절에서 자기 자랑을 하다가, 23절부터 28절까지는 교회를 위한 수고를 자랑했습니다.
2. 이처럼 바울 사도는 자랑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가도록 돕기 위해서 자랑을 했습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따르지 말고, 참된 복음을 전하는 참 사도 바울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자랑을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자랑은 신앙적 차원에서 선한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좀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2. 원래 사람이 자기 자랑하는 것은 다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참 사도라고 주장하고 자기들을 엄청 자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인물 자랑, 언변 자랑, 학벌 자랑, 가문 자랑, 지위 자랑, 체험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자 된 사람도 주님이 재물 얻을 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4.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주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일 뿐이지만, 주님이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약하고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서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약할 때가 곧 강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처럼 겸손할 때 주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이고 약한 우리들은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7절.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at I am saying, I am not saying as the Lord would, but as in foolishness, in this confidence of boasting.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ὃ λαλῶ, οὐ κατὰ Κύριον λαλῶ,
what I say, not according to Lord I say
직역하면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란 뜻입니다.
그래서 앞의 동사(λαλῶ)나 뒤의 동사(λαλῶ)가 다 현재형으로서(I say) 현재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ἀλλ’ ὡς ἐν ἀφροσύνῃ,
but as in foolishness
직역하면 ‘오직 어리석음 가운데서 (자랑하는 것) 같이’란 뜻입니다.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ἐν ταύτῃ τῇ ὑποστάσει τῆς καυχήσεως.
in this the confidence of the boasting
직역하면 ‘이 자랑의 신뢰로써’란 뜻이고 ‘기탄없이’란 한글 번역은 좋은 번역입니다.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다’란 뜻은 ‘나는 주님에게 영감을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는 뜻이거나, 더욱 가능성 있는 것은 ‘내가 주 예수님의 본을 따르지 않으면서 이 말을 한다는 것이고, 엄격히 예수님의 추종자로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극히 겸손하신 분이시고, 결코 자기 자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마 나는 이 말을 하는 데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자랑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순전한 모본을 떠나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의해 내가 자랑하게 되었고, 내가 자랑은 어리석은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내 사도직과 권위를 생각할 때 나는 이렇게 어리석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I speak it not after the Lord - see the note on 1 Corinthians 7:12. The phrase here may mean either, I do not speak this by inspiration or claiming to be inspired by the Lord; or more probably it may mean, I do not speak this imitating the example of the Lord Jesus or strictly as becomes his follower. He was eminently modest, and never vaunted or boasted. And Paul probably means to say, "I do not in this profess to follow him entirely. I admit that it is a departure from his pure example in this respect. But circumstances have compelled me and much as I would prefer another strain at remark, and sensible as I am in general of the folly of boasting, yet a regard to my apostolic office and authority urges me to this course.")
재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다’란 것은 원래 바울이 기록한 모든 말씀은 영감된 권위를 가지고 있는데, 바울이 이 자랑을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과 인도에 따라서 영감된 권위에서 제외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바울이 자랑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성령님의 허락하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에게서 벗어나서 바울 사도에게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자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말씀은 영감되지 않은 성경이라는 증거가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자랑이 일반적으로 자랑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바울의 자랑이 ‘주님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의 겸손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주님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not after the Lord—By inspired guidance he excepts this "glorying" or "boasting" from the inspired authoritativeness which belongs to all else that he wrote; even this boasting, though undesirable in itself, was permitted by the Spirit, taking into account its aim, namely, to draw off the Corinthians from their false teachers to the apostle. Therefore this passage gives no proof that any portion of Scripture is uninspired. It merely guards against his boasting being made a justification of boasting in general, which is not ordinarily "after the Lord," that is, consistent with Christian humility.)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1. 바울은 평소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믿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 사도도 증언하기를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15-16.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이렇게 바울은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 자랑하는 것은 주님을 따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랑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2.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바울의 말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22-28절에서 바울이 자랑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바울의 인간적인 말이라고 잘못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바울의 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바울을 감동하셔서, 22-28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감정이나 인간적인 경험이나 자료 수집조차도 성령으로 감독하셔서 오류가 없도록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역사적인 자료를 조사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으나, 아무런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습니다.
구약성경도 선지자들이 기록할 때, 역사적인 사실들을 자료로 얻어서 기록했어도 오류가 없이 기록하도록 성령님께서 간섭하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성경은 사탄 마귀의 말을 인용한 것이 있어도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즉 창세기에도 에덴동산에서 뱀의 말이 기록되었고, 욥기에도 사탄이 욥을 참소하는 말도 기록되었으며, 마태복음에도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말이 기록되었어도, 모두 성령님께서 기록자들을 감동하셔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내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고 기록한 내용도 모두 성령님의 감동과 섭리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약 39권 신약 27권의 성경은 모두 완전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에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이 성경의 일점일획도 변경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구약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와 능력 받아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1. 원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을 절제하여 자랑하고 싶어도 참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참지 못하고 자랑을 막 쏟아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참지 않고 기탄없이 자랑하겠으니, 용납해달라고 합니다.
2.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가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자랑할 만한 큰 자랑거리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한 수고는 장차 천국에서 상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자랑은 다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평생 수고와 슬픔뿐이고, 이 세상과 더불어 세상 자랑은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러나 이런 자랑도 결국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의 약한 것들을 자랑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에 주님의 은혜가 강하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3.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예를 들면 에디슨은 귀가 먹었기 때문에 발명왕이 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호킹 박사는 자기가 장애자가 되었기 때문에 딴 짓을 않고 연구에 몰두했다고 자기의 장애를 자랑했습니다.
레나 마리아도 자기가 국제 콩쿨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자기가 장애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노래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장님 크로스비는 자기가 장님이 되었기 때문에 신령한 눈을 떠서 찬송시를 많이 지었다고 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폐병으로 죽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간절히 찾았고, 평생 은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송명희 시인도 뇌성마비 장애 때문에, 남이 보지 못한 것 보았고, 남이 갖지 못한 것 가졌다고 찬양했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유명한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을 자랑했습니다.
4.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큰 은혜들을 체험한 것은 자기의 말할 수 없는 약점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약점들 때문에 바울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5. 그러면 여러분들의 약점을 무엇입니까?
육체적 장애입니까?
정신적 장애입니까?
낮은 학력입니까?
가난입니까?
약한 미모나 상처 많은 가정입니까?
그런 약점을 무시하지 말고, 인정해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약점이 보석이 되고,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며 많은 사람에게 큰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하지 마시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그래서 큰 은혜 받으시고 크게 일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8절.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ince many boast according to the flesh, I will boast also.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ἐπεὶ πολλοὶ καυχῶνται κατὰ τὴν σάρκα,
Since many boast according to the flesh,
‘자랑하니’(καυχῶνται)는 현재형으로서(boast) 현재 자랑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도 자랑하겠노라.
κἀγὼ καυχήσομαι.
I also I will boast
‘자랑하겠노라’(καυχήσομαι)는 미래형입니다(I will boast).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한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거짓 교사들이 자기 출생이나 지위나 재주나 언변 등을 자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Seeing that many glory ... - The false teachers in Corinth. They boasted of their birth, rank, natural endowments, eloquence, etc.; see 2 Corinthians 11:22. Compare Philippians 3:3-4.)
‘나도 자랑하겠노라’는 것은 나도 내 재능을 자랑하겠다는 것인데, 바울의 자랑은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것과는 다소 다르지만, 육체에 속한 것들을 그가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출생과 지위 같은 것인데, 바울이 육체로 견딘 것 즉 채찍에 맞고 옥에 갇힌 것들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I will glory also - I also will boast of my endowments, which though somewhat different yet pertain in the main to the "flesh" also; see 2 Corinthians 11:23 ff. His endowments "in the flesh," or what he had to boast of pertaining to the flesh, related not so much to birth and rank, though not inferior to them in these, but to what the flesh had endured - to stripes and imprisonments, and hunger and peril.)
재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사람’이란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many—including the "false teachers.")
‘육체를 따라 자랑한다’는 것은 육적인 사람들이 자랑하기를 원하는 것 즉 외적인 장점들로서 예컨대, 출생이나 업적 등을 자랑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after the flesh—as fleshly men are wont to boast, namely, of external advantages, as their birth, doings, &c. (compare 2Co 11:22).
‘나도 자랑하리라’는 것은 나도 그러한 육적인 장점들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점들에서 나도 그들만 못하지 않다는 것을 너희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에게 내가 평가 절하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내가 실로 자랑하기를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I will glory also—that is, I also will boast of such fleshly advantages, to show you that even in these I am not their inferiors, and therefore ought not to be supplanted by them in your esteem; though these are not what I desire to glory in (2Co 10:17).
마튜 폴(Matthew Pool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를 따라’란 육적인 것, 외부적인 것들을 가리키며, 그것들이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은총들일지라도, 그것들은 그 사람을 하나님께 추천할 만한 것들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By the flesh is meant, carnal and external things; which though they be the gifts and favours of God, yet do not at all commend a man to God.)
바울 사도는 ‘여러 사람들이 육체를 따라 자랑한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육체를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들의 성취물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유명한 고린도 교회에는 본래 유대인인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기들의 부유함과 지식과 배움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The apostle saith, there are many that glory after the flesh; and there needs must be such in all places, because there are many that walk after the flesh: now, it is but natural for men to boast and glory in those attainments, which it hath been the business of their lives to pursue after. Such there were, doubtless, in this famous church, who gloried that they were native Jews, or in their riches, or in their knowledge and learning.)
‘나도 자랑하리라’는 것은 만일 내가 이것들이 자랑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보다 더 많은 자랑거리들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I will glory also; and let them know, that if I thought these things worth the glorying in, I have as much to glory in of that nature as any of them have.)
1. 여러 사람들은 육신을 따라 자랑합니다.
이런 자랑은 가문 학벌 권력 돈 명예 등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추천서를 자랑하고, 인물을 자랑하고, 언변을 자랑하고, 환상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세상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빌 3:8)
빌립보서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2. 자랑은 내가 무엇을 가졌느냐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느냐를 자랑해야 합니다.
(예화) 네 개의 강물들이 서로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나일강이 긴 목을 빼고 거만스럽게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4,000마일 이상을 여행한단다. 나보다 더 긴 강은 없을 걸
그러자 다뉴브강이 입을 삐죽였습니다.
나는 매일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지. 내 품에 안긴 저 수많은 배들을 좀 보렴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갠지스강이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이 어리석은 친구들아. 나를 좀 보라구. 사람들은 이 거룩한 물에 몸을 씻기 위해 몰려들고 있어.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는 내가 최고의 강이 아닌가.
세 강의 다툼을 지켜보던 작은 개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자랑할 것이 없어요. 다만 저는 비가 오면 그것을 저장했다가 논밭으로 흘려보내지요. 그것으로 논밭에는 풍성한 열매가 맺히고 굶주린 사람들을 돕는답니다. 저는 단지 물을 흘려보내는 작은 강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작은 개울과 같습니다.
즉,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조용히 남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4-5절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래서 바울 사도도 자기의 육신적인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것만을 자랑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4-2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4. 이와 같이 자랑하는 자는 이기적인 자랑을 하지 말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 수고한 것 즉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5. 그래서 바울은 육신적인 자랑은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약한 것들만을 자랑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하면 내가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역사하여, 오히려 내가 은혜로써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10.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은혜 안에서 강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1.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
그리고 마음을 식물로써 강하게 하지 말고 은혜로써 강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6. 그러므로 육신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 주는 것으로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적 권세를 자랑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육신적인 자랑을 한다고 하면서도, 오직 주님과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것만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 명예를 위해서 자랑하지 않고,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의 율법주의 미혹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참된 말씀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가 참 사도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 자랑, 복음 선전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 자랑, 복음 선전, 그리고 남의 유익을 위한 자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기를 축원합니다!
19절.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you, being so wise, tolerate the foolish gladly.
ἡδέως γὰρ ἀνέχεσθε τῶν ἀφρόνων, φρόνιμοι ὄντες·
gladly for you bear with the fools, wise you being.
직역하면 ‘왜냐하면 너희는 지혜로운 자인데,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자인데’에서 동사(ὄ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you being) 현재 지혜로운 자인 것을 가리키고, ‘용납하는구나’(ἀνέχεσθε)는 현재형으로서(you bear with) 현재 용납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어리석은 자들을 잘 용납하는구나’란 말씀은 너희가 진짜 어리석은 자들을 용납하고 관용하고 있다는 뜻인데, 이 말은 브룸필드 박사의 말처럼 아마도 바울이 말한 것 중에서 가장 비꼬는 말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지혜로운 자라고 말하면서, 자기들의 업적들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잘 용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가 자랑하는 것을 용납하게 하고 여러분의 사랑을 받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들을 쉽게 알아보는 매우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대단히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내가 어리석은 사람인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자랑하는 다른 사람들도 어리석은 사람들임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어리석은 자들은 잘 용납하고 있고, 그들이 여러분의 호의를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머지 어리석은 자들 속에 들어가서 여러분의 호의를 얻기를 바랍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의 은사들을 자랑하는 거짓 사도들을 과거에도 용납했고, 아직도 거짓 사도들은 지혜와 분별력이 뛰어나다고 주장했습니다. (For ye suffer fools gladly - You tolerate or endure those who are really fools. This is perhaps, says Dr. Bloomfield, the most sarcastic sentence ever penned by the apostle Paul. Its sense is, "You profess to be wondrous wise. And yet you who are so wise a people, freely tolerate those who are foolish in their boasting; who proclaim their own merits and attainments. You may allow me, therefore, to come in for my share, and boast also, and thus obtain your favor." Or it may mean, "You are so profoundly wise as easily to see who are fools. You have great power of discernment in this, and have found out that I am a fool, and also that other boasters are fools. Yet knowing this, you bear patiently with such fools; have admitted them to your favor and friendship, and I may come in among the rest of the fools, and partake also of your favors." They had borne with the false apostles who had boasted of their endowments, and yet they claimed to be eminent for wisdom and discernment.)
길(G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란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은 거짓 사도들을 용납했고, 자기 자랑을 하면서 어리석음을 계속 선포하고 있는 거짓 사도들을 계속 용납하고 있었고, 그것도 기쁨으로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For ye suffer fools gladly,.... They bore with the false apostles, who were fools; were continually proclaiming their folly, boasting of themselves, ascribing that to themselves which did not belong to them, and were puffed up by their fleshly minds; they indulged these men in their folly, and that with pleasure and delight;)
바울 사도가 신중하게 이 말을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헛된 자랑을 하고 있는 거짓 사도들을 용납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도 기쁨으로 용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는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고, 모든 것에 부유한 사람이고, 모든 지식을 갖춘 자들이고, 지혜의 영으로 교훈을 받고, 그리스도를 아는 계시를 받고, 복음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을 용납하고 특히 기쁘게 용납하는 것을 바울은 놀랍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 These words may be considered either as spoken seriously by the apostle, and as wondering that they should suffer such fools to go on in their vain boasts, and especially with pleasure; since they were men of wisdom, who were otherwise taught of God, and by the word; they had been made wise unto salvation, and were enriched in all utterance, and in all knowledge; they had been instructed by 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in the knowledge of Christ, and in the mysteries of his Gospel; and therefore it was surprising that they could bear with such vain and foolish men, and especially with delight;)
마지막 구절은 비꼬는 말로 생각되고, 그런 어리석은 자들을 고린도 교인들이 용납하는 것에 대해 바울이 심각하게 비웃는 말입니다. 마치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런 멍텅구리 같은 사람들을 용납하고 대화하고, 헛된 말을 지껄이면서 기뻐하느냐는 뜻입니다. (or else the last clause may be considered as spoken ironically, and as a severe jibe upon their folly for tolerating such a parcel of fools among them; as if he should say, you show yourselves to be men of wisdom, as you would be thought to be; you act the wise part, do not you, in suffering such empty headed men to converse with you, and delight in their vain talk and conversation?)
바울의 말을 요약하면 이런 뜻입니다.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어리석은 자들을 용납하고, 기쁨으로 용납한다면,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어러석음을 좀 용납해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however, the whole furnishes out an argument for the apostle, and which he means to improve; that if they could suffer and bear with such fools, and so many of them, and that gladly, then they might and ought to bear a little with him in his folly, which is what he entreats of them.)
1.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로운 자인데, 어리석은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을 기쁘게 용납한다고 바울이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헬라나라 국민들로서 지혜를 최고의 미덕으로 숭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에서 ‘철학’(philosopy)이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헬라 철학은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고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들로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하고, 로마인은 정의를 추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추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2-23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2.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지혜를 추구하며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지혜롭다는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게도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추종한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고린도 교인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울을 참 사도로 추종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롭다고 자처한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를 전하는 거짓 사도들을 참 사도로 추종했다고 바울은 책망한 것입니다.
3.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세상 지혜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0.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지혜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복음을 잘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기를 미련한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십자가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은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은 눈을 뜬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처하기 때문에 영적 눈을 뜨지 못했고, 소경으로 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영안이 뜨였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4. 그러므로 세상 지혜는 자신을 믿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지혜이지만, 참된 지혜는 자신을 겸손히 낮추면서 하나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좋은 지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면 전 세계 백성들이 과연 이 백성은 지혜가 있는 백성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4: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5.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정작 모르는 사람입니다.
공자가 어느 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 공자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길을 막아섰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린아이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린아이가 자기가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길을 비켜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가 공자에게 저 하늘에 별이 몇 개인가 대답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하늘의 일을 묻지 말고 이 땅의 일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어린아이가 그러면 이 세상에 집의 갯수가 몇 개인지 대답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먼 데 일을 묻지 말고, 가까운 데 일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어린아이가 그러면 공자님의 눈에 붙은 눈썹이 몇 개인가 대답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을 못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양에서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공자조차도 자기가 무식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가 얼마나 짧은 시간을 산다는 것을 깨달아서 하나님 경외하는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90편 12절.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그런데 공자는 겸손하여 어린 소년을 스승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즉 공자(중니;仲尼)는 겸손하여 어린 소년 항탁(項橐))을 스승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三字經: 昔仲尼 師項橐)
<명심보감>에서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데가 없다’(子曰 獲罪於天이면 無所禱也라)고 했고, 맹자도 ‘하늘에 순종하면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孟子曰 順天者는 存하고 逆天者는 亡이니라)고 했습니다.
6. 1937년에 영국의 왕 윌리엄 4세가 죽었습니다.
그날 밤 한 처녀가 영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이 여왕은 64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번영은 바로 이 빅토리아 여왕 때 성취한 것입니다.
바로 영국의 국기 아래 해가 지지 않던 때도 빅토리아 여왕 때였습니다.
이처럼 일찍이 인류의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만큼 위대한 왕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왕이 이렇게 성공적인 왕이 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즉 그녀는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잠시도 자신의 품에서 떠나지 않았던 성경을 놓고 ‘주여, 내가 여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결했고 기도로 정치를 했습니다.
인도의 왕자 한 사람이 “그렇게 정치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성경을 펴들고 “바로 이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성경이 지혜요 능력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6:63.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리는 것은 영이나 육은 무익하니라. 내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말씀 따라 지혜로운 생활을 해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나라가 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절.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you tolerate it if anyone enslaves you, anyone devours you, anyone takes advantage of you, anyone exalts himself, anyone hits you in the face.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너희가 용납하는도다
ἀνέχεσθε γὰρ εἴ τις ὑμᾶς καταδουλοῖ,
You bear for if anyone you enslaves
‘종으로 삼거나’(καταδουλοῖ)는 현재형으로서(enslaves) 현재 종 삼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용납하는도다’(ἀνέχεσθε)도 현재형으로서(you bear) 현재 용납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잡아먹거나
εἴ τις κατεσθίει,
if anyone devours
‘잡아먹거나’(κατεσθίει)도 현재형으로서(devours) 현재 잡아먹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빼앗거나
εἴ τις λαμβάνει,
if anyone takes
‘빼앗거나’(λαμβάνει)도 현재형으로서(takes) 현재 빼앗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스로 높이거나
εἴ τις ἐπαίρεται,
if anyone exalts himself
‘스스로 높이거나’(ἐπαίρεται)도 현재 스스로 높이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뺨을 칠지라도
εἴ τις εἰς πρόσωπον ὑμᾶς δέρει.
if anyone in face of you strikes
직역하면 ‘누가 너희의 빰을 칠지라도’란 뜻입니다.
‘빰을 칠지라도’에서 동사(δέρει)는 현재형으로서(strikes) 현재 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엘리콧(Ellicot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너희를 종 삼을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는 말씀은 대적하는 교사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 디도가 바울에게 말했던 것을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적하는 교사들은 팔레스틴의 바리새주의의 가장 악한 모습을 그대로 했습니다. (마 23:4, 14, 25). 그들은 사람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인간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는 양심의 자유나 이성을 강압적인 율법 규정으로써 억압하고 종 삼았습니다. ( For ye suffer, if a man bring you into bondage.—Every word in the sentence clearly points to something that Titus had told him of the action of these rival teachers. They reproduced, in their worst form, the vices of the Pharisaism of Palestine (Matthew 23:4; Matthew 23:14; Matthew 23:25). They enslaved the consciences of men (the same word is used of the same class of men in Galatians 2:4) by pressing on them an iron code of rules which left no room for the free play of conscience and of reason in those over whom they claimed to act as directors.)
‘누가 너희를 잡아먹거나’란 말은 우리 주님께서 율법 교사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탄핵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 23:14) (If a man devour you.—The word again reminds us of our Lord’s denunciation of the teachers who “devoured widows’ houses” (Matthew 23:14).
‘누가 너희를 빼앗거나’란 말씀은 고린도후서 12장 16절에서 ‘속임수로 취하였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If a man take of you. In 2Corinthians 12:16, we have the same construction (“I caught you with guile”) obviously with this sense.)
‘누가 너희 빰을 칠지라도’란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곧 경험하게 될(행 23:2) 폭행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유대인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것인데, 그들은 대적자를 침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했습니다. 열왕기상 22장 24절에서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미가야 선지자의 뺨을 친 사례에 일찍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 바울 사도는 ‘감독은 구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교회 규칙으로 제정했습니다. (딤전 3:3, 딛 1:7).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난 것을 듣고, 고린도 교인들이 당한 일을 부드럽게 힐책했음에 분명합니다. 바울은 마태복음 5장 39절의 말씀(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을 잊었거나 듣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알고도 잠시 부주의해서 급한 감정으로 인간적 감정에 휩싸여서 영감을 놓쳐버린 것일까요? (If a man smite you on the face.—This last form of outrage was, as St. Paul was soon to experience (Acts 23:2), not unfamiliar to Jewish priests and scribes, as the most effective way of silencing an opponent. We have an earlier instance of its application in the action of Zedekiah, the son of Chenaanah (1Kings 22:24). That it had found its way into the Christian Church in the apostolic time is seen in St. Paul’s rule that a bishop should be no “striker” (1Timothy 3:3; Titus 1:7). It is obvious that he had heard of an instance in which this had actually been done at Corinth, and he taunts them with the tameness of their submission. Did he forget, or had he not as yet heard the law of Matthew 5:39; or was he, knowing it, for a time unmindful of it, in this rush of emotion which he himself feels to be simply human, and therefore not inspired?)
그러나 성경은 한쪽만 봐서는 안 되고, 양쪽 모두를 상호 보완적으로 잘 봐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한 것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원수에게조차도 사랑을 표현해서 복음의 광채를 나타내라는 뜻이고, 오늘 말씀은 교회 성도들이 잘못된 율법주의 이단자에게 억압당하고, 신앙의 파멸을 당하는 것을 당연히 저항하고, 주님과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복음 진리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대제사장의 아랫 사람이 빰을 칠 때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라고 항변하셨습니다. (요 18:22-23)
그리고 바울도 재판정에서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한 자에 대해서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라고 항변했습니다. (행 23:3)- Ellicott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1. 이 말씀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 위에 상전으로 군림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종으로 삼고 부려 먹는 것을 가리킵니다.
원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함으로 죄에서 자유하게 되고, 마귀에게서 자유하게 되고, 죽음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다시 율법으로 종삼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을 할례와 율법으로 종삼으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종노릇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4-5.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2. 군대에서 교관이 훈련병들을 기합을 주려고 하면, 미션을 주고, 그 미션을 이행하지 못한 병사들에게 기합을 줍니다.
예를 들면, 앉은뱅이걸음을 해서 연병장을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병사들이 그대로 합니다.
그렇지만, 교관은 늦게 온 사람은 늦게 왔다고 기합을 주고, 빨리 온 사람은 제대로 오리걸음을 안 했다고 기합을 줍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교사들은 성도들에게 율법 규정을 주고, 성도들을 기합주면서 종 삼으려고 합니다.
3. 과거에 우리나라도 유교 서당의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여러 가지 도덕 기준을 말하고서,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다고 매일 매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옛날 1950-60년대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매일 아침마다 학생들 두발 검사와 복장 검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운동장을 돌라고 하고, 엎드려뻗쳐를 시켰습니다.
4. 이처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율법 조항으로써 종 삼으려고 했습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율법 조항을 가르쳐서,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형벌을 주고, 자기들이 말하는 여러 율법으로써 종살이를 시켰습니다.
5. 오늘날도 어떤 이단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율법 조항을 가지고 교인들을 종살이를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여러 율법 조항들은 전도해야 14만 4천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만이 아니라, 많은 재산을 바쳐야 직분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노력 봉사를 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교복을 벗게 하고, 길거리나 전철 안에서 앵벌이를 하게 합니다.
6. 그러다가 과거에 구원파는 교인들을 산속에 가두어놓고, 강제 노역 봉사를 시켰습니다.
그러다가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수십 명 죽여서 암매장했습니다.
소위 ‘오대양 사건’입니다.
7. 이처럼 율법으로 종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빼앗기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잡아먹거나>
1. 이 말( κατεσθίω: eat up, eat till it is finished, devour)은 기생충이 몸에 달라붙어서 남의 피를 빨아먹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율법으로 억압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사례비를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2. 그러나 바울 사도는 고생해서 고린도 교인들을 예수님 믿고 구원받게 했고, 사례비를 받지 않고 무료로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봉사했습니다.
3. 과거에 율법주의 이단만이 아니라, 오늘날 이단들도 14만 4천이라는 명목을 가지고 얼마나 사람들을 종삼고, 물질과 노력을 착취하는지 모릅니다.
예컨대 신천지 이단이나 여호와증인도 14만 4천에 들기 위해서 전도하러 다니고, ‘파이오니아’라는 직함을 주어서 얼마나 노동 착취를 시키는지 모릅니다.
마치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달란트 점수를 많이 따면,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이단자들은 점수제를 실시하여, 봉사 점수, 전도 점수, 헌금 점수 같은 점수를 매겨서, 그 점수에 따라서 지위를 높여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단들은 이런 점수제로 교인들을 통제하고 종살이를 시킵니다.
그래서 문선명 이단 교주도 자기 주위에 여러 관장들을 두고, 군대 같은 조직을 갖추고 신도들을 통제했습니다.
이처럼 결국 이단자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짐승을 길러서 잡아먹듯이 신도들을 착취합니다.
<빼앗거나>
1. 여기 ‘빼앗는다’(λαμβάνω: receive, take)는 말은 남의 짐승에게 미끼를 던져서 함정에 사로잡고, 자기 것으로 빼앗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수사학적인 달변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을 유혹하여, 율법주의 함정에 빠뜨린 후, 바울에게서 고린도 교인들을 빼앗아갔습니다.
2. 오늘날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들은 불신자를 전도하지 않고, 꼭 기성 교인들을 빼앗아갑니다.
이런 이단들은 성경 공부라는 미끼를 가지고서 기성 교인들을 유혹해서, 14만 4천이라는 함정에 빠뜨리고, 성도들을 이단 집단으로 몰아갑니다.
<스스로 높이거나>
1.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 위에 스스로 자신을 위대한 사도라고 높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 7절에서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2. 이처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자신을 높이고 교인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교인들을 섬겼습니다.
교회에서 높임을 받을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교회에서 주님의 자리에 앉아서 교인들 위에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훌륭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조용히 교인들을 섬기는 분들이었습니다.
광주 동*교회에 박*옥 장로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이분은 광주시 부시장을 하셨는데, 교회에 오시면, 아들뻘 되는 담임 목사님(최*채)에게 무릎을 꿇고 복종하면서 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교회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 교회로 유명합니다.
이처럼 교회에서는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되고, 섬기는 종이 되어야 참된 존경을 받습니다.
<빰을 칠지라도 잘 용납하는구나>
1. 이 말씀은 실제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뺨을 칠지라도, 고린도 교인들이 용납해준 수치의 극치를 가리킵니다.
참 아이러니칼 하게도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을 섬겨주는 바울 사도에게 대해서는 무시하였고, 자기들을 종삼고 재산을 빼앗고 뺨을 치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 대해서는 관용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은 무시하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는 겁을 먹고 잘 대접하는 비굴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도 깡패가 기승을 부리고, 교회에서도 깡패 같은 사람이 교권을 장악하고, 어떤 마을에서도 깡패 같은 사람이 마을을 장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군대 대위로 제대한 남자가 온 마을 사람들을 종삼고, 군림한 것을 보았습니다.
2. 여기서(고후 11:20)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뺨을 맞을 때, 다른 쪽 뺨을 대주는 것만이 아니라, 왜 뺨을 치냐고 항의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셨지만, 마태복음 18장 23절에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대항하셨고, 바울 사도도 사도행전 23장 3절에서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대항했습니다.
본 절에서도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뺨을 칠지라도 잘 용납하고, 대항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쪽만 보아서는 안 되고, 다른 쪽도 보아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같은 다른 예로 마태복음 19장 29절에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하셨으나, 디모데전서 5장 8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예로 고린도전서 1장 11절에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이 있는 것을 아주 강하게 책망했고, 빌립보서 4장 2절에서도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싸우는 것을 화목하라고 강하게 말했지만,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서는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 편당이 있어야 한다고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절에서 할례받으면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없으니라고 했고,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총회에서도 이방인 성도가 할례받을 필요가 없다고 결의했지만, 바울은 사도행전 16장 3절에서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 전도에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4절에서는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 없다고 했으나,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는 만일 고기를 먹는 것이 형제를 실족하게 되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도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3절에서는 이단자들이 혼인을 금하라고 할 것이라고 했으나, 고린도전서 7장 38절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5장 14절에서는 시집가서 애를 낳고 집을 다스리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어느 한쪽만 보고 편파적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고, 종합적으로 보고 잘 판단하고, 구체적인 경우 속에서 살펴보아야 하고, 특히 기도 많이 하면서 성령님의 깨우치심과 인도를 잘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한쪽 면만 보아서는 치우칠 수 있으니, 다른 성경도 잘 보아서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는 성령님의 인도와 지도를 구하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분별력(φρόνησις: prudence, understanding)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 선한 분별력은 이단을 분별하는 데도 중요하고, 교회의 선한 인도자를 식별하는 데도 중요한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3. 광주 외곽지대의 시골 마을에서도 김*진이라는 사람이 깡패 노릇을 해서 동네 운영비를 마음대로 써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뒤에서는 욕을 하지만, 막상 그 사람 앞에서는 아양을 떨면서 잘 보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깡패들이 시골 마을을 장악해도 해결할 길이 막연합니다.
이것은 시골 마을만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에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깡패와 같이 자기를 높이고, 교인들을 종삼고, 심지어 뺨을 칠지라도 교인들이 대항을 하지 못하고, 용납했습니다.
4.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런 비정상적인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쫓아내고, 바울 사도를 따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가 되시므로, 우리 성도들은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3:8-12.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 같은 잘못된 지도자를 따르지 말고, 바울 사도 같이 성도들을 섬기는 지도자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님만 섬기고, 서로 성도들끼리 섬기고 봉사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1절.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o my shame I must say that we have been weak by comparison. But in whatever respect anyone else is bold-- I speak in foolishness-- I am just as bold myself.
나는-- 욕되게 말하노라
κατὰ ἀτιμίαν λέγω,
as to dishonor I say
‘말하노라’(λέγω)는 현재형으로서(I say) 현재 말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약한 것 같이
ὡς ὅτι ἡμεῖς ἠσθενήκαμεν.
as that we we have been weak
‘우리가’(ἡμεῖς:we)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동사(ἠσθενήκαμεν)는 완료형으로서(we have been weak) 이미 약한 상태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ἐν ᾧ δ’ ἄν τις τολμᾷ,
in whatever however anyhow anyone might be daring
‘담대하면’(τολμᾷ)은 현재 가정법 동사로서(might be daring) 현재 담대한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ἐν ἀφροσύνῃ λέγω, τολμῶ κἀγώ.
in foolishness I speak, dare I also
직역하면 ‘어리석게 내가 말하는데, 나도 담대하다’는 뜻입니다.
‘담대하리라’(τολμῶ)는 현재형으로서(dare) 현재 담대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엘리콧(Ellicot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는 말씀에서 ‘우리’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육체적 연약성들에 대해서 비난했던 것이 아직도 바울의 생각에 남아 있어서, 바울은 이런 씁쓸한 빈정거리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즉 바울이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주장한 행동들은 그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대조적인 말을 하는 것은 아직도 그가 ‘어리석음’이나 ‘정신 나간 말’이란 불쾌한 말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 그러나 감히 나는 너희가 나의 정신 나간 것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것으로 아는데, 나는 거짓 교사들처럼 나도 감히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We” (the pronoun is strongly emphasised) “were too infirm to venture on such things.” The taunt flung at his bodily infirmities is still present to his thoughts, and he assumes, in the bitterness of his irony, that it was through them he had been kept from like acts of self-asserting authority. Then he resumes his contrast, still dwelling on the offensive words, “folly” or “insanity,” which had been used of him: “Yes, but on every ground of daring—I know you will see my insanity again in this—I have as much right to dare as they.”)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는 것을 로젠뮬러는 ‘나는 욕되게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욕된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거짓 사도들의 욕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I speak as concerning reproach - I speak of disgrace. That is, says Rosenmuller, "I speak of your disgrace, or, as others prefer it, of the disgrace of the false apostles.")
나는 내 주장에 대해 압박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치 귀한 가문에서 출생한 것이나 높은 지위가 거짓 사도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나에게는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것이 다인 것 이 모든 것이 사실인 양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을 나도 더 뛰어나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높은 가문을 나도 가지고 있습니다. (I have not pressed my claims, but have been reasoning as if all this were true - as if all that was honorable in birth and elevated in rank belonged to them - all that is mean and unworthy pertained to me. But it is not so. Whatever they have I have. Whatever they can boast of, I can boast of in a more eminent degree. Whatever advantage there is in birth is mine;)
그리고 나는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이 수고한 것들과 시련받은 것들과 고난당한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가문이 완전히 뛰어난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수고들을 말하게 됩니다. ( and I can tell of toils, and trials, and sufferings in the apostolic office which far surpass theirs." Paul proceeds, therefore, to a full statement of his advantages of birth and of his labors in the cause of the Redeemer.)
길(G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란 말을 ‘내가 비난에 대해서 말하노라’로 번역했고, 이 말들은 앞 절의 후반부(‘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를 치거나’)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뺨을 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오만불손하고 비난하는 말을 한 것을 가리킵니다. (I speak as concerning reproach,.... These words may be considered either as explanative of the latter part of the former verse, "if a man smite you on the face"; that is not to be understood strictly and literally, of one man's striking another on the face, but of reproach and contumelious language, used by the false apostles to the Corinthians;)
혹은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의 오만불손한 말을 오래도록 참아온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서 바울이 비난하는 말이거나, 거짓 사도들이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럽게 사용한 말을 드러내려고 한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고린도 교인들의 눈이 열려서 거짓 사도들을 꿰뚤어보고 배척하도록 한 말입니다. ( or they may have reference to the apostle's design in the whole, which was partly to reproach, the Corinthians for acting such a stupid part, in patiently bearing so many and such indignities from these men; and partly to expose the scandalous and reproachful usage of them by the false apostles, that if possible their eyes might be opened to see through them, and discard them:)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에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거짓 사도들은 참 사도들을 가난하고, 약하고, 두려워하고, 겁쟁이들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 일행은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고, 고린도 교인들을 지배하지 않았고, 고린도 교인들을 종삼지 않았고, 그들의 물질을 탐하거니 강제로 빼앗지 않았고, 모욕하지 않았고, 그들을 불명예스럽고 멸시하는 태도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 일행은 고린도 교인들보다 자기들이 더 못난 사람으로 대했고, 그들과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드러내고 담대하게 자기방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as though we had been weak; and then the apostle's meaning is; for the false apostles reproached them, as poor, weak, fearful, and pusillanimous men; because they did not use that authority, and exercise that domination over them, they did not bring them into bondage, devour their substance, take away their goods from them by force, insult over them, and treat them in an ignominious and contemptuous manner; and intimated that they were upon all accounts inferior to them, and not worthy to be mentioned with them; which moved the apostle to exert himself, and boldly rise up in his own defence)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1. 원래 바울 사도는 성령 충만하고 거룩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다투면서 자기도 약한 인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욕되게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한 이 말은 <너희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나를 시시하다고 비방하는데, 좋다 그렇다면 내가 시시한 줄 알고 나도 시시한 자랑을 좀 하겠다>는 말입니다.
2.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는 교훈과 같습니다. (잠 26:5)
그렇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이 가만있으면, 어리석은 바보가 생각하기를 지혜자도 자기같이 바보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잠언 26:5.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3. 처음에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사도를 알아줄 줄 알고,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바울을 거짓 사도로 매도하고, ‘바울이 추천서도 없다, 헌금을 도적질해 먹기 때문에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 바울은 설교도 잘못한다, 신비체험도 없다’고 비난하자,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게도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 유혹을 받아서 바울 떠나가고 거짓 사도들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도 자기 자랑이 어리석은 일인 줄 알지만,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을 위한 자랑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가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4. 그런데 바울은 점잖게 자기 자랑을 하면, 효과가 없으니까, 욕되게 자기 자랑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2절에서부터 28절까지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자기 자랑을 보면, 자기 자랑이라기보다는 주님과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내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히브리인이라고 하고, 이스라엘인(야곱의 자손)이라고 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3절부터 27절까지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당한 고난의 목록 27가지를 쭉 나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28절에서는 바울이 교회를 위해서 날마다 염려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12장 1-4절에서는 삼층천에 올라갔다 온 신비스러운 체험을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신비스러운 체험을 3인칭으로 말했고, 자기가 그랬다고 직접적으로 1인칭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1.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자기들을 자랑하면서 담대하게 말하였듯이, 바울 사도도 담대하게 자기 자랑을 해보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바울이 하는 자랑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주님과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해서는 이런 어리석은 자랑도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대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이처럼 용서와 사랑이 가득한 바울 사도도 이단자에 대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갈라디아서 1장 7절에는 율법주의자들을 대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사도 요한도 이단에 대해서는 인사도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단자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이 악한 일에 동참하는 자라고 경고했습니다.
요한이서 1: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3장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해서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에게는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8장 23절에서는 빰을 치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대항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른편 빰을 칠 때 왼편 빰도 돌려대라고 한 말씀만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도 되시지만, 악인과 마귀는 지옥 형벌에 처하시는 공의의 하나님도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와 사랑만 찾아서도 안 되고, 공의와 정의도 찾아야 합니다.
4. 신약성경만이 아니라 구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같이 믿음 좋은 사람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연합군을 쫓아가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사무엘같이 믿음 좋은 사람도 아각 왕을 칼로 찍어 죽였습니다. (삼상 15:33)
또한 다윗같이 좋은 사람도 골리앗을 쳐서 죽였고, 블레셋 사람들도 쳐서 죽였고, 사울을 죽인 아말렉 사람과 이스보셋을 죽인 두 신하도 죽였습니다.
5. 그러기 때문에 두 가지 측면을 다 알아야 합니다.
자동차가 두 바퀴가 있어야 똑바로 달리고, 새도 두 날개가 있어야 똑바로 날듯이, 우리들의 신앙도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단지 그때그때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쁘신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대로 올바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